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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두륜산 자락에는 천년의 불교문화와 역사를 품은 사찰이 있습니다. 바로 해남 대흥사입니다.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2018년 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입니다. 하지만 대흥사의 매력은 오래된 전각에만 있지 않습니다. 서산대사의 법맥과 초의선사의 차 문화, 그리고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조선시대 명필들의 글씨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대웅보전(이광사)

두륜산 깊은 곳에 자리한 해남 대흥사

해남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과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산세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사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건물들이 하나의 축에 일렬로 놓이기보다는 자연 지형을 따라 여러 영역으로 나뉘어 있는 것도 대흥사의 특징입니다.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에는 여러 전승이 있어 특정 연도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 동안 불교의 수행과 신앙이 이어져 온 한국의 대표적인 산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서산대사와 대흥사의 특별한 인연

대흥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서산대사 휴정(1520~1604)**입니다. 서산대사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 활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대흥사에는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에서 의발은 스승의 가르침과 법맥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후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법맥을 계승하는 중요한 사찰로 성장했고, 조선 후기에는 많은 종사와 강사를 배출하며 선 수행과 불교 교육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흥사에 서산대사를 비롯한 고승들을 기리는 표충사가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초의선사와 일지암, 그리고 차 한 잔

대흥사를 이야기할 때 또 한 사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초의선사 의순(1786~1866)**입니다. 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면서 우리나라 차 문화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대흥사 산내 암자인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고 차 문화를 꽃피운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동다송》과 《다신전》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현재의 일지암 건물은 후대에 복원된 것이지만, 일지암은 오늘날에도 초의선사의 수행 정신과 한국 차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은 누가 썼을까?

대흥사를 방문한다면 전각만 바라보지 말고 처마 아래 걸린 편액에도 주목해 보세요. 대흥사에는 조선시대 여러 명필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입니다. 이광사의 글씨는 대웅보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흥사의 ‘침계루(枕溪樓)’와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편액도 이광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대흥사 편액 이야기

대웅보전 편액에는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 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보고 떼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주 유배를 마친 뒤 다시 대흥사를 찾아 이광사의 편액을 원래대로 걸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다만 여기에는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문헌을 통해 명확하게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대흥사에 전해지는 일화로 소개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래서 “추사가 이광사의 편액을 떼었다가 다시 걸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그런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흥사에 남아 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대흥사에는 추사 김정희의 실제 글씨도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백설당에 걸려 있는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입니다. 무량수는 글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을 무량수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웅보전에서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 백설당에서 추사의 글씨를 바라보면 두 명필의 서로 다른 서풍을 한 사찰에서 비교해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초의선사의 글씨도 찾아보세요

대흥사의 편액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인물이 초의선사입니다. 대흥사 산신각(山神閣) 편액은 초의선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의선사를 흔히 ‘차의 성인’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불교 수행뿐 아니라 시와 글씨, 차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깊은 조예를 지닌 승려였습니다. 또한 대흥사에서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의 글씨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백설당’과 ‘응진당’ 등의 편액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대흥사는 하나의 거대한 서예 전시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대흥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이유

대흥사는 2018년 우리나라의 다른 여섯 산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됐습니다. 대흥사의 가치는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산속에서 승려들이 수행하고 공부하며 예불하고 생활하는 한국 불교의 산지승원 전통이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대흥사는 과거의 흔적만 보존한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불교의 신앙과 수행이 이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산사’**입니다.

대흥사에서 꼭 살펴볼 것

해남 대흥사를 방문한다면 대웅보전과 천불전 같은 전각뿐 아니라 대웅보전의 이광사 편액, 백설당의 추사 김정희 ‘무량수각’, 초의선사의 산신각 편액을 함께 살펴보면 좋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서산대사의 흔적과 초의선사의 일지암, 그리고 대흥사를 둘러싼 두륜산의 자연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대흥사는 천년의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서산대사의 법맥이 이어지고, 초의선사의 차향이 남아 있으며, 이광사와 김정희의 붓끝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곳입니다. 해남 대흥사를 찾는다면 전각 앞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보세요. 처마 아래 걸린 작은 편액 하나에도 수백 년의 역사와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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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받는 순간 초록빛과 붉은빛, 금빛으로 반짝이는 곤충이 있습니다. 마치 보석을 몸에 두른 듯 화려한 이 곤충의 이름은 비단벌레입니다. 비단벌레는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영어로도 ‘Jewel beetle’, 즉 보석벌레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비단벌레가 특별한 이유는 아름다운 색깔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이자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으며, 신라시대 사람들도 비단벌레의 아름다운 날개를 장식에 이용했을 정도로 생태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곤충입니다.

비단벌레

비단벌레는 어떤 곤충일까?

비단벌레는 딱정벌레목 비단벌레과에 속하는 곤충입니다. 우리나라 비단벌레의 현재 학명은 Chrysochroa coreana입니다. 과거 자료에서는 Chrysochroa fulgidissima라는 학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형태와 유전적 차이를 연구한 결과 한국 개체군은 별도의 종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몸길이는 대략 3~4cm 정도이며 몸 전체에서 강한 금속성 광택이 나타납니다. 특히 녹색 몸 위로 붉거나 자주색을 띠는 세로무늬가 나타나는데, 햇빛이 비치는 방향과 보는 각도에 따라 초록색과 금색, 붉은색 등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실제 비단벌레를 보면 작은 보석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비단벌레는 왜 이렇게 반짝일까?

비단벌레의 아름다운 색은 단순히 몸에 초록색이나 금색 색소가 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몸 표면의 매우 미세한 구조가 빛과 상호작용하면서 강렬한 금속성 광택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색을 흔히 구조색이라고 합니다. 비눗방울이나 공작의 깃털이 보는 방향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비단벌레 역시 햇빛의 방향이나 사람이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몸의 색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비단벌레는 어디에서 살아갈까?

비단벌레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무와 숲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팽나무가 중요한 기주식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활엽수와 관련된 관찰 기록이 있습니다. 성충은 주로 여름철에 나타나며 햇볕이 잘 드는 날 나무 주변이나 높은 곳을 날아다닙니다. 몸집도 비교적 크고 색깔도 화려한데 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울까요? 비단벌레가 주로 나무 높은 곳에서 활동하는 데다 성충을 볼 수 있는 시기도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숲에 비단벌레가 살고 있다고 해도 사람이 쉽게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무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비단벌레

비단벌레는 알 → 유충 → 번데기 → 성충 과정을 거치는 완전변태 곤충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진으로 보는 화려한 모습은 성충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비단벌레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은 바로 나무 속입니다. 유충은 팽나무 등 기주식물의 목질부에서 생활하며 성장합니다. 충분히 성장한 뒤 번데기 단계를 거쳐 화려한 성충으로 모습을 바꾸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방식 때문에 비단벌레에게는 큰 나무와 오래된 나무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죽은 나무, 비단벌레에게는 삶의 터전

숲에 쓰러진 나무나 죽어가는 나무가 있으면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저분하니 치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연의 입장은 다릅니다. 오래된 나무와 죽은 나무는 수많은 곤충과 균류, 미생물이 살아가는 하나의 작은 생태계입니다. 특히 나무 조직을 이용하는 곤충에게 고사목과 노령목은 먹이이자 산란 장소이며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숲을 지나치게 깔끔하게 관리하면서 오래된 나무와 고사목을 모두 제거하면 일부 곤충들에게는 살아갈 공간 자체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비단벌레를 보호하기 위해 한 마리의 곤충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귀하게 보호받는 비단벌레

우리나라에서 비단벌레는 매우 중요한 보호종입니다. 현재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496호이기도 합니다. 또한 국가생물적색목록에서는 취약(VU) 범주로 평가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과 ‘취약(VU)’이라는 표현이 서로 다르다고 혼동할 수 있습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등급은 법적인 보호를 위한 지정 체계이고, 적색목록은 생물이 처한 멸종위험을 평가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서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야생에서 발견한 비단벌레는 희귀하다는 이유로 잡거나 집으로 가져오기보다 서식지에서 그대로 보호하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라인들도 사랑했던 비단벌레의 빛

비단벌레의 가치는 생태학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오래전부터 비단벌레의 아름다운 광택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신라시대 유물에서는 비단벌레의 화려한 날개를 장식에 이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식 유물 가운데 비단벌레의 날개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진 사례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화려한 금속 장식처럼 비단벌레의 날개가 가진 자연스러운 광택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옛날 사람들의 눈에도 비단벌레는 분명 특별한 존재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비단벌레는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동시에 연결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곤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벌레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숲의 가치

비단벌레를 단순히 ‘희귀하고 예쁜 곤충’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비단벌레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비단벌레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알을 낳고 유충이 성장할 수 있는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 나무가 오랫동안 자랄 수 있는 숲도 필요합니다. 결국 비단벌레 한 종의 생존은 나무와 숲,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늙은 나무 한 그루가 어떤 곤충에게는 태어나고 자라고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단벌레를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곤충 한 마리를 지키는 일이 아닙니다. 비단벌레가 살아갈 수 있는 나무를 지키고, 그 나무가 살아가는 숲을 지키는 일입니다. 숲 속에서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비단벌레. 그 아름다운 날개빛 속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숲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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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연 스님은 흔히 《삼국유사》를 쓴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일연 스님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옛이야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수행에 힘쓴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이었으며, 승려로서 최고의 지위인 국존(國尊)에 오른 고승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가 큰 혼란을 겪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불교, 신화와 설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일연스님(ai)

14세에 출가한 일연 스님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은 고려 희종 때인 1206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시작한 일연은 14세 무렵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하여 본격적으로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22세가 되던 1227년에는 국가에서 승려를 대상으로 실시한 승과의 선불장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미 뛰어난 학문과 수행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연은 높은 지위나 명예를 좇기보다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참선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비슬산 일대에서도 오랫동안 수행했으며, 몽골의 침입이 계속되던 1236년에는 무주암에서 수행하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수행자

일연 스님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몽골의 고려 침입입니다. 일연이 살았던 13세기 고려는 몽골과 오랜 전쟁을 치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마을과 사찰, 문화유산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연은 이러한 혼란을 직접 겪으며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훗날 그가 옛 기록과 사찰의 전승, 신화와 설화 등을 모아 《삼국유사》에 남겼다는 사실은 의미가 큽니다. 다만 일연이 몽골 침입 때문에 《삼국유사》를 집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의 경험은 일연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대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팔만대장경 조성에도 참여한 일연

일연 스님의 삶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력도 있습니다. 1249년 무렵 그는 남해 정림사에 머물면서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 조성과 관련된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일연이 단순히 수행만 했던 승려가 아니라 불교 경전과 문헌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훗날 수많은 옛 문헌과 전승을 모아 《삼국유사》라는 방대한 책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이기 전에 선승이었던 일연

오늘날 우리는 일연을 《삼국유사》의 저자로 먼저 기억합니다. 하지만 일연의 본래 모습은 선 수행에 평생을 바친 승려였습니다.

1256년에는 선종 관련 저술인 《중편조동오 위》를 저술했고, 1259년에는 대선사가 되었습니다. 1261년에는 고려 원종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 선월사에서 머물며 설법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청도 운문사 등 여러 사찰에서 수행하고 많은 승려를 지도했습니다.

따라서 일연을 이해하려면 ‘역사가 일연’보다 먼저 **‘수행자 일연’**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연 스님은 왜 《삼국유사》를 남겼을까?

일연 스님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 바로 **《삼국유사》**입니다.《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의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펼쳐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역사책과 상당히 다릅니다. 왕과 전쟁 이야기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군왕검과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부터 신라의 여러 설화, 불교의 전래, 사찰과 불탑, 고승들의 이야기, 민간신앙과 효행담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특히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대 향가도 《삼국유사》 덕분에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고대의 역사·불교·문학·민속·언어·신앙과 사람들의 삶을 함께 담아놓은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삼국유사》에는 불교 이야기가 많을까?

《삼국유사》를 읽다 보면 유난히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저자인 일연 스님 자신이 평생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했던 승려였기 때문입니다. ‘흥법’에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발전하는 과정이 담겨 있고, ‘탑상’에는 사찰과 불탑·불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해’에서는 여러 고승의 삶과 가르침을 다루고 ‘감통’에서는 불교 신앙을 통한 영험과 감응 이야기를 전합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한국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문헌이기도 합니다.

《삼국사기》와 무엇이 다를까?

《삼국유사》를 이해하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습니다.《삼국사기》가 국가와 왕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정사라면, 《삼국유사》에는 공식 역사 기록에서 놓치기 쉬운 신화와 설화, 불교 전승과 민간의 이야기가 폭넓게 담겨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단군신화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왕검과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를 전하는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일연은 오래된 문헌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접한 전승과 증언까지 기록에 포함했습니다. 물론 현대 역사학에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종교적 요소를 구분해 비판적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기록했기 때문에 다른 역사책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던 고대인들의 생각과 믿음, 생활과 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고려 불교 최고의 지위, 국존에 오르다

오랜 수행 끝에 일연 스님은 고려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1283년 충렬왕은 일연을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원경충조’라는 호를 내렸습니다. 국존은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 매우 높은 지위였습니다. 그런데 일연 스님은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지금의 대구 군위에 있는 인각사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일연 스님의 마지막 수행처, 인각사

일연 스님과 인각사의 인연은 매우 깊습니다. 1284년부터 일연은 인각사에 머물면서 수행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곳은 일연이 만년을 보내고 《삼국유사》를 집필·정리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289년 일연 스님은 인각사에서 84세의 나이로 입적했습니다. 입적 후 고려 왕실은 그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각사에는 일연 스님의 흔적을 보여주는 보각국사탑과 비가 남아 있습니다.

《삼국유사》만 쓴 스님이 아니었다

일연 스님에게는 《삼국유사》 외에도 많은 불교 관련 저술이 있었습니다. 《중편조동오 위》를 비롯해 선종과 불교 수행에 관한 수많은 책을 저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안타깝게도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일연은 역사책 한 권을 남긴 승려가 아니라 평생 불교를 수행하고 공부하며 기록했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불교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연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

일연 스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사라져 가는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연이 살았던 시대는 전쟁과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그는 왕의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사찰에 전해지던 이야기와 스님들의 삶, 백성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설화와 신화, 노래와 믿음까지 글 속에 담았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 덕분에 우리는 7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단군의 이야기를 읽고, 신라인들이 불렀던 향가를 만나며, 옛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연 스님을 단순히 **‘《삼국유사》를 쓴 사람’**이라고만 기억하기에는 아쉽습니다. 그는 수행자였고 불교 문헌가였으며, 무엇보다 사라질 수 있었던 한 시대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해 준 기록자였습니다. 어쩌면 《삼국유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가치는 화려한 왕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 밖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와 믿음을 기억하게 해준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집니다. 일연 스님은 그 사라질 기억을 글로 붙잡아 후대에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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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이나 계곡을 걷다 보면 갈대처럼 생긴 풀이 물가를 따라 무리를 지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갈대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 땅을 살펴보면 긴 줄기가 옆으로 뻗어 있습니다. 바로 달뿌리풀입니다. 달뿌리풀은 이름도 재미있지만 살아가는 방법도 흥미로운 식물입니다. 오늘은 달뿌리풀의 특징부터 꽃과 서식지, 번식 방법, 갈대와 구별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달뿌리풀

달뿌리풀이란?

달뿌리풀은 벼과 갈대 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학명은 Phragmites japonicus Steud.이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러시아 극동 등 동아시아 지역에 분포합니다. 보통 하천이나 냇가, 계곡 주변처럼 물이 있고 습한 곳에서 자랍니다. 특히 물이 흐르는 하천변에서 군락을 이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키는 대체로 1~2m 정도까지 자라기 때문에 얼핏 보면 갈대와 매우 비슷합니다.

달뿌리풀이라는 이름은 왜 붙었을까?

달뿌리풀을 알아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땅 위를 길게 기어가는 줄기입니다. 줄기가 땅 위나 지표 가까이에서 옆으로 길게 뻗어나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땅 위를 달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줄기의 마디입니다. 땅을 기어가는 줄기의 마디가 땅에 닿으면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새로운 줄기가 자랍니다. 한 포기의 달뿌리풀이 줄기를 뻗고 →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고 → 새로운 줄기를 만들면서 주변으로 계속 영역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뿌리풀이 자라는 하천에서는 한두 포기보다는 넓은 군락으로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달뿌리풀의 잎과 줄기

달뿌리풀의 줄기는 곧게 서고 마디가 뚜렷합니다. 잎은 길고 좁은 피침형으로 자라며 끝부분으로 갈수록 뾰족해집니다. 잎의 길이는 대체로 10~30cm 정도이고 폭은 약 2~3cm 정도입니다. 벼나 갈대의 잎을 떠올리면 달뿌리풀의 모습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달뿌리풀을 확인할 때는 잎보다 지표면을 따라 길게 뻗는 기는줄기를 살펴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달뿌리풀 꽃은 언제 필까?

달뿌리풀은 주로 늦여름부터 초가을에 꽃을 피웁니다. 작은 꽃 하나하나가 눈에 띄는 식물은 아닙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 가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원추꽃차례를 만듭니다. 국내 식물 자료에서는 주로 8월 무렵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가 익는 것으로 소개됩니다.

꽃차례까지 갈대와 비슷하기 때문에 멀리서 꽃만 보고 달뿌리풀과 갈대를 정확하게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달뿌리풀은 어디에서 자랄까?

달뿌리풀을 만나기 좋은 장소는 하천, 냇가, 계곡 주변입니다. 갈대도 물가에서 잘 자라지만 일반적으로 갈대는 강 하구나 습지처럼 물의 흐름이 비교적 느린 곳에서도 큰 군락을 형성합니다. 반면 달뿌리풀은 비교적 물의 흐름이 있는 하천 상류와 냇가, 산지 계곡 주변에서도 잘 자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만 서식 환경만으로 두 식물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 자연에서는 여러 식물이 함께 자라고 서식 환경도 서로 겹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뿌리풀과 갈대의 차이는?

달뿌리풀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갈대와의 차이입니다. 두 식물은 실제로 가까운 친척입니다. 달뿌리풀은 Phragmites japonicus, 갈대는 Phragmites australis로 둘 다 벼과 갈대속에 속합니다. 그래서 잎이나 줄기, 꽃의 모습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땅 위를 기어가는 줄기입니다. 달뿌리풀은 지표면을 따라 긴 줄기가 뻗어나가고, 그 줄기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갈대인지 달뿌리풀인지 궁금하다면 꽃만 올려다보지 말고 발밑의 줄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땅 위를 길게 기어가는 줄기와 마디에서 나온 뿌리가 뚜렷하다면 달뿌리풀을 알아보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달뿌리풀과 억새도 다르다

가을이 되면 달뿌리풀과 갈대뿐 아니라 억새까지 혼동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억새는 달뿌리풀과 분류부터 다릅니다. 달뿌리풀과 갈대는 갈대 속(Phragmites)에 속하지만 억새는 억새 속(Miscanthus)에 속합니다. 억새는 산이나 들의 비교적 건조한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반면 달뿌리풀은 하천이나 냇가처럼 물과 가까운 환경에서 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식물이 자라는 장소와 줄기, 잎, 꽃차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달뿌리풀은 어떻게 번식할까?

달뿌리풀은 씨앗으로도 번식하지만 기는줄기를 이용한 영양번식 능력이 뛰어납니다. 옆으로 뻗어나간 줄기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줄기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방식은 물의 흐름이나 하천 환경 변화가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데 유리합니다. 조건이 맞으면 주변으로 빠르게 퍼지면서 넓은 달뿌리풀 군락을 만들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상당히 강한 식물인 셈입니다.

하천 생태계에서 달뿌리풀의 역할

달뿌리풀은 단순히 물가에서 자라는 잡초가 아닙니다. 하천 가장자리에 촘촘한 군락을 이루면서 뿌리와 줄기가 토양을 붙잡아 주고, 하천변의 식생을 형성하는 구성원이 됩니다. 달뿌리풀 주변에는 다른 습지식물이 함께 자라기도 하고 다양한 작은 생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집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하천 식생 조사에서도 달뿌리풀군락은 하나의 중요한 하천 식생 유형으로 다뤄집니다. 다만 번식력이 강한 만큼 특정 습지에서 지나치게 퍼지면 다른 식물의 생육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적으로 가치 있는 습지에서는 달뿌리풀의 확산을 관리하기도 합니다.

달뿌리풀을 기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

달뿌리풀을 한 번에 기억하려면 이름보다 '달리는 뿌리'를 떠올려 보세요. 하천 가장자리에서 갈대처럼 생긴 풀이 보인다면 꽃만 바라보지 말고 발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땅 위로 긴 줄기가 뻗어 있고 그 줄기의 마디마다 뿌리가 내려 있다면 달뿌리풀을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갈대는 위를 보고, 달뿌리풀은 아래를 보라.” 두 식물을 관찰할 때 기억하기 좋은 방법입니다.

마무리

달뿌리풀은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식물도 아니고 특별히 눈에 띄는 야생화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천이라는 변화가 많은 환경에서 살아남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기를 땅 위로 길게 뻗고, 마디마다 다시 뿌리를 내립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자리를 넓혀갑니다. 하천이나 계곡을 걷다가 갈대처럼 생긴 풀이 보인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번 발밑을 살펴보세요. 땅 위를 달리듯 뿌리를 뻗고 있는 달뿌리풀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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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도 승가 안에서 의견 충돌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서 화해를 권했는데도 비구들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국 부처님은 그들을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조용히 떠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부처님이 떠난 사실을 알게 된 재가 신도들이 다투던 비구들에게 공양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결국 비구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을 돌아보고 부처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초기불교 경전에 전해지는 ‘코삼비(Kosambī) 비구들의 분쟁’입니다.

붓다


코삼비 승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당시 부처님은 코삼비의 고시타라마(Ghositārāma)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비구들 사이에서 계율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에서는 한 비구가 계율을 어겼다고 판단했고, 다른 쪽에서는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계율 문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지지하는 비구들이 나뉘었고 승가 전체가 두 편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논쟁은 점점 거칠어졌습니다.《중부》 제128경에서는 당시 비구들이 서로 다투고 논쟁하며 ‘입의 창’으로 서로를 찌르듯 거친 말을 주고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수행자들이 진리를 논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견해를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만하여라. 다투지 말라.”

승가의 분쟁이 심해지자 부처님께서 직접 중재에 나섭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다툼과 논쟁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비구들은 쉽게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한 비구는 부처님께 이 문제에 관여하지 마시고 편안히 머무시라는 취지로 말합니다. 자신들이 알아서 다툼을 처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한 번만 권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세 차례에 걸쳐 다툼을 멈추라고 권하셨지만 비구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승인 부처님이 바로 앞에서 화합을 권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생각과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떠나셨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어느 한쪽의 입을 막지도 않았습니다. 충분히 가르쳤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부처님은 결국 코삼비를 떠나셨습니다. 이후 부처님은 여러 곳을 거쳐 팔릴레야까(Pālileyyaka)의 숲에서 홀로 머무셨다고 전합니다. 이때 한 코끼리가 부처님을 가까이에서 시봉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집니다. 코끼리는 부처님께 필요한 물을 가져오고 주변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곳을 떠난 부처님 곁을 오히려 말 못 하는 코끼리가 지켰다는 이야기는 후대 불교미술에서도 자주 표현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떠나자 재가자들이 움직였다

부처님께서 코삼비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재가 신도들은 생각했습니다. ‘저 비구들의 다툼 때문에 세존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리고 매우 강력한 결정을 내립니다. 다투던 비구들에게 더 이상 예를 표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으며 탁발하러 오더라도 음식을 공양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초기불교 승가는 기본적으로 재가자의 보시에 의지해 생활했습니다. 따라서 재가자들이 공양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구들에게 매우 큰 일이었습니다. 재가자들은 비구들이 이러한 상황을 겪게 되면 결국 그곳을 떠나거나, 수행자의 길을 포기하거나,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고 부처님과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

공양을 받지 못하게 된 비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결정을 내립니다. “사왓티로 가서 세존 앞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 여기에서 흔히 알려진 이야기와 경전 기록 사이에 작은 차이가 있습니다. 재가자들이 비구들에게 “부처님을 다시 모셔오지 않으면 음식을 주지 않겠다”고 직접 요구했고, 비구들이 부처님을 코삼비로 다시 모셔왔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율장의 기록에 좀 더 정확히 따르면, 재가자들이 분쟁을 일으킨 비구들에게 존경과 공양을 거두었고, 그 결과 비구들이 사왓티로 가서 부처님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부처님은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코삼비의 비구들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리뿟따, 즉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분쟁을 일으킨 비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사람을 기준으로 어느 한쪽의 편을 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법(Dhamma)에 맞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내 사람인지, 누가 나를 지지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법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승가의 화합은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법과 계율에 따라 문제를 바로 보고 해결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왜 부처님은 떠나셨을까?

코삼비의 이야기는 약 2,500년 전 승려들의 다툼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말을 듣기 어려워집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옳은가’를 놓고 시작했던 논쟁이 어느 순간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싸움’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코삼비의 비구들도 그랬습니다.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편이 갈리고 서로를 말로 공격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 직접 중재했는데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말씀할 만큼 말씀하신 뒤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변화는 부처님께서 떠난 뒤 시작되었습니다. 재가자들이 공양을 거두었고, 비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옳은 말도 들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닿지 않습니다. 때로는 계속 설득하는 것보다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코삼비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의견 충돌을 경험합니다. 가족과 다투기도 하고, 직장에서 의견이 부딪히기도 하며, 인터넷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논쟁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진실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순간, 나는 코삼비의 비구들과 무엇이 다른가? 부처님 시대의 오래된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한눈에 보는 코삼비 승가 분쟁

계율에 대한 의견 충돌
→ 비구들이 두 편으로 갈라짐
→ 서로 거친 말로 논쟁
→ 부처님께서 세 차례 화합을 권고
→ 비구들이 받아들이지 않음
→ 부처님이 코삼비를 떠남
→ 재가 신도들이 비구들에 대한 공양과 존경을 거둠
→ 비구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음
→ 사왓티의 부처님을 찾아감
→ 법과 계율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나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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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무렵 산길이나 들판을 걷다 보면 사람 키만큼 훌쩍 자라 작은 노란 꽃을 피우는 식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잡초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깊게 갈라진 잎과 줄기 끝에 달린 수많은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왕고들빼기입니다. 왕고들빼기는 이름 때문에 우리가 김치로 즐겨 먹는 고들빼기의 큰 종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식물학적으로 살펴보면 의외의 사실이 있습니다. 왕고들빼기는 오히려 상추와 가까운 식물입니다.

왕고들빼기

왕고들빼기는 어떤 식물일까?

왕고들빼기의 학명은 **Lactuca indica L.**입니다. 국화과(Asteraceae) 상추 속(Lactuca)에 속하는 식물로,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러시아 극동지역 및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분포합니다. 산기슭과 들판뿐 아니라 햇빛이 잘 드는 길가, 빈터, 밭둑 등에서도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름에 붙은 ‘왕’이라는 말처럼 키가 상당히 크게 자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처음에는 땅 가까이에서 잎을 펼치지만 성장하면서 줄기를 곧게 뻗어 주변 풀보다 훨씬 높게 자랍니다.

왕고들빼기 잎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왕고들빼기를 알아보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잎입니다. 아래쪽의 잎은 크고 길며 가장자리가 깊게 갈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줄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잎이 점점 작고 가늘어집니다. 그래서 같은 왕고들빼기 한 포기에서도 아래쪽 잎과 위쪽 잎의 생김새가 상당히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린 왕고들빼기만 보다가 성숙한 모습을 보면 전혀 다른 식물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줄기를 꺾으면 나오는 하얀 즙

왕고들빼기의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우윳빛의 흰 유액이 나옵니다. 이는 왕고들빼기가 속한 상추속 식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우리가 먹는 상추 역시 줄기를 자르면 흰 즙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왕고들빼기와 상추는 전혀 다른 식물처럼 보이지만 분류학적으로는 같은 상추 속에 속하는 친척인 셈입니다.

왕고들빼기 꽃은 언제 필까?

왕고들빼기는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줄기 윗부분에 가지를 많이 만들고 그 끝에 작은 노란색 계열의 꽃을 피웁니다. 꽃 하나만 보면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키 큰 줄기 끝에서 여러 개의 작은 꽃이 한꺼번에 피기 때문에 들판에서는 제법 눈에 띕니다. 왕고들빼기는 국화과 식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실제로는 여러 작은 꽃이 모여 이루어진 머리모양꽃차례입니다. 민들레나 해바라기와 같은 국화과 식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꽃이 지면 솜털 같은 씨앗이 나타난다

왕고들빼기의 매력은 꽃이 지고 난 뒤에도 계속됩니다. 꽃이 지면 열매에 가느다란 갓털이 생깁니다. 바람이 불면 갓털이 낙하산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열매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작은 씨앗을 가능한 한 멀리 보내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왕고들빼기의 영리한 번식 전략입니다.

왕고들빼기와 고들빼기는 같은 식물일까?

많이 혼동하는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왕고들빼기는 단순히 크게 자란 고들빼기가 아닙니다. 이름에는 모두 ‘고들빼기’가 들어가지만 식물분류상 서로 구별됩니다. 왕고들빼기는 **상추속(Lactuca)**에 속합니다. 따라서 야생에서 이름만 보고 “큰 고들빼기니까 왕고들빼기겠지”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왕고들빼기를 구별할 때는 잎 하나만 보는 것보다 전체적인 키, 잎의 모양, 줄기, 흰 유액, 꽃과 열매의 형태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왕고들빼기는 먹을 수 있을까?

왕고들빼기의 어린잎과 연한 부분은 예부터 산나물처럼 이용되어 왔습니다. 특유의 쌉싸래한 맛이 있으며 어린잎을 나물 등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다만 야생 왕고들빼기를 직접 채취해 먹으려 한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식물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생에는 어린 시기에 생김새가 비슷한 식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도로변이나 농약·제초제가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는 곳, 오염 우려가 있는 장소에서 자란 식물 역시 식용으로 채취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식물의 정확한 종류를 확신할 수 없다면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왕고들빼기 효능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인터넷에서 왕고들빼기를 검색하면 ‘왕고들빼기 효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다양한 건강 효과가 소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식용하거나 이용해 왔다는 사실과 특정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는 것은 구별해서 봐야 합니다. 왕고들빼기를 건강식품이나 약처럼 과도하게 해석하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자라는 식용 가능한 야생식물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특히 특정 질환에 대한 치료 효과를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정보는 근거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왕고들빼기를 알아보는 5가지 특징

들에서 왕고들빼기를 발견했다면 다음 특징을 관찰해 보세요.

① 키
줄기가 곧게 서고 상당히 크게 자랍니다.

② 잎
아래쪽 잎은 크고 깊게 갈라지는 경우가 많고 위로 갈수록 작고 가늘어집니다.

③ 흰 유액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흰 유액이 나옵니다.

④ 노란 꽃
줄기 위쪽에서 가지가 갈라지고 작은 노란 꽃들이 여러 개 달립니다.

⑤ 갓털
꽃이 진 뒤에는 바람을 이용해 퍼지는 갓털 달린 열매가 만들어집니다.

이 다섯 가지를 기억하면 왕고들빼기를 관찰할 때 도움이 됩니다.

잡초인 줄 알았는데 상추의 친척이라니

왕고들빼기는 화려한 꽃을 자랑하는 식물은 아닙니다. 길가나 빈터에서 흔하게 자라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흥미로운 식물입니다. 봄과 초여름에는 땅 가까이에서 잎을 키우고, 성장하면서 높은 줄기를 뻗습니다. 여름과 가을에는 줄기 끝에 수많은 작은 꽃을 피우고 마지막에는 갓털 달린 열매를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고들빼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즐겨 먹는 상추와 같은 상추 속 식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산길이나 들판에서 키가 훌쩍 큰 왕고들빼기를 만난다면 그냥 잡초라고 지나치지 말고 잎과 꽃을 한번 살펴보세요. 평범해 보이던 풀 한 포기에서도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식물의 놀라운 전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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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 불광산 자락에는 척판암(擲板庵)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습니다. ‘척판’이라는 이름은 조금 낯설게 들립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척(擲)은 ‘던지다’, 판(板)은 ‘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척판암은 말 그대로 ‘판자를 던진 암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왜 판자를 던졌을까요? 그 이름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와 관련된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척판암

멀리 중국에서 닥쳐오는 재앙을 보다

전승에 따르면 원효대사가 기장 불광산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깊은 선정에 든 원효대사는 아주 먼 중국 당나라의 한 사찰에 큰 재앙이 닥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라 그곳을 **종남산 운제사(雲際寺)**라고도 하고 **태화사(太和寺)**라고도 전합니다. 그 절의 법당에는 수많은 승려가 모여 예불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전설에서는 그 수가 무려 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그 법당이 곧 무너질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대로 두면 법당 안에 있는 수많은 승려가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에서 중국까지는 너무나 먼 거리였습니다. 지금처럼 전화도 없고, 소식을 곧바로 전할 방법도 없던 시대였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려야 할까?’ 원효대사가 선택한 방법은 놀라웠습니다.

원효대사가 하늘로 던진 판자

원효대사는 판자, 혹은 소반 하나를 가져와 그 위에 글을 적었다고 전해집니다.

海東元曉 擲盤救衆
해동원효 척반구중

뜻을 풀어보면, “해동의 원효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한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원효대사는 글을 적은 판자를 중국을 향해 힘껏 던졌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판자가 하늘을 날아 바다를 건너 중국의 사찰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판자는 곧바로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법당 앞 허공에서 계속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예불을 드리던 승려들은 이상한 광경을 발견했습니다. “저게 무엇이지?” 한 사람, 두 사람…. 승려들은 신기한 물체를 보기 위해 법당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법당 안에 있던 수많은 승려가 모두 밖으로 나온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쾅! 조금 전까지 승려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던 법당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인명 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하늘을 날아온 판자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결국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척판구중’이라는 말이 생기다

이 이야기를 **척판구중(擲板救衆)**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擲板 — 판자를 던지고
救衆 — 대중을 구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판자를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에 있는 암자가 바로 오늘날 부산 기장의 척판암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원효가 소반을 던져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의 오래된 흔적이 문헌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고승들의 전기집인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원효 전에는 “或擲盤而救衆” 즉,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였다”**는 짧은 기록이 등장합니다. 다만 오늘날 전해지는 것처럼 중국의 특정 사찰과 천 명의 승려, 기장 척판암 등을 하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로 연결하는 내용 전체가 《송고승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한 원효’라는 오래된 기록에 여러 지역의 전승이 더해지면서 오늘날의 척판구중 설화가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판자를 던졌다는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

척판구중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원효대사의 신통력입니다. ‘정말 판자가 신라에서 중국까지 날아갔을까?’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 전설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더욱 흥미로운 의미가 보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사실 ‘판자를 얼마나 멀리 던졌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왜 던졌느냐입니다. 원효가 판자를 던진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척판구중’에서 어쩌면 ‘척판(擲板)’보다 더 중요한 말은 **‘구중(救衆)’**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닥칠 위험을 알고도 외면하지 않는 마음, 멀리 떨어진 사람의 고통까지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구하려는 마음.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작은 암자에 남아 있는 큰 이야기

오늘날 척판암은 부산 기장 불광산의 작은 산중 암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海東元曉 擲盤救衆. 해동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하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척판구중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누군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을 던질 수 있을까?” 원효에게는 그것이 한 장의 판자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신통력이 아닐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건네는 손길 하나, 위험을 알려주는 말 한마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작은 관심 하나.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던질 수 있는 **‘한 장의 판자’**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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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꽃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때 꽃망울을 터뜨리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애기동백입니다. 분홍빛 또는 흰빛 꽃을 가득 피운 모습을 보면 흔히 동백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잘 아는 동백나무와는 조금 다릅니다. 특히 꽃이 지는 순간을 보면 그 차이가 더욱 재미있습니다.

애기동백

애기동백은 어떤 식물일까?

애기동백의 학명은 **Camellia sasanqua Thunb.**입니다. 차나무과 동백나무속에 속하는 상록 활엽 관목 또는 작은 나무로, 일본이 원산지입니다. 사계절 푸른 잎을 유지하며 늦가을부터 겨울에 꽃을 피우는 것이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꽃은 흰색과 연분홍, 진분홍 등으로 다양합니다. 원종은 주로 흰색의 홑꽃을 피우지만 오랜 원예 육종을 통해 다양한 색과 모양의 품종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꽃 색깔만 가지고 애기동백과 동백을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애기동백꽃은 언제 필까?

애기동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개화시기입니다. 보통 늦가을부터 겨울에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품종과 지역의 기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인 동백나무보다 일찍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꽃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계절, 정원이나 공원에서 동백을 닮은 분홍색과 흰색 꽃이 활짝 피어 있다면 애기동백인지 한번 살펴볼 만합니다. 다만 개화시기는 기후와 품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꽃이 핀 시기만으로 애기동백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애기동백과 동백꽃의 차이는?

애기동백과 동백나무는 같은 동백나무속에 속해 꽃 모양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장 재미있는 방법은 꽃이 아니라 나무 아래를 보는 것입니다. 애기동백은 꽃이 질 때 꽃잎이 한 장씩 떨어져 흩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동백나무는 꽃잎이 서로 붙어 있는 상태로 꽃송이 전체가 떨어지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따라서 나무 아래에 꽃잎이 낙엽처럼 소복하게 흩어져 있다면 애기동백을 구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잎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애기동백의 잎은 짙은 녹색에 광택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백나무보다 잎이 작고 얇은 편입니다. 꽃도 애기동백은 비교적 활짝 펼쳐지는 느낌이 강하고 노란 수술이 눈에 잘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기동백과 동백 한눈에 비교하기

구분 애기동백 동백나무
학명 Camellia sasanqua Camellia japonica
주요 개화시기 늦가을~겨울 늦겨울~봄
잎 비교적 작고 잔 톱니가 뚜렷한 편 비교적 크고 두꺼운 편
꽃 모양 비교적 활짝 펼쳐지는 편 도톰하고 단정한 느낌
꽃이 질 때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편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지는 것이 특징
향기 일부 품종에서 향기가 있음 대체로 향기가 약함

단, 원예 품종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실제 식물을 정확하게 동정하려면 꽃뿐 아니라 잎, 꽃받침, 열매 등 여러 특징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애기동백'은 어린 동백나무일까?

이름 때문에 생기기 쉬운 오해가 있습니다. 애기동백은 어린 동백나무를 뜻하지 않습니다. 애기동백(Camellia sasanqua)과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는 같은 동백나무속에 속하지만 서로 구별되는 식물입니다. 따라서 작은 동백나무가 자라서 큰 동백나무가 되는 것처럼 애기동백이 자라서 동백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애기동백 키우는 방법

애기동백은 산성 토양을 좋아하며 물이 잘 빠지면서 적당한 수분이 유지되는 환경이 좋습니다.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잘 자라지만 겨울철 차갑고 건조한 바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곳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꽃봉오리가 발달하는 시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면 꽃이 진 뒤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늦게 가지치기를 하면 새롭게 형성되는 꽃눈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꽃보다 떨어진 꽃잎이 알려주는 애기동백

애기동백을 알고 나면 늦가을과 겨울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나무 위의 분홍빛 꽃에 눈길이 가지만 애기동백의 진짜 매력은 어쩌면 꽃이 진 뒤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송이가 통째로 툭 떨어지는 동백과 달리 애기동백은 꽃잎을 한 장, 한 장 내려놓습니다. 바람이 불면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고 나무 아래에는 꽃잎이 소복하게 쌓입니다. 동백이 겨울의 끝자락을 알리는 꽃이라면, 애기동백은 겨울이 오고 있음을 먼저 알려주는 꽃입니다. 다음에 늦가을 길을 걷다가 동백을 닮은 꽃을 발견한다면 꽃만 바라보지 말고 나무 아래도 한번 살펴보세요. 꽃잎이 하나둘 흩어져 있다면 우리가 무심코 동백꽃이라고 불렀던 그 꽃이 애기동백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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