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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탄생에 대한 고대인들의 문화와 사상은 그들 무리가 어떤 생활 방식을 취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세상은 창조되었는가, 순환하는가

먼저 초원에서 홀로 가축을 돌봐야만 하는 유목문화의 사람들은 하늘과 신에 대한 외경심이 크다. 결국 이들은 창조의 근원을 신에게서 구한다. 반면 농경문화의 사람들은 창조보단 순환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에게는 봄·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경문화의 사람들은 이 세계가 시작과 끝이 없이 생멸의 순환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에는 원주민의 농경문화와 이주한 지배층의 유목문화가 한 데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해 창조론과 순환론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 중 브라만교는 창조신이 등장하는 창조론을 채택하는 반면, 불교는 자연의 원리에 따른 순환론을 수용하게 된다.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윤회란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듯 정신의 본질은 상속되고, 육체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상속'이란 자기 동일성이라는 성질을 지닌다. 만약 정신의 본질이 '상속'되 않는다면 그것은 윤회라기보다 '새로운 변화', 혹은 '창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윤회론을 받아들이고, 윤회를 끊어 그 과정에서 벗어날 것을 추구하는 인도철학과 종교에서는 '윤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브라만교는 윤회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바뀌지 않고 영속한다고 주장한다. 브라만교에서는 아트만, 즉 '아(我)'라고 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안아트만, 즉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이는 유심은 동일하지만 그 속의 정보는 변화한다는 것, 다시 말해 유심은 고정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그때그때 업그레이드되는 정보의 총합이란 것이다. 업그레이드되는 정보를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하며, 이것의 누적이 곧 자의식이라고 본다.

 

윤회에 대한 브라만교와 불교의 입장 차이는 그 주체를 고정 불변하는 실제로 볼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층위의 변화 대상으로 볼 것이냐에 있다. 이 판단에 따라서 '아윤회(我輪廻)'와 '무아윤회(無我輪廻)'라는 상반된 주장이 충돌하게 된다.

 

절대자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신이 두 가지를 창조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두 가지란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이 중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것은 '변화하지 않는' 가치이다.

 

브라만교에서는 인간에게 있어 아트만을 제외한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아트만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불변의 본질이다. 다만 이것은 마치 태양이 구름에 가려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변화하는 가치에 감싸여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트만이 본질의 불변성을 잃어버리거나 변화하여 오염되는 것은 아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다 해도 그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아트만은 창조주 브라흐만과 같은 불변의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합일될 수 있다.  아트만(我)과 브라흐만(梵)의 결합, 즉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개별적 존재인 아트만과 창조주인 브라흐만이 하나가 되면 변화와 유한성에 속박된 아트만은 무한 불변의 자유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이고, 그 대상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반복의 수레바퀴, 즉 윤회이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종교 ·철학이 주장한 결론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창조주로서의 신'이라는 대전제를 필수로 한다. 결국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이 주장은 오류에 빠지게 되고, 논리 구조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의 존재는 유사 이래로 신앙과 믿음으로 용인될 뿐, 증명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이러한 관점에서 검증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배제한다. 그렇게 되면 아트만도, 브라흐만도, 범아일여의 구조도 성립될 수 없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안아트만, 즉 '변화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이 변화를 깨닫게 되면 인간은 바람처럼 완전한 자유를 증득하게 된다고 본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브라만교의 해탈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셈이다.

브라만교와 불교의 차이

 

 

 

출처 : 자현스님 <불교사 100장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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