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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가 만든 '오온의 감옥'에 갇혀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는데 문제는 본인이 그 틀(또는 패턴)에 갇혀 있는 줄 일절 모른다는 것. 쉽게 표현하자면 누구나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 그 생각에 집착과 혐오 또는 좋다과 싫다로 반응하며 하루 종일 놀아난다.

<아미타삼존도> 벽화의 배경 부분, 조선시대 1476년, 전남 무위사. 감색(짙은 파란색)의 바탕에서 깨달음의 꽃들이 송송 피어오른다. 감색은 깨달음의 색깔로, 불화의 바탕색이 된다.

 

어렵게 표현하자면 이미 굳어진 '오염된 반응 체계'가 스스로 작동하고 여기에 하릴없이 끌려 다니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지는 공정인 '색色 - 수受 - 상相 - 행行 - 식識 [오온]'이라는 메커니즘은 계속 돌아간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면 [촉], 느낌[수]이 생기고 그것은 과거의 기억 또는 이미지와 즉시 연결되고, 연결된 이미지[상]에 다시 마음이 반응[행]하고, 이것이 인식[식]으로 굳어져 다시 경험[업식]으로 쌓인다.

 

색수상행식의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수없이 반복되면서 구축된 마음의 덩어리를 업식[ 업장, 무의식]이라고 한다. 이 업식을 바탕으로 '나'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 안에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의 패턴'대로 어쩔 수 없이 또 반응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몸의 느낌[수]' 보기

가장 큰 문제는 뇌가 '마음속에 떠오른 상(이미지)'과 '실제의 상'을 구분 못하고 반응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속의 상'으로서의 '남편'과 '실제의 법'으로서의 '남편'을 구분 못한다. 실제 남편은 집에서 쿨쿨 자고 있는데 지금 여기 사찰에서 참선 도중 떠오른 남편의 이미지[상]에 순간 화로써 반응한다.

 

그러면 여기서 '남편의 이미지[상]'를 떠올리게 한 '주범'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남편'이 아니다. [상] 이전에는 [수]가 있다. 불쾌한 느낌[수]이 먼저이고 그에 해당하는 불쾌한 이미지[상]가 순식간에 따라 붙는다. 부지불식간에 엄청 빠른 속도로 전개되어 버리는 이러한 과정을 보려면 순간 '정定 또는 지止'에 다름 말로 '사마타 또는 삼매'의 마음을 말한다.

 

특정 '느낌'이 오는 순간, 바로 그것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던 과거의 상황이나 대상이 무의식 속에서 귀신같이 선택되어 섬광의 속도로 연결된다. 광활한 무의식의 바다에서 그 깊은 심연의 기억 창고에서 어찌 그리도 '현재의 느낌'과 가장 유사한 '과거의 느낌'이 곧바로 낚여 '환영의 상'을 붙여버리는지 놀랄 일이다.

 

고통의 마음이 올라올 때는 엉뚱한 대상을 달달 볶을 게 아니라 현재의 그 마음을 직시하면 된다. 더 정확히는 현재의 마음 그 이전의 느낌을 직시하면 된다. 직시하는 방법은 "몸의 느낌[수]을 보라!"이다. 예를 들면 목과 어깨에 힘 들어감, 심장 부위에 갑갑하게 뭉치는 느낌, 도는 배가 경직되는 느낌 등을 보면 된다.

 

"느낌"에서 '대상(이미지)'으로 연결되기 전에 그래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차단하는 방법이다. 몸의 느낌만 보고 있으면 그 '느낌의 기승전결'이 보인다. 느낌이 오고 머물다가 사라진다. "조건 따라 왔다가 가는구나!"  그 '무상'함을 볼 때, 거기에는 어떤 주체나 객체도 없다는 '무아'를 저절로 알게 된다.

 

불교미술 보는 요령, '바탕자리' 보기

몸의 느김[수]을 자꾸 알아차리다 보면, 생각으로의 전개가 애초에 차단되어 그 많던 생각이 점점 없어진다. 그리고 생각에 가려 보이지 않던 '허허로운 허공'이 드러난다. 맑고 영롱한 허공이 '바탕자리'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드디어 물고기가 바다를 본다.'투명한 아는 마음'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상의 상태로 삼라만상이 현존하고 있고 단지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불교미술에서는 생각(번뇌망상)이 걷힌 자리인 '바탕자리'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궁극의 차크라가 열릴 때의 색은 깊은 파란색(감색)과 살짝 붉은빛이 도는 보라색이다. 깊은 파란색은 무궁한 천공이나 깊고 깊은 바닷속을 들여다볼 때와 같은 신비로운 쪽빛을 말한다.

 

이것을 '감색'이라고 한다. 이것이 더 깊고 오묘해지면 자색의 바탕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고려사경은 '감지금니(감색 바탕에 금색 선)' 또는 '자지은니(자색 바탕에 은색 선)'로 제작된다. 고려불화 또는 고려사경은 모두 감색 바탕 또는 자색 바탕을 기본으로 한다. 이 두 가지 색은 만물을 창조하는 바탕색으로 미술에서는 차용된다.

 

깨달음의 현현은 금색 또는 은색 등으로 표현되는데, 밝고 투명하게 빛나는 듯 빛나지 않는 '오묘한 흰빛'이다. 불교미술을 보는 요령 ! 정리하면, '바탕자리를 먼저 본다'이다. 불화의 바탕, 법당의 공간, 나의 허공자리를 본다. 그러면 무엇이 과연 그 바탕자리에서 현현하여 있는지 쉽게 볼 수 있다. 바탕자리[법신]에서 온갖 장엄[보신]이 나오고 이것이 형체를 이루어 부처 또는 보살[응신]로 화化하는 유기적 과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월간통도. 2022. 0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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