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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태어남은 타파해야 할 숙명이다. 생로병사(生老炳死: 태어남, 늙어감, 병듦, 죽음) 일련의 과정이 모두 '고苦'이다. 고성제. '고'라는 ' 팩트(사실), '고'라는 '진리'이다. 유명한 티베트승 감뽀빠의 《해탈장엄론》에는 태어나는 과정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고통이 동반하는지 상세히 기술되었다. "아이가 수태된 첫 주, 신체 기관과 의식의 혼합물인 태아는 뜨거운 솥에서 요리되고 튀겨지는 듯 상상도 못 한 고통을 겪는다. (중략) 자궁 안에 바람이 일어나 태아에 닿으면 두 팔과 두 다리가 나타나는데, 이때 장사가 사지를 잡아당기고 매로 때리는 듯 큰 고통이 일어난다.

 

붓다의 '다시 안 태어나는 법'

탄생은 우리가 끊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자꾸만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끊는 것, '고'라는 진리의 궁극적 소멸! 이것이 우리 수행의 목표이다. 결국 '다시 안 태어나는 법'을 가르쳐준 위대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겠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덩어리를 타파해 버리는 놀라운 방법. 스스로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비상한 방법. 그 내용은 사성제와 팔정도이고, 실참법은 '계戒 - 정定 - 혜慧'이다. 

그림1. <육도윤회 원판>, 《화엄경》 권제37변상도, 감지금니, 고려 14세기 중엽, 호림박물관 소장

자꾸만 생生을 받게 되는 원인, 다시 태어나는 근간의 비밀을 밝힌 분이 석가모니이시다. "수많은 태어남, 그 윤회 속을 헤매왔네./ 집을 짓는 자는 누구인가(중략) / 아! 집을 짓는 자여! 마침내 너를 찾았다. 너는 이제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조각 났다. / 나는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갈애는 사라졌다. "《법구경》에 나오는 석가모니 붓다의 오도송이다.

그림 2. '생로병사'의 삶의 과정, 그리고 죽은 후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항아리 같은 것이 무수히 둘러 있는데, 이는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터널이다. (그림 1의 부분)

자꾸만 '집을 짓는 자'가 있다. 여기서 '집'이란 몸 받아 태어남(生)을 말한다. 집 짓는 자를 찾으면, 집을 못 짓게 할 수 있다. '집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했네/ 거듭거듭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그러다가 석가모니는 결국 '집 짓는 자'를 찾게 되고, 그 기쁨에 위아 같은 오도송을 터트린다.

 

'집 짓는 자'는 바로 '12 연기'였다. 집의 근간이 되는 대들보는 '무명無明'이었고, 대들보에 연결되는 서까래들은 무명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식識 · 명색名色 · 처處 · 촉觸 · 수受 등이었다. 수受를 바탕으로 갈애(愛)와 취착(取)이 생기더니, 태어남(生)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태어남에 따른 노老 · 병病 · 사死가 속절없이 진행된다.

그림 3. 한가운데의 부처님 아래로 지옥, 축생, 아귀 등 육도윤회의 세상이 펼쳐진다.(그림 1의 부분)

노병사에는 슬픔 ·비애 ·통곡 ·절망이 동반된다. 승려연수교육에서 "우리는 왜 죽을까요?"라는 질문을 했더니, 바로 "태어났으니까요."라는 정답이 나왔다. 그러면 "왜 태어났을까요?"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은 분이 석가모니이시고, 그 해답은 12 연기이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북인도 우르벨라(지금의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내용이다.

 

'윤회의 터널'을 지나, 재생되는 모습

고려시대 화엄경 변상도(變相圖) 중에 현재 우리가 윤회하고 있는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림 1) 커다란 둥근 원판이 정면으로 보이게끔 아귀가 들고 있다. 원판 위로 아귀의 머리가 보인다. 양옆으로 크게 벌린 팔과 손이 원판을 붙잡고 있다. 원판 아래로는 한쪽 발이 노출되었다.

 

그 발의(정면에서 보아) 오른쪽 옆으로는 원숭이가, 마치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질 롤렛(바퀴라는 뜻의 게임 회전판)을 돌리는 듯 자세를 취하고 있다.(그림 2) 변상도의 좌우 윗부분에는 '第六 現前地(제6의 현전지: 진리가 바로 앞에 나타나는 경지, 불이不二의 평등성을 체득하는 경지)' 및 12인연'이라는 용어를 만날 수 있다. 12인연을 보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존재와 비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평등성을 체득하게 된다.

 

'12인연'은 '12연기'를 말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환영을 만드는 근원이다. 무명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갈애가 어떻게 윤회를 전개시키는지, <육도윤회의 원판>에 상세히 도해되었다. 삶을 다시 부여잡는 가장 큰 요소인 '갈애'는 돌고 도는 윤회의 에너지 판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아귀'로 묘사되었다.

 

원판의 한가운데는 부처님이 있고 그 위로는 극락을 포함한 법계, 그 아래로는 오리· 뱀 · 멧돼지로 표현된 동물의 세계, 확탕지옥으로 묘사된 지옥의 세계, 벌거벗고 굶주린 아귀의 세계가 둘러 있다.(그림 3) 그 외곽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나 겪게 되는 일련의 삶이 그려져 있다.

 

아기로 탄생해 엄마 품에서 재롱부리는 모습, 봇짐을 메고 집을 떠나는 모습, 이성을 만나는 모습, 여러 가지 송사에 얽히는 모습, 늙어서 지팡이 짚는 모습, 병들어 침 맞는 모습, 죽어서 관에 담겨 운반되는 모습 등.(그림 1,2)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가장 외곽의 테두리에는 항아리 같은 것이 무수히 둘러져 있다.

 

항아리 같은 것의 앞과 뒤를 보면, 뱀으로 들어갔다가 사람 모습으로 나오고, 다시 말의 모습으로 나왔다가 또 사람으로 환생한다.(그림 2) 이 부수한 항아리는 '윤회의 터널'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윤회의 터널을 무수하게 도돌이 하였는가. 윤회의 터널을 전문 용어로 중음기간이라 한다. 티베트에서는 바르도라고 하는데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 기간이 일반적으로 49일이기에 49재를 지내게 된다. 그림에서 확인하듯 사람으로 죽어 꼭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는 않는다. 동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에 태어나기도 한다. 지은 업에 따라 육도(六道 :6개의 세상 -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를 오가며 윤회하는 것이다.

 

물론 무한반복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있다. 바로 석가모니께서 처음 발견하시고 설파하신 방법, 12 연기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 연기를 보는 자나(부처 또는 깨달음)을 본다."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연기를 볼 수 있을까? 

(계속)

 

 

 

 

 

월간통도.2022. 0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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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 스님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 태화지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서 물었다. "어찌 이에 이르게 되었는가?" 스님이 답하기를 "보리를 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인이 예를 갖추 또 묻기를 "너희 나라는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는가?" 하니 스님은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을 연하고 남쪽으로 왜국을 접하고 있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이웃나라의 침략이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 라며 신라의 위기를 전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인이 대답하기를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다 그 절에 가서 호위하고 있으니, 9층 탑을 조성하고 팔관회를 베풀면 외적이 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 신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용을 움켜쥐고 있는 통도사 천왕문의 남방 증장천왕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길에 겪은 신이한 일이다. 이때의 신인은 황룡사에 살고 있던 용의 아버지인 셈이다. 스님은 신라로 귀국하여 신인이 말한 대로 황룡사에 9층 탑을 건립했다. 또 영축산에 통도사를 지으려 하는데, 이때 또 다른 용을 만난다. 영축산의 큰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 독룡이었다.

아무리 극심한 가뭄이 와도 절대 마르지 않는 통도사의 구룡지

 

자장 스님은 용에게 떠나 줄 것을 요청했지만 용들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때 자장 스님이 법력으로 못의 물을 펄펄 끓게 만들자 용들이 달아났다. 아홉 마리 용 중 다섯 마리는 남서쪽으로 도망가다가 떨어져 죽었다. 이곳이 현재 서운암 뒤편의 오룡골이다. 세 마리는 동쪽으로 달아났는데 여기가 삼동골이다. 도망가던 한 마리는 영축산 바위에 부딪혀 피를 흘리는데 이 바위가 무풍한송로에 있는 용피바위다.

 

남은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도망가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자장 스님에게 청하기를 "눈이 멀어 갈 수 없으니 연못에 그대로 있게 해 주시면 절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한다. 스님은 용의 청을 받아들여 큰 못은 메우고 작은 못을 남겨 두어 용이 살게끔 했다. 현재 금강계단 앞에 있는 구룡지가 바로 그것이다.

 

통도사에서는 매해 단오절마다 용왕재를 봉행한다. 바다와 거리가 먼 산중의 절에서 용왕재를 지낸다는 게 사뭇 생소하지만 통도사의 구룡설화를 되짚어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극심한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신이함은 용의 신통력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통도사 극락보전 반야용선 벽화

이곳뿐만이 아니라 용은 상상 속의 신성한 동물로서 불교에 자주 등장한다. 극락정토로 중생을 실어다 준다는 반야용선도 마찬가지다. 용머리에 용 꼬리를 한 이 배는 일반적인 배의 역할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서 용이 차용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백중기도나 천도재 때 영가를 모시는 배의 모양이기도 하다.

 

용은 육지와 해상, 하늘과 땅 어디든 오가는 신성한 동물이다. 다시 말해 용이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극락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는 신비한 동물은 '용'이 될 수밖에 없다. 

 

통도사 범종각 목어

 

통도사 범종각에도 재미있는 목어가 있다. 범종각의 목어는 두 마리인데 한 마리는 물고기에 가깝게 생겼고 한 마리는 용의 모습에 더 가깝다. 한 마리는 이제 수행을 시작한 목어고, 다른 한 마리는 이미 경지에 올랐으므로 이 두 마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다. 목어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구제하기 위해 치는 법구로 알려져 있다. 또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기 때문에 수행자가 혼침에 빠지지 않고 정진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법구이기도 하다

 

용은 수많은 신화에 등장한다. 부처님께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셨을 때, 아홉 마리의 용이 태자와 육신을 씻겼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통도사 전각의 대부분에 용 조각이 새겨져 있고, 여러 장엄물에 빠지지 않는 동물이기도 하다. 매해 음력 5월 5일에는 통도사의 연례행사인 단오절 용왕재가 봉행된다. 화마로부터 도량을 지키고자 행하는 오랜 의식이다.

 

'왜 산중 절에서 용왕재를 지낼까?' 1300여 년 동안 지켜 온 이곳, 영축산 아래서 통도사가 안전하게 불법을 외호하며 역사를 이어 온 것에 분명 호법룡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이다.

 

 

 

월간통도. 2022. 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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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죽은 이후에도 다시 생사가 거듭되는 윤회라 말하며 생명은 모두 6가지의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죽어간다고 믿었는데, 이를 육도윤회라고 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 태어나고 선한 덕을 많이 쌓으면 행복이 가득한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생산을 거듭하고 때문에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에서 비롯되었고 미래의 나를 결정짓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떻게 왕자로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을까요? 과거에 어떤 선행으로 탄생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관련된 붓다의 행적은 불교 신자에게 교훈을 주고 깨달음을 얻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붓다의 삶을 보다 쉽게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 유효했을 것입니다.

 

붓다의 일생 불전도 이야기

붓다의 일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불전도라고 하며 전생의 이야기를 본생담이라고 합니다. 불전도와 본생담의 내용은 곧 붓다의 가르침이 되며, 일찍부터 불교 미술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붓다의 일생을 간략하게 불전도를 알아보겠습니다.

마야부인이 싯타르타를 잉태 꿈


싯다르타는 약 2500년 전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를 잉태할 때 꿈을 꿨는데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주문을 세 번 돌고 오른쪽 무릎에 앉았다고 전합니다. 인도 바로흐트에서 발견된 스투파 난간에는 마야 부인의 태몽 장면이 묘사되었고, 한편에 코끼리가 등장합니다. 중요한 인물인 마야부인은 중심에 자리하고 앞다리를 구부린 코끼리도 상당히 크게 표현하였습니다. 반면에 주변의 시녀들은 작게 나타나고 뒷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도에 따라서 인물의 크기와 위치를 다르게 하고 묘사되는 것은 고대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싯다르타를 잉태하고 시간이 지나 마야부인은 출생하게 되는데,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산기를 느끼고 겨드랑이 아래에서 아기가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탄생 직후 한 손은 하늘을,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재하다. 즉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습니다. 일곱 걸음은 육도의 윤회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싯다르타 개인이 아니라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개개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명의 존엄과 실존을 뜻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을 탄생불이라고 하며, 아기의 모습으로 하늘과 땅을 향해 손짓하는 모양입니다. 싯다르타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부기영화를 누렸지만 생로병사의 고해를 보고 29살에 출가하여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6년간의 고된 수행으로 극한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아님을 느끼고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하고 깊은 선정에 들게 됩니다. 이때 마왕은 깨달음을 얻은 붓다로 인해서 자신의 세력이 위축될까 두려워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지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지신을 부르고 마왕의 세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항마성도

 

마왕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로 항마성도라고 부릅니다. 보리수 아래의 결가부좌로 오른손으로 땅을 짓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왼쪽에는 마왕이 칼을 들고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겁에 질려 도망가는 마왕의 부하가 보입니다.


항마성도는 붓다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으로 단독의 존상으로도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합니다. 첫 설법도 중요한 장면으로 표현되며 초전법문이라고 합니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돌렸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붓다가 결가부좌한 자세로 수레바퀴를 돌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때 아래에는 두 마리의 사슴이 등장하여 이 장소가 사슴동산인 녹야원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 설법 당시에 다섯 사람의 수행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구조에도 머리를 깎은 수행자 5명을 표현하였습니다. 처음 설법 이후 붓다는 45년간 인도 북부와 중부의 갠지스 유역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80세가 되어 쿠시나라가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상


부조를 보면 침상 위에 붓다는 옆으로 누워 열반에 들었고, 주변에는 슬픔에 잠긴 제자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붓다의 일생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보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특히 간다라 지역에서는 불전 기술이 크게 발전해서 탄생해서 열반에 이르는 석가모니의 일생이 100여 개의 장면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붓다 일생 가운데 중요도가 높은 사건을 중심으로 탄생, 항마성도, 초전법륜, 열반에 이르는 긍정적인 사상도가 미술의 주제로 자주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면 사상도를 발전시켜 8장면으로 확대된 팔상도가 유행하기도 합니다.

 

붓다의 사후, 즉 열반에 이른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었을까요? 스승이 떠난 후 제자들은 애도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시신을 안치한 관을 붙들고 통곡하는 모습도 보이고 화장을 하는 장면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장례 풍습에 따라서 시신은 화장했는데 중심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표현하여 다비의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붓다의 8등분 사리

 

그리고 다비가 끝나고 붓다의 사리를 수습하게 됩니다. 이때 주변 여덟 부족이 달려와 사리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여 사리는 8등분 됩니다. 사리를 가져간 지역에서 만든 8개의 탑을 근본사리탑이라고 부릅니다. 부조를 보면 8개의 사리가 표현되어 모든 인물은 손에 사리를 담은 그릇을 들고 있습니다. 귀한 사리는 소중하게 모셨고 스투파를 만들어 기념하게 됩니다. 부조의 중심에는 앞서 건축물로 살펴본 스투파가 자리하고 양쪽 주변에는 승려들이 있습니다. 두 손에 사리기를 들거나 합당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붓다의 전생 본생담 이야기

붓다는 싯다르타로 태어나기 전에 수많은 전생을 살았습니다. 본생담은 붓다의 전생을 묘사한 설화로 자타카라고도 합니다. 인도에서는 생사가 반복되는 윤회와 선악에 따른 인과응보의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음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모습은 전생의 선악에서 결정된다고 본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현상을 부여받은 것은 과거의 공격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며, 그와 같이 자기를 희생하고 선을 위해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교훈이 자타카에 담겨 있습니다. 후대 전하는 붓다의 본생담은 수백 종에 이르며 인도 각지의 옛날이야기나 우화에 기초한 것입니다. 자타카에서는 석가의 전생을 보살, 즉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선행을 쌓는 수행자를 보며 선인이나 귀인, 혹은 왕자, 또는 코끼리나 원숭이와 같은 동물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태어나 보살의 수행을 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원본생


본생담 가운데 대표적인 이야기와 미술로 표현된 예는, 먼저 대원본생을 소재로 만든 바로트 스투파입니다. 석가모니는 과거생에서 원숭이의 왕으로 태어났습니다. 원숭이들은 히말라야 산맥 아래 거대한 망고나무 숲 속에 살았는데 나무의 열매는 맛과 향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강으로 뻗은 가지에서 열매가 떨어져 바라나시에 흘러갔고, 맛있는 과일을 맛본 왕은 군대를 이끌고 원숭이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원숭이를 모두 죽이고 열매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 상황에서 몸집이 크고 지혜로운 원숭이 왕은 강 건너로 먼저 도망갈 수 있었지만 나무줄기를 몸에 묶어 자신을 밟고 지나가게 해서 원수인 모두를 구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기력을 잃고 나무에서 떨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 다른 목숨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바라나시의 왕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원숭의 왕을 구출하고 경배하면서 군주의 도리와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바로트의 구조를 보면 여러 이야기가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위쪽에는 원숭이 왕이 다리가 되어 다른 원숭이들을 구하는 장면이 보이고, 아래에는 바라나시 왕이 군왕의 도리에 대하여 설법을 경청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비왕 본생담


희생을 통해 선업을 짓는 내용으로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비왕 본생담도 대표적인 이야기인데 간다라 부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왼쪽에 왕이 앉아 있고 가운데는 저울을 들고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자비심 만일 왕은 백성을 비롯해 누구든 찾아오면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하늘의 제석천이 그런 모습을 보고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시비왕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매로 변신하고 부하는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매에게 쫓겨 겁을 내고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가서 매가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하자 왕은 자신의 살과 피로 비둘기를 구하고자 합니다. 매는 비둘기와 같은 무게를 요구하면서 시비왕이 베어 낸 살을 저울 한쪽에 얹고 비둘기 몸을 한쪽에 두었습니다. 저울은 시비왕의 몸 전체를 올린 후에야 비로소 비둘기와 수평을 이루었고, 결국 왕은 목숨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시비왕의 진정한 희생을 보고 매는 다시 제석천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시비왕의 생명도 회복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대중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서 붓다를 더욱 존경했습니다. 또한 교훈을 되새기며 자비를 베풀고 공덕을 쌓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도의 초기 불교 미술에서 붓다의 열반 이후 조성된 스투파의 특징을 고찰하고 붓다의 전생과 현생에 관한 불교 미술에 이였습니다. 붓다는 자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과거의 모든 인연을 통해 가르침을 설파했고, 이는 불교 미술의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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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는 법주사와 선암사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불교 사찰 7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불상과 불화를 쉽게 접할 수 있고,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을 모르는 분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불교 미술품을 만날 수 있고, 각자의 종교적 믿음과는 별개로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00년경에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문화는 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어 오랜 기간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 미술의 형성과 발달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초기 불교 미술_붓다


인도의 초기 불교 미술이란 무엇인지?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아시아로 전파된 이후 중심 사상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상이란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으로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또한 인간이 사회 활동을 하며 사고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 판단의 기준이기도 하며, 이는 미술의 전개에 지속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먼 옛날에는 무속 신앙과 신화의 세계가 있었고, 유교와 도교, 불교 등이 성립된 후 우리나라에도 전파됩니다. 사상의 내용과 특징에 따라 미술에 끼친 영향력에도 차이를 보이는데 불교는 미술과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해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불교에서는 전생과 윤회, 열반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신의 존재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종교적 교리와 신앙에 기초한 소재를 다룬 모든 것을 불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고타마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었으며, 세상의 가르침을 전한 후에 열반에 들었고, 그때부터 불교의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의 장례 의식인 다비를 통해 수습된 붓다의 사리는 스투파에 안치하였고, 이는 초기 불교에서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붓다의 무덤인 스토파는 우리가 사찰에서 보게 되는 탑의 시작으로 추정. 사찰은 승리와 신도가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점차 신앙의 중심인 불상과 탑을 보완하고 승려의 수행과 불법을 가르치는 기능을 지닌 복합적인 공간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싯타르타가 활동했던 시기는 기원전 5세기 후반경이며, 당시 인도는 16개의 소국이 경쟁하던 시대였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인도 여러 지역으로 퍼져가게 됩니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분열의 시기를 끝내고 북인도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제국 마우리아 왕조의 역할이 컸습니다.


마우리아의 3대 왕이었던 아소카는 강력한 통치자를 유명했으며, 정복전쟁에서 겪은 참혹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된 아쇼카왕은 각지의 불법을 포교하고 경전을 수집했으며, 수많은 불교 미술품 제작을 후원한 대표적인 인물로 기록됩니다. 아쉽게도 그가 남긴 불교 미술품이 모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왕의 친명을 새긴 석주가 일부 전하고 있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소카 석주는 평균적으로 높이가 13m에 이르며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의 기둥입니다.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한 주두가 놓여 있는데, 연꽃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의 대자 위에 사자나 코끼리, 황소, 말과 같은 형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주는 원래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지만 아소카 석주는 건축의 기능과는 상관없이 제작돼서 일명 법의 기둥으로 불립니다. 석주 옆면을 보면 명령이 새겨져 있는데 살생을 금하고 죄 없는 자를 벌하지 말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적인 내용과 왕의 통치 원리를 설파하는 역할로 법의 기둥이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기둥 위에 있는 조각 중에는 사자가 가장 많이 보이는데 사자는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서아시아에서 왕의 모습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사자의 빛나는 갈기는 태양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주도의 수레바퀴를 묘사한 점도 주목됩니다. 법륜으로 태양이나 우주를 상징합니다. 또한 붓다가 최초로 설법할 때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렸다는 데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초기 불교 미술의 대표적인 스투파

유해를 화장하고 나온 사리는 당시 여러 나라에서 나누어 스투파를 지어 안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토파는 무덤이면서 열반을 이룬 스승의 상징물이었고, 수행과 명상을 돕는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아소카 왕은 붓다의 사리를 꺼내 난 후 새로 지은 스투파에 모셨다고 전합니다.


수많은 스투파가 각지에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에 세운 스투파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파괴되어 일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인도의 산치 대스투파입니다. 아소카 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규모로 볼 때 붓다의 자리에 앉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그렇지만 아쉽게도 현존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의 발굴 조사를 통해 대스토파는 아소카 시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스투파는 비단 위에 안다라고 하는 강구형 돔을 울린 형태로 제작했습니다. 안다는 우주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보완된 것이며, 그 안에 붓다의 사리를 모시는 방을 만들게 됩니다. 스투파의 정상부에는 발코니 모양의 하르미카가 있고, 그 위에 기둥 아슈티가 자리하며 여러 단어로 된 단계인 차트라가 있습니다.


상기는 고귀한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탑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외형에 변화가 생겨도 차트라의 모습은 유지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다를 중심으로 속새와 서역을 구분하는 의미의 원형 울타리 난간 베디카를 만들고 내 방에는 탐문 토라나를 세우고 난간과 탐문에는 다양한 조각 장식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조각을 통해 당시 미술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베리카와 토라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스투파는 초기 불교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면서 신앙의 중심이였고, 불교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각지의 스투파가 세워졌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발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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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가 만든 '오온의 감옥'에 갇혀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는데 문제는 본인이 그 틀(또는 패턴)에 갇혀 있는 줄 일절 모른다는 것. 쉽게 표현하자면 누구나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 그 생각에 집착과 혐오 또는 좋다과 싫다로 반응하며 하루 종일 놀아난다.

<아미타삼존도> 벽화의 배경 부분, 조선시대 1476년, 전남 무위사. 감색(짙은 파란색)의 바탕에서 깨달음의 꽃들이 송송 피어오른다. 감색은 깨달음의 색깔로, 불화의 바탕색이 된다.

 

어렵게 표현하자면 이미 굳어진 '오염된 반응 체계'가 스스로 작동하고 여기에 하릴없이 끌려 다니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지는 공정인 '색色 - 수受 - 상相 - 행行 - 식識 [오온]'이라는 메커니즘은 계속 돌아간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면 [촉], 느낌[수]이 생기고 그것은 과거의 기억 또는 이미지와 즉시 연결되고, 연결된 이미지[상]에 다시 마음이 반응[행]하고, 이것이 인식[식]으로 굳어져 다시 경험[업식]으로 쌓인다.

 

색수상행식의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수없이 반복되면서 구축된 마음의 덩어리를 업식[ 업장,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 업식을 바탕으로 '나'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의 패턴'대로 어쩔 수 없이 또 반응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몸의 느낌[수]' 보기

가장 큰 문제는 뇌가 '마음속에 떠오른 상(이미지)'과 '실제의 상'을 구분 못하고 반응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속의 상'으로서의 '남편'과 '실제의 법'으로서의 '남편'을 구분 못한다. 실제 남편은 집에서 쿨쿨 자고 있는데 지금 여기 사찰에서 참선 도중 떠오른 남편의 이미지[상]에 순간 화로써 반응한다.

 

그러면 여기서 '남편의 이미지[상]'를 떠올리게 한 '주범'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남편'이 아니다. [상] 이전에는 [수]가 있다. 불쾌한 느낌[수]이 먼저이고 그에 해당하는 불쾌한 이미지[상]가 순식간에 따라 붙는다. 부지불식간에 엄청 빠른 속도로 전개되어 버리는 이러한 과정을 보려면 순간 '정定 또는 지止'에 다름 말로 '사마타 또는 삼매'의 마음을 말한다.

 

특정 '느낌'이 오는 순간, 바로 그것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던 과거의 상황이나 대상이 무의식 속에서 귀신같이 선택되어 섬광의 속도로 연결된다. 광활한 무의식의 바다에서 그 깊은 심연의 기억 창고에서 어찌 그리도 '현재의 느낌'과 가장 유사한 '과거의 느낌'이 곧바로 낚여 '환영의 상'을 붙여버리는지 놀랄 일이다.

 

고통의 마음이 올라올 때는 엉뚱한 대상을 달달 볶을 게 아니라 현재의 그 마음을 직시하면 된다. 더 정확히는 현재의 마음 그 이전의 느낌을 직시하면 된다. 직시하는 방법은 "몸의 느낌[수]을 보라!"이다. 예를 들면 목과 어깨에 힘 들어감, 심장 부위에 갑갑하게 뭉치는 느낌, 도는 배가 경직되는 느낌 등을 보면 된다.

 

"느낌"에서 '대상(이미지)'으로 연결되기 전에 그래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차단하는 방법이다. 몸의 느낌만 보고 있으면 그 '느낌의 기승전결'이 보인다. 느낌이 오고 머물다가 사라진다. "조건 따라 왔다가 가는구나!"  그 '무상'함을 볼 때, 거기에는 어떤 주체나 객체도 없다는 '무아'를 저절로 알게 된다.

 

불교미술 보는 요령, '바탕자리' 보기

몸의 느김[수]을 자꾸 알아차리다 보면, 생각으로의 전개가 애초에 차단되어 그 많던 생각이 점점 없어진다. 그리고 생각에 가려 보이지 않던 '허허로운 허공'이 드러난다. 맑고 영롱한 허공이 '바탕자리'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드디어 물고기가 바다를 본다.'투명한 아는 마음'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상의 상태로 삼라만상이 현존하고 있고 단지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불교미술에서는 생각(번뇌망상)이 걷힌 자리인 '바탕자리'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궁극의 차크라가 열릴 때의 색은 깊은 파란색(감색)과 살짝 붉은빛이 도는 보라색이다. 깊은 파란색은 무궁한 천공이나 깊고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볼 때와 같은 신비로운 쪽빛을 말한다.

 

이것을 '감색'이라고 한다. 이것이 더 깊고 오묘해지면 자색의 바탕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고려사경은 '감지금니(감색 바탕에 금색 선)' 또는 '자지은니(자색 바탕에 은색 선)'로 제작된다. 고려불화 또는 고려사경은 모두 감색 바탕 또는 자색 바탕을 기본으로 한다. 이 두 가지 색은 만물을 창조하는 바탕색으로 미술에서는 차용된다.

 

깨달음의 현현은 금색 또는 은색 등으로 표현되는데, 밝고 투명하게 빛나는 듯 빛나지 않는 '오묘한 흰빛'이다. 불교미술을 보는 요령 ! 정리하면, '바탕자리를 먼저 본다'이다. 불화의 바탕, 법당의 공간, 나의 허공자리를 본다. 그러면 무엇이 과연 그 바탕자리에서 현현하여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바탕자리[법신]에서 온갖 장엄[보신]이 나오고 이것이 형체를 이루어 부처 또는 보살[응신]로 화化하는 유기적 과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월간통도. 2022. 0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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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태어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일들은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상하다.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형님, 곁에 있을 땐 영원할 것 같고 그 사랑이 변치 않을 것 같았지만 고통받으며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불현듯 갑작스러운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고통을 안고 같은 슬픔으로 살아가고 있다.

삼법인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할 것 같고 존속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죽음이라는 형체의 소멸이 있다. 죽음이라는 슬픔을 어떻게든 간직하여 붙잡아 곁에 두려 하고 있다. 이것 또한 '나'라는 자아가 생겨 나면서 집착이 생기고 집착으로 인해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고통, 이 또한 무상함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소멸을 향하여 여정을 보내고 있다. 소멸을 향한 여정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슬픔으로 한편으로는 쾌락을 행복으로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 등을 진정한 고통이라 착각 하면서 살고 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해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진정한 행복도 아니다. 이것으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고통의 연속이다. 좋은 것만 보고 싶은 욕망, 나에게 이로운 말만 듣고 싶은 욕망, 향기로운 냄새만 맡고 싶은 욕망,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 내 몸에 부드럽고 값비싼 옷을 입고 싶은 욕망 등· · ·.

 

이러한 것들로 인해 우리의 의식에서는 항상 '나'른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라는 인식으로 인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게 된다. 살면서 인식되어진 모든 것들, 좋고 나쁨이 고통인 줄 모르고 인식되어진 나로 인해 우리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 속에 '나'라고 인식되어진 세상이 없다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집착이 없어진다고 한다. 집착이 없으면 고통 또한 없을 것이라고 가르쳐주신다. 어떻게 '나'라는 생각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 '나'로 부터의 시작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내 마음은 이렇다, 내 느낌은 이렇다 등 모든 것이 나로부터의 시작이다. 어떻게 버릴 것인가? 평생 화두로 삼아 공부해야 할 부분이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해답을 가르침으로 풀어놓으셨다. 수행자로서 해답을 찾는 길은 길게 사유하고 진실된 수행을 함으로써 그 해답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로부터의 시작을 상대를 먼저 보고 배려하고 살면서 인식되어진 나의 생각이 정확하거나 맞다고 생각하지 말며 나의 마음이 일어나 상대를 보고 화내지 말고 나의 몸이 영원하여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소멸의 길로 가고 있다. 나의 몸을 비롯한 모든 생명,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지구 그리고 모든 우주가 소멸하고 생겨난다. 그렇듯 소멸과 탄생, 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롯이 나를 벗어나는 것, 나를 생각한다는 것이 곧 고통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모든 고통은 나로 인해 생겨난다는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다면 이 세상 슬픔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계곡 사이에 흐르는 물처럼 바람이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주신 진리.

 

제행무상 諸行無常   제법무아 諸法無我

일체개고 一切皆苦   열반적정  涅般寂靜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아 무상함을 알고, 인연으로 생긴 모든 것들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고, 이 세상 현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면 생로병사 또는 삶과 고통, 윤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나로 비롯되어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또한 '나'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해탈이 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 이 큰 가르침에 깊이 사유하고 진실된 수행으로 정진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라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신 부처님 가르침에 지심귀명례 합니다.

 

 

 

 

월간통도. 2022. 09.(통도사승가대학 혜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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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가다 보면 주차장에 차를 대고도 제법 긴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이나 통도사 무풍한송로 소나무 숲처럼 풍취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때론 진입로가 왜 이렇게 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긴 진입로는 우리나라 산사에만 있는 특징 중 하나이다. 

통도사 무풍한송로

짐승에게 받은 피해를 줄이려는 문을 세우다

산은 모든 면에서 인간에게 이익을 주지만 옛날에는 호랑이와 같은 위협적인 존재가 석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호랑이가 뭐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할지도 모르지만 마마媽媽(천연두) 보다 더 무서운게 호환虎患이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을 빗댈 때 호환마마라고 했다.

 

또 호랑이와 관련된 유명한 속담으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호랑이 없는 골에는 토끼가 왕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와 같은 것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산사와 관련해 섬뜩한 속담이 하나 있는데 '새벽 호랑이는 중(승려)이나 개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속담은 왜 거의 모든 산사에 산신각이 있고 그 안에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은 국토의 특성상 호환이 많았는데 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었다. 일본은 해수구제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맹수를 대량 사살했으며 이로 인해 1925년 무렵에는 호랑이와 표범 및 늑대가 거의 전멸했다.

 

심산유곡에 위치한 산사는 호환에 가장 취약한 곳이다. 그래서 산사는 진입로를 최대한 길게 빼고 인적을 남겨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인적이 있으며 짐승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진입로에 인적을 남기는 방법으로 산사에서는 중간중간에 문을 세웠다. 그런데 이 문은 담도 없고 문짝도 없다. 그저 문만 덩그러니 놓인 다소 우스꽝스러운 '문 없는 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산사는 수미산으로 올라가는길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그 중심에 제우스와 12신이 사는 올림포스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산은 신화 속에서 우주의 중심이 되는 곳이자 신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이를 우주산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우주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수미산須彌山이다.

 

올림포스산 정상에 제우스가 사는 것처럼, 수미산 정상에도 인도의 하느님인 제석천이 32명의 신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다. 사찰에서는 이 제석천이 머무는 곳을 불상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불상을 모신 좌대를 수미좌 라고 하는데, 이는 불상에 최고의 존업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수미산은 너무 높아서 산의 중턱을 해와 달이 돌고 있다. 그래서 해 쪽이 되는 세상은 낮이 되고 달 쪽이 되면 밤이 된다. 이 수미산의 중턱 4방위에는 4천왕이 살고 있다. 이들은 모든 악으로부터 인간세계를 지키며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수미산은 신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성스러운 성산聖山이다. 즉 인간계와는 단절된 성스러운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수미산 주위로는 마치 성의 해자처럼 동그랗고 넓은 바다가 전개되어 있다.

 

이를 향수해香水海처럼 하는데 이는 수미산의 성역에 대한 권위와 인간이 범접을 차단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불상을 수미산 정상에 있는 제석천의 거처에 모신다. 그러다 보니 산사에 간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수미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구조를 취하게 된다. 즉 '속俗'에서 성聖으로의 전환'이 곧 산사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문은 있는데 문짝은 없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행복에는 더러움을 버리고 청정해지려는 다시 말해 속俗에서 성스러움으로 이행한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산사의 입구에 이르면 으레 계곡과 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는 산을 등지고 앞쪽으로는 물을 향하는 것으로, 풍수에서 흔히 말하는 배산임수 라는 것이다.

 

물을 건넌다는 것은 속진의 더러움을 내려놓고 성스러운 부처님의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도 된다. 즉 냇물과 다리를 통해서 우리는 수미산 주변의 향수해를 건너는 것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다리의 이름은 흔히 해탈교解脫橋나 피안교彼岸橋인데 이는 다리 넘어가 해탈이나 피안의 경계인 깨달음의 성역임을 의미한다.

 

종교는 상징으로 표현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상징에 대한 이해는 종교의 핵심을 관통한다. 냇물과 다리를 건너면 사찰의 첫 번째 문인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문짝도 담도 없는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된 특이한 구조의 문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부터 성산인 수미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주문은 본래 인도불교에서 부처님의 탑과 같은 성스러운 대상을 기리는 기념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넘어서 우리나라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 일주문과 형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는 왕릉이나 충신, 열녀를 기리는 홍살문이 있다. 이들 문의 특징은 문짝과 담이 없는 동시에 문의 뒤쪽에 기릴 만한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불교의 정신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일주문을 넘어서 걷다 보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것이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수미산의 중턱에서 사방을 관장하는 네 명의 천왕을 모신 문이다. 그래서 문의 안으로 들어가면 우락부락한 모습을 한 네 명의 거구가 각기 다른 무기를 잡고 악귀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사찰을 모든 악으로부터 수호한다는 상징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해탈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가 수미산 정상의 입구에 해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주문과 천왕문이 '문짝 없는 문'이라면, 해탈문은 '문 없는 문'이라는 점이다. 해탈문은 사실 문이라기보다는 2층 누각 아래의 어두운 터널과 같은 통로일 뿐이다. 무릉도원 이야기로 유명한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무릉의 어부가 동굴을 통과해 이상향을 발견하는 것처럼, 성聖을 좇아 속俗을 버린 중생은 어둠의 터널을 건너 부처님이 계신 밝은 이상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붓다를 상징하는 장엄한 석탑과 황금빛 불상이 환하게 빛나는 깨달음의 성城인 대웅전을 만난다.

 

 

 

 

자현스님 <세상에서 가장 쉬운 불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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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있고 번뇌로 인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중생이라 한다. 약한 번뇌는 우리를 느슨하게 얽어 매고, 강한 번뇌는 단단하게 결박하며, 더 심한 번뇌는 우리를 죽인다. 번뇌는 중독성이 있다. 가장 중독성이 강한 번뇌를 삼독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 한다.

 

독성을 처음 가까이할 때는 즐거움을 주나, 중독이 심해진 뒤에는 본능이라 불리며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다. 처음에 가까이 하면 즐거움을 주지만, 나중에는 벗어나려면 고통을 준다. 번뇌에 오염된 정도에 따라 고통도 커진다. 이 번뇌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작동하는 것일까.

명상

숫타니파타 수칠로마 야차에서,

야차가 묻고 부처님이 답하시는 내용이 있다.

 

 

"탐욕과 혐오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좋고 싫은 것, 소름 끼치는 일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또 온갖 망상은 어디에서 일어나 우리를 방심케 합니까.

마치 어린아이들이 잡았던 까마귀를 놓쳐버리는 것처럼."

 

"탐욕과 혐오는 자신에게서 생긴다.

좋고 싫은 것과 소름 끼치는 일도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온갖 망상도 자신에게서 생겨 방심케 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잡았던 까마귀를 놓쳐버리는 것처럼."

 

 

경전에서 '자신'이라고 말한 것은, 불교 전문용어로는 유신견有身見이 될 것이다. 유신견은 근본번뇌 6가지 중 악견에 속한다. 약견에는 다시 유신견·변견 ·견취견 ·계금취견 ·사견 5가지가 있다. 유신견은 모든 번뇌의 근본이고 근본 번뇌의 근본이 된다. 유신견을 의지해 여러 가지 악견과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번뇌가 발생한다. 유신견에 집착하는 정도에 따라 번뇌도 강해진다.

 

유신견은 몸이 있다는 견해, 즉 아我가 있다는 확실한 느낌, 즉 유아견이라 말해도 된다. 유신견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자기의 존재가 너무나 확실해 의심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는가. 자기는 '항상 머무는 존재'이고 '하나인 존재'로서 느끼고 확신한다.

 

또 그 아我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자기는 '자유로운 존재'이고 '자유로운 존재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또 자가가 모든 질서의 중심, 관계의 중심, 관심의 중심이고,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또 자기가 더 옳고 정확하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것은 의식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다.

 

잠재의식 무의식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갈망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강박이 되고 집착이 된다. '나의 존재'를 확신하는 자는, 모두 자동적으로 이런 강박을 갖게 되고, 이런 것에 집착을 하게 된다. 나의 존재를 확신하고, 나를 위주로 나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과 행동이 당연하다고 본다. 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다. 더 사랑스럽고 더 소중하다.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으며 사랑스럽고 소중한 나는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더 좋은 것은 나에게 당연히 주어야 하고, 나를 거스르는 것은 당연히 악한 것이며,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당연히 선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너무도 중요한 나머지, 다른 존재는 자기를 위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이용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자기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이와 같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자기에게 당연한 이 확신을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편으로 답답하고 억울하다. 물론 다른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도 똑같이 답답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존재가 나에게 답답해하는 것은, 잘 보이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다. 그냥 자연스러운 내로남불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타인 혹은 다른 존재와 갈등하고 대립하게 만든다. 개인 간에도 작동하고 단체 사이에도 작동하며 국가 간에도 작동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처리하기 위해, 아상을 더 강하게 사용할수록 더 강한 악업을 짓게 된다. 아상을 강화해 문제를 해결하려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고 강화된다.

 

그 결과 고통도 더 커진다. 마치 두 사람이 목소리를 점점 더 높여가며 싸울수록, 점점 더 목도 상하고 관계도 상해 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가 자신 즉 유신견을 기반으로 발생하고 있다. 

 

불법에는 대소승을 막론하고 '나의 존재'라는 생각을 벗어나기 위해서, 오온을 깊게 관찰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오온을 하나하나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유신견은 존재에 대한 착각이고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망상임을, 경전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공통된 착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고통과 불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아我에 집착하고 행동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바탕으로 한 반야지혜를 개발하고, 그 지혜를 의지해 일체 고해를 건너 피안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유신견을 끊으면 인무아를 얻는다. 그렇다고 당장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를 잘라내도 나무 잎이 그 순간에 말라죽는 것은 아니라, 시간이 더 지나야 그 나무가 자연히 말라죽게 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유신견이 없어지고 정견을 얻어 수다원이 되어도, 7번 욕계를 왕래하며 생사를 거친 뒤, 삼계를 벗어나 열반에 들게 된다. 유신견은 제일 먼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근본 번뇌다. 이 관문을 원만히 통과하고 수행해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축산보림. 2024.01_도암스님(통도사 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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