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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로 태어난 붓다는 안락하고 호화스러운 왕궁 생활을 누렸다. 그 예로, 전기 자료에는 그가 계절에 따라 옮겨 가며 거주했던 '삼시전(三時殿)'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열대 기후 지역인 인도는 일 년이 여름과 겨울, 우기(雨期)로 나뉘는데, 삼시전은 바로 그 각각의 계절에 머물기 좋은 세 채의 전각이었다

 

안락하고 호화로웠던 왕자 시절

중아함 권29 「유연경(柔軟經)」 등의 기록에서는 붓다가 호화로웠던 자신의 왕자 시절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곤 한다. 이에 따르면 붓다는 왕자 시절 전단향을 몸에 바르고, 새로 만들어진 비단옷만 입었으며,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하인에게까지 쌀밥에 고기반찬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가 2,600여 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붓다가 다른 이들에 비해서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로 전기 자료는 붓다 탄생 직후 있었던 예언을 들고 있다. 당시에는 새로 태어난 왕자의 운명을 점쳐 보는 풍습이 있었다. 붓다의 경우 '아시타'라는 선인이 '그는 장래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나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전륜성왕은 인도신화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1,000개의 바큇살을 가진 수레바퀴를 머리 앞에서 자전시키며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의 출현은 당시 석가족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반왕은 아들의 붓다로서의 기질을 막고, 위대한 왕의 자질을 증장하기 위해서 더욱 특수한 배려를 했다고 한다.

전륜성왕의 대표적 인물 /아소카 대왕

 

또한 붓다는 미래의 군주로서 여러 분양에 걸쳐 교육을 받는다. 그 주된 과목은 국가 운영을 위한 통치술과 전쟁에 필요한 무술, 그리고 외교와 관련된 어학이었다. 이때 붓다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받은 교육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 통치술은 불교 교단의 조직 관리에서 활용되었으며, 어학은 여러 국가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데 유용했다. 또 무술을 연마하여 얻은 건강한 신체는 출가 후 혹독한 수행을 감당할 수 있었던 자산이 되었다. 왕궁에서 받은 교육은 불교 교단이 붓다 당대에 거대한 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다.

 

야소다라와의 결혼과 아들 라후라의 탄생

붓다는 19세(혹은 17세)에 이웃 나라 콜리국의 공주이자 선각왕의 딸인 야소다라와 결혼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기 자료에는 각술쟁혼(角術爭婚)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 · 중세 시대 전사 집단에 있던 결혼 풍습 중 하나로 무술대회를 열어 우승을 한 사람이 결혼을 쟁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붓다가 무술에 능한 사람이었음을 방증한다.

 

붓다는 29세에 출가하므로 그들의 결혼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다. 이 기간에 둘 사이에는 '라후라(羅㬋羅)'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라후라는 '장애'라는 의미인데, 출가하려는 붓다에게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붓다의 출가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꾸며진 이야기일 뿐, 실은 라후라가 탄생할 때 일식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즉 출가의 장애가 아닌 태양의 장애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라후라의 탄생은 왕가의 가계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붓다의 출가에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현대의 일반적인 시간이다.

 

사문유관을 통한 생로병사의 인식

붓다의 왕궁 생활은 화려했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그를 생산하고 7일 후에 사망한다. 아마도 룸비니에서 급작스럽게 출산한 일이 원인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이 일이 붓다의 삶에 그늘을 드리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붓다의 출가와 관련해서 전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사문유관'이란, 그가 왕궁의 동, 남, 서, 북의 네 문을 차례로 나가면서 각각 노인과 병자, 그리고 죽은 자와 사문을 목격하게 되고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 일을 말한다.

 

전기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이 야기는 붓다의 출가가 노· 병 · 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 대안으로써 출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즉 붓다의 출가는 처음에는 자신의 삶과 관련된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을 뿐 중생 구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삶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자현스님 불교사 100장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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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현재의 네팔 지역에 해당하는 소국 '가비라(迦毗羅)'의 첫째 왕자로 태어났다. 이곳은 석가(釋迦)족이 이룬 나라로, '석가'란 '능력 있는 자'라는 뜻이다. 국명으로 사용된 가비라는 이 지역에서 수행하던 유명한 수행자인 가비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위기의 가비라국

붓다가 태어났을 당시, 가비라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히말라야 산맥 근처 폐쇄된 지역에 위치했던 가비라는 인도 내륙에 위치하여 다양한 문화가 유입될 수 있었던 도시 국가와 달리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며 낙후되고 만다. 더욱이 당시 인도 내륙 도시 국가들은 상업으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등 팽창기에 있었다. 가비라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점차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붓다의 만년인 75세 무렵 가비라는 주변 강국인 코살라 비유리(毘琉璃) 왕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붓다의 가계

붓다는 정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다. 정반왕은 사자협왕의 장남으로 그의 이름 정반(淨飯)은 '깨끗한 흰쌀밥'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쌀농사를 지었던 당시 가비라국의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그의 부인인 마야의 이름에는 환상'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웃나라 콜리국의 공주였다.

 

석가족의 기대를 받으며 탄생한 왕자

쇠락하고 있었던 석가족의 상황 때문에 왕자에 대한 기대는 배가되었다. 마야 부인은 여섯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의 태몽을 꾸고 붓다를 잉태하였다고 하는데, 이 태몽은 붓다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상징한다. 인도에는 코끼리와 관련된 특별한 상징이 있는데, 희 코끼리는 코끼리 중 가장 상위에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중에서도 여섯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는 가장 강력한 존재이다.

 

마야 부인은 해산을 위해 고향인 콜리로 향한다. 그러나 만삭의 산모가 비포장된 길을 가마 수레에 의지해서 간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해산의 징후가 나타나게 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해산을 위한 장소로 선택된 곳이 바로 룸비니이다. 붓다의 전기자료에서는 이때를 4월 8일 (혹은 15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탄생 직후 붓다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위존 삼계개고 아당인지(川上天下 唯我爲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즉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니,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겠다'는 게송을 천명했다고 한다. 이는 모든 생명 있는 존재에 대한 구제자로서의 그를 나타내는 기록이다.

붓다의 가계도

 

붓다의 이름과 칭호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고타마'는 '훌륭한 소리'라는 의미로, 석가족이 쌀농사를 짓던 농경민족이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의미인데, 이 이름은 개인의 성취인 동시에 당시 쇠락해 가던 석가족의 성취 역시 염두에 둔 것이다.

 

붓다를 이르는 또 다른 호칭인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인도는 땅이 넓고 많은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성씨로 구분하기보다는 종족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다. 때문에 종족명과 결합된 석가모니라는 칭호가 사용되는 것이다.

 

'붓다'란 '께달은 분', '깨달음의 완성자'를 뜻하는 일반명사지만 불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고착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붓다가 개달음을 얻은 이후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붓다의 전기 자료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전의 붓다를 칭할 때 장래에 붓다가 될 분이라는 의미의 '보살(菩薩)'을 사용한다.

 

붓다와 관련해서 불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호칭으로는 '여래(如來)'와 '세존(世尊)'도 있다. 여래는 '진리에서 온 분'이라는 의미로 '진리의 채현자'라는 뜻이다. 또 세존이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의미인데, 두 칭호 모두 깨달음의 완성자에 대한 존칭이다. 일본불교에서는 '석가모니'와 '세존'을 결합시켜 '석존(釋尊)'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붓다를 칭하는 열 가지 칭호(여래십호)

 

 

 

 

출처 : 자현스님의 불교사 100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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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당시 인도는 62견(見), 또는 363견이라는 많은 종교적 · 철학적 견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견해가 공존하는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이들은 스스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추려진 여섯 집단을 불교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칭한다.

사상계의 혼란과 육사외도의 등장

불교와는 다른 철학적 견해를 가진 여섯 사문, 또는 그 사문을 따르는 집단이라는 뜻이다. 이 여섯 사문에 대한 내용은 장아함 권 17 「사문과경(沙門果經)」등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불교 경전에는 이들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여러 번 나타남다. 그러나 불교 또한 이들과 같은 사문 전통에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붓다가 브라만교보다도 육사외도를 더욱 강도 높게 비판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모두 같은 사문 계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고 원색적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럼 육사외도를 이끈 이들과 그들의 사상을 살펴보자

먼저 소개할 인물은 유물론자인 아지타 케사캄발린이다. 그는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를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네가지로 보고, 인간이 죽으면 이 요소가 흩어질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설에 입각해서 윤리나 사후 세계를 부정하고 현실에서의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다음은 인간과 세계가 지·수 ·화 ·풍 ·고(苦) ·락(樂) ·생명의 일곱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 파쿠다 카짜야나이다. 그는 소멸하지 않는 일곱 가지 요소들이 이합집산하여 인간을 구성하기 때문에 죽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다음은 카말리 고살라이다. ·수 ·화 ·풍 · 허공(虛空) ·득(得) · 실(失) · 고(苦) · 락(樂) · 생(生) · 사(死) ·영혼의 열두 가지 요소설을 주장하였다. 숙명론자였던 그는 인간이 느끼는 고락과 선악 등이 이미 정해진 이치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행과 같은 엄격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라나 카싸파는 모든 사회적인 규범을 인정하지 않는 도덕부정론자이다. 모든 규범은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선악이나 과보가 초래될 수 없다는 윤회적 회의론을 주장했다.

 

불가지론(不可知論)자 산자야 벨라티풋타는, 모든 문제는 주관적인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어떤 판단도 정당할 수 없다는 회의론을 주장했다. 그래서 지식을 버리고 수행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후일 붓다의 최고 제자로 꼽히는 사리불과 목건련은 본래 산자야의 제자였다.

 

마지막은 미간타 나타풋타이다. 그는 육체와 물질에 속박된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고행에 가까운 엄격주의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고 하였다. 5대 서원인 불살생(不殺生) · 불망어(不妄語) · 불투도(不偸盜) ·불음(不淫) · 무소유(無所有)를 강조하면서, 청정한 엄격주의만이 윤회를 끊고 해탈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붓다보다는 연배가 위였지만 붓다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 현재까지 인도에 남아 있는 자이나교의 교조이기도 하다. 그가 강조한 5대 서원은 불교로 수용되어 오계(五戒)가 되는 등 불교 정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육사외도의 사상가는 대체로 요소론(적취설)의 관점에 입각한 유물론이나 숙명론, 도는 도덕부정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윤회를 끊는 해탈의 방법으로 고행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다수 목도된다. 육사외도의 요소론과 고행에 대한 입장과 비슷한 내용은 붓다에게서도 일정 부분 찾아간다. 다만 붓다는 요소론의 관점을 인과연기론(因果緣起論)으로 승화하고, 고행을 부정하며 중도(中道)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을 배제한 사문이 세계를 이해한 방법, 적취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차이와 차별이 존재한다. 유신론에서는 이 부분을 신의 의지에 따른 결과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신이 빠지게 되면 차이나 차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 세상의 구성 물질로서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며, 이것의 결합 차이가 현상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적취설(積聚說)이라고 한다.

 

붓다 이전의 사문들은 세계를 여러 원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러한 적취설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지 ·수 ·화 ·풍의 사대설(四大設)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설(五溫設), 그리고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십이처설(十二處設), 십이처에 안식(眼識) ·이식(耳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을 덧붙인 십팔계설(十八界設)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세계 구성의 요소가 된다.

 

적취설의 발달은 문제의 초점을 요소 간의 결합 관계로 옮겨 가게 한다. 붓다는 각각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그 원리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설(因果設)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세계 구성의 요소가 된다.

 

적취설의 발달은 문제의 초점을 요소 간의 결합 관계로 옮겨 가게 한다. 붓다는 각각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그 원리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설(因果設)과 연기설(緣起設)이다. 붓다는 적취설이라는 사문 전통의 토대 위에서 보다 진일보한 관점에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문 전통에서 적취설이 신이라는 존재의 대항마로 대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쪼갰을 때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최소가 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추구 때문이다. 이는 희랍철학에서도 확인되는 측면 중 하나인데, 이것이 사문 전통에서 적취설이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전통은 후대까지도 계속 유지되는데, 이는 불교의 구사학(俱舍學)에서 75종의 요소를 말하는 것이나, 유식학(唯識學)에서 100가지 요소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 마음 작용, 세계의 구성 요소

 

 

출처 : 자현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사 100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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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탄생에 대한 고대인들의 문화와 사상은 그들 무리가 어떤 생활 방식을 취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세상은 창조되었는가, 순환하는가

먼저 초원에서 홀로 가축을 돌봐야만 하는 유목문화의 사람들은 하늘과 신에 대한 외경심이 크다. 결국 이들은 창조의 근원을 신에게서 구한다. 반면 농경문화의 사람들은 창조보단 순환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에게는 봄·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경문화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시작과 끝이 없이 생멸의 순환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에는 원주민의 농경문화와 이주한 지배층의 유목문화가 한 데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해 창조론과 순환론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 중 브라만교는 창조신이 등장하는 창조론을 채택하는 반면, 불교는 자연의 원리에 따른 순환론을 수용하게 된다.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윤회란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듯 정신의 본질은 상속되고, 육체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상속'이란 자기 동일성이라는 성질을 지닌다. 만약 정신의 본질이 '상속'되 않는다면 그것은 윤회라기보다 '새로운 변화', 혹은 '창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윤회론을 받아들이고, 윤회를 끊어 그 과정에서 벗어날 것을 추구하는 인도철학과 종교에서는 '윤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브라만교는 윤회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바뀌지 않고 영속한다고 주장한다. 브라만교에서는 아트만, 즉 '아(我)'라고 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안아트만, 즉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이는 유심은 동일하지만 그 속의 정보는 변화한다는 것, 다시 말해 유심은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그때그때 업그레이드되는 정보의 총합이란 것이다. 업그레이드되는 정보를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하며, 이것의 누적이 곧 자의식이라고 본다.

 

윤회에 대한 브라만교와 불교의 입장 차이는 그 주체를 고정 불변하는 실제로 볼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층위의 변화 대상으로 볼 것이냐에 있다. 이 판단에 따라서 '아윤회(我輪廻)'와 '무아윤회(無我輪廻)'라는 상반된 주장이 충돌하게 된다.

 

절대자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신이 두 가지를 창조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두 가지란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 중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것은 '변화하지 않는' 가치이다.

 

브라만교에서는 인간에게 있어 아트만을 제외한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아트만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불변의 본질이다. 다만 이것은 마치 태양이 구름에 가려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변화하는 가치에 감싸여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트만이 본질의 불변성을 잃어버리거나 변화하여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다 해도 그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아트만은 창조주 브라흐만과 같은 불변의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합일될 수 있다.  아트만(我)과 브라흐만(梵)의 결합,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개별적 존재인 아트만과 창조주인 브라흐만이 하나가 되면 변화와 유한성에 속박된 아트만은 무한 불변의 자유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이고, 그 대상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반복의 수레바퀴, 즉 윤회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종교 ·철학이 주장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창조주로서의 신'이라는 대전제를 필수로 한다. 결국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이 주장은 오류에 빠지게 되고, 논리 구조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의 존재는 유사 이래로 신앙과 믿음으로 용인될 뿐, 증명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이러한 관점에서 검증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배제한다. 그렇게 되면 아트만도, 브라흐만도, 범아일여의 구조도 성립될 수 없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안아트만, 즉 '변화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이 변화를 깨닫게 되면 인간은 바람처럼 완전한 자유를 증득하게 된다고 본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브라만교의 해탈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셈이다.

브라만교와 불교의 차이

 

 

 

출처 : 자현스님 <불교사 100장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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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인도에 자리 잡았던 아리안족은 점차 영역을 넓혀 동부 내륙에서 세력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아리안족과 선주민의 문화가 뒤섞이게 되고, 결국 갠지스 강 유역에는 아리안족 문화의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아리안족 침략으로 생긴 신분제 역시 느슨해지면서 능력에 따른 사회 구조가 더 강한 설득력을 얻게 된다.

 

또한 아리안족이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할 즈음 인도에는 대상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도시 국가들이 등장하였다. 이 당시 크고 작은 부족들이 통합되어 국가의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면 대표적인 16국이 세력을 다투게 된다. 그 16 국가는  캄보자, 간다라, 쿠루, 판찰라, 코살라, 말라, 브리지, 앙가, 마가다, 카시, 밤사, 체티, 슈라세나, 바차, 아반티, 아슈바카 였다. 이 중 강대국은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의 4개국으로 군주정치제로 운영되었다.

 

도시 국가의 발달은 기존의 전통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변화를 파생시킨다. 다시 말해 기존의 전통을 불신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원전 6세기 인도에 등장한 16 도시국가

 

신흥 사문의 탄생

브라만교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아리안족 종교 전통을 축으로 인도 전통 문화가 결합된 우파니샤드 철학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시대적인 변화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더욱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 인도 동부의 사회적 변화 욕구는 전통의 부분적 개변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붓다가 신분 제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파격적인 행보도 정당하다고 여겨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교에서 사문 전통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을 뿐, 대안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집단적 색깔이 약한 수행 문화를 가졌던 사문 전통은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더불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게 된다. 특히 도시화로 인한 개인주의의 발달과 탈집단주의의 추구는 사문 전통의 경향에 더 근접해 있었다. 이들 사문 전통의 수행자가 바로 신흥 사상가와 신흥 종교가인  '사문'이다.

 

사문은 브라만교의 브라만과 같이 제도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집단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가능한 한 모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견해들을 제시하게 된다. 장아함 권 14 「범동경」에 따르면 당시 신흥 사상가와 신흥 종교가의 철학적 견해들은 62가지가 있었으며, 불교와 동시대 종교인 자이나교의 문헌에는 363가지 관점들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사상계의 과도기에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본가와 왕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사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곧 신분이자 지위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도시 국가가 발달한 인도에서 인류 역사 최초로 나타난다.

 

카스트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성직자인 브라만이 신분상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도시 국가가 발달하면서 다수의 자본가가 탄생하고, 이들에 의해 구 질서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당시 사문들은 브라만들이 행했던 것처럼 전통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사문의 특징 중 하나가 '신분제의 부정' 이었다.

 

장자는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고, 왕족과 귀족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신분제가 붕괴된다 해도 받게 될 여파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또한 상위 계층인 브라만의 권위가 무너질 경우, 자금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하여 최상위자로 군림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이와 같은 측면들로 인해 당시의 자본가와 국왕 및 귀족들은 브라만보다 사문을 지지했다.

 

또 사문들은 수행법에 있어 고행과 같은 개인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는 브라만이 종교의식인 제전(제사)을 중시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로, 자본가와 왕족, 귀족의 이익과 충돌할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면도 제도적 성향을 가진 브라만에 비해 사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는 이유로 작용한다.

 

출처 : 자현 스님 「불교사 100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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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약 1,000년 동안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아라비아해까지 이어지는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피어난다.

사진 구글

인더스문명 발생과 종언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은 드라비다족과 문다족으로 이들은 완만하고 비옥한 대지 위에서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농경 사회를 구축하고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여느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생활 방식 역시 환경적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히말리야 산맥은 인도 대륙의 동북쪽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인더스 문명은 동북쪽 문화권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문명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인도 대륙과 인접하지만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던 중국 대륙의 문화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단, 인도 대륙은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지르는 동북쪽과 달리 서북쪽으로 개방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 문명과 교류하는 교차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 지역으로부터 그리스 문명이 유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때문에 서북쪽으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것이 사실이다. 내륙과 맞닿아 있는 서북쪽 경로로 이민족이 침입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라안족의 침입,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침입, 마지막으로는 이슬람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서북쪽 경로를 통해 아리안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이들은 코카서스 지방에서 시작된 유목 민족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미 쇠퇴기에 들었던 인더스 문명은 종언을 맞게 된다.

 

베다의 집대성과 브라만교의 탄생

  서북쪽 인도 펀자브 지역에 정착한 아리안족은 이후 자신들의 성전인 '베다'를 집대성한다. 종교 지식과 제식 규정이 담겨 있는 이 성전은 암송되어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기원전 1500년경부터 체계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목 민족이었던 아리안족이 섬기던 주신은 '전쟁의 신'이자 '천둥(번개)의 신 '인드라'였다. 「리그베다」의 찬가 사분의 일 가량이 인드라에 대한 것임을 보면 당시 아리안족의 그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메르 산 정상에 머물며, 휘하에 32명의 신을 거느린 인드라를 '신들의 왕'으로 여겼다. 하지만 유목 사회의 문화가 농경 사회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이러한 사상은 큰 변화를 맞는다. 전쟁의 신 인드라를 주신으로 모시던 구조에서 세계를 창조한 브라흐만을 중심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로써 탄생하는 종교가 바로 브라만교이다.

 

  브라만교는 그 명칭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창조주 브라흐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이는 아리안족이 '신들의 왕'보다도 더 오랜 기원을 가지는 창조주의 개념을 이용해 인도 원주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브라만교는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문화와 철학적 사고를 발생시키게 된다.

 

  한편 아리안족은 씨족제 농경 사회를 형성하면서 견고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낸다. 이 제도에서는 크게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었는데, 그 네 가지는 제사장인 제1계급 브라만을 시작으로, 왕족인 제2계급 크사트리아, 평민 계급인 제3계급 바이샤, 노예 계급인 제4계급 수드라이다. 이 계급 구조는 현대까지도 이어지면 영향을 미치는 신분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우파니샤드의 성립과 브라만교의 한계

  기원전 800년경에는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에 철학적인 해석을 입힌 우파니샤드 시대가 열린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고 해서 베다의 끝이라는 의미의 '베단타'라고도 한다. 또한 그 내용이 철학과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심오하다는 의미의 '오의서'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우파니샤드'는 본래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로 스승과 제자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종교 지식을 전수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식을 소수의 사람만이 독점하는 비밀주의를 상징한다. 우파니샤드의 이러한 태도는 후일 '누구나 배울 수 있다'라고 주장한 붓다의 개방적인 태도와 대비된다.

 

  맹목적인 신앙과 제의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가 철학적 사유라는 옷을 입게 된 건 기존의 것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아리안족 문화의 구속력이 약했던 갠지스 강 유역의 인도 동부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대적인 요구에 비해 느리게 진행된 브라만교의 변화에 내포된 한계, 이것이 신흥 사상가와 철학자들을 각성시키게 된다.

 

 

출처 : 불교사 100장면 중에서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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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가면 주요 전각에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이 없는 사찰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불상은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에도 불상을 제작했을까? 그리고 불상의 외형은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뚜렷하게 다른 점도 있는데, 그러한 특징에는 무슨 상징이 숨어 있는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된 모습을 재현한 불상의 제작과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시기, 무불상 시대가 입니다.

보리수 아래에 대좌가 있고 주변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여러 명의 악마가 보입니다. 그런데 대전은 비어 있습니다. 원래는 붙다가 있어야 할 자리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데 왜 그럴까요? 당시 아직 불상을 제작하지 않았던 시기기 때문에 붓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키미디어

불교 미술사에서 처음부터 불상이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물로 추정해 보면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부터 약 500년간 불상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시기를 무불상 시대라고 부릅니다. 당시 불전도에도 붓다의 형상을 그리지 않고 대신 상징물로만 표현했습니다. 스투파나 보리수 혹은 법륜, 대좌나 발자국 등을 표현해서 붓다를 상징했습니다.

 

열반을 상징하는 스투파와 깨달음의 나무인 보리수, 진리의 수레바퀴는 모두 붓다 일생과 연관된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산체스투파의 난관과 탐문에 묘사된 다양한 이야기 속에도 붓다는 흔적만 추정할 수 있을 뿐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인간의 형상으로 재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징의 표현은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을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왜 불상을 오랫동안 만들지 않았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도에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지금은 상을 숭배하는 모습이 익숙하고 어색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보편적이지 않았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슬람교에서도 인간의 형태로 성을 만들거나 숭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런 전통은 서아시아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금제사리기

불교가 처음부터 붓다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그 땅은 진리를 깨닫고 가르침을 전한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받았지만 신처럼 숭배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깨달음의 진리, 즉 다르마라고 하는 불법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붓다를 신앙하기보다는 수행을 통해 그와 같은 길을 걷기를 소망했습니다. 붓다처럼 깨달음을 얻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만들거나 숭배할 필요가 없었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관행은 금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 세상을 초월하여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 존재를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한다는 것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 후에 붓다를 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정당성이 담보되어야만 하고, 신성함을 보여주는 형식적인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불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특별한 상징을 덧붙이게 됩니다.

불상이 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지속되어 왔습니다.학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기원을 전후해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유물이 아프가니스탄의 비마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기입니다.

 

사리기 외면에는 불입상이 묘사되어 주목됩니다. 이 유물은 아제스의 은하와 함께 출토되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은하가 샤카와 아제스의 것이라면 사대기의 연대를 기원전까지도 올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화가 후대에 독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시기를 올려보는 데는 이견이 있고 기원 후 1세기 유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불입상은 머리 육계가 있고 콧수염이 분명하며 한 손은 가슴 앞에 두고 있습니다. 얼굴과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발은 옆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에 인도에는 쿠잔 왕조가 들어섰습니다.

쿠션 왕조는 현재 파키스탄의 페샤아로와 인도 북부의 마투라와 같은 도시 번성이 있었고 점차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쿠션 왕조의 불상은 간다라와 마투라를 중심으로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두 지역 가운데 어느 곳에서 먼저 불상을 만들었는지는 20세기 초부터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보통 서양의 학자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간다라에서 먼저 불상을 창안했다고 보았고, 반면 인도 학자는 본질적으로 인도 전통에 바탕을 두고 불상이 제작되었으며 간다라보다 앞선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즘은 두 지역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혹은 동시에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간다라와 마투아는 불상 제작의 중심지로 비슷한 시기에 유명했지만 두 지역의 불상은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간다라는 알렉산더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쿠산 왕조가 성립되고 정치적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다수의 스투파가 건립되고 다양한 불상이 제작되었습니다.

 

간다라 불상은 대부분 회색이나 검은색이 감도는 표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불립상은 전체적으로 사실적인 표현이 눈에 들어오는데 큰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장신구는 걸치지 않은 차림입니다. 머리카락을 끌어올려 상투 모양으로 틀고 콧수염 안에 있는 얼굴입니다.

 

복식은 숙녀들과 같지만 머리는 삭발하지 않고 긴 머리여서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싯다르타는 출발하면서 머리를 잘랐을 것이고, 다른 승려들처럼 삭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불상은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출가한 보통의 수행자와 다르게 머리 모양을 한 것은 붓다가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도에서 전통적인 대인사, 즉 훌륭한 인간의 신체적 특징에 관한 전통을 따른 것이며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상투로 틀은 모습은 고결한 머리 모양을 의미했습니다. 간다라의 다른 불좌상도 입상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머리 위에 큰 육계가 보이고 콧수염이 있으며 옷주름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입상에 비하면 옷을 입고 있는 방식이 다른데,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식을 편단우견식이라고 부르며 입상은 통견식이라 부릅니다.

 

인도 중북부에 위치한 마투라도 중요한 도시였으며, 마투라불상 제작의 중심지이었습니다. 마투라 인근에는 붉은색 사암이 흔해 불상을 만드는 데에도 사암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붓다는 편단우견으로 옷을 입었고 미간에는 깨달은 자의 눈썹 사이에 백호를 표현하였고, 머리는 마치 소라 고동 같은 모양의 육계가 있고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법륜이 있습니다. 

 

머리 뒤로는 광배가 있고 주변으로 보리수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 손은 무릎 위에 다른 손은 들어서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간다라 불상에 비하면 옷차림이 다르게 표현되었고, 몸체 세부가 좀 드러나 보입니다.

 

두 지역의 불상은 재료의 차이가 있고 또 부분적으로는 다른 표현도 여러 곳 눈에 들어옵니다. 두 불상은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세부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머리 위에 육개가 있고 눈 사이 미간에 백호가 있습니다. 광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어떻게 공유되었을까요? 우리가 어떤 상을 보면 불상이라고 금방 알아챌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은 무엇일까요?

 

인도에서 귀인이 지니는 신체 특징을 불교에서 받아들였고, 이는 붓다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붓다의 신체를 체계화한 내용은 여러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전마다 모두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게는 32가지로 구분하고 많게는 80가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고귀함과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있고 깨달은 자의 눈썹 사이에 나는 백호가 있습니다. 백호는 도더라지를 둥근 점으로 묘사하거나 구멍을 파고 보석이나 유리를 채워 넣기도 합니다. 또 광배도 중요한데 붓다의 몸체에서 나오는 빛을 조형화한 것입니다. 신성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표현인데, 머리에 비추는 두광이 있고 몸체 뒤에 나타나는 신광, 그리고 전체를 감싸는 전신광이 있습니다.

 

두광과 신광을 겹쳐 표현한 것도 있는데 이중원광이라고 부릅니다. 끝부분을 뾰족하게 해서 배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주형 광도 나타납니다. 32가지 중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불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대좌입니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앉았던 풀방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상은 언제나 대좌 위에 모시게 되는데 형태의 특징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형식으로는 연꽃 모양으로 만든 연화좌가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에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불교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장식된 경우는 사자좌로 부르고 위험과 위세를 뜻합니다. 또한 붓다가 입은 옷자락이 흘러내려 계절을 덮은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런 형식은 상현좌라고 부릅니다. 옷주름 표현이 강조되면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으로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우리나라에도 들어옵니다.

 

불상을 이해할 때 중요한 부분이 손의 특징입니다. 불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손 모양을 수인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을 지물이라고 합니다. 중상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대표적인 수인 두 가지를 먼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진입니다. 오른손은 지신을 부르는 촉지, 다섯 손가락을 아래로 편 모양으로 무릎 밑을 향하고 있습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 있습니다. 수인의 특징에 따라 좌상에서만 볼 수 있으며 일찍부터 많이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도 크게 유행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붓다의 탄생물에 나타나는 수인입니다. 한수는 위로, 다른 수는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천지인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붓다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며 수인으로만 특징을 표시합니다. 불상은 성격에 따라 석가모니, 아미타, 비로자나 약사불 등 다양하게 제작되는데, 약사불만 약을 담는 그릇인 약함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수인을 약기인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위계와 지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상이 있습니다. 붓다는 불, 부처 또는 여래라고도 부릅니다. 원래는 석가모니에 대한 명칭이지만 불교 교리가 발달하면서 여러 정토 세계와 시방세계를 관장하는 모든 부처를 가리키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이전에 과거에도 부처가 있었고, 미래에도 세상을 구제해 줄 부처가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과거 부처는 연등불, 미래 부처는 미륵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지만 정토에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음으로 부처를 도와 대중에게 자비를 베풀고 중생의 구제와 교화에 힘쓰는 보살이 있습니다.

 

불상의 좌우에 등장하는 협시보살의 기는 한 번쯤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약침으로 깨달음을 구하여 중생을 보살피면서 궁극적으로는 성불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를 의미했지만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부터 부처의 다음 지위를 갖게 되고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여러 보살이 나타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미륵, 관음, 문수, 보현, 지장보살 등이 있고, 외형은 불상과 달리 각종 장신구를 걸치고 있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각각의 역할에 따라서 정경이나 보주 혹은 지팡이와 연꽃 등의 지물을 들고 있습니다. 보살은 단독으로도 제작되지만 불상과 함께 표현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석가모니 불은 보통 문수와 보현보살과 함께 나타나고, 아미타불은 관음과 세지보살과 어울립니다. 그렇지만 이런 특징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가 오랜 시간 여러 지역에서 발달했기 때문에 예외적인 경우도 많고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도 했습니다. 불상이나 보살상은 자세에 따라 구분되기도 하는데요. 크게는 입상, 좌상, 와상 등이 있고, 좌상은 또 특징에 따라서 좀 더 세분됩니다. 와상은 와불이라고도 하면서 누운 자세 불상을 뜻합니다. 부처의 열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상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결가부좌입니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 참선에 들 때 취한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가부좌에서 한쪽 다리를 내리면 반가좌입니다. 보살상에 많으며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예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한쪽은 결가부좌를 하고 다른 다리는 무릎을 세우고 앉는 자세를 유낭좌라고 부릅니다. 역시 보살상이 주로 나타나고 고려시대 불상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경우지만 의자에 앉는 자세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무불상 시대에서 불상의 탄생, 그리고 인도 초대 불상 제작의 특징들은 불상을 제작하는 데 있어 고유한 상징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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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눈'으로 본 우리의 모습 또는 중생의 실체는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나의 성격도 모른 채 좌충우돌 평생을 산다. 끊임없는 부딪힘과 갈 곳 모르는 마음, 채워지지 않는 집착은 분심을 유발하고 갈 곳을 모르는 분심은 결국 슬픔을 택한다. 화병 또는 우울증 등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바람이 차곡차곡 쌓여 생긴 마음의 병이다. 급기야 가족도 소용없고 세상도 다 소용없다며 혼자만의 고립을 택한다. 하지만 요동치는 마음은 그대로다.

그림 1 <육도윤회승침도> 꽈배기처럼 돌아가는 탁한 에너지 속에 물고기 · 자라 ·제비 ·달팽이 ·개구리 ·개 ·돼지 ·말 ·사람 ·천인 등이 서로 엉켜 돌아가고 있다.

부정적인 마음이 쌓이면 썩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시뻘겋다가 더 지나면 시커멓게 덩어리 지는데 이것을 '업장'이라 한다. 부정적인 업장의 모습은 지난 연재 불타는 아귀의 모습과 미처 날뛰는 검은 소의 모습으로 보여드린 바 있다. 실제로 썩은 마음의 모습이 이렇다.

 

썩은 마음 덩어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검붉은 에너지로 무상하게 파도친다. 여기에 담배나 술이 가해지면 불타는 업장에 휘발유를 붓는 격이 된다. 순간, 수백 수천 배로 증폭된다. 그래서 음주 후에 스스로와 남을 해치는 사고 또는 방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에너지의 흐름이다.

 

관자재 vs 오욕자재

세상만물에는 '자성自性'이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유지하려는 성품을 말한다. 이것은 저절로 돌아간다. 저절로 돌아가며 자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을 끌어들여 몸집을 불린다.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자재自在'한다고 표현한다. '관자재보살'이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관자재, 관觀이 자재自在한다'는 말이다. 관(통찰지)이 자재한다는 말은 저절로 알아차림이 유지되어 뭐든지 다 꿰뚫어 보는 경지를 말한다.

 

반대로 '오욕자재천왕'이라는 말이 있다. 오욕(중생의 마음에 항상 요동치는 다섯 가지 욕망 : 식욕·수면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이 자재하는 도가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오욕을 키울 수도 있고, 반대로 통찰지를 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오욕의 밀물 같은 자동 작동 속에 휩쓸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먼저 오욕이 힘을 못 쓰게 하는 유일한 방법,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행이란, '알아차림의 유지'를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다. 우리가 일 초 알아차림 하면 일 초 부처님이고 일 분 알아차림 하면 일 분 동안은 부처님인 것이다. 반면 알아차림 못하면 오욕자재의 검은 파도에 하릴없이 놀아나게 된다. 이렇게 놀아나는 무명 속 중생 모습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다.

 

"저 중생들을 관찰하니/ 여섯 갈래 속에서 육도윤회 하면서/ 나고 죽음의 끝이 없네/ 그것은 거짓이고 견고하지 못하며 마치 파초 ·꿈 ·환영 같네."

 

이러한 모습을 사진을 찍는다면, 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육도윤회승침도」(그림 1.2)라는 이 장면은 해인사 명부전의 《시왕도》 중 한 폭인 <제10 오도전륜대왕> (그림3) 속에 그려져 있다.

그림 2. 오르락내리락 서로 모습을 바꾸어 환생하며 아등바등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이 엉킴의 실타래를 누가 풀 것인가?"

우리가 육도를 자맥질하듯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이다. '승침'이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모습으로, 마음이 무명에 갇혀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 낸 것이다. 죽어서 형체가 없을 때에도 '무명의 마음'이 중음이라는 터널을 지나 어떻게 다시 몸 받아 환생하는지 소개하였다.

 

섬광 전개되는 자동반응: 갈애와 집착

「육도윤회승침도」 그림3 를 보면 집착과 갈애의 불꽃에서 소용돌이처럼 누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그것은 여섯 갈래로 나뉘어 돌아간다. 꽈배기처럼 돌아가는 에너지 속에는 물고기 ·자라 ·제비 ·달팽이 ·개구리 ·개 ·돼지 ·말 ·사람 ·천인 등이 서로 엉켜 돌아가고 있다. 서로 모습을 바꾸어 환생하며, 부질없는 삶을 유지하려 아등바등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그림 3. 갈애의 불꽃에서 누런 회오리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는데, 그 속에는 여섯 갈래(육도)가 꼬여 돌아가고 있다.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 「청청도론」「제1장: 계」에 나오는 첫 질문이다. 우리 중생들은 안팎으로 '갈애의 그물'로 서로 꼬여서 엉켜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장착된 육근[안이비설신의]도 이미 꼬인 채로 있고, 이것이 육경과 만나면 또 꼬일 수밖에 없다.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는 것은 이미 오염된 반응 체계를 말한다.

 

굳어진 오온의 반응체계, 이것을 쉽게는 업의 패턴, 더 쉽게는 성격 또는 성향이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는 순간 초스피드의 광속으로 이미 반응은 전개일로이다. 꼬인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니 꼬여 보이고, 또 꼬인 반응이 다시 업장으로 쌓이게 된다.

 

안팎으로 또 너도 나도 모두 꼬여 있다. 그러니 "이 실타래 엉킴을 도대체 누가 푼다는 말 입니까?"라는 천신의 질문이다. 이에 붓다는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라고 답하신다. 여기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머물러서'라는 문구에서 '계戒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해석에 나와 있다. 해석 첫 문장은 "계란 의도이다."라고 나온다.

 

여기에서 막혀서, 약 5년 전 「청정도론」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의도라니? 지금은 이해가 된다. 즉, 우리가 세상을 인지 또한 인식하는 순간, 이미 집착이 자동적으로 따라붙는다. 오염된 반응체계가 발동한다. 그러니 알아차림으로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이미 생긴 불순한 의도는 상카라[행行]의 길을 걷는다.

 

'반응'을 잡아라! '알아차림'으로!

붓다는 "업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답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다. 중생은 의도를 가지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계가 '의도'이듯이, 업도 '의도'이다. 우리는 이미 장착된 오염된 반응체계로 부지 불식 간에 '의도'를 낸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는 순간 알아차림 못한 채 반응하였다면 이미 끝나버린 거다. 계는 지켜지지 않았다.

 

업은 이미 부정업이다. 알아차림이 동반되었다면 그것은 청정도이고, 마음의 정화가 가능하다. 이것은 《청정도론》의 핵심 요지이다. 섬광으로 전개되는 우리의 오염된 반응체계, 이것에 내 마음을 도둑질당하지 않으려면,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한다. '실타래의 얽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림의 날카로운 칼날'이다. 붓다 실참 수행법의 핵심경전인 《대념처경》의 요지, 신수심법[몸·느낌 ·마음 ·법]의 알아차림! 먼저 나의 행동방식, 반응방식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마음 정화의 첫걸음이자 윤회를 끊는 첫걸음이다.

 

 

월간통도. 2022. 0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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