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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약 1,000년 동안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아라비아해까지 이어지는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피어난다.

사진 구글

인더스문명 발생과 종언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은 드라비다족과 문다족으로 이들은 완만하고 비옥한 대지 위에서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농경 사회를 구축하고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여느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생활 방식 역시 환경적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히말리야 산맥은 인도 대륙의 동북쪽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인더스 문명은 동북쪽 문화권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문명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인도 대륙과 인접하지만 독자적인 문명과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던 중국 대륙의 문화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단, 인도 대륙은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지르는 동북쪽과 달리 서북쪽으로 개방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 문명과 교류하는 교차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 지역으로부터 그리스 문명이 유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 때문에 서북쪽으로부터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것이 사실이다. 내륙과 맞닿아 있는 서북쪽 경로로 이민족이 침입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라안족의 침입,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침입, 마지막으로는 이슬람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서북쪽 경로를 통해 아리안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이들은 코카서스 지방에서 시작된 유목 민족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이미 쇠퇴기에 들었던 인더스 문명은 종언을 맞게 된다.

 

베다의 집대성과 브라만교의 탄생

  서북쪽 인도 펀자브 지역에 정착한 아리안족은 이후 자신들의 성전인 '베다'를 집대성한다. 종교 지식과 제식 규정이 담겨 있는 이 성전은 암송되어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기원전 1500년경부터 체계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목 민족이었던 아리안족이 섬기던 주신은 '전쟁의 신'이자 '천둥(번개)의 신 '인드라'였다. 「리그베다」의 찬가 사분의 일 가량이 인드라에 대한 것임을 보면 당시 아리안족의 그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메르 산 정상에 머물며, 휘하에 32명의 신을 거느린 인드라를 '신들의 왕'으로 여겼다. 하지만 유목 사회의 문화가 농경 사회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이러한 사상은 큰 변화를 맞는다. 전쟁의 신 인드라를 주신으로 모시던 구조에서 세계를 창조한 브라흐만을 중심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로써 탄생하는 종교가 바로 브라만교이다.

 

  브라만교는 그 명칭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창조주 브라흐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이다. 이는 아리안족이 '신들의 왕'보다도 더 오랜 기원을 가지는 창조주의 개념을 이용해 인도 원주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브라만교는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문화와 철학적 사고를 발생시키게 된다.

 

  한편 아리안족은 씨족제 농경 사회를 형성하면서 견고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낸다. 이 제도에서는 크게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었는데, 그 네 가지는 제사장인 제1계급 브라만을 시작으로, 왕족인 제2계급 크사트리아, 평민 계급인 제3계급 바이샤, 노예 계급인 제4계급 수드라이다. 이 계급 구조는 현대까지도 이어지면 영향을 미치는 신분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우파니샤드의 성립과 브라만교의 한계

  기원전 800년경에는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에 철학적인 해석을 입힌 우파니샤드 시대가 열린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고 해서 베다의 끝이라는 의미의 '베단타'라고도 한다. 또한 그 내용이 철학과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심오하다는 의미의 '오의서'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우파니샤드'는 본래 '가까이 앉는다'는 의미로 스승과 제자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종교 지식을 전수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식을 소수의 사람만이 독점하는 비밀주의를 상징한다. 우파니샤드의 이러한 태도는 후일 '누구나 배울 수 있다'라고 주장한 붓다의 개방적인 태도와 대비된다.

 

  맹목적인 신앙과 제의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가 철학적 사유라는 옷을 입게 된 건 기존의 것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아리안족 문화의 구속력이 약했던 갠지스 강 유역의 인도 동부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대적인 요구에 비해 느리게 진행된 브라만교의 변화에 내포된 한계, 이것이 신흥 사상가와 철학자들을 각성시키게 된다.

 

 

출처 : 불교사 100장면 중에서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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