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청정혜보살장에서는 원각은 차별이 없지만 닦아 증득하는 데는 차별지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청정혜보살은 청정한 지혜를 지닌 보살이며, 청정은 밝고 깨끗함이다. 세상에서의 깨끗함은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물들고 더럽혀지지만, 이 보살이 누리고 있는 지혜의 맑고 깨끗함은 어느 것에 의해서도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깨끗함이다.

청정혜보살이 부처님께 물은 것은, 중생과 보살과 부처가 증득한 경지의 차이는 무엇이며 서로 같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원각은 차별이 없지만 닦아 증득하는 데는 차별지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부사의 한 일이라는 것은, 생각이나 말로 미칠 수 없기 때문이며, 윤회 근본 종성의 차별법이 있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깨달음에는 차별과 뒤섞임과 물듦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부사의하다고 한다. 『승만경」에 "물들지 않되 물드는 것과 물들되 물들지 않는 것을 모두 요지 하기 어렵다."라고 부사의를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보거나 듣지 못했다는 것은, 청정하고 물듦이 서로 차별이 있다거나 청정하고 물듦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은 익히 보고 들었지만, 여기서는 깨달은 성품에는 청정하고 물듦이 원융하게 통했다는 것을 일찍이 보고 듣지 못했다는 의미다. 곧 깨달음 마음은 일미로 돼, 인과가 층지고 차별되는 뜻을 묻고 있다.


중생의 깨치지 못한 지위와 보살의 닦아 가는 지위와 여래의 이미 깨친 지위가, 모두 본래 원만하게 깨쳐 있는 깨달음의 마음 자체에는 차별이 없지만 수행의 인과에는 깨치지 못함과 닦아감과 이미 깨침의 차별이 있어, 평등함과 차별됨의 두 가지 뜻이 모순되므로 이에 대해 청정혜보살이 의심을 두어 물음을 일으킨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여래는 평등함과 차별됨이 끝내 둘이 없는 수행의 인과를 보여 주고 있다.

차별됨을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거나 얻을 바가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얻었다는 마음과 나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증상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퇴굴심 곧 물러서려는 마음과 증상만 곧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마음을 모두 뛰어넘은 곳에 깨달음의 자기 활동으로 바른 수행이 있으며, 단박 깨침과 삶 속에 부단히 향상의 실천이 둘 일 수 없을 때, 해탈의 한 길에서 명함 곧 한치의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인연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 차별법 가운데 실로 얻을 것이 없으므로 경문에 '실상 가운데는 실로 보살도 없고 중생고 없다.'라고 한다. 이는 원각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여러 차별한 성품을 이루는 것으로서, 여러 성품이 일어날 때에 온전한 깨달음의 성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허망하게 공부를 한다는 것은, 『화엄경』에 "마치 꿈속에 약으로써 병을 치료해서 차도가 있으나, 꿈에서 깬 후엔 곧 약과 병이 모두 없는 것과 같나니, 고로 허망한 공부라, "라고 이른다.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지혜가 생기며, 인연이 이미 갖추어짐에 심성이 밝아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망령된 생각이 꿈에서 깨어날 때와 같아지는 일이다. 참된 깨달음에 곧 딱 들어맞아 일찍이 생각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마치 이는 선가에서 '한 소식'을 한 것 같은 경계라 하겠다.

이 삶이 공연히 번거롭다는 것은, 밖으로 실다운 경계가 없는데 어찌 미워하고 사랑할 것이며, 일어난 번거로움 당체가 스스로 번거로워할 따름이다. 중생의 깨치지 못한 모습과 보살의 수행과 여래의 깨달음이 끝내 고요해서, 고요함도 없고 고요하게 하는 이도 없음이요, 그러나 허깨비 같은 번뇌가 일어나므로 번뇌를 돌려 보리를 드러내는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세워지는 일이다. 그러나 본래 낱낱 중생이 원각을 구현하고 있으며 여래장의 공덕을 온통 쓰고 있지만, 그러나 실상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번뇌와 망상으로 왜곡되게 씀으로, 비록 번뇌 속에 있지만 진여의 이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계가 청정해졌다는 것은, 『화엄경」에 말하는 이사무애법계 곧 이법계와 사법계가 원융무애한 의미로서 이법계는 진여 속에서 모든 번거로운 번뇌를 끊어 육진 육경인 대상경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 하며, 사법계는 곧 온갖 차별되는 생각과 차별되는 경계와 대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 한다. 이사 곧 비유하면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일었다가가 파도가 잔잔해지면 온 바다가 고요해지듯이, 바다 자체를 이 곧 당체라 한다면 파도는 사 곧 현상이다. 다시 고요해진 바다는 이사가 원융한 모습이겠다.

비록 장애를 끊어 청정함을 이루었으나, 장애를 끊어 버리는 지혜의 자취가 있으면 그것 또한 법에 대한 애착이 되며, 법에 대한 애착을 넘지 못하면 원만한 개달음에 자제하지 못하므로, 법에 대한 애착을 여의어야 비로소 깨달음을 생활 속에 그대로 쓰는 이가 될 것이다.

보살은 '비추되 고요함'으로 전환하고 '고요하되 비춰짐'으로 전환되어, 비추되 비춤 없는 지혜 자체인 경계가 되면 그것이 깨달음에 머물지 않음이 된다. 또한 비추는 자와 비치는 것에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므로 모두 공적 한 줄 사무쳐 보면 비추는 자도 없고 비치는 것도 없어지게 되어, 경문에 "늘 깨달음에 머물지 않으면 비칠 것과 비추는 이가 동시에 적멸하게 된다."라고 이른다.

장애의 마음은 능히 비춤과 비추는 바가 있고 깨달아 앎과 깨달아 아는 바가 있는 마음이며, 장애 속에서 능히 비춤과 비추는 바가 본래 공한 줄 알면, 장애가 본래 없으므로 장애를 끊어 없애는 이도 없다는 것이다. 『수능경』에, 능히 비침과 비치는 모습이 있으며 깨달음을 장애 하여 깨달음의 원만한 밝음이 사라지고, 비침과 비치는 모습이 지양될 때 깨달음이 원만해진다고 한다.

게송에,
깨달음의 바다 그 성품 맑고 둥글어
둥글고 맑은 깨침 원래 미묘하네
원래 미묘한 밝음이 능히 비치어
비추는 바 모습을 일으켜 내고
비치는 모습이 세워짐으로
비춤 없이 비추는 성품 사라지노라

언어와 형상을 세운 것은 뜻을 얻는 데 있는 것이요, 언어와 형상이 없으며 전도되고 미혹됨이라, 언어와 형상에 집착해서도 실상에 미혹되는 것이요, 그러하기에 달을 가리킨 손가락으로써 부처님 교법에 비유했다. 달을 보는 데 있어 모름지기 손가락 끝을 빌린 것이요, 마음을 깨치는 데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빌린 것이다. 손가락으로 인해 달을 보는 것이니 달을 보고는 손가락을 잊음이요, 교법으로 인해 마음을 설명한 것이니 마음을 깨닫고는 교법을 잊음이요, 손가락이 그대로 있다면 본래의 달을 잃게 되며 교법에 집착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되며 교법에 집착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이요, 이는 실상을 얻고는 가리킨 것을 잊게 하는 도리로서 필경에는 달이 아니겠다. 『불정경』에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써 달을 가리키거든, 보는 이는 마땅히 달을 보아야 할 것이요, 손가락을 보아선 아니 될 것이니, 만약 손가락만 본다면 본래의 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또한 손가락까지도 잃는다."라고 한다.

정보와 의보 곧 중생과 중생이 의지해 사는 세계는 서로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닫혀 있는 것이 아니며, 중생과 세계는 모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 일어나 중생과 세계가 모두 있되 공한 중도의 실상인 것이다. 『열반경』에 "나는 부처의 눈으로 두루 삼계를 살피니, 유정과 무정, 온갖 사람과 경계가 모두 구경의 진리다."라고 이른다.

고락 곧 괴로움과 즐거움의 대비는, 선과 악, 괴로움과 즐거움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된 법이므로 실체가 없으며, 선업의 결과인 천궁과 악업의 결과인 지옥이 허공 꽃과 같은 줄 알면 선악에 막힘없이 참된 즐거움을 수용할 수 있어,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이리라. 『불정경』에 "육근 육진의 근원이 같고 속박과 벗어남이 둘이 없으며 인식하는 성품이 허망해서 마치 허공 꽃과 같다."라고 이른다. 이는 '온갖 번뇌가 끝내 해탈이며, 온갖 장애가 구경각'이라는 의미다.

법계해혜 곧 법계가 깊고 넓으므로 바다와 같고, 지혜는 법계와 더불어 무변 곧 끝없이 펼쳐졌기에, 종합해서 법계해혜라 한다. 이는 바다처럼 깊은 지혜로써 온갖 법과 모든 존재를 사무쳐 보아 그 모든 법에 실로 얻을 것 없음을 통달하면, 이것이 바로 여래가 개달음의 성품에 수순 한 도리이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은 연기된 마음이라 공한 것이니, 미세한 생각을 끊고 구경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살펴 본래 일어나는 첫 모습이 없는 줄 깨달아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의는 것이 구경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여래가 원각의 성품에 수순 한다는 것은, 망령된 마음을 단박에 증득하고 상을 여의어 근기에 맞춰 수순 하는 것으로서, 이는 차별과 평등이 융합한 것이니 곧 차별 속의 평등이요, 평등 속의 차별인 것이다.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망령된 것은 바깥 경계를 반연하고 취착 하는 것으로서, 깨달은 성품에 거스르기에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며, 또한 경계를 따라 온갖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러한 경계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망령된 생각을 쉬어 없애려 들지 말라는 것은, 이는 마치 소리를 내어 진동을 그치게 하려는 것과 같다. 또한 망상의 경계 속에 있으면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본래 스스로 지각하는데 거의에 안다고 하는 마음을 더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자연히 거울에 사물이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여래의 길을 가는 이는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과 보살님께 공덕의 뿌리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자리에 앉아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일을 행하는 자로서, 이런 사람을 일체종지 곧 일체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성취한 이라 한다.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각경 ; 변음보살장  (0) 2023.11.15
원각경 ; 위덕자재보살장  (0) 2023.11.15
원각경 ; 미륵보살장  (0) 2023.11.14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0) 2023.11.13
원각경 ; 보안보살장  (1) 2023.11.13
반응형

미륵보살은 미래 세상에 부처가 되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불이다. 미륵보살장은 금강장보살장에 이어 윤회의 근본과 중생교화의 방편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서술한 내용이다.


금강장보살은 윤회에 머문 마음으로 여래의 원각 경계를 알 수 없음을 밝히고, 미륵보살은 중생에게 결정된 믿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 네 가지 물음을 일으킨다. 윤회의 근본이 무엇이며, 윤회에 몇 가지 성질이 있으며, 수행문에 몇 가지 차별이 있으며,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을 묻고 있다. 앞의 두 가지 물음, 윤회의 근본과 윤회의 성질이 곧 끊어야 할 윤회에 관한 물음이라면, 뒤의 두 가지 물음인 수행문과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은 곧 윤회를 끊는 지혜와 행원을 묻고 있다.


경에 "지혜의 눈 혜안은 실상 그대로의 실상이니, 미륵보살의 물음은 모두 실상 그대로의 지혜로 실상을 비추어 모든 중생이 환상과 허위에서 벗어나 불지견 곧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에 돌아가게 한다."라고 이른다. 삿되고 바른 것을 분별한다는 것은, 파사현정 곧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힌 것을 타파하고 옳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삿된 도와 삿된 견해, 삿된 집착을 깨뜨리는 것이 그대로 중도실상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파사 곧 삿된 것을 타파하는 것을 벗어나서 따로 현정 곧 옳은 진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옳은 진리가 있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다른 이의 삿된 견해를 깨뜨리는 동시에 자기가 도리어 삿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서, 결국에는 진정한 파사현정이 될 수 없다.


결정신 곧 결정된 믿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다른 것을 믿지 아니하는 마음인데,「수능엄경」에 "미묘한 믿음이 상주해서 일체 망상이 남김없이 다 소멸했다."라고 이른다. 질문은 청정한 지혜와 청정한 마음으로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무상지견 불지견 곧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를 성취할 수 있기를 간청하는 내용이다. 무생인이라는 것은, 참다운 성품은 생 하는 일이 없어 본래 청정하거늘 중생이 깨닫지 못해 망령된 마음으로 생을 보니 생한 즉 반드시 멸함이라고, 고로 윤회라 한다. 여기서 실상을 깨달아 마음을 요달해서 참되고 거짓됨이 생하는 일이 없으니, 마음이 이미 생하지 않아 윤회가 영원히 끊어져 이를 인가했기에 무생인이라 한다. 이는 법이 이미 무생함에 곧 멸이 없는 도리이다.


「화엄경」에 "소법도 생멸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함이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생이 없으면 곧 멸도 없기 때문이라."라고 이르고 또한 "일체법이 생이 없으며 일체법이 멸이 없으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제불이 항상 앞에 나툰다."라고 이른다. 이에 연기는 성품이 없기에 불생이요, 자성이 없이 연기하기에 불멸이다.


망념이 고요한 것은 마치 허공과 같거니, 무엇이 생하며 무엇이 멸하리오. 마음은 부생임을 보게 되며 마음은 무멸임을 보아 적연히 경계에 기거하니 무슨 생멸이 있다 하겠는가.


윤회를 끊어야 한다고 했는데, 윤회는 "무시로부터 애착이 근본이요, 이에 욕망이 보조 인이 되어 애착이 생하고 생명이 인이 되어 욕망이 있게 됨이요, 이에 욕진 곧 색성향미촉의 다섯 대상이 결속되어 생사가 상속되며 내지 여러 상황을 일으켜 선악 등 업을 지어 괴로움과 즐거움 등 과보를 받는다."라고 이른다. 『열반경』에 "애착으로 인해 근심이 생기고, 근심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기나니, 만약 탐욕과 애착을 여의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겠는가."라고 이르고,『불명경』에 "애욕이 있은즉 생하고 애욕이 다한즉 멸한다."라고 이른다.


탐욕은 곧 오욕으로 '색성향미촉'으로 말미암아 애착심을 일으켜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곧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미혹이 나와 남을 가르고 몸을 집착하는 애착으로 드러나고, 애착으로 인해 탐욕에 갇힌 왜곡된 생활 곧 업이 반복되며, 탐욕에 갇힌 왜곡된 생활이 삶의 질곡과 뒤틀림 곧 괴로움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혹과 생사에 갇힌 업과 괴로움이 서로서로 의지해 중생의 윤회를 반복하게 하지만, 윤회가 본래 윤회가 아니므로 중생의 실상은 늘 청정하다 하리라.


『조론』에 "중생이 오래도록 유전하는 까닭은 모두 욕망에 탐착한 까닭이요, 만약 탐욕을 마음에서 그친즉 다시는 생사가 없을진대, 잠재한 신령한 정신이 그윽이 침묵해서 허공으로 더불어 부처님의 덕과 화합하게 되나니, 이를 열반이라 하느니라."라고 이른다.


경계가 애착을 등진다는 것은, 경계를 애착함으로 말미암아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고, 곧 뇌고로운 번뇌로 미워하고 싫어함을 일으키나니, 성냄으로 인해 살해, 괴로움, 구타, 능욕인 갖가지 악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갖가지 업을 지어 지옥, 아귀에 태어난다는 것은 나쁜 업을 지어 삼악도의 과보를 받는 것이며, 애염업도 곧 업을 싫어하고 법문을 좋아한다는 것은, 악도를 두려워하고 악이 되는 인을 짓지 않으며 악을 여의는 법문에 깊이 애락을 일으키는 것이다.

탐욕과 갈애가 근본이 되기 때문에 윤회라 하고, 마음의 본체를 요달하지 못했기에 성인의 도가 아니라 한다. 갈애는 곧 애욕에 목마르듯 간절함을 이른다.


삼악도의 고통스러운 과보가 모두 음욕 때문에 존재한다 하니, 경계가 제 기분에 들면 '사랑이 더욱 심해지고', 경계가 제 기분을 거스르면 '미워하고 질투하여' 성내거나 때리며 더욱 심한 행위를 한다. 역경계를 만나면 많은 악행을 짓게 되므로 다시 삼악도의 극심한 고통을 초래하게 되어, 이는 모두 쏠리는 사랑 때문이다.


보살이 짐짓 탐욕을 부리는 것처럼 생사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보살이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위해 동사섭, 곧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주면서 교화하는 일이다. 『유마경』에 "중생의 병이 곧 보살의 병이며, 또한 중생의 병은 반연으로부터 일어나며, 보살은 대비로부터 일으킨다."라고 하였으며, 천태대사의 『마하지관』에서는 "보살은 범부나 이승이 나고 죽음에 빠지거나 끊는 것과 같지 않으며, 열반에 대해서 탐착 하지 않는다. 나고 죽는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있는 것과 같고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으며 새가 허공을 날되 허공에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이 동사섭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라고 하였다.

미움과 애착을 제거하며 부지런히 여래의 원각 경계를 구하는 것은, 마치 광석에서 나온 쇠로 능히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하리라.


두 가지 장애 곧 이장과 사장인데, 유식의 궁극 목표가 바로 이 두 장애를 지혜로 전환하여 보리와 해탈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장은 이치 도리 곧 근원적 도리나 이치에 어두워 지혜를 장애 하는 것으로서 법집으로 인해 장애 된 곳이며 이에 식에 전환해서 지혜를 증득하면 바로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사장은 온갖 현상에서 벌어지는 일 곧 번뇌의 장애로서, 이는 아집으로 인해 장애가 되어 생사윤회를 하는데, 이 또한 전식득지 곧 식을 전환해서 지혜를 증득하면 바로 해탈이 된다.
결국 이장은 지혜를 장애 하는 소지장이 소멸됨으로 해서 보리를 증득하고, 사장은 윤회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 번뇌장이 소멸됨으로 해서 해탈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장의 이는 소지 곧 소지리라는 이치에 대한 장애로서, 근본무명에 대해 사장에 대한 장애로서, 근본무명에 대해 사장 각각에 대한 번뇌가 작용하는데, 이는 청정한 마음을 물들며 계속해서 상생하여 모든 업을 일으키며 생사를 연속하게 한다.


또한 이장 곧 근본무명이 법계 진심을 덮어서 불각망념이 일어나 제법성상을 통달하지 못하고 정지견을 장애 하여 무명을 물들게 되며, 번뇌 곧 사장은 진여 근본의 지혜를 장애 하여 생사를 거듭하게 된다.


사장을 없앤다는 것은 생사의 고통을 알고 반연을 쉬는 것이요, 장애는 이장과 사장이 있고 집착에는 아집과 법집이며 번뇌는 현행 곧 밖으로 드러나고 습기 곧 안으로 갈무리되는 것으로 구분되며, 생사는 분단생사 곧 중생의 생사와 변역생사 곧 보살의 생사와 구분이 된다.


보살의 경계에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이승 곧 성문 연각들이 아직 보살의 경계에 들지 못하는 것으로서,『법화경』에 "비록 장자의 집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문 밖에 머물러 있어, 초암에서 숙식하고 감히 집에서 살지 못하는 격"이겠다.
야부 선사는 게송에 이른다.

올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말하게 되면
삿된 법이 모두 바른 법에 돌아가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게 되면
바른 법이 모두 다 삿되어지리니
강북 탱자 강남에서는 귤이 되지만
봄이 오면 한 가지 꽃 모두 피우네.

닦아 가는 과정에서는 온갖 차별이 있지만 원각에 이르러서는 하나 곧 일심이 되겠다.

미륵보살이 석존 입멸 56억 7천만 년을 지나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데, 여기서 56억 7천만 년은 곧 5식, 6식, 7식과 나아가 8식이 전환되어 지혜를 얻으면 곧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촉목도존 곧 눈에 와닿는 모두가 도 아닌 것이 없다 했으니, 원각의 품속에서는 일상 모두가 청정한 법전이며 미묘한 장엄의 경계이다.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각경 ; 위덕자재보살장  (0) 2023.11.15
원각경 ; 청정혜보살장  (0) 2023.11.14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0) 2023.11.13
원각경 ; 보안보살장  (1) 2023.11.13
원각경 ; 보현보살장  (0) 2023.11.10
반응형

금강장보살은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 내재하는 견고한 성품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금강은 금강석처럼 굳세고 빛나는 성품을 뜻하고 장은 창고나 곳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처와 중생의 마음에 똑같이 금강과 같은 원각의 성품이 감추어져 있음을 뜻한다.


금강장보살장에서는 본래 성불과 무명 곧 미혹의 본질을 묻고, 묻는 뜻에 답해 의심을 끊어 주는 내용이다. 문수장에서는 "무명을 영원히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이룬다." 했고, 보현장에서는 "무시의 허깨비 같은 무명이 원각심으로 건립되었다"라고 하여 무명의 허물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 끊어 없애라고 권했으며 보안장에서는 "중생이 본래 성불이며, 생사와 열반이 마치 어젯밤 꿈과 같은 줄 비로소 안다." 하여, 닦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전후가 상반되어 어긋나기에 의심을 하게 되는데, 이에 금강장보살이 보안보살을 이어 세 가지 의문을 일으켜 부처님께 의심을 결정해 주실 것을 청한다.


첫째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면 무슨 까닭으로 무명이 있게 되었는가, 둘째는 무명이 있는 것이라면 어찌 본래부터 부처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셋째는 본래 부처였던 중생이 무명을 일으켰다면 부처도 다시 번뇌를 일으켜 무명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질문을 한다.


함허 스님은 게송에서 "중생과 부처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의심하니, 만일 크게 깨친 이가 아니면 누가 능히 가려낼 것인가, 닭이 한번 홰를 치자 바야흐로 꿈을 깨고, 뜬구름이 흩어지자 달이 뚜렷이 나타나도다."라고 송 했다.
부처님께서 질문에 답해 주는 이 마음은 무차대비, 곧 모든 이를 차별하지 않고 절대 평등의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위해 베푸는 마음으로서 무연자비와 같은 의미다. 부처님은 그러한 대비심으로 의심을 풀어 주신다.


금강장보살의 세 가지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우선 망령된 견해로 원각의 경지를 따지고 분별하려는 어리석음을 경책하시고 윤회에 대하여 답하신다. 일체세계 시종생멸 전후유뮤 취산기지염념상속, 곧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생각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공간적으로는 세계가 있다가 파멸되고 다시 모였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는 틀 속에서, 망념에 의거해 미혹한 업을 계속 익혀 과보에 응하는 것이다. 마치 바퀴 돌듯 끊어짐이 없고,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여 몸의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기뻐하며, 취하고 버리는 모습이 윤회의 모습이라고 답하신다.


눈을 가림과 허공 꽃이 서로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리움이 허공 꽃과 더불어 연관되어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허공 꽃이 실로 생긴 것이 아니기에 서로 연관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다. 비록 마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했을지라도 생사는 또한 적적 함이요, 다만 미혹을 반연 한 까닭에 허망하게 생사와 같을 뿐으로, 중생이 본래 생긴 것이 아니요 허공 꽃도 필영에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니, 눈병으로 생긴 가림으로 생겼다 하지 말고, 미혹으로 생사가 생긴 것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허공에 본래 꽃이 없는 줄 안다면 어찌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는 것을 의심할 것이며, 또한 만약 허공 꽃이 눈병 때문에 보이는 줄 안다면 어찌 성불한 뒤에 번뇌가 다시 일어난다 의심할 수 있겠는가. 여래께서 선교방편을 개시하여 허공 꽃 비유로 세 가지 의문을 단박에 해결한 것이다.


또한 중생이 이미 허공 꽃이 일어난 것과 같으니 무엇을 들어 다시 무명을 물을 것이며, 무명과 생사가 이미 공한데 어찌 본래 성불을 질책할 수 있겠는가. 허공 꽃은 마침내 다시 일어나지 않으며, 원각에서 다시 미혹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이 어리석을 때 나고 죽음을 보는 것이 허공꽃이 일어남과 같고, 중생이 깨달아 열반을 얻을 때에는 나고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 허공 꽃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문에 "생사와 열반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불정경」에 "허공이 대각 중에서 발생했으며, 고요히 비추어 허공을 포함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공이 대각 중에 있을지라도 허공은 항상 고요하거든, 하물며 대각이 허공의 성품이 된다 해도 늘거나 줄어듦이 없다는 것이다. 금광은, 부처님이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는 물음에 답한 비유다. 보안보살장에서, 중생 본래성불의 뜻으로서, 허공 꽃은 시종 본래 없는 것이요, 광석은 곧 녹임으로 인해 잡된 성분이 사라짐이라, 이는 다생토록 장애 된 습기를 제거함으로 해서 참된 성품이 드러나 구경에는 청정하다는 것이다. 미혹과 깨달음 그리고 인과의 상이 없다고 하면 잘된 견해로서, 중생의 깨달음 성품이 본래 부정해서 참된 성품이 본성을 잃었다고 하면 잘못된 견해다.


경문의 비유를 요약하면, 어떤 사람이 광석을 단련해서 금을 얻는 것으로서, 금광이 없었으면 단련해도 금을 얻을 수 없으니, 만약 광석을 녹임으로써 금을 얻었다고 한다면 비록 화로나 풀무를 이용해서 융해하고 녹일지라도 금의 성품은 모름지기 본래 있는 것이요, 금은 녹여서 짐짓 있게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금강삼매경」에 "옛적에 미혹도 짐짓 없게 한 것이 아니요, 지금의 개달음도 짐짓 개달음에 들게 한 것 아니다."라고 이른다. 그래서 금은 법신에 비유하고, 단련해서 출현한 것은 보신에 비유하며, 고리나 팔찌 등 백천 가지를 만든 것은 화신에 비유가 되겠다. 광석 중에 비록 금이 있지만, 녹이지 않으면 금은 나오지 않듯이, 비록 불성이 있으나 수행하지 않음 성불할 수 없다는 도리다.

정리하면, 비록 광석을 녹여 순금을 이루었으나 순금은 본래 순금 그대로 여여하기에 녹여서 순금을 만들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듯이, 여래의 개달음은 허깨비가 본래 허깨비 아님을 실현했을 뿐 허개비를 끊고 따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깨달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뒤에 바야흐로 자취를 털어 내지만, 그것을 끊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허깨비를 여윌지언정 깨닫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곧 번뇌와 생사를 굴려 보리와 열반에 이른 것으로서, 근본은 진실됨에 곧장 나아갔지만 이는 망령된 것으로 인해 얻었다 하리라. 그래서 「화엄경」에 "법에 만약 보는 것이 있으면, 이는 곧 보았다 할 수 없음이라, 만약 본 것이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이 바로 부처를 본 것이다."라고 이른다.


몸과 마음과 언어가 모두 귾어졌다는 것은, 몸과 마음 모두가 공적한 무위의 열반 경계에 돌아간 회신멸지의 경지며, 그를 친히 증득해서 얻은 것은 열반이다. 그러한 경지에서 사유가 있는 마음 곧 윤회의 마음으로 여래의 경계를 헤아린다면, 이는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는 것이며, 「법화경」에서는 "대지에 모든 사리불과 같은 이가 함께 헤아릴지라도 능히 알 수 없으며, 모든 실발의 보살 곧 보리심을 처음 일으킨 보살과 불퇴등 보살도 헤아릴 수 없다."라고 이른다.


모든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이 먼저 끝없이 오랜 윤회의 근본을 끊어야 한다는 것은, 앞에서 문수보살의 물음에 "먼저 무명을 끊으라."는 것이 답한 경문이다. 사유심이 있게 되면 깨달음을 증득한 것이 아닌데, 이 마음은 일찍이 허공 꽃과 같아서 스스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위로 향해 다시 증득을 구하고자 한다면 허공 꽃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다 하리니, 곧 들뜬 마음으로 교묘한 견해를 내어서는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으리라.


앞에서는 선재 곧 훌륭하다 칭찬하고, 여기서는 옳지 않다고 질책한 것은, 질문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말세에 오래도록 미혹할 것이므로 칭찬한 것이요, 비로소 질문을 일으킨 공덕으로 부처님의 질책에 있어 이치가 드러난 것이다. 듣고 아는 것, 따져서 아는 것은 모두 분별망상이며 허개비로서, 이런 소견이나 방법으로 수행을 삼는 지해종사, 곧 알음알이로 따지고 분별하여 지식으로 가르치는 이를 경계해야겠다. 

 

그래서 선원 입구에 '입차문내 막존지해', 곧 이 문에 들어오는 이는 지해 곧 알음알이로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는 경각심을 일깨운 편액이 있다. 더불어 일찍이 선사들은 막망상 곧 허개비 같은 망상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경책 한다. 환상이 없는 활안 곧 뛰어난 안목으로 닿는 곳마다 참됨을 구현하는 대자유의 삶을 대혜 선사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이른다.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각경 ; 청정혜보살장  (0) 2023.11.14
원각경 ; 미륵보살장  (0) 2023.11.14
원각경 ; 보안보살장  (1) 2023.11.13
원각경 ; 보현보살장  (0) 2023.11.10
원각경 ; 서문과 문수장  (0) 2023.11.10
반응형

보안보살장에서는 수행방편과 어떻게 사유하며 어떻게 편안히 머물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대승을 공부하는 이들은 반드시 관행을 닦아야 하는데, 이해함에 있어서 차별이 있기에 곧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를 위한 가르침이 다르다. 법화경의 "듣기는 널리 들으나 깨닫는 것은 오직 사리불뿐이다."라는 말처럼, 법문을 듣지도 이해함에는 깊고 얕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보안보살의 관행이 부처님과 같음을 열어 보이고, 이어서 금강보살은 미혹과 깨달음의 근본을 묻고 해석하며, 다믕에 미륵보살은 윤회의 근본을 깊이 궁구하며, 계속해서 닦아 증득하는 지위를 간략히 나누는 경문으로 원각경은 전개된다. 관이 이루어져 애욕이 끊어진 경지에 이르는 데는 이른바 닦아 증득함이 원만해야 하는데,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을 닦아 과에 계합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자성이 없는 것을 개시해서 이공, 곧 아공 · 법공의 이치를 드러내 육근 · 육진이 청정하여, 경계를 보아 마음 쓰는 것이 단박에 부처님과 대등해진다는 것이다.


삼혜, 곧 문혜 · 사혜 · 수혜로 설명하는데 있어, 사유는 진망을 관찰하는 것으로써 사혜가 되고, 주지는 미묘한 경계를 깨우쳐 그 속에 안주해서 수지해 잃지 않는 것으로써 수혜가 되며, 다음에 부처님 설법을 듣는 것은 문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범부로부터 성인에 나아가는 것이, 반드시 삼혜를 닦아 이루어지기에 보안보살이 대중을 위해 법을 청한다.

삼매를 듣는다는 것은, 앞의 문수보살에서 환, 곧 허깨비를 안즉 허깨비를 여의는 법문에 이어 미혹하고 번민해서 능히 원각에 깨달아 들지 못할까 걱정되어 깨달음을 여는 방편을 청한 것이다.

이어서 가설방편, 곧 방편을 시설한 것은, 진정한 이치에서 말하면 깨달음의 본성은 원래 원만하고 허깨비의 허망함은 몬래 공해서 없지만, 그 도리를 알지 못하기에 부득이 있다고 말한 것이니, 알고 나면 곧 여의어서 허깨비를 여윈즉 깨달음이요, 실로 닦을 것이 없음이다.

그러나 중생의 번뇌 습기가 무거워 가히 단박에 제거되 어려우며, 비록 본래 공한 줄을 알았으나 아직 묶이어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보안보살이 부처님께 닦음 없는 중에 굳이 수습하는 방편을 설해 주실 것을 청해 방편을 가설한다 한 것이다. 대품경에 수행함에 있어 한결같이 무소득으로써 방편을 삼았지만, 원각경에서는 허깨비를 여의는 것으로써 방편을 삼았다고 설명한다.

정념을 무념이라 해석하는데, 지론에서는 "유념은 마업이요, 무념은 법인 곧 진리"라 했으며, 논에는 "일체중생을 각이 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상속해서 일찍이 망념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문에서의 정념은, 이환 곧 허깨비를 반복해서 여윔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이른다.

사마타는 번역하면 지로서, 지는 곧 정의 뜻이다. 이는 '지극히 고요한 것을 행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어지러운 마음에 계를 지니면 능히 관문에 들지 못하기에, 먼저 정에 들고 뒤에 계를 행한다고 한다. 경문에서는 계로 인해 정에 든다 했는데, 여기서는 먼저 정에 들고 뒤에 계를 행한다 한 것은, 수행에는 선후가 없다 하겠다. 계를 굳게 지닌다는 것은, 한결같이 반연을 끊어 딱히 고의로 범하지 않는 것을 굳게 지니는 것이다. 육근, 곧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를 막고 금하며 몸과 입을 단속한다 해서 금계라고 한다.

대중과 함께 편안히 머물다 한 것은, 곧 함께 보고 행하는 사람으로서 행업이 이미 같게 되어 서로가 탁마해서 한 마음으로 헤아려 도의 인연을 계속해서 맺게 되기에 편안히 머문다고 한다.

연좌정실, 곧 조용한 방에 편안히 앉는다는 것은, 편안함은 고요하고 안온한 것으로서, 앉는 것은 몸을 섭수하는 일이며 몸이 머문 즉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한즉 경계에 흔들림이 없어, 몸과 마음이 고요히 머문다는 뜻이다. 이는 정, 곧 고요한 마음과 지혜를 평등하게 하는 것으로서, 관행을 원만히 통함에 있어 지와 관을 서로 조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좋은 도반을 의지해야만이 혹 함께 보고 행하여, 종일토록 법문을 논의하고 마음을 운용하는데 있어 터럭만큼의 어긋남이 없이 천리 길을 함께 간다 하겠다. 정에 의지하고 계율을 지키며 대중들과 고요히 앉는다는 것은 앞에서 어떻게 머물러 유지하느냐는 주지에 대한 물음에 답한 대목이다.

 

자신의 육신을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 유마경에서는 "사대가 화합한 까닭에 이름을 빌려서 몸이라 한 것이요, 사대가 주체가 없으며 몸도 무아이니, 이 병이 생긴 것이 모두 아를 집착함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써 이미 병의 근원을 앎에 곧 아상과 중생상을 제거하게 된다."고 이른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무아인데, 무아를 관찰함에 대저 마음은 자상이 없어 경계에 의탁하여 바야흐로 일어나지만, 경계의 성품은 본래 공해서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남이요, 육근 육진이 화합해서 대상을 헤아리는 마음으로서, 이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길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마음을 요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을 것이니 진실로 능히 마음을 요달하면 원각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음은 육진을 의탁하고 육진은 사대를 의지하니, 사대는 실체가 없거늘 육진이 공함이요, 이런 까닭에 육진에 인연된 것이 각기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아의 인연을 수습하여 상속하는 모습을 멸 한 것을 열반이라 이름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결정코 실아가 없는 줄 안다는 것이며, 다만 제식이 있어 무시로부터 앞에 없어지고 뒤에 일어나 인과가 상속되어 허망한 훈습으로 아상이 나타난 것을, 어리석은 이는 그 속에 허망하게 집착해서 실체가 있다고 한다. 

경에 "색이 곧 공이요, 색이 멸해서 공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몸과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한 것으로서, 비로소 사라져서 공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공, 곧 아공 · 법공으로 드러낸 원각인 것이다. 앞에서 집착이 다함으로 말미암아 원각이 드러난 것이라 했는데, 마치 구름이 흩어짐에 달이 나온 것과 같아서 구름이 없는 것을 이른바 달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다만 구름이 없는 곳에 달을 볼 뿐이겠다. 허깨비가 없는 것을 곧 진여라 하지 않음이요 다만 허깨비가 없는 곳에 진리를 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원각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고 원명해서 유독 자체가 온전히 참됨이요 닦음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 아니요, 뭇 허깨비가 사라졌으나 자성은 항상 존재함이요, 인연을 빌러 일어난 것이 아니기에 '허깨비 같지 않은 것'이라고 이른다. 또한 제불과 보살은 비록 몸과 마음이 있으나, 허깨비의 공함을 요달함으로 말미암아 비환, 곧 '허개비 같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다. 

거울을 문지르지만 이는 도리어 때를 문대는 것이며, 도를 닦는다고 말한 것은 단지 허망함을 떨치는 것으로서, 대저 거울의 성품은 본래 밝아서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요, 때에 덮여 가려진 것으로 문대서 나타난 것이기에 가려지고 나타남이 비록 다르나 밝은 성품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거울의 비유는, 거울을 문지름으로 인해 나타난 모습은 집착을 파헤쳐 제거한 것에 비유가 되고, 본래 밝은 모습은 마니주의 본래 청정하고 밝아서 시방을 두루 비추는 것에 비유된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그림자와 영상이 사라져 끝없는 청정을 얻게 된 것은, 마침내 허공마저도 원각에서 발현된 것이요, 허공 또한 오직 식으로 나타났기에 수능엄경에 "만약 한 사람이 진제를 일으켜 근원에 돌아가면 시방허공이 일시에 녹아 사라진다."고 이른다. 국토의 맑고 더러움이 모두 각자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중생은 검이 다하면 사라지지만 국토는 편안한 것이요, 마음이 각성에 명 합하고 인식의 작용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서 몸이 의지하는 국토가 진여에 의지하여 더럽고 청정함이 모두 사라지며, 법계에 확 통해서 청정하고 고요한 것이다.

역으로 깨달음이 분명하지 못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며,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보는 대상이 청정하지 못하며, 보는 대상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안근이 청정하지 못하며, 내지 이와 같이 한 세계와 많은 세계가 청정하지 못하다는 원리다.공색무애, 곧 공과 색이 걸림이 없다는 것은 사라져 의지할 것이 없어서 법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으며, 허공은 이미 나고 멸하고 동요함이 없듯이, 제법도 또한 본래 생하거나 멸하지 않아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개달음의 성품이 이미 다해 허공과 같아서 모두가 움직임이 없으므로 곧 깨달음의 성품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파도가 일어나지 않음에 물은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고 평등한 의미와 같다.

법구경에 "제법이 본래부터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어 옳고 그른 모습이 적멸하며 본래 움직임이 없다."라고 이르고, 법화경에서는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음은 수미산 같아서, 온갖 법이 있다 할 수 없는 것은, 마치 허공과 같음을 살피면 견고함이 없고 생겨남도 아니고 나오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 않고 물러서지 않아 늘한 모습에 머물게 된다."라고 이른다.

증득 가운데는 능히 아는 이와 아는 바가 없고, 증득한 것도 증득한 이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원각의 고요하고 둘이 없는 바탕에 온갖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지 않으며, 가고 오지도 않음이요, 그러므로 깨달아 얻은 경계 또한 참됨을 얻고 망념됨을 잃지 않으며 나고 죽음을 버리고 열반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능히 깨닫는 마음에도 깨달아 얻는다는 분별이 없어지고 그치고 맡기고 소멸하는 네 가지 병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은 실로 깨달아 얻은 바가 있는 깨침이 아니라 본래 깨끗한 깨달음의 모습, 곧 청정각상이 그대로 실현된 모습이다. 결국 무변허공각소현발, 곧 끝없는 허공도 원각에서 나타나는 도리이다.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각경 ; 미륵보살장  (0) 2023.11.14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0) 2023.11.13
원각경 ; 보현보살장  (0) 2023.11.10
원각경 ; 서문과 문수장  (0) 2023.11.10
불교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3) 2023.11.09
반응형

앞의 문수보살장은 부처님께 인지법행을 열어 보여 주기를 청해서 정원각을 깨닫게 했고, 여기 보현보살장은 부처님께, 다시 깨달음을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키게 한다.

 보현보살은 세 가지를 질문한다. 먼저 '본래 있는 것이 아닌 허깨비와 같은 무명을 어떻게 허깨비 같은 몸과 마음으로 닦을 수 있는가'인데, 이는 문수보살장에게 "허고의 꽃인 줄 알면 곧 윤회가 없다."는 경문에서 이어진 질문이다. 해석하면 몸과 마음이 이미 허깨비 같다고 하면 능히 아는 것도 바로 허깨비가 될 터인데, 곧 허깨비로서 허깨비를 어떻게 닦느냐는 물음이다. 이에 법과 비유를 들어 보겠다.

월간통도. 2020. 02


하나의 수건을 묶어 한 마리 말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수건 자체는 진성에 배대가 되고, 말을 만든 기술은 심식[의식]에 배대가 되며, 말의 모습은 의타기법 곧 인연으로 생긴 것에 배대가 된다. 그러나 본래 말은 없기에 이는 공함에 배대가 되며, 또한 어리석음으로 집착해 말로 여기는 것은 미혹하여 주체와 경계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허깨비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두 번째 질문은 '만약 온갖 허깨비 같은 무명이 멸했다면 몸과 마음도 없어져야 될 터인데, 누가 수행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다. 곧 모든 것이 끊어져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수행하겠는가 하는 질문으로서, 허깨비가 공해서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인식마저도 모두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떨쳐 무엇을 수습하며, 어떻게 다시 허깨비 같은 삼매를 수행하라 하는가 하는 질문인 것이다. 금강경에 "중생의 마음이, 성품이 본래 공적 함이요, 공적한 마음은, 실체엔 색상이 없거니 어떻게 수습해서 본래 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세 번째 질문은 '무명이 허깨비인 줄 모르고 망상 속에 빠져 사는 중생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곧 닦지 않는 실수를 멈추게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체가 허깨비 같아서 깨달음 아닌 것이 없으며 또 깨달음의 성품은 생겨남이 없이 본래 청정한데 무엇을 수행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러한 실수를 멈추게 하는 가르침으로, 본래 공하다 해서 애당초 닦지 않으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겠는가? 결국 허깨비와 같이 공한 사고에 빠져 닦지 않는 실수를 멈추게 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닦아야 모든 헛된 것들을 영원히 여윌 수 있는가? 일찍 논(논장)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진여 곧 본래 청정하고 공한 진리만을 생각하고 방편으로써 갖가지 훈습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침내 청정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또한 수능엄경에 이르되  "이치로는 단박에 깨쳤음이라 깨달음으로 인해 아울러 녹아지거니와, 현상은 단박에 제거되지 않음이라. 차제 곧 수행의 점차를 밟아 다한다."라고 했다.

허깨비 같은 삼매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 허깨비 같은 줄 깨달아, 곧 명백하게 알아 본각 진여에 명합하면, 마치 거울에 영상이 비춘 것과 같아서 수용하거나 거절하지도 않게 된다는 의미로, 또한 정수라고 한다. 여기서 정이라는 것은 산란한 마음을 여윈다는 의미이며, 수는 무념무상 곧 망상이나 망념이 없는 경계에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또한 일체가 허깨비와 같음을 깨달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원각 · 진여 · 여래장 ·법계 · 열반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허깨비를 닦는다는 것은, 허깨비가 다한 것은 원래 끊어져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논에 이르기를 "자성청정심이 무명풍으로 인해 움직이며 내지 무명은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는 것이, 마치 바람이 그침에 움직임이 사라지는 것 같으나 습한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 것 같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여래원각묘심은 곧 성정진심 일심이라고 하는데, 온갖 상을 여윈 것을 원이라 하고, 공하지 않기에 각이라 하며 물들되 물들지 않는 것을 묘라 한다. 해석하면 온갖 상을 여윈 도리를 깨쳐 인연을 따르되 물들지 않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허깨비가 다해 끊어져 사라진다는 것은, 능소 곧 주체와 객체가 모두 없어져 원각에 계합하는 것으로서, 허깨비가 다 사라졌으나 개달음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치 파도가 물로 인해 일어났다가, 파도가 사라져도 물은 존재하듯이, 허깨비가 깨달음으로부터 일어남에, 허개비가 사라져도 깨달음은 온전히 그대로인 것과 같다.

허깨비를 여의고 수행함에 공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허물을 털어내야 하는데, 먼저 허깨비에 의지한 깨달음이 인연을 상대해서 일어난다면, 이 또한 허깨비임을 털어낸 것이요, 다음에 허깨비를 상대한 깨달음은 바로 허깨비이지만, 허개비를 상대하지 않은 본래 갖추고 있는 깨달음은 마땅히 허깨비가 아닐진대, 만약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면 곧 허깨비와 같다 했으며, 그리고 허깨비를 깨달은 각과 본래 갖추고 있는 각이 모두 없는 것을 진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허깨비와 같기에, 마음을 일으켜 생각이 움직여서 헛되고 참되다고 [진망] 이르는 것이, 허깨비 아닌 것이 없다.

허깨비가 사라진 것을 부동 곧 움직임이 없다고 말한 것은, 만약 사라져 의지함이 없어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의지한다면, 원각의 진심이 자연히 드러나 원래 허깨비의 변화도 없을 것이기에 부동 곧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거듭거듭 허개비를 여윈다는 것은, 먼저 모든 허깨비의 경계를 여의고, 다음에 허깨비를 여의었다는 마음마저 여의며, 또한 허개비를 여의었다는 여윔마저도 떨쳐 버려 종국에는 떨치고 떨친다는 의미이다.
 
모두 멀리 여윈다는 것은, 지관으로 설명되겠다. 여의는 것을 지라 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쉬어 영원히 반연을 좇지 않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만남에 응당 함께 거쳐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여의는 것을 관 한다는 것은 허망한 법은 체성이 모두 공한 것이 마치 꿈속에 수갑을 차고 있다가 깬 후에는 이미 없는 격이라 하겠다. 그래서 "허개비를 안 즉 여의었다." 했으며, 입불경계경에서는 "제법이 마치 허깨비와 같음이요, 허개비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 했다. 그리고 매이지 않는 것을 관이라 하기에, 모두 지관으로써 여윔에 곧 정혜가 평등한 것이다.

허개비가 제거되어 여윌 것이 없다는 것은, 진각 곧 참된 깨달음에 계합한 것이며, 진각 속에서는 허깨비를 여윌 것이 없다는 의미겠다. 하택 선사는 "허망함이 일어난 것이 곧 개달음이니, 허망함이 사라지고 깨달음이 사라져서 깨달음과 허망함이 모두 사라지면, 이것이 진여"라고 했다. 이는 허깨비 같은 깨달음의 허물을 털어 버리고, 공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과 세상을 모두 무상 · 무아 괴로움으로 보는 반면, 본래부터 생멸이 없는 원각의 마음이 중생들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땅으로써 원각이 비유하면, 나무가 본래 당에서 나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태워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오직 땅은 남아 있는 것과 같고, 갖가지 허깨비의 변화가 원각묘심에서 생기는 것과 같아, 허개비의 변화는 거듭 떨쳐 다한다 해도 원각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다.

 지환즉리 이환즉각 곧 허깨비 같은 줄 알면 바로 여의고, 여읜즉 깨닫는다는 것인데, 단박에 무명이 허깨비 같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돈오 곧 단박에 깨치는 최상승의 법문이겠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꿈에서 몸을 병을 보고 의사에게 물어 약을 구했다가, 깨고 나서는 이미 꿈인 줄 알게 되어 다시 어떠한 처방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수행함에 있어 만약 방편으로 닦아 점차 여의기를 기대한다면, 이는 실로 법이 있다고 집착하는 변계소집 곧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라, 진정한 수행이라 할 수 없다.

 보현보살은 수행의 근본 곧 수행법과 수행하는 자에 대해 묻는다. 허개비로서 허깨비를 어떻게 닦는가, 허개비가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수행하는가, 허개비와 같이 공하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허개비 같은 변화가 모두 여래의 원각모심에서 나왔으니, 마치 허공 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다 하겠다. 또한 허깨비에 의지해 허깨비가 사라졌다 해도, 깨달은 마음은 온전히 그대로이다. 이에 허개비 같은 깨달음의 허물을 털어 버려야 하며, 허깨비를 여의고 수행함에, 공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허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나무를 서로 비벼 불이 나면, 나무는 타 없어지고 재는 날아가 연기마저 사라지듯이, 허깨비는 사라지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니기에, 이는 물질 불생불멸의 도리이다.

보현보살이 깨달음에 드는 방편과 점차를 물으니 부처님은 끊어야 할 무명이 원래 허깨비인 줄 알면 나고 죽음을 벗어나며, 나고 죽음을 벗어나면 바로 깨달음이기 때문에 방편과 점차를 세울 것이 없다고 답하신다. 무명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실체 아닌, 나고 죽음을 실로 있다고 보는 환상을 무명이라 이름하였기에 무명은 허깨비와 같다. 그러므로 무명이 본래 공적한 곳에서 공도 다시 공한 줄 알면, 억지로 닦아서 얻음 없이 계급과 차제를 넘어 여래의 공덕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게송으로 마무리한다.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0) 2023.11.13
원각경 ; 보안보살장  (1) 2023.11.13
원각경 ; 서문과 문수장  (0) 2023.11.10
불교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3) 2023.11.09
통도사 화엄산림 대법회  (0) 2023.11.09
반응형

그동안 방송 강의를 통해 규봉 스님의 『원각경』 대소를 번역하여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그래서 앞으로 『원각경』을 기술하는 데 있어 가급적 경문을 적게 싣고 핵심 개념이나 내용을 담았다.

『원각경』은 요의경으로서, 마음의 요체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경이며 이망증진, 곧 허깨비 같은 망념이나 망상을 여의어 진여실상을 증득케 하는 지침서라 하겠다.

먼저 경의 서문 격인 전문이다. 경문을 개괄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도안 스님이 주창한 서분, 정종분, 유통분, 삼분으로 분류해 왔다. 처음 경전이 설해지는 서분에서는 여섯 가지 요건을 구비하는데 이를 육성취라 한다. 믿음의 성취, 들음의 성취, 설법할 때의 성취, 경을 설할 분의 성취, 경을 설할 장소의 성취, 경을 듣는 이의 성취다.

그중에 가장 처음은 믿음의 성취 곧 여시다. 이는 부처님께 직접 들었다는 의미이며, 부처님께서 친히 맡기고 부탁한 것이며, 또한 아난이 일찍이 의심을 벗게 된 것으로서, 아난이 '법을 받는 사실'이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믿음으로 따르는 말'이며, 불법대해에 믿음으로 능히 들어가고, 지혜로 능히 건너간다 하겠다. 믿음으로 인해 말한 이치가 순조롭고, 순조로운 즉 스승과 제자의 도가 이루어지는 감응도교이겠다.

월간통도. 2020. 01


여는 이치의 측면에서 모든 것을 다 이르고, 시는 무비 곧 아닌 것이 모든 것이 잘못됨이 없다는 의미다. 『원각경』에서 여시는 곧 범부 성인의 인과가 원각과 다르지 않은 것을 "여"라 하고, 이 인과가 허물과 잘못됨을 떨쳐 버리는 것이 "시"라 하겠다. 그래서 여는 진여, 진제, 진리 그 자체이며, 시는 진리 그 자체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 것이다.

들음의 성취는 이근 이 식을 일으키는 곧 이식으로서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성품을 의미한다. 이를 『능엄경』에서는 반문문성, 곧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으로서, 성품과 식으로 듣기에, 이는 미묘한 귀로 진제와 속제의 무애한 법문을 듣는 뜻이겠다.
 
설법할 때의 성취는, 스승과 제자가 한데 모여 설하는 것이 원만한 것을 총괄적으로 일시라고 했다. 단순히 시간을 표하기보다는 어디에도 걸림 없는 두루 하다는 의미로 '일'이라고 했다. 이는 설하고 들을 때에  마음과 경계가 사라지고, 이치와 지혜가 융합되고 범부와 성인이 같고, 본각 곧 본래 갖춘 깨달음과 시각 곧 수행해서 얻은 깨달음이 모여 이 모든 두 법이 한결같이 하나가 되는 때라 하겠다. 또한 시간을 정해 놓으면 경에 따라 같지 않은 번거로움이 있기에 모든 경에 통하도록 '일시'라고 했다.

설법한 장소의 성취는, 대부분 경이 설법한 구체적인 장소, 곧 국토를 표하는데 반해 『원각경』은 근본삼매인 참다운 지혜, 곧 진지의 경계에 나아가는 '신통대광명장삼매'가 장소다. 이는 수용신 곧 증득해서 깨달은 몸으로, 수용토 곧 법열을 받아들이는 정토에서 설한 의미이며, 깨달은 법을 스스로 누리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뜻이다.

서분은 육성취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시 곧 진리를 아난으로부터 대중이 함께 듣고 확인됨으로 해서 증거가 되어,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수용토록 하며, 수승한 법회에 '바가바' 곧 온갖 덕을 갖춘 석가모니불께서 타수용토 곧 교화하는 국토인 불이경계제국토에서 신통대광명장삼매에 들어 대보살 십만 대중 그리고 열두 상수보살과 함께 평등법회를 펼치고 있다.

이어서 문수보살장을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여래의 인지법행 곧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 방법과 그에 따른 과정을 묻는 것이 핵심 냉용이다. 인지법행이란,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성취하는, 다시 말해 수행을 해서 법성 곧 불성을 증득한다는 뜻이다. 대집경에 법행이란, 몸과 마음을 관해서 마음에 밖으로 일체 상에 탐착 하지 않고 겸허하게 뜻을 낮추어 교만을 내지 않으며, 애욕에 물들거나 끄달리니 않고, 경계에 모두 쉬고, 길이 번뇌를 여의며, 그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했다. 이러한 경지에 되면 "마치 도공이 진흙을 잘 반죽해서 물레 위에 놓고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인지법행은 '일실경계'와 뜻을 같이 한다. 일실경계 곧 평등하고 진실한 깨달은 경계로서, 중생심의 본체가 본래부터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자성이 청정하여 장애가 없고, 평등하게 두루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모양으로서, 일체중생심과 성문 벽지 보살의 마음과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한결같이 불생불멸하여 물듦 없이 적정해서 진여의 모습이라 하겠다. 마치 허공이 분별하지 않고 평등하고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하겠다.

 '보살들이 대승 중에 청정심을 일으켜 모든 병을 멀리 여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실 것을 청했는데, 여기서 청정심이란, 대지심이며, 직심 곧 순순하고 곧은 마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진여만을 올바로 생각하는 마음이며, 유무를 모두 여의고 능소 곧 주체와 객체가 끊어지는 등 일체심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으로, 모든 병을 여의고, 병을 여읜 후에 길이 망실함이 없고, 어떠한 마구니에게도 유혹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미래의 말세 중생이 대승을 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기를 세 번 청했는데, 법을 세 번 청하는 것은, 한두 번 청하는 것은 성의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세 번을 넘기면 번거로워 어지러울 수 있기에, 세 번을 청함으로써 정성스레 공경함을 표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도는 의식과도 같다.

말세에는 거성요원 곧 성인과 떨어져 있는 것이 멀고 멀어서 근심이 매우 깊은 때를 이르는데, 성인과 떨어져 있다는 것은, 부처님은 입멸하셨지만 법은 지속되기에 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법이 지속되어 그 속에서 법열을 느낀다면 결코 말세라 할 수 없으리라

사견에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본심 밖에 따로 구하는 것으로서, 곧 참되고 허망한 일을 보게 되는데, 그로 인해 바른 견해를 얻기 어려우며, 마음이 오욕에 방종하며, 혹 이도에 미혹되어 익히며, 이승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대승의 마음을 일으켜 법문을 듣게 한다는 의미다.

'일체 청정과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그리고 바라밀을 유출하여 보살에게 가르치셨다.'는 경문에서 『원각경』에서의 보리 곧 깨달음이라는 것은, 시각 곧 가르침을 받아 수행한 깨달음과, 본각 곧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이 합치한 것을 뜻한다. 또한 삼법 곧 반야, 해탈, 법신의 세 개념을 통합해서 같은 의미인데, 이를 하나의 밝고 깨끗한 둥근 구슬에 비유하면, 밝은 즉 반야요 깨끗한 즉 해탈이며 원만한 본체는 법신이요 모두를 종합해서 '대열반'이라 하는데, 이는 원각자성에서 발현된 것이겠다. 그래서 '유출'이라고 했는데, 이는 원각으로부터 건립 곧 성취된다는 의미로, 깨달음은 본체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고 중생 본각의 심지 곧 마음바탕이라 하겠다. 비록 오염된 듯하지만 오염되지 않으므로 '청정'이라 하고, 또 종래부터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므로 '진여'라 한다. 이는 무명으로 덮여 있는 까닭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제불 여래께서 인지 곧 수행 과정에서 시각의 지혜를 밝히고, 무명을 다 끊어서 시각과 본각이 합일한 구경각을 성취하며, '보리'라는 결과를 얻어 '적멸일심'에 희귀하는 것을 '원적'이라 하며, 이를 '열반'이라 부른다. 이러하므로 모든 부처님의 과덕은 원각일심을 의지하여 다 건립하므로, 그래서 '유출한다'라고 했다.

결국 원각자성의 광명에 의지하여 적멸인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를 돌이켜 비추어 보며, 나아가 원만하고 사무치게 비추어 남음이 없어, 무명이 영원히 끊어지고 법신을 원만하게 증득하고 되는데, 이는 '원조청정각상'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서야 비로소 불도를 이룬다 하겠다. 여기서 무명이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올바른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한다. 곧 진리에 어두워서 사물에 통달하지 못하고 사물과 현상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 상태로 어리석음을 뜻한다. 무지, 우매, 특히 불교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명의 명을 법으로 해석해서 '법'이 없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되며, 이로 인해 수많은 번뇌가 일어나 끊임없는 윤회가 이루어진다 하겠다.

무명과 생사본말의 실체가 없는데, 다만 중생이 이렇게 없는 중에 미혹한 정으로 어긋나게 잘못 생사를 보게 되기에 무생 중에 망령되이 생멸을 본다 하겠다. 『화엄경』에 "일체법이 생함이 없으며 일체법이 멸함도 없으니,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제불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라고 이른다.

"허공의 성품은 항상 움직이 않는다." 했는데, 허공의 성품은 일체법이 공해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본래 생하거나 멸하는 일이 없는 것이기에, 털어내어 궁극에 공하도록 한 것이 아니며, 일체법이 여여해서 오고 가지 아니하며 이미 간 것도 아니며 현재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겠다.

『불장경』에  "일체법이 공해서 터럭만큼의 모습도 없다." 했다.







선행 스님께서는
진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통도사 승가대학과 율원을 거쳐, 승가대학원 1기로 졸업했다.
백양사· 선운사 승가대학장을 역임했으며

불교방송에서 『원각경』 강의를 진행했다.
현재 통도사에 계신다.


반응형
반응형

인도 갠지스강

 

불교(佛敎, Buddhism)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창시된 인도 계통의 종교이다. 불교는 그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 · 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신이 아닌 진리를 따르는 불교

인간의 이성이 닫혀 있던 미개한 시절,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요청했다. 이것이 종교학적으로 '강자에 대한 의존'이라고 하는 것, 바로 신이다. 이 시기의 신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고, 자신을 믿고 섬기는 이에게 영생을 선물해 주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하고 인간이 이성적인 사유를 하면서, 신이란 슈퍼맨처럼 신화 속에나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붓다는 인도 갠지스 강변에서 신을 믿는 사제를 만났다. 사제는 붓다에게 신을 믿고 받들면 죄가 없어져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붓다는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고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저 돌멩이가 떠오르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사제가 "불가능하다"라고 하자, 붓다는 "선업(善業)을 지은 사람은 가라앉히려고 해도 뜨고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띄우려고 해도 가라앉는 것이지, 이것은 누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돌멩이는 가라앉고 스티로폼은 뜨는 것처럼, 질료의 속성이 그런 것이지 신이나 신앙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신이 아닌 진리가 불교의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에게 잘하면 "예쁜 놈 떡 하나 더 준다'와 같은 불합리성을 버리고, 진리의 합리성을 따르는 것이 바로 불교이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신이 아닌 진리를 추구한다. 이것이 불교의 첫 단추이다. 진리는 붓다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마치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붓다는 스스로를 "고성(古城)을 발견한 사람이며, 그곳으로 인도해 주는 길잡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늘날 모든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아래의 <예불문 禮佛文>에서처럼, 붓다를 '도사(導師)' 즉 인도자이자 가이드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붓다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는 위대한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예불문 禮佛文>

지심귀명례 至心歸命禮    

삼계도사 三界導師   

사생자부 四生慈父
시아본사 是我本師   

석가모니불 釋迦牟尼佛


온 우주의 인도자이시며 모든 생명 있는 존재의 자애로운 어버이신,
우리의 참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예경 올리옵니다.

 

우상숭배의 진실

선禪불교에서는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말이 있다. 또 붓다는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 뗏목을 이용하고는, 그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뗏목을 계속해서 끌고 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두 경우 모두 수단에 전도된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손가락과 뗏목은 목적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불고에서는 이것을 좋은 방편(선교방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중에는 손가락과 뗏목은 우상으로 바뀌게 된다.

개신교에서는 신이라는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은 우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톨릭의 마리아상이나 불상마저 우상이라고 비판한다. 우상비판에 더 철저한 이슬람교에서는 '기독교의 십자가'나 '여호와'라는 명칭 역시 신을 상징하는 우상숭배라고 부정한다. 실제로 이슬람의 모스크에는 신을 상징하는 그 어떤 표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알라신이란, 단지 유일신이라는 대명사일 뿐이다. 그런데 붓다는 진리로 인도해 주는 분이지 신이 아니다. 또 불교는 신을 좇는 종교도 아니다. 마치 대치동의 족집게 선생님처럼 진리의 핵심을 가르쳐 주는 분이 바로 붓다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붓다는 우상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 담벼락에 계속해서 낙서가 발생하자, 담에 '낙서금지'라고 적었다. '낙서금지'는 낙서를 금지하기 위한 방편의 낙서이다. 이것을 통해서 낙서가 사라지자, 주인은 '낙서금지'라고 쓴 낙서마저 지운다. 불상이란 이러한 '낙서금지'와도 같은, 우리의 내면을 자각하기 위한 좋은 방편인 것이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가 발견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좇는 종교이다. 나침반이 배를 직접 끌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침반에 의해서 배는 바른 길로 인도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인간에게 바로 배의 나침반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진리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붓다가 될 수 있다. 붓다란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석가모니 붓다라는 표현은 붓다 가운데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다.

 

마치 조선 왕이라는 범주 속에 태조 · 태종 · 세종 등 27명이 포함되는 것처럼, 붓다라는 범주에는 석가모니불 · 아미타불 · 미륵불 등 진리를 자각한 모든 붓다가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진리를 각성하면 붓다가 된다. 즉 붓다는 가르침을 주는 대상인 동시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마치 대학에서 교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또 다른 교수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받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찾아 진리에 의지하는 사람이 붓다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의 첫머리에 진리의 발견자로서 석가모니 붓다가 있다.



자현스님 "세상에서 가장 쉬운 불교" 

반응형
반응형

올해 양산 통도사 화엄산림 대법회 입재가 2023년 12월 13일이고 회향은 2024년 1월 10일입니다. 화엄산림대법회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 법문시간표 확인(이미지 클릭)

화엄산림 법회의 유래​

해동에 화엄을 가르침을 최초로 전한 자장율사가 창건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개신 이후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법등을 밝혀 온 유서 깊은 도량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도 1920년대 초에 이미 통도사는 '화엄의 진리'를 대중에게 전하기 위하여 '화엄대경'이란 법석을 열었습니다. 1922년 3월(음력)에 촬영한 구하 큰스님의 '화엄대경 회향' 사진에서도 통도사 화엄산림법회의 근대 역사가 100년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엄산림 법회는 1925년 극락암 경봉 스님께서 어려운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만일염불회를 개설한 데 이어 1927년 보우스님, 해담스님과 함께 극락암 무량수각에서 삼칠일 간 법문을 하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변함없이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를 담은 『화엄경』법석을 열어 민족정신 고취와 화엄정토 실현에 정진해 왔습니다.

스님과 불자들이 계승해 온 이러한 깊은 뜻을 오늘날의 통도사에 이어 가고자 화엄산림 법회를 봉행합니다. 화엄산림 법회에 두루 동참하시어 진리의 등불을 밝히고 가정과 국가에 평안을 가져오는 인연 만들어 가기를 기원합니다.

화엄산림 법회의 목적

경봉스님께서는 1930년 화엄산림 동참을 권하는 서문을 쓰시면서 화엄산림 법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우리의 도는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하여 성불하는 것이며,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우쳐 이 둘이 이롭고 원만하게 되는 도이다."

"비유하자면 어둠 속에서 등불 없이는 보배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불교를 말하여 줄 사람이 없으면 설사 지혜가 있더라도 능히 알 수 없는 것이다."

"현현하고도 현현한 이치와 오묘하고도 다함이 없는 법을 설할 준비를 하였으니 함께 원력을 세워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니 유루를 버리고 무루의 일을 증득할지어다."

다시 말해서 경봉스님께서는 우리의 불교가 '사람의 마음의 가리켜 견성하여 성불하는 데 있으며,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우쳐 이 둘이 이롭고 원만하게 되는 도'임을 먼저 밝히시고 화엄경 법문이야말로 '어둠 속에 보배를 찾아볼 수 있게 하는 등불과 같은 존재'임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법문을 통해 우리들 각자가 '유루의 법'을 버리고 '무루의 법'을 증득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명확하게 밝혀 놓으신 것입니다.


화엄산림 법문​

화엄산림 기간 동안 설법전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법사스님의 화엄경 법문이 있습니다. 화엄경의 법문 내용이 어려워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금생에 지혜의 종자를 심어 두는 것이기 때문에 법당에 들어오셔서 법사스님의 법문을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대승경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육백 년이 지난 뒤 서천 28조 가운데 제14대 조사 용수보살께서 세간의 모든 학문을 일시에 섭렵한 뒤 발심하여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보고 가져왔다고 합니다.

화엄경에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세 종류 번역본이 있습니다. 첫 째는 실차난타스님이 번역한 80권 화엄경, 둘째는 불타발타라스님이 번역한 60권 화엄경, 마지막으로 반야삼장 스님이 번역한 40권 화엄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80권 화엄경으로 39품을 7처 9회에 나누어 부처님께서 설한 법문입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