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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통을 관찰하고, 나고 멸하는 법(생멸법)의 사유하는 모습/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의 사유하는 모습 / <금동반가사유상>(국보)의 얼굴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린 태자가 목격한 '세상의 실체'.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을 나와 동산으로 행차할 때 · · · 길가에서 밭 가는 농부를 보매/ 흙을 뒤칠 때 온갖 벌레들이 버둥질치며 죽네 · · · 농부는 일에 시달려 몸은 여위고 흐트러진 머리에 땀을 흘리며 온몸은 흙먼지로 뒤집어썼네/ 밭 가는 소도 지쳐서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네(「불소행찬」 <출성품> 중에서)."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실체는 '모두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생명 또는 존재의 이러한 집착은 '고통'이라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 온갖 고통을 관찰하시고/ 나고 멸하는 법 [생멸법 生滅法]을 사유하실 때/ 참으로 슬프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어 미처 깨닫지 못하는구나."

  무엇을 깨닫지 못하는가? 바로 앞 문장에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생멸법'이다. 모든 생명 또는 존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이라는 변화의 철칙에 지배받고 있다. '늙음 ·병 ·죽음으로 무너지는 것/ 이 세상은 참으로 수고롭고 괴롭구나!" 태어날 때는 태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태어나서는 생존하느라 발버둥 치고, 늙어갈 때는 아프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죽어갈 때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니 붓다의 말씀대로 "참으로 수고롭고 또 수고롭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면 이러한 수고로움이 죽으면 끝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죽어서 몸이 없는 상태 [중음 기간]에서도 역시 '다시 몸 받으려는 발버둥'은 계속되어, 결국 우리는 재생再生하게 된다. 이러한 생멸의 무지 않고, 마침내 사라짐으로 돌아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 미술품 <반가사유상>은 바로 이 대목을 조형화한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통찰하는 어린 태자의 모습이다. 그는 무엇을 사유하는가? '나고 멸하는 법[生滅法]'이다. '사유'란 무엇인가? 여기서 사유란 '통찰하여 그 원인을 보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 아니 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이것을 붓다는 사성제四聖諦의 가장 첫 번째인 고성제 苦聖諦로 천명하셨다. 성제聖諦란 '진리'란 뜻인데,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보편적인 법칙이자 사실을 말한다.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멸, 즉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한 것에 어리석게 집착하는 것은 고통을 야기한다. 한 번 만들어진 것은 맹목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질 친다. 몸도 한 번 만들어지면 그것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애쓴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 만들어진 마음은 끊임없이 계속 올라온다. 이것은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성품을 말한다.

 

  물론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므로 컨트롤 불가능하다. '물질과 느낌, 기억과 반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식'은 저절로 일어나 파도친다. '물질과 느낌, 기억과 반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식'을 '색色과 수受, 상想과 행行, 그리고 식識'의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붓다 설법의 결정판에 해당하는 「대념처경」의 <고성제>에는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것을 '오취온五取蘊'으로 규정한다. "요컨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 또는 덩어리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다. "  '오온'이라고 부르는 것은 '취착 하는 성품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기에 '오취온'이라 하는데, 이것이 '나'의 실체이다.

 

  「고성제」의 마지막 단락에는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라며 설명이 나온다. "그것은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 색취온色取蘊,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 수취온受取蘊, 취착하는 기억의 무더기 상취온想取蘊, 취착하는 상카라의 무더기 행취온行取蘊,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 식취온識取蘊이다. "색 ·수 ·상 ·행 ·식의 덩어리가 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품의 취착이기에 취착의 무더기로서의 '나' 자체는 고苦라는 것이다. '삶이 고苦'일 수밖에 없는 이유. 답은 이미 제시되었다. '취착'하기 때문이다. 즉 '갈애'이다. 고통의 원인으로서의 갈애를 '집성제'라고 한다.

 

  고통은 컨트롤 불가능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붓다께서 밝혀놓으신 길을 따라가보자. 우선 붓다의 어린 시절 태자가 '세상은 온통 고통이다'라는 사실을 목격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고자 정사유正思惟를 하는 장면에는 "모든 나고 죽음[生死]과 일어나고 멸함이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관찰할 때/ 마음은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네/ 오욕은 구름인 듯 사라져 버렸네."라고 기술되어 있다. 생사와 기멸의 변화,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대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비로소 그것의 무상함을 보고 그것의 본질이 공空임을 알게 된다.

 

  고통에 마냥 시달리지 않고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직시하는 순간 그것의 정체는 드러났다. '고통'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고통이라는 것이 '대상화'되고 그것과의 '분리'가 일어났다. 나 자체가 고통이었다가, 이제는 고통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것을 관찰하였을 때"라는 대목이 핵심이다. 이렇게 통찰지가 발휘된 순간, 그것의 실체는 드러났고 그것은 사라졌다. "그리고 취착을 떠난 희락이 생겨 첫 번째 사마디를 받았다." 즉 초선정初禪定에 들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의심하거나 어지럽지도 않고 / 혼침 하거나 취착 하지도 않고 / 무너지거나 그것을 싫어하지도 않고 / 맑고 고요하여 모든 무명을 떠나 / 지혜의 광명이 돌아가고 더욱 밝아졌다."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苦가 법法'이라는 붓다의 첫 번째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고통이 오면 '고통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부단히 생겨나는 고통을, 우리는 부단히 알아차려서 보내고 또 보내야 한다. 한 자락의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그 결과는 천 근의 무거움이 아니라 날아갈 것 같은 경안이며, 불타는 뜨거움과 깊은 어둠이 아니라 지극히 편안한 희락이며 맑고 청정한 자유이다.

 

 

 

 

 

월간통도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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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은 음식을 구하고자 '그릇鉢을 내미는托' 행위를 묘사한 말로, 곧 걸식을 뜻한다. 따라서 걸인의 구걸을 일컫는 '동냥'이라는 말도 스님의 탁발에서 비롯되었다. 동냥은 '동령動鈴'에서 나온 말로, 스님이 탁발할 때 요령을 쓰기도 하여 '요령鈴을 흔든다動'는 의미에 따라 생겨났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기 중국불교에서 대중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스님을 '교화자敎化子'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해 걸인을 '화자花子·규화자叫化子'라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얀마 스님들의 탁발행렬

  초기 율장律藏에, "비구로서 자기 마음대로 입에 넣을 수 있게 허락된 것은 물과 이쑤시개뿐"이라 하였다. 당시의 이쑤시개는 양치용의 작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출가자는 오로지 탁발로써 재가자가 발우에 담아주는 음식에 의지해 살아가야 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라 하겠다. 걸식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물질에 대한 집착을 없애며, 최소한의 음식으로 수행에 힘쓰는 일이 출가자의 본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이어온 탁발도 초기불교와 그 정신은 같지만, 양상은 차이를 지닌다. 탁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남방불교와 달리, 대승불교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수행을 위해 탁발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탁발로 얻는 보시도 조리된 음식보다 곡식이나 화폐가 주는 이루었다.

 

  그런데 사찰경제가 힘든 시절에는 대중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할 수 없어, 스님들이 자신의 식량을 직접 마련해야 했다. 선방 수좌와 강원 학인은 물론 다른 사찰에 잠시 머물 때도 자신의 식량을 내야 했는데, 이를 '자비량自備糧·自費糧'이라 불렀다. 따라서 1960년대 무렵까지 탁발은 일상의 수행이자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스님들의 전기를 엮은 「동사열전」을 보면, "본래 가진 재물이 아무것도 없어서 탁발로 학문의 비용과 식량을 마련했다."는 청해凊海스님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궁핍한 시절에 탁발하여 식량은 물론 경전과 학비를 마련한 것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출가수행자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탁발을 나갈 때면 규범이 분명하였다. 반드시 가사를 수하여 수행자의 위의를 갖추었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나가되 가능하면 젊은 스님은 노스님과 함께하도록 하였다. 재가자와의 관계에서 자칫 실수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기 위함이다. 탁발 시간 또한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를 피했음은 물론이다.

 

  탁발승이 절어진 걸망에는 대개 두 개의 자루가 있어 재가자가 주는 쌀과 보리를 구분해서 담았다. 가난한 마을에서는 보리쌀과 잡곡이 주를 이루니 쌀자루는 아예 꺼낼 일 없었고, 잡곡이 섞이는 걸 꺼리는 절에서는 자루를 네 개씩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형편이 나은 마을에서는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면 걸망이 묵직해졌고, 곡식뿐만 아니라 철 따라 고추나 감자·나물 등을 주기도 했으니 걸망을 멘 어깨와 등이 아프기 일쑤였다.

 

  노스님은 목탁을 들고 젊은 스님은 발우를 든 채 집 앞에 다다르면 목탁을 쳐서 방문을 알리고 염불을 하는데, 반야심경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주를 이루었다. 시주 여부와 무관하게 염불을 끝까지 마치고 성불을 바라는 축원으로 재가자에게 복을 지어주게 된다. 스님이 대문 앞에서 염불 하면, 부엌에서 곡식 종발을 들고 염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는 안주인도 있었다. 자신의 집이 잘되도록 축원하는 스님의 염불을 온전히 듣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부터 탁발은 재가자의 재보시와 출가자의 법보시가 오가며 공덕을 쌓아온 현장이었다. 수행자의 하심을 기르고 재가자에게 선근을 심어주는 탁발은 부처님을 본받는 일로, 재가자와의 관계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20세기 중반이면, 마을 곳곳에 기독교가 확산하고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스님들의 지위도 회복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대부분 민중은 불교에 우호적이었지만, 이러한 변수들이 늘 도사리고 있어 탁발에 큰 장애가 되었을 법하다. '사찰을 찾는 재가불자'와 '집집을 다니며 만나는 일반 재가자'는 분명 다르고, 수행자의 탁발이 일상화된 남방불교권과 다종교사회인 한국에서의 탁발 또한 큰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갓 출가한 스님은 첫 탁발 때 차마 발우를 내밀지 못했는가 하면, 문전박대를 당한 뒤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들은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며, 문제는 재가자의 홀대가 아니라 출가자의 마음에 있다고 보았다. 하심과 인욕忍辱을 체득하는 탁발이야말로 수행에 더없이 좋은 현장 실습이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대하는 모습이 다르고, 그것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곡식을 내주는 모습도 조금씩 달랐다. 가장의 밥그릇에 쌀을 담아 두 손으로 부어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밥뚜껑이나 바가지로 푹 퍼서 주기도 하고, 물 묻은 접시에 쌀을 담아 반은 도로 가져가게 되는 때도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중생들과 부대끼며 감사함을 배우는 마음공부의 거름으로 삼으니, 탁발 걸식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위대한 선택을 한 출가수행자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탁발은 전통 개념과 다른 '자비탁발'의 방향으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자비탁발은 승속僧俗을 떠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행하는 탁발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재가자에게 보시를 받는 일방향의 탁발에서, 다시 중생에게 환원되는 양방향의 순환으로 또 다른 탁발의 참뜻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자비탁발은 어려운 이들에게 보시하는 불교의 역사와 함께해왔고, 탁발의 역사 속에서도 실천해 온 일이다. 자비탁발이 구호모금과 다른 것은, 출가자가 직접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 한 명 한 명과 만난다는 점이다. 금액에 연연하지 않고, 받는 자와 주는 자 모두 발우에 담기는 공감을 함께 체감하고 연대한다. 굳이 종교적 의미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미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지극히 불교적인 행위이다.

 

 

월간통도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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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흥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는 통도사 말사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후 고려 말 지공대사가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1614년 조선시대 대희선사가 재건했다. 특히 조선시대 운흥사는 경전을 간행하는 도량으로서 1672년부터 1709년까지 많은 불서가 간행되었다. 운흥사지 목판은 16종 673판인데, 현재 통도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운흥사는 폐사되고 넓은 터와 수각 등 일부 석물만이 유물로 남아 있다.

운흥사지에는 종이 제작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수곽과 너른 돌이 남아 있다.

 

  이곳 운흥사 터에는 건물터 7동, 부도 6기, 수조 4기 등이 남아 있는데 터가 매우 크고 넓어 당시에 굉장한 규모의 대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토록 크고 넓은 도량, 게다가 목판을 제작하고 종이를 인쇄할 정도로 많은 대중이 살았던 곳이 왜 한순간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1709년까지 운흥사에서는 활발하게 종이 제작과 불서 인경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1749년에 간행된 학성지에는 기록이 없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역사를 이어온 사찰이 40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폐사된 것이다.

  1727년 양산군수 김성발이 통도사의 종이 부역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당시 통도사 말사였던 운흥사에도 상당한 지역 부담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운흥사는 경판(목판) 제작에서부터 종이 생산, 그리고 인경 작업까지 가능한 현대판 출판단지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운흥사에서 제작한 경판은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규모다. 오늘날로 비교한다면 디자인에서 인쇄, 납품까지 가능한 종합출판단지라 할 수 있다. 특히 운흥사 인근은 닥나무가 많이 자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량이 풍부하고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 양질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 때문에 운흥사에서 생산한 종이에 인경한 경전은 통도사뿐만 아니라 여러 사찰에 전해지며 불서 보급을 이끌었다. 또한 당시 많은 대중이 기거하고 있었기에 대량 작업이 가능했던 것도 주효했다.

 

  하지만 스님들의 불사 작업이 지역이라는 노동으로 치환되며 운흥사는 급속도로 쇠락했다. 불서 보급을 위한 종이 제작이 아닌, 나라의 압력에 의한 종이 생상이 강제된 것이다. 나라에서는 불서를 만드는 사찰마다 종이 부역을 내렸고 스님들은 과도한 노역으로 사찰을 떠나야만 했다. 특히 닥나무를 베고, 삶고, 물에 불려 두드리는 작업은 모두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라 그 고통은 더욱 심각했다.

 

  대가람을 일구며 불서 제작이라는 대작불사의 원력으로 정진했던 스님들에게 가혹하고 부당한 일이 주어진 것이다. 이후 운흥사는 폐사의 길로 들어섰고 통도사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운흥사 폐사 이후 지역뿐만 아니라 과도한 부역으로 통도사 역시 폐사 직전의 위기를 처했다. 통도사 역시 종이 부역과 각종 잡역을 버텨 냈다. 1838년에 이르러서야 권돈인이 통도사에 부과된 부역을 혁파하고, 비로소 오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운흥사는 폐사 후 재건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당시 종이 부역의 폐단은 사찰의 폐사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운흥사는 질 좋은 닥종이를 생산하고 이를 인경해 내는 종합출판단지로서의 역할을 해 내고 있었다. 이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제지기술과 인쇄문화의 발달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51년 이전에 제작된 한지로 만들어졌으며 755년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역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견고하게 수명을 이어 가고 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제지기술이 사찰에서 발달했으며, 불서 보급이라는 확고한 명분과 목적하에 이뤄졌음을 분명히 한다.

 

  운흥사는 오랫동안 비워져 있다가 지난 2001년에 이르러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당시 발굴된 부도는 인근으로 옮겨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부도의 주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나 부도를 장엄한 형태나 문양을 보면 통도사 대웅전 소맷돌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운흥사가 통도사 말사로서 통도사의 스님들이 기거하고 머물며 역사를 공유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운흥사는 오래된 절터로 남아 있지만, 불서 보급을 통해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던 스님들의 간절한 염원은 생생한 오늘의 가르침으로 유전되고 있는 듯하다.

 

 

월간통도 20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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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에서는 고려 때부터 자체적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불경을 인쇄하여 책을 만들어야 했기에 목판인쇄술과 함께 제지기술이 발달해 왔다. 또 사찰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어 시중에 내다 팔았다.

  종이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1827년에 통도사 스님들이 수군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에 종이 만드는 과정이 있다. 제지 공정은 닥나무의 불필요한 부분이나 표피 등을 제거하여 한지 원료인 백저白楮로 만드는 과정인 거형去荊, 백저를 잿물과 섞어 가마솥에 넣고 삶는 과정인 숙정熟正, 삶은 후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분해하는 과정인 타저打楮, 분해된 섬유질을 큰 통 속에 물과 함께 넣고 휘저어 발로 종이를 뜨는 과정인 부취浮取, 종이를 말리는 과정인 건취乾取, 종이의 티끌과 오물을 제거하는 과정인 택록擇鹿, 종이를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단단하고 윤택이 나게 만드는 과정인 도침壔砧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종이 만들기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일손 또한 많이 필요하였다.

  사찰은 스님들의 제지 기술과 함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사찰은 닥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산간 지역, 풍부한 물을 확보하고 있는 개울, 닥나무를 두드릴 평평한 바위, 그리고 건조할 넓은 공간과 땔감이 많은 곳에 있었다.

 

  불교가 핍박받던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지서 혁파와 수취체제 변화로 인해 승려의 종이 생산과 상납이 본격화되었다. 종이를 청나라 조공품으로 보내었기에 사찰의 종이 부역이 가중되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워낙 그 폐해가 심해 종이 부역을 피해 승려들이 도망가고 결국에는 폐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1727년 양산군수 김성발은 통도사와 같은 천년 명찰이 지역으로 하루아침에 공허해졌음을 지적하고, 지역을 혁파한다면 흩어진 승도僧徒가 다시 환집還集할 것이라고 하였다. 통도사에는 닥나무가 자라지 않아 울산과 경주 등지에서 닥나무를 사들여 종이를 제작하여 납부하였다. 다른 사찰보다 통도사는 과중한 부담과 수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봤다.

덕암당 혜경스님 진영

  덕암당 혜경스님이 통도사에 있을 때, 그의 고향 친구? 인 권돈인이 영의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통도사 대중들은 스님에게 권 대감을 만나 지역면제 요청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도성 출입이 스님들에게는 금지되었던 시절이라, 스님은 6개월 동안 머리를 기르고 나서 상투를 매고 도포를 입고 한양으로 갔다. 한양에 입성한 스님은 권 대감을 만가 위해 물장수로 위장하였다. 물장수만이 양반집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권 대감을 만난 스님은 지역면제 요청을 하고, 권 대감은 임금에게 알리었고, 마침내 임금이 교지를 내려 종이 부역이 혁파되었다는 이야기가 통도사에 전해 온다.

  이런 공적을 통도사 부도원에 새겨 놓았으니,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 1884년 고종 21> 그것이다. 비 앞면에 그의 공적을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

 

  (통도사의 형세가)

  우리 스승님 이전에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우리 스승님 이후에는 태산같이 안정이 되었네.

  천 리에 있는 서울을 혼자서 갔다 돌아오시고 나니,

  보리수에 봄이 돌아오고 우거진 초목이 무성하였다네.

  그 수 헤아릴 수 없기에 머물고 거할 만하거늘,

  여기 큰 유공비 세웠는데 절만 있고 이제 스님은 안 계시네.

 

  그런데 권돈인이 당시 통도사에서 만난 사람은 덕암당혜경스님만이 아니었다. 성담 의전스님도 있었다. 그는 통도사 지역혁파에 공을 세운 <덕암대사잡역혁파유공기현판>을 쓰기도 했다. 이재 권돈인과 추사 김정희가 있었다.

 

  통도사의 위기는 덕암당이 한양을 다년온 후 안정이 되었다. 통도사 부도원에 권돈인의 영세불망비가 있다. 비석의 앞면 중앙에 <도순상국권공돈인영세불망비>라고 기록되었고, 앞면 아래쪽에 "다만 잡다한 부역의 폐해를 일체 감면하고 제거하였으니 그 은혜와 덕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넓다."라고 새겨져 있다. 경상남도순찰사 권돈인이 양산 통도사를 양산군수와 수군절도사와 함께 방문하여 여러 잡역을 면재해 준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이다.

 

  덕암당 스님이 머리 기르고 한양에 가서 만난 사람은 영의정이 아닌 산성판윤이나 병조판서인 권돈인이었다. 스님의 하소연을 들은 권돈인이 직접 경상감사로 약 1년간 있으면서 통도사의 종이 부역을 비롯한 각종 잡역을 혁파해 준 것이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는 1838년 경상도 감영에서 통도사에 잡역을 혁파해 준다고 발급한 문서인 <양산군통도사지역혁파급각양잡역존감절목>이 있다. 도순찰사가 천년고찰임을 감안하여 과도한 부역을 감해 주고 일부만 남겨 지속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백지白紙, 홍장지紅壯紙, 유지油紙 등 다양한 종이와 관모 및 신발 등의 의복류와 쌀과 메주, 산나물 등의 곡식류에 대한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1842년에 제작된 <덕암대사잡역혁파유공기현판>이 있다.

 

  훗날 이재 권돈인은 통도사에 자신의 필적을 남긴다. 1851년 국화가 만발한 가을에 쓴 해장보각海藏寶閣 편액과 주련이다. 그가 1851년에 유배를 가고 귀양지에서 사망하니 그의 마지막 유작일 수도 있다. 해장보각은 통도사의 불경 도서관이었다.

 

  보물 같은 경전을 옥함에 두루마리로 모셨으니

  서역에서 모아서 동토에서 번역했네.

  귀신이 지키고 천룡이 흠모하니

  달을 가리키는 지표요, 고해를 건너는 뗏목이라.

 

  권돈인과 김정희는 둘도 없는 친구로 추사의 그림자 같은 벗이 권돈인이었다. 김정희는 권돈인에 대해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는데, 예서 글씨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일찍이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극찬을 받았다. 두 사람의 친밀함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세한도歲寒圖>이다. 추사는 이재의 세한도에 발문을 썼다.

 

  권돈인은 성담 의전스님의 입적 후 진영에 기문과 헌시를 직접 쓰고, 끝에 '우랑又閬', '이재彝齋'라는 자신의 호를 낙관했다. 드문 일이다. 추사는 이재가 소개해 준 성담스님을 만나 후 편지를 보내고, 70세 때 성담스님 헌시를 짓는다. 통도사에 현판으로만 전해져 온 <성담상게聖潭像揭>, 곧 <성담스님의 상(진영)에 대한 게송>이다. 통도사에는 '탑광실塔光室', '노곡소축老谷小築', '산호벽수珊瑚碧樹', '일로향각一爐香閣'등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나무는 죽어서 종이를 남긴다고 하였다. 종이 부역으로 인해 사찰의 닥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종이 뜨는 기술은 단절되고 말았다. 과도한 부역 세금은 호환과 마마보다 무서운 것이다.

 

월간 통도  202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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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256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한지는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다시 삶고, 섞고, 뜨고, 건조하는 등 매우 복잡한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이 과정으로 1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최고의 종이로 태어난다. 아흔아홉 번의 손질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백지百紙라고도 불렀다. 이렇게 복잡한 공정으로 완성된 종이에, 목판 활자를 찍어 내어 인쇄물로 제작한다고 하면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이러한 제지 기술은 불경 보급의 바람을 타고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는데, 현존하는 오래된 한지 인쇄물이 대부분 경전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중 제일이 751년 석가탑에 봉안된 세계 최초의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또한 당대에 발간된「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등 여러 경전들이 유물로 남아 있다. 이는 천 년을 견디는 한지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나라가 보유한 16건의 세계기록유산 중 13건이 한지로 제작돼 있을 만큼 뛰어난 기술은 역사를 기록 보존하는 최고의 장치라 할 수 있다.

  한지의 기본 재료는 닥나무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는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어 수명이 길다는 특징이 있다. 산지 승원의 특성상 사찰 주변에는 닥나무가 자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맑은 계곡물은 물을 필요로 하는 제지 공정상 최적의 조건이었다. 여러 사찰에서 자연스럽게 한지 제작이 이뤄졌다.

  경전 보급을 위해 스님들이 목판을 판각하고 한지에 인경하는 작업은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통도사는 많은 양의 종이를 제작하는 제지소 역할을 했다. 운흥사처럼 한 곳에서 다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고 목판과 종이를 분담하여 제작하기도 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판각된 이후 여러 곳에 인출되고, 인경 작업을 거쳐 전국 여러 사찰에 인경본들이 보급되었다. 또한 한지는 불상에도 쓰였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잦은 전란으로 이동이 용이한 지불紙佛을 조성했는데, 이를 통해 지호공예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사찰의 스님들을 주축으로 한지 제작과 불경 보급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정책이 국가적으로 시행되고, 동시에 왕실과 귀족, 민가를 중심으로 종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종이 부역은 사실상 사찰에 전가되었다. 불경을 만들던 수준 높은 제지 기술이 강제 노동으로 치환되면서, 많은 사찰이 종이 제작에 한계를 느끼며 폐사 위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종이 제작을 주도했으나, 조선시대 이후에는 여러 사찰이 종이 부역으로 폐사되기 이르고 점차 사찰에서의 종이 생산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통도사는 1838년(헌종 4)에 이르러서야 덕암당 혜경스님의 원력으로 종이 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지의 우수한 보존력

  중국의 선지는 2009년, 일본의 화지는 2014년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화선지라는 말도 중국의 선지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나라의 제지 기술은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지만, 기술을 발전시켜 고려시대에는 중국 내에서 고려지高麗紙라고 불리며 가장 고급스러운 종이로 인정받았다. 원조의 기술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 기술은 610년 고구려에서 담징이 제묵법과 제지법을 일본에 전하면서 일본에도 전수되었는데 이것이 선지의 시작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 제지법을 전수하고 전수받은 관계에서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꽃을 피운 것은 결국 한국이었다. 하지만 근대화를 거치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이후 한지는 급격히 쇠퇴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이 중국과 일본은 본국의 종이를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시키며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의 종이 인쇄 역사를 명확히 들여다볼 수 있는 주제는 바로 '불교'다. 불교에서는 불상이나 탑을 조성할 때 내부 복장伏藏에 여러 물건을 넣게 되는데, 이를 복장유물이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전이다. 석가탑 복장에서 발굴된 「무구정광대다라니」가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된 불상의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유물들은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고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는데, 한지의 보존력이 우수한다 보니 경전이나 기록물이 매우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오래된 책들이 대부분 경전인 점도 이러한 불교 의식에서 기인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신위가 "종이는 천 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말을 남긴 것도 한지의 보존력을 두고 한 말이다. 수량의 측면이나 보존의 질이나 모두 불경이 압도적이다.

  한지의 우수성을 증명하기에 불교전적만큼 우수한 증거자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한지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불교 유산이 한지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제1회 한지의 날을 맞아 휘호를 쓰시는 종정예하

  지난 2020년 한지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끊어진 사찰의 한지 제작 역사 복원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중봉 성파 대종사께서 길이 100m의 초대형 한지를 조성한 것이다. 초대형 불화제작을 목표로 한 공정이었지만, 이를 통해 과거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제지 역사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었다. 특히 통도사는 과거에도 대찰로서 많은 양의 한지 생산이 이뤄졌는데, 서운암 인근에 1천여 그루의 닥나무를 심은 것도 이러한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2022년에는 '한지의 날'을 최초로 선포하며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힘을 모았다. 한지의 날은 매년 10월 10일로, '10x10=100'이라는 의미를 담아 백지白紙라는 뜻이다. 이날 종정예하께서는 대형 한지에 '한지의 날' 휘호를 새기며 한지 세계화에 강한 힘을 실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한지는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화학제지에 밀려 과거 찬란했던 한지의 역사, 한지 장인, 기술, 한지 재료에 대한 연구 등 모든 것이 사라진 역사만큼 지체되었다. 이제 한지는 새로운 도약을 시도한다. 각계 전문가와 가장 많은 한지 유산을 보유한 불교계의 힘이 한데 모여 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종이문화의 근간을 회복하고, 한국 제지 기술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월간통도 20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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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당나라 시대는 선종禪宗이 부흥하던 시대였습니다. 선종에는 5가 7종 五家七宗이라 하여 모두 일곱 갈래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두종牛頭宗의 스님으로 도림道林선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진망산秦望山에서 자라는 커다란 소나무 위에서 수행하였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 스님을 '새 조鳥'자에 '우리 과菓'자를 붙여, 조과선사鳥菓禪師라 불렀습니다. 마치 새 둥지처럼 나무 위에 가부좌를 틀고 산다는 뜻이었지요. 또는 '까치 鵲' 자에 '새집 巢' 자를 붙여 '까치집 스님'이라는 뜻의 작소화상鵲巢和尙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통도사

  어느 날, 당대의 문장가였던 백거이白居易가 항주 지방의 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자사란 오늘날로 치면 도지사와 같은 지방 행정관이었습니다. 그는 진망산에 새처럼 둥지를 틀고 사는 도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스님! 그 나무 위는 떨어질 것 같아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나는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이 더 위험해 보이오."
  백거이는 높은 나무 위보다 자기가 서 있는 단단한 땅 위가 더 위험해 보인다는 조과선사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스님! 나무 위에서 새 둥지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시는데, 깨달은 것이라도 있으면 하나 알려주십시오. 도대체 무엇이 부처님 가르침의 큰 뜻입니까?
  "모든 죄악은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는 것이라네."
  백거이는 조과선사의 그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습니다.
  "그 말은 세 살배기 어린애라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놈아! 세 살배기 아이도 말할 수는 있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법이니라."
  백거이는 조과선사의 그 말씀에 크게 탄복하고서 대나무로 집을 지어드리고는 스님을 머물러 지내게 하고 자주 찾아가 도를 여쭈었다고 합니다. 이 대나무 집은 나중에 광화사廣化寺라는 사찰로 건립되기도 하였다지요.
 
 사실 「법구경」과 조과선사의 대답에 나오는 이 구절은 칠 불 통계게七佛通戒愒라고 하여, 과거세에 출현하신 일곱 분의 부처님께서 공통적으로 말씀하신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 한문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악막작 諸惡莫作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중선봉행 衆善奉行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며,
  자정기의 自淨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시제불교 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생천도生天道, 즉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길을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으로 인해 여섯 가지 세상을 돌고 돕니다. 선업을 많이 지으면 천상이나 인간계에 태어납니다. 하지만 악업을 많이 짓게 되면 괴로운 지옥이나 배고픈 아귀세계, 또는 지혜가 없는 축생들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악을 지으면 악의 허물이 마음에 남습니다. 하지만 선을 지어도 선의 종자가 마음에 남습니다. 선과 악은 상재적인 특성을 지닌 분별지의 경계이기 때문에, 악을 행하면 악의 과보인 괴로움이 오고, 선을 행하면 선의 과보인 즐거움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악을 행한 결과인 괴로움도, 지옥이나 아귀, 축생세계에서 그 과보를 모두 받고 나면 사라지듯이, 선을 행한 결과인 즐거움도 인간이나 천상세계에서 그 복을 모두 받고 나면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다시 또 자신이 지은 선업이나 악업의 결과에 따라 여섯 세계를 돌고 돌며 윤회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칠 불 통계게의 세 번째 구절에서는 '자정기의', 즉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선업도 비우고 악업도 비워서 그 어떤 허물이나 번뇌도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해탈도解脫道, 즉 완전히 육도윤회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가르침입니다. 실로 불교에서 추구한 진정한 선善이란 바로 해탈과 열반을 말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에는 주로 출가한 수행자들에게 설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출가와 재가의 수행자 모두를 보살菩薩이라 부르며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재가자들에게도 해탈도의 가르침이 설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이라는 여섯 세계를 윤회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인 업종자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착한 행동을 한 사람은 즐거운 과보를 받게 되고,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은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착한 행동을 더욱 하도록 장려하고, 나쁜 행동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하는 윤리적 가르침을 먼저 일러주셨습니다. 세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상, 당시 출가한 수행자들처럼 완전히 세속을 벗어난 수행은 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천상세계에 태어나기 위해 행하는 대표적인 선행으로서 보시와 지계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보시란 부처님이나 청정한 수행자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지계란 재가자들에게 부여된 계율인 삼귀의계三歸依戒와 재가오계在家五戒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삼귀의계란, 부처님과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청정한 수행자들의 무리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재가오계란, 산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남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으며, 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간음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향 香

  재가오계 중에서 앞의 네 가지는 그 행위의 성품 자체가 죄가 되기에, 이를 금한다는 뜻에서 '성계性戒'라 부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마지막 계율은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는 사실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는 것처럼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술을 마심으로써 정신이 혼미해져서 다른 수많은 죄악을 짓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이를 막기 위한 계라는 뜻에서 '차계遮戒'라 부릅니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라'는 제악막작諸惡莫作과 중선봉행衆善奉行의 가르침과는 달리,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자정기의自淨基意의 가르침은 출세간의 해탈도로서 세간의 생천도와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법구경」에는 아래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일반적인 세간의 가르침에서는 사랑은 좋은 것이니 해야 하는 것이고, 미움은 좋지 않은 것이니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출세간의 해탈도는 설사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번뇌의 허물을 남긴다면 비워버려야 할 것이 됩니다. 물론 이미 마음을 청정히 하여 반야의 근본지혜를 얻은 법신보살이 중생의 제도하기 위해 무소주심無所住心, 즉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자비행이나 방편행의 경우에는 허물이 되지 않습니다.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이라 하여 허공과 같이 톡 트인 마음에서 진정한 자비심이기 때문이지요.
 
 
월간통도 20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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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적멸보궁 사리탑

  옛날 인도 코살라국에 파세나디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쟁에서 패하여 돌아가던 와중에 너무나 피로하여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쓰러져 잠이 들게 됩니다. 그때 그 정원을 관리하던 여종 말리카는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잠든 나그네가 왕인지도 모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극히 보살피게 됩니다. 이후 그녀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동한 파세나디왕은 그녀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말리카 왕비는 신분도 비천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인이 아니었지만, 항상 지혜롭고 공손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을 잘 돌보았기에 궁중의 다른 왕비들까지도 그녀를 좋아했습니다. 파세나디왕은 이런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혼자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 이것은 예외가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일지 모른다. 말리카는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파세나디왕은 말리카 왕비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고는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왕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대왕이시여,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는 대왕보다 저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남편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라 믿었던 왕은 상심하여 왕비와 함께 부처님을 찾아가 진실한 답면을 듣고자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이시여,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듯이 남들 또한 그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남을 괴롭히거나 해쳐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내가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듯 다른 중생들도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니, 나 자신을 아끼는 만큼 다른 중생들도 나처럼 아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화에는 또 다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지신을 위한 삶의 여백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구경」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도 좋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공간도 남겨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아끼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정말로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제대로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소중한 구슬들이기 때문입니다.

 

 

 

 

월간통도 2023.05_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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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

몸에 집착하지 마라!

 

  극심한 고통은 더욱더 심해만 가고, 알아차림은 도무지 힘을 못 쓴다고 절절히 토로하는 장자에게 사리뿟다는 이렇게 말한다. "장자여, 그대는 이렇게 공부 지어야 합니다. '나는 눈을 취착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알음알이(식 또는 인식)는 눈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여, 그러면 나의 알음알이는 귀·코·혀·몸·생각(mano 意)을 취착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나의 알음알이는 귀·코·혀·몸·생각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부 지어야 합니다."

 

  먼저, 고통이라고 '아는 마음' 또는 '느끼는 마음'인 '식 또는 인식을 그 원인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 원인은 취착과 취착을 동반한 오온이다. 취착은 '취하려고 집착하는 마음'으로 '갈애 또는 집착'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몸에 장착하고 있는 뿌리 기능인 육근六根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는 이미 취착이 담겨 있다. 내 몸에 이미 장착된 취착[업]이 외부 대상과 만나게 되면서, 그것은 순식간에 표면으로 떠올라 행(行: 상카라, 업력)으로 구현된다. '나'라는 것은 '업과 업력의 작용' 또는 '업과 업력의 소용돌이'인 것이다.

 

  이렇게 사리뿟다 존자는 육 근에서 시작한 취착과 그것을 아는 마음(인식)이, 어떻게 부단히 다단계를 밟아 어느새 고통이라는 느낌 덩어리로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다시 말해, 존자는 장자에게 '고통의 구성 요소들'을 속속들이 들추어내어 '고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낱낱이 일깨워준다. 해당 경전상의 길고도 상세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육근이 대상과 만나 육경(색성향미촉법: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한 취착과 그것을 아는 알음알이(또는 인식)가 일어난다. 다시, 육경에서는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이라는 육식의 취착이 일어나고, 그것을 아는 인식이 또 일어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육식에서는 육촉(감각접촉)이라는 취착이 일어나고, 다시 그것에 대한 인식이 따라붙는다. 다시 육촉에서는 육수(느낌)라는 취착이 일어나며,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이 또 생겨난다. 이렇게 '취착'과 그것을 아는 분별심인 '인식'에 속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다잡으라고, 존자는 장자에게 끊임없이 권유한다.

 

날숨들숨에 대한,

'한 지점'에서의 알아차림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약은 실제로 아픈 데를 낫게 해 주기보다는,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신경계통 약이 많다. 고통이라는 느낌에 대한 인식의 차단을, 약이 아니라 부작용 걱정할 일 없는 위빠사나 통찰지로 하는 것이다. 존자가 설법한 고통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 어느 단계라도 알아차림이 들어가면 그것을 차단할 수 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고통은 절반으로 뚝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고통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인지 모르는, 또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로부터 온다. 그것이 덩어리로 인식되는 한, 그것에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몸이라는, 고통이라는, 나라는) 덩어리를 '해체해 버리는 방법'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밝혀놓으셨다.

 

  물론 나의 밑바닥까지 관철해 버리는 선정과 통찰 지를 키워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부단히 바르게 차근차근해나간다면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윤회는 (부처님 말씀대로) 반드시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걸음은 아나빠나삿따, '날숨들숨에 대한 알아차림'부터 라고 「대념처경」에는 설해져 있다. 호흡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수행은 시작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지점'에서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호흡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지점에서 알아차림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대념처경」 첫머리의 요지는 '한 지점 집중'이다. 그리고 집중 지점은 '전면'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인중 부위'를 말한다. 즉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구'의 '전면'을 말한다. 여기서 호흡 또는 호흡 관찰이라는 용어가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호흡'이라는 용어는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재의 호흡이 아니라 관념의 호흡을 상상해서 본다. 개념의 호흡을 부여잡고 있는 한 수행에 진전은 없다. '호흡'이라는 용어 대신 '공기 또는 바람의 움직임'이라고 명명하면, 우리는 '개념의 허상'에서 '실재實在의 진실'로 바로 소환될 수 있다.

 

'고통의 만들어지는 과정'

산산이 해체하다

 

  수행의 요점은 '한 지점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대상은 들어오고 나가는 바람(풍대)의 움직임이다. 쉽지 않은 첫 단계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설정한 그 지점에서 자꾸 딴 데로 가지 않고, 미끄러지지 않고, 알아차림을 1초에서 10초로, 10초에서 1분으로, 1분에서 30분으로 늘려나가며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뿌연 흰 구름 같은 니밋따가 뜨고, 그것이 확대되고 투명해지면서, 나의 몸은 없어지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 대상과 나의 의식이 하나 된 선정 삼매의 상태가 된다. 이 같은 청정한 마음 상태에서 대상을 꿰뚫는 위빠사나 통찰지가 섬광처럼 나온다. 순식간에 작용하는 오온의 스피드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그것을 포착하는 통찰지. 덩어리로 나를 흔들던 무명(또는 오온)은 그 실체를 드러내며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임종의 순간, 사리뿟다 존자의 위대한 설법을 들은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펑펑 문물을 흘리게 된다. "존자시여, 저는 더 이상 취착이 생기거나 실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설법이 끝난 뒤, 얼마나 지나지 않아 장자의 몸이 무너져 죽었다. 하지만 마음은 더욱 진보하여 예류과(수다원과)를 성취하고 천신의 몸을 받게 된다.

 

 

월간 통도 20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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