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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노사나불의 장엄, 통도사 영산전 팔상탱 (녹원전법상)의 부분. 1775년

석가모니 붓다께서 최초로 밝혀놓으신 방법 불교를 타 종교와 구별되는 '불교'이게 하는 이것! 사념처를 파헤쳐보기로 하자. 사실, 한 번도 '나는 무엇인가?' 또는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에 대해 진정한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에게, 사념처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아시다시피, 불교는 '없는 개념' 또는 '없는 세계'를 결코 만들어서 말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만 말하고, 또 반드시 본 것만을 말한다. 그래서 '오온의 작용'에 하릴없이 하루 종일 또 일평생을 그리고 죽어서도 또다시 나서도 계속 윤회하면서도 쉴 새 없이 놀아나며 갇혀 있는 우리에게 그 메커니즘을 '보고 거기서 나오라'라고 종용한다.

 

'삶의 중심 잡기' _ 호흡 관찰

'사념처'의 뜻은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네 가지란 ①신身 ②수受 ③심心 ④법法을 말한다. ①'신'은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과 그것의 다양한 면모를 말하는데 자재自在하는 생리적 현상 및 그에 따른 감각을 말한다. 우리는 외부 세상과 그것에 반응하느라 정신없이 스스로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먼저 '아나빠사 사띠'를 수행 일번지로 권하신다. 자신의 호흡(날숨과 들숨)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개념과 이미지'로 호흡을 상상해서 보면 결코 발전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실제 현상을 직시해야 한다. 내 몸에서 가장 알기 쉬운 현재 진행형의 현상인 호흡, 즉 공기의 들어옴과 나감은 '부름과 꺼짐 또는 팽창과 수축으로 나타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신념처는 사대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이합집산과 운영을 보는 것인데 '단단함과 부드러움·가벼움과 무거움 ·흐름과 응집 ·따뜻함과 차가움 ·팽창과 수축 ·운동과 지탱 ·긴장과 진동 등'의 변화무쌍함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호흡 관찰을 중심에 두고 있자면 [①신념처], 몸의 통증(어깨 또는 가슴 등)이 느껴질 것이다. [ ②수념처], 통증의 느낌을 관찰한다. 느낌(수)은 '좋다 · 싫다 · 중간이다'로 나타난다. 통증을 관하고 다시 중심 관찰(부름과 꺼짐)로 돌아오는 것을 반반 정도로 밸런스를 유지하며 진행한다.

 

이처럼 신념처에 중심을 두는 것은 위빠사나도 되지만 동시에 사마타도 된다. 고요함에 머무는 정定의 힘으로 통증의 느낌 [②수념처]과 거기서 유발되는 마음[③심념처]을 관하는 것이다. '수受'와 '심心'의 객관화 중심에는 신념처 '아나빠나 사띠'가 있다. ④법法이란, 오온 및 삼법인(무상· 고 · 무아)의 메커니즘을 보는 것이다.

 

'무명'의 생존기_'마음과 나'의 동일시

여기서 가장 힘든 것이 심心 즉 마음의 객관화이다. 화내는 마음, 슬픈 마음, 절망의 마음, 즐거운 마음 등 마음은 곧 '나'이기에 이것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분리가 안 되니 마음이 아플 때 실제로 몸이 아프다. 다양한 마음들이 우리를 휘감싸지만 그 이면에는 고통의 마음 '갈애', '들어붙는 마음' 집착을 명중하면 끝이다. 마음은 사라진다.

 

우리는 오랜 습관으로 고통이라는 마음을 즐기고 있다. "고통을 즐긴다고?" 붓다께서 득도 이후, 설법을 대중에게 할까 말까로 장기간 고민을 하신 적이 있다. 그때 독백하신 내용은 이렇다. "고통의 자아(에고 ego)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해주는 것을 대중은 원치 않는다. 대중은 그 고통을 스스로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명'은 이렇게 '마음과 나(아상)'를 통일시 하며 살아남는다.

 

'나'를 해체한 자리_ 연꽃 피다

꽃만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꽃을 피운다. 깨달음의 꽃! 하지만 꽃봉오리는 세세생생 닫혀 있고 쉽게 열리지 않는다. 또 열렸다 해도 수행력의 정도에 따라 잠시 머물다가 다시 닫힌다. 깨달음의 봉오리는 타원형의 모양으로 '연꽃 봉오리' 또는 '솔방울' 모양과 흡사하다. 불교에서는 연꽃 봉오리로 표현하지만, 서양에서는 솔방울에 견주어 서양학자들은 이것을 송과체(솔방울샘 또는 송과샘, 송과선)라고 부른다.

그림 1의 부분, 연화대좌, 모든 부처 및 보살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통 '앉아 있다'라고 표현하는데, 사실은 '연꽃에서 화생한 모습', 즉 '연화화생'의 모습인 것이다.

사람 뇌의 정중앙에 위치한 이 연꽃 봉우리 또는 송과체는 "불가사의한 분비샘", 신神과의 연결점" 또는 "영혼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 (데카르트의 저서 <Treatise of Man(1637>에서)"라고 간주되었다. 이것이 열리면 '천 잎의 연꽃잎'이 만개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불교의 꽃이 연꽃(영서화 또는 공기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없어진 아공我空의 자리에서 피기에 '공기화'라고도 한다. 그래서 불교미술은 온통 연꽃이다. 부처와 보살의 광배 ·대좌 ·보관 ·법의 ·지물 등등! "연화장세계는 향수로 된 바다 가운데 커다란 연못이 피어 있든/ 본래 법신불이 천 잎의 연화대에 앉았는데/ 천 잎이 각각 한 세계가 되고/ 그곳에 화현 한 일천 석가모니불이 계시며/ 다시 백억 나라에 모두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 한다.(범망경 중에서)

 

 

 

 

 

 

월간통도. 2022. 10. 중에서(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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