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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는 단청과 함께 목조건축물을 장엄하는 중요한 요소다. 건물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는 예배의 대상인 불상뿐만 아니라 불교교리, 부처님 전생이야기 등을 표현하고 있어 대중을 교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불어 나한, 산수, 화조 등 다양한 소재가 담겨있어 당시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반야용선도의 앞에는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님이 서 있고 선미에는 지장보살님이 서 있다. 가운데에는 극락세계로 향하는 중생들이 타고 있다.

극락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를 말한다. 또 용은 극락으로 향해가는 뱃머리를 상징하고 반야(般若)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의미한다. 용으로 극락세계로 가는 배를 삼은 반야용선에는 인로왕보살이 배의 앞머리에 서서 극락으로 길을 인도한다. 법당 건물에 용머리와 용꼬리를 조각해 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통도사 극락보전은 천왕문을 지나 처음 마주하는 전각으로, 하로전 영역의 영산전 좌측에 서향하고 있다. 극락보전은 1369년 성곡대사에 의하여 세워졌고 1800년 연파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법당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신 아미타불과 좌우에 협시보살로 관음 · 세지보살상을 봉안하였다.

 

벽화는 통도사가 가람의 초입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18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개보수로 인해 대부분 결실되어 외부와 외벽화와 포벽화만이 전한다.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는 포벽화 <나한도>가 주를 이루고 후면 외벽에는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도>가, 좌우 외벽에는 <금강역사상>등이 남아 있다.

 

중생들은 선행을 닦고 염불을 잘 했하면 아미타여래가 임종 시 왕생자를 서방 극락정토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극락으로 가는 또 다른 대표적인 방법은 아미타여래의 인도를 받은 왕생자가 용선을 타고 바다 너머의 극락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반야용선도>는 용선을 타고 인로왕보살의 인도하에 극락세계로 가는 중생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화면의 중앙에 돛이 달린 큰 반야용선을 배치하고 서방극락 아미타불 또는 아미타삼존불이 서 있다. 선수와 선미에는 삿대와 번을 들고 중생들을 이끄는 보살이 배치되는데, 불보살의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과 고통, 재난 두려움 등을 없애 주는 관세음보살과 명부세계의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 등이 그려진다.

 

통도사 극락보전 외벽에 그려진 <반야용선도>는 용선의 선주에 인로왕보살이 합장하고 서서 서방 극락정토로의 길을 안내하고 선미에는 지장보살이 육환장을 들고 있다. 배 중앙에는 비구, 아낙, 선비, 양반, 노인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극락왕생을 기대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유일하게 뒤돌아보는 한 사람이 눈에 띈다. 아마도 속세에 미련이 남아 있거나 남겨 둔 가족이 걱정되어 극락을 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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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범어로 수투파(Stūpa)을 뜻하며 saṃdarśana는 바라보는 행동 혹은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한역에서 ‘견보탑품’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견보탑품에서는 부처님 앞 땅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칠보탑이 솟아나 ‘세존께서 법화경 설법하시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 말한다. 모인 대중들은 이 신비로운 일에 놀라움과 찬탄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이때 대요설이란 보살이 세존께 대중들을 대신해서 그 이유에 대해 질문을 한다.

견보탑품도 부분 (다보여래와 석가여래).

부처님 앞에 솟아난 칠보탑

이 탑은 옛날 동방으로 무량 아승지 세계를 지나 보정(寶淨)이란 나라에 다보불(多寶佛) 계셨는데 큰 원력을 세우되 자신이 멸도한 이후 어디든지 법화경 설하는 곳이 있으면 자신의 탑이 경전을 듣기 위해 그 앞에 솟아나 증명하고 찬탄하리라는 서원을 세웠다. 세존께서는 그 대의 원력으로 이 탑이 지금 나타난 것이라 말씀하신다. 대요설이 다보불을 친견하고 싶다고 하자 세존께서는 시방세계에 흩어져 법을 설하는 자신의 모든 분신이 모여야 비로소 다보불을 친견할 수 있다하시며 세존의 분신을 왕사성 기사굴산에 모이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그때 부처님의 미간 백호상에서 한 줄기 광명을 놓으시니, 동방에 있는 무수한 국토의 부처님 설법하시는 모습이 보이며, 무수한 보살들이 중생을 교화하시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사바세계는 그대로 청정한 국토로 바뀌게 된다. 그때 부처님의 모든 분신이 사바세계 기사굴산에 모이신다. 비로소 석존은 손가락으로 다보탑을 열고 다보불은 그 속에서 깊은 선정에 들어 계시다가 석존의 법화경 설법을 증명하시며 자리를 반반으로 나누어 앉으신다. 그리고 두 분이 동시에 진리를 펼치신다는 내용이다.

통도사 영산전 <견보탑품변상도>

통도사 영산전 내부의 벽화 가운데 불상의 반대쪽 서벽에는 현존 국내 유일한 벽화인 <견보탑품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예배자의 위치에서 사리탑을 향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그려져 있으며 《법화경》의 내용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높이 540cm, 폭 220cm 크기의 <견보탑품변상도>는 영산전 내부 벽화 중 가장 크고 화려하여 다른 사찰의 영산전과 구별되는 통도사 영산전의 대표적 벽화이다. 이 벽화는 석가모니가 기사굴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화려하게 장식된 칠보탑이 솟아오르고 다보불이 석가모니불을 맞이하자 보살·천인 ·천룡팔부 등 참석한 대중들이 칠보탑에 공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벽면 중앙에 두 부처님이 나란히 앉은 웅장한 탑을 배치하고 탑 좌우에 보살과 제자 각 2위를 대칭적으로 그려 안정감이 있다. 화면 상부에는 화려한 채운과 탑을 장식한 각자 보령寶鈴과 영락瓔珞이 군청색의 바탕과 대비를 이루며 중앙의 탑을 부각시키고 있다. 9층 탑신에서 확산되는 나선형의 선은 '칠보탑이 솟아오르자 사방에 전단향이 가득하였다.'는 경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부의 전단향이 번지는 모습과 탑 주위의 합장한 보살·성중들이 표현은 탑 속에서 나오는 다보불의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공경한다는 <견보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내용 전체를 한 화면에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법화경》의 내용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인 칠보탑이 솟아오르고 다보불이 증명을 하는 <견보탑품변상도>는 국내에서 사경화나 영산회상도를 제외하고는 벽화나 탱화로 조성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

 

우리나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서 유래

석가탑은 국보 제21호이며, 본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다.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본래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의 내용으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하자 과거불인 다보불이 그 설법을 증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석가탑 아래에는 사방에 여덟 개의 연화좌가 있는데 이것도 견보탑품에 석존이 자신의 분신을 팔방에 앉게 한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용산의 국립박물관 중앙에 있는 경천사 석탑과 종로에 있는 국보 2호인 원각사 석탑에도 견보탑품에 나오는 칠보탑이 허공에 솟는 장면과 두 분의 부처님이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는 이불병좌상(二佛坐像)이 있다. 앞의 장면은 법화회상도라 하며, 후자는 다보회상도라 한다. 이렇듯 견보탑품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가탑은 다보탑과 함께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건립했다. 1966년 석가탑 해체 때 사리공에서 나온 중수기에 따르면, 석가탑은 고려 현종 15년(1024)과 정종 2년(1036), 정종 4년(1038)에 각각 대규모 지진 피해를 봤다. 이때 석탑 상당 부분이 무너졌고 현재 보는 석가탑은 복원 과정을 거친 것이다. 조선 선조 20년(1596)에는 우레에 상륜부가 파괴되었고, 400년 가까이 지난 후인 1970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을 모델로 복원한 것이다. 1966년 석가탑 도굴 미수사건으로 탑이 훼손되어, 부분 보수할 때 당시 사리공에서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석가탑 중수기’가 발견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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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원류응화사적>은 석가모니불의 일대기와 전법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 이 판화집은 중국에서 전래되었고 조선 후기 팔상도에 대부분 표현되어 그려졌다. 영산전의 포벽 상하단에는 부처님의 이야기와 고승에 관련된 내용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주요 행적을 전기 형식으로 모아 놓았기 때문에 성도 이후 열반까지의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일부는 인도 승려들의 행적과 중국 불교를 형성해 온 고승들의 설화를 그려 놓았다. 이 가운데는 양나라 때 불교를 전한 달마대사의 일화와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 스님도 있고 양 무제 등 불교를 믿고 따랐던 황제나 지식인들의 행적도 있다. 불교의 심오한 사상을 전달하기보다는 부처님과 고승들의 기적이나 귀감이 되는 내용을 일반인과 불교에 입문하는 초심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풀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법당 벽면에 표현하여 당시 억압받던 조선 시대 불교가 대중들과 쉽게 소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숭유배불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부처님과 승려의 위계를 고려하여 상단 포벽에 부처님의 전래 이야기를 배치하고 하단 포벽에 승려들의 내용을 그린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산전 내부의 상단 포벽에는 동서남북 모두 25장면의 불전 관련 그림이 그려져 있고 하단 포벽에는 고승과 관련된 설화 그림 21점이 구성되어 있다.

 

영산전 상단 포벽에 그려진 <석씨원류응화사적>의 25장면

증명설주證明說呪 : 관세음보살이 진언을 통하여 중생구제를 청하는 장면

노인출가老人出家 :

나이가 많아 출가할 수 없는 노인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

 

시식득기施食得記 :

부처님께 음식과 옷을 공양한 공덕으로 성불하게 되는 장면

 

불화추야佛化醜兒 :

추악한 아이가 설법을 듣고 선하게 변하게 되는 장면

 

옥야수훈玉耶受訓 :

패악한 옥야에게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가르치는 장면

 

추녀개용醜女改容 :

추악한 여인이 설법을 듣고 아름답게 변한다는 장면

 

부인만원夫人滿願 :

유폐된 위제희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는 장면

 

권칠청불勸親請佛 :

외도를 믿다가 병든 친구에게 부처님을 만나기를 권하는 장면

 

촉아반불囑兒飯佛 :

수라타가 임종 시 아들에게 보시를 부탁하는 장면

 

시의득기施衣得記 :

부처님에게 옷감을 보시한 공덕으로 수기를 받는 장면

 

도제분인度除糞人 :

사위성에서 천한 신분의 전타라를 제자로 받는 장면

 

목련구모目連救母 :

목련이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구제하는 장면

 

능가설경楞伽說經 :

여러 보살들에게 <능가경>을 설하는 장면

 

원각삼관願覺三觀 :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 때 보살들에게 <원각경>을 설하는 장면

 

반야진공般若眞空 :

급고독원에서 수보리의 질문에 <반야심경>을 설하는 장면

 

청불주세請佛住世 :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고 남아 있기를 청하는 장면

 

도부루나度富樓那 :

부루나가 설법제일의 제자가 되는 장면

 

어인구도漁人求道 :

상대를 물고기라 놀린 과보로 백두어가 되었다는 장면

 

도발타녀度跋陀女 :

대가섭의 부인 발타라라는 여인이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장면

 

천인헌초天人獻草 :

제석천이 변신한 길상에게 보리수 아래에 깔 풀을 얻는 장면

 

범천권청梵天勸請 :

범천과 여러 권속들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장면

 

불화무뇌佛化無惱 :

사위성의 살인자인 앙굴리말라를 교화시키는 장면

 

백구폐불白拘吠佛 :

전생에 재물에 집착한 업보로 개가 되었다는 장면

 

사천우불祀天遇佛 :

치병을 위해 살생하여 제사 지내는 악습을 교화하는 장면

 

증명설주證明說呪 :

관세음보살이 진언을 통하여 중생구제를 청하는 장면

 

불구석종佛球釋種 :

침공하는 유리왕을 설득하여 석가족을 구했다는 장면

 

 

 

 

 

<한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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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불화를 팔상도라고 한다. 팔상이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불전도에 표현되던 부처님의 탄생, 성도, 초전법륜, 열반을 기념하는 4성지에 네 곳이 추가되어 8성지가 된 후 각 성지와 관련된 설화들이 결합하여 팔상의 개념이 확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본행집경》을 기본으로 하여 제작했던 것으로 짐작하며 1447년 《석보상절》에서 팔상을 도솔래의 - 비람강생 - 사문유관 - 유성출가 - 설산수도 - 수하항마 - 녹원전법 - 쌍림열반이라고 밝힌 이후 모든 팔상도가 이 같은 화제하에 제작 되었다. 팔상도에는 화폭에는 화폭의 장면마다 내용의 제목을 적어 놓아 그림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보물 제1041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는 조선 영조 51년(1775)에 유성, 포관 등 화승에 의해 그려졌는데 각각의 화폭은 거의 빈 공간을 두지 않고 건물과 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적절하게 구도를 나누어 해당되는 장면을 잘 표현하였다.

 

도솔래의상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과거에 쌓은 공덕으로 도솔처에서 호명보살로 머물다 부처님이 되기 위해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맨 위쪽 원상에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오는 호명보살상과 이를 에워싸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과 시종 하는 모습의 천중상이 묘사되어 있고, 하단 좌측에 마야부인이 여러 시녀를 거느리고 잠든 모습에서 잉태하는 내용들이 보인다.

 

비람강생상

비람강생상은 마야부인이 나무가지를 잡고 오른쪽 옆구리부터 출생하시는 불타의 모습이 있다. 강탄 후 일곱 걸음을 걸어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장면을 표현하였다. 상단 좌측에는 상서로운 구름 주위로 구룡이 청정수를 토하여 탄생불의 몸을 씻겨 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하단 우측에는 아시타 선인 정반왕의 궁에 들어가서 태자의 형상을 보고 정각을 이루어 붓다가 되리라 예언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사문유관상

사문유관상은 풍요롭고 화려한 성 안에서만 자라던 태자가 성 밖으로 나가 생로병사의 실상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기까지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의 오른쪽 위부터 동, 오른쪽 아래 남, 왼쪽 아래 서, 왼쪽 위는 북쪽을 상징하였다. 특히 북문에서 출가사문을 만나는 장면을 잘 묘사되어 있다. 세상의 무상함과 출가한 사문의 고고한 자태를 대비시켜 극적인 장면들이 잘 표현되었고, 두 그루의 소나무가 엉켜 있는 구조를 중심으로 생로병사의 네 장면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구분하였다.

 

유성출가상

유성출가상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얽힌 삶에 대하여 깊은 번민에 방황하던 태자가 마침내 궁궐을 떠나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에 태자가 마부 찬다카와 함께 백마 칸타카를 타고 성을 빠져나갈 때에 제천과 신중들이 호위하는 모습이 상서로운 구름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하단에는 카필라성 왕궁 내부에서 비파를 안고 잠들어 있는 야쇼다라와 궁녀들이 묘사되어 있고, 맨 아래 우측에는 성문에 기대어 잠든 병사들이 그려져 있다. 중안에는 마부 찬다카가 돌아와서 정반왕에게 태자의 출가를 고하자 모두 슬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설산수도상

설산수도상은 태자가 출가항 궁궐로 돌아오라는 부왕의 명을 거절한 채 십 년간 수행하는 과정을 설산을 배경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하단에 태자가 말에서 내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칼로 자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그 옆에 제석천신이 태자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다. 삭발하고 있는 태자의 앞에 끊어 앉아 우는 마부 찬다카의 모습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태자와 작별하고 성으로 돌아가는 찬다카가 묘사되어 있다. 상단에는 고행림에서 수행을 마친 다음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물을 받으시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수하항마상

수하항마상은 팔상도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싯타르카가 인간의 모습에서 불타가 되는 획기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핵심 사상을 여기에 둘 수 있기 때문에 이 도설의 내용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중앙 우측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한 보살 앞에는 각종 무리글 든 마군과 칼을 든 마왕 파순, 또 한편에는 마군들의 퇴각하는 모습이 율동적이고 생기 있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극적인 표현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49일을 정진하여 지금까지 그를 유혹하던 온갖 마군을 조복 받고 명성을 보고 오도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하고 있다.

 

녹원전법상

녹원전법상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설법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상단에는 수미단상에 앉아 보관을 쓰고 천의, 화만, 영락을 걸치고 설법하는 부처님과 그 주변으로 협시보살과 보상중, 천중, 외호신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부처님 위쪽에는 제불래영이 표현되어 있다. 하단에는 보탑과 그 위에 합장하고 있는 부처님과 시방세계의 부처님, 신중, 성중이 묘사되어 있다.

 

쌍림열반상

쌍림열반상은 길에서 태어나 일평생 수행의 길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의 가르침을 전파하셨고 길에서 마지막 여정인 불생불멸의 열반에 드셨다. 이때 사라나무가 홀연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더니 열반에 드신 부처님 위로 향기로운 꽃을 흩뿌렸다. 쿠시나가라 니련선하의 사라쌍수 아래서 80세의 생애를 마치고 음력 2월 15일 열반에 드신 모습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모습 주위로 통곡하고 있는 비구상, 합장한 보살상, 외호하는 신중상이 묘사되어 있고 상단에는 부처님 입멸 후 다비하는 장면, 중앙에는 부처님 입멸 후 다비할 때에 시자를 거느리고 내강한 마야부인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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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건물을 아울러 전각殿閣이라고 표현한다. 그중에서도 전殿은 위계가 높은 건물을 이른다. 대표적인 예가 대웅전과 영산전, 관음전 등이다. 이곳은 불보살님을 모시고 있는 곳이므로 신앙의 공간이 되고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구조나 장엄이 다른 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대웅전은 부처님의 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별도의 불상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제외하고 나머지 주요 전각과 불보살님을 알아보고자 한다.

 

 

응진전의 십육나한

부처님을 항상 따르던 상수제자가 경전에 1,250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제자가 십육나한이다. 십육나한을 봉안한 법당을 나한전, 응진전, 도는 십육성전 이라고 하는 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부처님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를 더 줄여서 말할 때는 십대제자를 들기도 하지만 나한전에 봉안되는 제자상은 십육나한이 보편적이다. 나한은 부처님으로부터 고苦, 집輯, 멸滅, 도道 사제의 법문을 듣고 진리를 깨친 분을 이른다.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 應眞'이라고 하기 때문에 나한을 모실 예배 공간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응진전

특히 십육나한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미륵부처님이 출현하기 전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불법을 수호하도록 하는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응진전 안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나한들이 옹호하고 있는 모습의 후불탱이 모셔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에는 <백호도>, 외벽에는 <교족정진도>와 육조해능이 의발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치열한 정진을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강조하며 아라한과를 얻는 구도행을 표현하고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여래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여 석가여래부처님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다른 불보살의 원력과 다른 점으로 첫째는 모든 중생들 특히 악도에 떨어져서 헤매는 중생과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은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서원誓願함이요, 둘째는 누구든지 업보에 의해 결정된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지장보살에게 귀의하여 해탈을 구하면 정해진 업을 모두 소멸시켜 악도를 벗어나서 천상락을 누리고 열반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신라시대 이후로 가장 일반적인 신앙으로 신봉되었고,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한 49재 때에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는 보살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지장보살의 원력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장보살신앙이 성행하여 대표적인 불교신앙 중의 하나로 유포되었다.

 

대광명전의 비로자나불

불신은 그 성질에 따라 세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 법신불 · 보신불 ·화신불이다. 법신불은 영겁토록 변치 아니하는 만유의 본체인 이불理佛, 보신불은 인因에 다라 나타나는 불신으로서 수행정진을 통해 얻어진 영원한 불성, 화신불은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불신으로 화현한 역사적 부처님이다. 대표적인 법신불은 비로자나불, 보신불은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노사나불을 말하며 화신불은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이 해당된다. 대광명전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통도사약지》에 따르면 대광명전은 통도사 창건 당시에 초창 하였다고 전한다.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대장경 400함 가운데 화엄경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건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부에는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비로자나'는 광명의 빛을 두루 비춘다는 '광명변조'의 듯을 지닌다.

 

용화전의 미륵불

석가모니부처님에게서 미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아 앞으로 출현하실 분을 미륵불이라고 한다. 미륵불이 출현하는 시기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고 나서 56억 7천만 년이 지난 후이며, 이때까지 도솔천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따라서 미륵부처님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실 곳은 용화수 아래이므로 미륵불을 모신 법당을 용화전 또는 미륵전이라고도 한다. 통도사 용화전에 모셔진 미륵불은 여타의 일반적인 불상과 다르게 하얀 호분칠이 되어 있다.

 

관음전의 관세음보살

관음전 내부 벽면에는 보타락가산에 계신 관세음보살에게 남순동자가 법을 묻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32응신을 상징하는 여러 모습의 관세음보살을 표현하였다. 관세음보살은 일반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보살님 중 한 분이다. 관세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으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당할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관하고 곧 해탈하게 하느니라."라고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에 대해 설하고 있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은 시방 국토에 32응신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하는 대자대비하고 원력이 바다와 같이 깊으신 보살이다. 관음신앙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신봉하는 신앙으로 관음전은 불자들이 많이 찾는 전각 중 하나이다

 

영산전의 노사나불

경전에 의하면 노사나부처님은 무량한 공덕을 완성하고 무변 중생을 교화하여 정각을 이루었다. 온몸의 털구멍에서 화신化身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여 광대무변의 부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범망경》에 따르면 천엽연화대의 단상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그리고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삼천대천세계의 교주이며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노사나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 주위에는 천千의 꽃잎이 열려 있고 그 꽃잎 하나하나는 각각 일백억의 국토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 국토의 주재자가 곧 노사나불로 현재 색계色界의 맨 위층인 대자재천궁大自在天宮에서 설법하고 있다.

 

앞서 언굽한 삼신불이 이를 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세 분을 말하는데, 여기서 노사나불은 보신불이다. 영산전에는 <팔상성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와 함께 전각 내부에 화려한 벽화들이 온전히 남아 있다.

 

극락보전의 아미타불

법당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신 아미타불과 좌우에 협시보살로 관음, 세지 보살상을 봉안하였다.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은 과거 인행 시 법장비구로서 48대원을 성취하여 성불하였으며 극락세계를 장엄하여 누구든지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케 한다는 일념왕생원의 믿음을 지니는 부처님이다.

 

즉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빛으로서의 '무량광' 또는 한량없는 생명으로서의 '무량수' 등으로 번역되므로,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경우 '수광전'이란 현판을 갖게 되었다. 불교신앙의 종교적 이상국토를 관장하는 부처님이 아미타불이며, 이를 상징하는 전각이 극락전이며 무량수전이라고 할 때도 있다.

 

약사전의 약사여래불

《약사경》에 의하면 약사여래는 과거 보살행을 닦을 때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고뇌를 제거한다는 내용을 담은 12가지 서원을 세워 부처님이 되었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현세 이익적 성격이 강한 부처님으로 특히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중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널리 신앙되었다.

 

'약사십이대원'의 공덕으로 성불하여 중생의 병고를 치료하므로 '대의왕불'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가 머물고 계신 곳은 청정하고 안락한 동방유리광세계라고 하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로 등장한다. 그리고 호법신장으로는 12신장이 출현한다고 한다. 보통 약사여래가 불상이나 불화로 표현될 때는 왼손에 약합藥盒을 지니는 것을 징표로 하며 약사전에 모셔진다. 통도사 약사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도 약합을 들고 있다.

 

산령각의 산신

산령각과 삼성각은 가람배치상 상로전의 가장 위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산령각은 이름처럼 산령(산신령, 산신)을 모신 곳으로 산신각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산신에 대하여 오해가 적지 않다. 즉 산신이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속신이었으나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나름대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는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일컬어지는 산신에 대한 개념의 근거는 화엄법회에 동참했던 39위의 화엄신중 가운데 제33위에 엄연히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산신을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앙만으로 보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석문의범》의 산신청 '가영'에 산신을 "옛날 옛적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시고, 강산을 위진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푸른 하늘 청산에 사시며, 구름을 타고 학처럼 걸림 없이 날아다니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는 것으로도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부에는 산신령이 호랑이를 거느리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삼성각에는 보통 산신, 독성, 철성을 모시는데, 통도사는 산령각에 산신을 모시고 있으며 삼성각에는 고려시대 이후 존중받은 3대 화상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중앙에 석조독성 좌상과 독성탱화를 모셨고 오른쪽에는 삼성탱화, 왼쪽에는 칠성탱화를 봉안하여 복합적 기능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각이다. 특히 삼성각에는 구하 스님이 쓰신 주련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이 삼성각의 의미를 잘 전하고 있다.

 

松巖隱跡經千劫(송암은적경천겁)

송암에 자취를 숨기고 천 겁을 지내고

 

生界潛形入四維(생계잠형입사유)

중생계에 모습을 감추고 사방으로 왕래하네

 

隨緣赴感澄潭月(수연부감징담월)

인연 따라 감응함은 맑은 못에 달 비치듯

 

空界循環濟有情(공계순환제유정)

허공계를 순환하며 중생을 제도하네

 

 

도량을 옹호하는 가람각

가람신伽藍神은 도량을 지키는 사찰의 토지신이다. 일반적으로 한국불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으나 신중청에 '하계당처 토지가람'으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가람각은 천왕문의 남동쪽에 근접해 있는 가장 작은 4면 단칸의 법당으로 도량의 수호를 위해 가람신을 모시고 있다. 가람각에서는 매해 가람기도를 봉행하는데, 이 기도에는 주지 스님과 노전 스님 두 분만 참석한다. 섣달 그믐 밤 11시에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데, 도량의 안정을 발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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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화승이 그린 초상화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았으리라 짐작되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몇 점에 불과하다. 16세기에 지방의 화승이 그린 신종위(1501~1583)와 김진(1500~1580)의 초상을 소개한다. 아울러 19세기 중엽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초상화로 명성을 얻은 화승 필안疋晏의 존재도 함께 알아본다.

 

약 400년 전 선비의 초상화

2009년 경북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엣ㅓ 초상화 특별전이 열렸다. 이때 초상화 한 점이 약 440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16세기에 경북 영덕에 살던 평산신씨 신종위를 그린 초상화다. 오사모에 홍색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이 초상화는 그려진 뒤 한 번도 집 밖을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신종위는 효행안에 이름을 올린 효자로 알려졌으며, 지방군수를 지냈다. 이 초상은 1580년(선조 13) 그가 임금이 내린 수직인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고서 이를 기념하여 그린 초상화로 추정된다. <신종위 초상>은 손이 드러나 있어 화승이 그린 초상이라는 데 심증이 간다.

 

함께 살펴볼 또 한 점의 초상화는 신종위 보다 7년 앞서 그려진 의성김씨 <김진 초상>이다. 김진은 안동에 거주했으며, 강학과 교육활동으로 안동의 선비문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진 초상>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화승이 그린 초상이 분명하다.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는 일생을 교육과 가문의 기반을 위해 헌신한 선비상의 전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초상화법의 비밀

신종위 , 김진 초상의 얼굴 부분

두 점의 초상화에서 유심히 봐야만 알 수 있는 두 가지 비밀스러운 특징이 있다. 하나는 얼굴의 형태를 그리는 방식이 두 점 모두 같다는 것이다. 이는 화승들의 인물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코드와 같은 독특한 요소이다. 이 두 인물의 얼굴에서  빨간색 원의 부분을 보면 코와 눈 부분이 좌우대칭을 이룬 정면이 시점에 가깝다.

 

그런데 파란색 부분은 약간 반 측면의 시점에서 귀와 연결된 얼굴 옆면의 일부를 정면상에 추가하여 그려 놓은 듯하다. 즉  빨간색 형태로 그리려면 파란색 부분은 귀만 남아야 하고, 파란색 형태로 그리려면 빨간색의 얼굴 각도가 달라져야 한다. 빨간색와 파란색이 함께 그려지면 얼굴이 좌우로 넓어지며 불합리해 보인다.

 

여기에서 화승들이 얼굴을 인식하여 그리는 독특한 틀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얼굴의 투시방법만 본다면 <김진 초상>과 <신종위 초상>은 한사람의 화승이 시기를 달리하여 그렸다고 할 만큼 유사성이 짙다.

 

두 초상의 또 다른 공통점은 턱수염의 끝을 꼬아 놓은 점이다. 특히 수염을 꼬아 그리는 방식은 다른 어떤 초상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는 활동하기에 편리하고 수염을 단정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행했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종위와 김진은 어떤 관계일까? 확인 해 보니 두 사람은 한 살 차이의 사촌 간이다. 신종위의 조부인 신명창의 딸이 김진의 어머니이며 신종위에게는 고모가 된다. 신종위와 김진은 고종사촌과 외사촌간이었다.

 

신종위가 평소 <김진 초상>에 관심을 가졌고 1580년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김진에게 화가를 소개받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신종위 초상>을 그린 화가는 <김진 초상>을 그린 화승이거나 그 밑에서 배운 화승의 솜씨가 틀림없다.

 

<신종위 초상>과 화승 필안

<신종위 초상>을 조사하던 중 19세기에 모사본 한 점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사를 화승 필안이 맡았다는 사실은 1849년에 기록한 「물촌선생영정개모시일기」에 나온다. 내용 가운데 모사본 제작을 주관하던 문중의 한 인물이 필안을 소개한 대목이 있어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 · 수정사의 승인 '장순'이라는 자가 와서 말하기를 용담의 주지승 필안이 그 스승 선준에게서 화법을 전수받았다. 일찍이 경기에서 놀았는데 도화서의 여러 화사들과 함께 서로 실력을 다투었다. 전후로 경상도관찰사와 수령 중에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개 정묘함이 서울의 화공보다 못하지 않음을 칭찬하였다. 여러 의론이 이르기를 다 같이 정모 하니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서 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했다. 또한 필안은 시에 능하고 글씨도 잘 쓴다고 전에 이름을 들었다. · · ·"

 

경북 용담사의 주지인 필안은 화승 선준에게서 화법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선준은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유명한 화승인데 생졸년과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1868년에서 1970년 사이에 그린 것이 많고 수화승 신겸의 작업에 활발히 참여한 사실이 있어 그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필안은 신겸과 선준의 계보를 잇는 화사였지만, 아쉽게도 작품이 전하지 않는다.

 

필안이 경기 지역에 있을 때, 도화서의 화원들과 실력을 겨루었다고 하는 대목은 당시 화원과 화승들 간의 교유가 긴밀히 이루어졌으며 화원들이 그린 초상화 양식을 화승들이 체험하고 익히는 계기가 도었음을 알려 준다. 즉 화승들의 그림에 초상화나 궁중회화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화원들과의 사적 교유라는 루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필연에게 그림을 의뢰하거나 재주를 시험해 보려는 관리들의 주문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또한 그림의 정교함이 서울의 화원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했으니 필안은 결코 만만한 기량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19세기의 모사본은 현존하는 <신종위 초상>과 형태는 같았겠지만 구체적인 화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세기 무렵에는 지방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화가를 서울에서 데려오지 않더라도 가까이서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섭외된 필안이 1849년에 <신종위 초상>의 모사본을 그렸지만, 그 그림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당시 모본이 되었던 16세기 작 <신종위 초상>만이 약 400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를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셈이다.

 

 

 

월간통도.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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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는 용이 너무도 많다. 굳이 대웅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누각에 걸린 법고에도 황룡과 청룡, 쌍룡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용 장식

대웅전에 서린 용의 상징과 의미

  대웅전의 용은 바깥의 세로기둥에는 그려지지 않고 건물 안쪽의 세로기둥에만 그려진다. 보통 좌우대챙의 쌍룡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물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증득한 부처님과 이를 닮아 가려는 스님들의 기상을 상징한다.

 

  대웅전 바깥쪽까지 용이 보이는 경우는 모두 대들보와 관련 있는 가로기둥이다. 이는 승천하는 용보다 하늘을 나는 용을 상징한다. 대웅전에는 나는 용들이 아주 빼곡하게 박혀 있다. 보통은 바깥쪽 기둥 끝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어떤 곳에는 꼬리만 나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전각 안에 대들보로 연결된 하나의 긴 용이 서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이 넘실대는 용의 궁전, 이곳이 바로 조선의 임금은 둘째치고 황제도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부처님의 위엄이다. 

 

용인가, 이무기인가?

  동아시아의 용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용이 아닌 이무기다. 용과 이무기를 가르는 기준은 여의주를 획득했는가이다. 중국 문화에서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보다는 여의주를 막 취하기 직전의 용을 선호한다. 발전과 변화의 기상을 잃지 말라는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다. 여하튼 눈앞에 있더라도 아직 여의주를 물지 못했으니 이무기일 뿐이다.

 

대웅전은 동물의 왕국

  우리의 미감에는 <까치호랑이> 그림처럼 두려운 대상을 친근하게 표현하려는 해학의 미학이 있다. 이런 점에서 사찰의 용은 근엄하기만 한 왕궁의 용과는 다르다. 불국사 대웅전의 용은 이러한 우리의 해학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불국사 대웅전 바깥쪽의 용들은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것과 여의주를 코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 물고기를 가로로 물고 있는 것과 삼키는 건지 토해 내는 건지 헷갈리는 모습 등 실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황룡과 같은 경우는 코끼리 코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용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에 비견되는 제석천이 타는 동물인 용상이란 실은 용이 아니라 용의 위신력을 가진 코끼리다. 아마도 조각하는 이는 이것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또 대웅전 안에도 용은 물론이거니와 멧돼지를 닮은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六牙白象: 우리의 백호처럼 인도에서도 코끼리의 왕으로 이해된다. 부처님의 태몽에 등장하며, 대승불교의 《법화경》등에서는 보현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가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듯 튀어나와 있다. 여섯 상아의 흰 코끼리는 마야 부인의 태몽에도 등장하는 코끼리의 왕이다. 또 흰 코끼리 맞은편에는 목조각으로는 아주 귀엽게 생긴 푸르뎅뎅한 사자가 곰 인형과 같은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 흰 코끼리와 청사자가 상응해서 나타날 경우 이는 보현보살문수보살을 상징한다.

 

  불국사 대웅전 안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업경대를 등에이고 있는 해태이다. 업경대는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생전의 선악 행위를 심판할 때 비추어 본다는 거울이다. 해태는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신령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업경대를 등에 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마스코트는 해치인데 이는 해태의 다른 표현이다. 불국사 대웅전은 그야말로 온갖 상서로운 동물들이 운집해 있는 성전인 셈이다.

 

 

 

 

자현스님 <사찰의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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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광배를 장식할 때 자주 보게 되는 문양은 넝쿨무늬다. 그 속에는 꽃과 봉오리가 묘사되는데, 이를 보상화문과 인동문, 당초문이라고 한다. 사찰에 꽃을 장엄할 때는 만개한 꽃을 그리거나 새길 때도 있지만,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을 그리거나 새길 때도 있다. 만개한 꽃을 표현할 때는 '완성'리라는 의미를, 봉우리를 나타낼 때는 '가능성'이나 '인욕'의 의미를 상징한다.

사찰의 꽃 장식

꽃으로 장엄된 궁전

  사찰에는 많은 꽃 장식이 있다. 대웅전을 둘러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꽃창이다. 꽃창살은 왕궁과 사찰에만 허용되던 최고 권위의 표현 중 하나이다. 대웅전을 지탱해 주는 기단의 화강암 판에도 꽃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 위 바닥 전돌에 연꽃 등이 새겨지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 대웅전 외각의 벽화에도 꽃이 등장하며, 기와의 막새에도 연꽃이 새겨져 있다. 무심히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서까래의 목재 끝에는 매화점이라고 하는 꽃술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흰 점이 일곱 개 찍혀 있는 경우도 있다.

 

  외부만이 아니다. 대웅전 내부로 들어가면, 천장에 학과 더불어 꽃이 꽃창처럼 활짝 피어 있다. 물론 차이는 있다. 꽃창에는 창살이 교차점에 꽃이 입체로 조각되어 있지만, 천장 꽃은 우물 정井 자 사이에 그려진 평면 그림이라는 것이다. 또 불단인 수미단에도 꽃 장식이 부조되어 있고, 단 위에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꽃과 화병이 있다. 주변 벽을 보면 나무와 나무의 중간 포벽에 또한 여러 꽃나무나 화병 장식이 들어간다.

 

  그리고 대웅전 중앙의 불상에 보게 되면, 부처님은 활짝 핀 연꽃 광배와 그 주변의 화려한 넝쿨무늬를 배경으로 연꼬이 활짝 핀 연화좌대 위에 앉아 계신다. 그 뒤쪽의 불화에서도 불상에서와 같은 양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불화속에는 연꽃을 든 보살까지 존재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은 전체가 '꽃의 궁전'인 셈이다.

 

  한국불교의 철학 체계에서 가장 폭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화엄사상이다. 여기에서 화엄이란 '잡화엄식雜花嚴飾', 즉 모든 꽃으로 장엄된 세계라는 의미이다. 사찰은 그 자체로 이미 화엄세계라고 이를 만하다.

 

연꽃 아니면 모란

  사찰이라는 비밀의 화원에는 꽃이 많으니 종류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주류는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과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의 양강 구조이다.

 

  연꽃은 불교의 이동경로를 따라 인도에서 이 땅에 전래됐다. 중국 성리학의 비조인 북송의 주돈이는 연꽃을 일러 화중군자라 했다. 군자로 부를 만한 품격 있는 꽃이라는 뜻이다. 연꽃은 사치스럽지 않은 자태와 진흙이라는 낮은 곳에 임하는 겸손의 덕, 그리고 강하지 않고 은은한 향을 통해서 중국인의 심성을 사로잡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사찰뿐 아니라 궁궐, 서원 등에서 가리지 않고 사랑받았다. 땅을 파거나 흐르는 물을 막아 물을 가두어 놓은 '못'을 '연못'으로 부르는 경우가 일반화됐을 정도이다. 연꽃을 알아보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전후좌우 동형의 꽃을 찾으면 된다. 특히 연꽃은 중앙에 독특한 연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게 눈에 띄면 연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모란은 제국 당나라의 미감을 대표하는 부귀와 풍요의 꽃이다. 오늘날 모란은 장미와 같이 뚜렷하고 강력한 꽃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아주 유명한 미녀, 당의 양귀비라는 점을 고려하면 모란이 왜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요즘은 살집이 있고 풍만한 체형이 인기가 없지만, 못 먹고 못 살던 과거에는 이런 체형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인식 때문에 불상도 우리가 보기엔 비만인 것이다.

  

  모란을 일컫는 다른 말은 화중지왕이다. 모든 꽃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국색천향이라고도 했다. 나라의 최고 미녀요, 가장 빼어난 향기를 자랑한다는 뜻이다. 이런 연유로 모란은 사찰 안으로까지 들어왔다. 그래서 사찰에서 발견하는 꽃문양은 연꽃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모란임에 틀림없다.

 

  사찰의 장식에서 연꽃이 위에서 보는 정면으로 표현되는 데 비해, 모란은 주로 측면으로 새겨지거나 그려진다. 또한 연꽃은 정면으로 보는 구조상 여럿이 섞여서 묘사되지 못하고 단독으로 혹은 병렬되어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만, 모란은 측면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군집을 이루는 모습으로 흔히 묘사된다. 물론 이러한 법칙은 대개가 그렇다는 것이지 예외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연밥의 유무를 통해서 이 둘을 구별하는 게 더 확실하다.

 

  이외에 간혹 살펴지는 꽃으로는 국화가 있다. 이는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국화는 매화 · 난초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로 불린다. 하지만 매화와 난초는 꽃을 묘사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찰 장식에는 국화만 수용된다. 국화는 꽃잎이 굵은 바늘침 모양이므로 구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며 꽃병에 꽂혀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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