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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비각

 

  건축물은 목적과 쓰임에 따라 지어집니다. 통도사 가람의 중간 전각인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명부전, 응진전, 용화전, 영산전 등 '전殿' 자가 붙은 곳은 불보살님을 모시고 있으며 위계가 높은 건물입니다. 또 응향각, 범종각, 산신각, 가람각 등은 전에 비해 위계는 낮지만 뚜렷한 목적을 갖고 건립되어 가람의 일부를 이루는 건물입니다.

  그렇다면 통도사에서 가장 큰 건물은 어딜까요? 대규모의 법회를 개설하기 위해 건립한 설법전입니다. 1992년 당시 국내 최대 목조건물로 건립하여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500평의 규모에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장 작은 건물은 어딜까요? 기붕만 있고 벽이 없으며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건물입니다. 바로 세존비각世尊碑閣입니다. 비碑란 공적을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이요, 각閣이란 다시 그 비碑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세존비각을 지으며 지은 기문(세존비각비, 1792년)의 일부입니다. 다시 말해 1706년 세워진 사바교주석가여래 영골사리부도비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는 아주 작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비각은 1792년 세워졌으니, 비석보다 86년 후에 지어진 것입니다.

  세존비각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가장 근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사리' 관련 내용이 있으므로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설명과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겨 금강계단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문화재 해설서인 것이지요.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사리부도비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사리부도비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사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왜적으로부터 부처님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스님들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1706년에 비석을 세웠을까요?

 

                    명나라 홍무 10년(1377년) 정사년에 왜구가 양주에 들어와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월송대사가 구덩이를 파서 숨겼다.

                    다시 찾아서 짊어지고 도망가는데 추격이 급해지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려 벗어날 수 있었다.

 

  사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범절 할 수 없는 신성한 가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비 이후 여러 나라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다툼 직전까지 갔다는 기록을 보면, 사리는 '신성한 보물'로서 훔치고 싶고 갖고 싶은 대상이었을 겁니다. 왜구들이 끊임없이 수탈해가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1377년에는 사리를 온전히 지켜냈지만 다시 또 사리는 수탈의 위기를 겪습니다.

 

 

                 선조 임금 임진년(1592년) 왜구가 크게 전쟁을 일으켜

                 영남 지방이 먼저 왜군의 침입을 받아 죽음과 불태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금강계단도 그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마침 사명대사 유정이

                 의승장으로 온 힘을 다하여 사리를 완전하게 지켰다.

 

  왜적들이 끊임없이 사리를 수탈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통도사 스님들은 사리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사명대사 유정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휴정대사에게 사리를 전해며 지켜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고민하던 휴정스님은 사리를 다시 남쪽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영축산은 수승한 곳으로 문수보살의 명을 받은 자리이다· · ·.

              저들의 뜻을 관찰해보면 얻고자 하는 것은

              황금과 구슬이지 믿음의 보배는 아니다.

              그러니 전과 같이 단에 봉안하고 수리하는 것이 좋겠다.

 

  사명스님은 휴정스님의 뜻을 이해하고 금강계단을 다시 온전히 수리하여 모셨습니다. 그리고 1706년 계파 성능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성능대사는 마지막 문장에서 "내가 방장산으로부터 와서 백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성골을 외람되어 봉안하고 예를 올리며 보단을 중수하고 비석을 새겼다. 일을 마치자 슬픔과 감격으로 눈물을 쏟으며 삼가 발문을 쓴다."고 남겼습니다.

 

  세존비각이 건립된 목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그 숨은 뜻은 역사의 기록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고자 함이었을 겁니다. 사실 비문의 내용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사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금강계단을 지켜온 스님들의 마음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작은 건물 속, 가장 깊은 이야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월간통도. 202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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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또는 연인, 부모와 자식, 도반과 동료 등 주변인들로부터 관심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사랑받고자 하는 집착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 중 하나다. 갓난아이가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이는 하나의 개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겠다. 관심과 보살핌으로 위태로운 생명, 몸과 마음은 안정을 찾고 성장을 한다.

  불교에서는 사랑받고자 하는 집착을 '갈애'라고 한다. 갈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란 용어의 단순한 뜻을 넘어, 존재의 뿌리와 직결되는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불교에서 갈애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집착'으로 우리를 '윤회하게 만드는 근원적 마음'으로 설정된다. 《앙굿따라니까야》에는 우리 몸을 존재하게 하는 요소의 네 가지로  "자양분 · 갈애 · 자만 · 성교"를 들고 있다.

 

  우선, 이성 간의 끌림에 있어 애욕인지 사랑인지부터 구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집착인지 희생인지 구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욕은 집착에 근간을 두고, 사랑은 연민에 근간을 둔다. 여기서 애욕과 사랑을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너는 나로 인해 행복하니?"라면 사랑이고, "너는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니?"라면 집착이다. 상대방의 행복이 안중에 없는 관계라면, 그저 내 욕망 채우는 비인간적인 관계일 뿐이다. 연인 사이 · 남편과 아내 사이 · 부모와 자식 사이 · 스승과 제자 사이는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집요한 불만과 강요가 계속된다. 또 희생이라는 탈을 쓰고 억울한 집착은 계속된다.

 

자비의 상징<수월관음도>의 부분, 》, 미국 하버드대학박물관 포그아트뮤지엄 소장

  불교에서는 '감각적 욕망은 여의어야 하는 것'이고 '자비는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성욕과 자비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방법으로 부정관不淨觀을 가르치셨다. 육체의 더러운 실체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 아름답다는 착각과 끌림에서 벗어나 오히려 염오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부정관으로 그러한 착각을 다스리도록 가르치셨다. 물론 통찰지가 균형을 이루면 염오 하는 마음을 넘어 연민하는 자비의 마음이 나온다는 논리이다.

 

  자비는 바라는 것 없고 분별하지 않는 무조건적이고도 무차별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대상은 나와 친밀함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 또는 모든 존재로 확대된다.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일 때. 우리는 드디어 결핍의 감옥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을 구현하는 존재를 불교에서는 '보살'이라 한다.

  자비를 통해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 보살! 많은 보살 중에서도 자비의 대명사는 <관세음보살>이다. 《화엄경》에는 '보살의 마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아이가 삿된 견해에 빠져 인생을 헤매고 있는데, 혼자 깨달음을 구해 무엇하나. 어떻게든 아이를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헛된 고통에서 끌어내어 빛을 향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아이'는 우리들 '중생'을 말하고, '삿된 견해'는 '내가 있다'는 착각이다.

 

  부처님은 자비 또는 자애를 방사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무기'라고 표현하셨다. 《법구경》의 게송 40번 이야기를 보면 「자애경」을 설하게 된 인연과 그 내용이 나온다. " 살아 있는 생명이면 어떤 것이나/ 갈애가 있거나 없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태어났거나 태어날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귀신으로 모습을 나타내어 수행을 방해하는 목신들을 향해,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발원하는 「자애경」을 암송하니 그들의 공격성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따사로운 감정이 솟아나, 이제 수행자를 방해하기는커녕 호위하고 모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보호하는 무기로서 <자비관>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비를 방사하는 대상은 먼저 (1) 나 자신 (2)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또는 가까운 주변인 (3) 중립적인 사람 (4) 미워하는 사람의 순이다. 가장 먼저 '나에게 자애를 방사해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해 '불만 또는 성냄의 아픈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한 결핍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삿된 견해를 가장 가까운 주변에 투영하여, 그들이 사랑을 주지 않기 때문에 본인은 불행하다는 논리이다.

 

  <자비관>의 발원 문구는 이렇다. (1) 내가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2) 내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3) 내가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4)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다음으로 주변인과 타인으로 옮겨가는 방식을 염송 하면 된다. 이러한 <자비관>의 염송은 타인에 대한 또 세상에 대한 나의 오염된 반응체계를 정화시킨다. 중생들은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체례를 장착하고 있다. 그래서 칭찬보다는 질투를, 사랑보다는 미움을, 도움보다는 공격을, 격려보다는 헐뜯음을 즐겨한다. 고통을 초래하는 이러한 오염된 업장을 정화하는 첫걸음이 바로 <자비관>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베루는 보살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공성空性을 깨달은 보살은/ 만물을 실재로 간주하는 마구니에 사로잡힌/ 중생에게 특히 자비심을 일으키네"라고 한다. 먼저 자신이 공성, 즉 무아無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특히 고집부리는, 특히 심한 편견과 차별에 사로잡힌 중생이 더없이 불쌍해 보인다고 한다.

 

 

 

 

 

출처 : 월간통도 20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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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돈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질투하는 것을 이르는 속담이다. 질투는 험담과 모함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많다. 그러한 폐쇄적인 풍토성 때문인지, 비교 대상의 폭이 좁은 탓에 서로 견주며 질투가 심한 편이다. 

부처님이 진리의 설법을 하는 모습./ <법화경> 권1의 변상도 부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감지금니시경: 1340년 <묘법연화경> 7권본 / 일본 니베시마 보효회 소장

  "질투는 자만과 어리석음과 함께 일어난다."라고 「오위백법五位百法」에 나온다. 내 속의 '자만과 무지함'이 대상과 만나면서 질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즉 내 속에 자만과 무지함이 없다면 질투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진심(瞋心, 성내는 마음 또는 화내는 마음)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심소 중 하나로 질투를 꼽고 있다. 쉽게 말해 질투는 성냄과 동반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냄의 특징은 잔인함이다. 성냄은 잔인함을 특징으로 하며, 한 모금의 독처럼 퍼지고, 자기의 의지처를 태운다."

  질투를 동반한 성냄은 "자기의 의지처", 즉 질투하는 본인에게 독처럼 퍼져 스스로를 태운다는 것이다. 해로운 번뇌의 마음부수[불선심소]로 규정하고 있다. 우월한 상대를 보고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스스로의 결핍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질투와 욕설이 자신의 '낮은 자존감'에 근거한다는 것을 본인은 일절 알지 못한다. 철석같이 상대가 잘못되었다고, 문제가 있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스스로를 태운다.

  질투의 반대가 되는 것은 '수희隨喜'이다. 수희는 '같이 기뻐함'이란 뜻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선심소로 규정된다. 타인의 성공을 보고 '질투할 경우'와 '수희 할 경우', 반응을 둘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질투는 마치 원수처럼 말로 성내고두 들켜 패는 잔임함을 드러내고, 그 성냄이 독처럼 퍼져, 자신을 숲 속의 불처럼 훨훨 태운다." 결국 자신에게 매우 괴로움을 일으키는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희의 어원은 '무디타'  팔리 또는 산스크리트 인데 '기쁨'이란 뜻이다. 타인의 잘됨 또는 안녕을 내 일처럼 기뻐하는 이타적인 공감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자녀의 성취와 성공을 기뻐하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다고 하겠다. 하지만 자랑거리 또는 자부심과 혼동하면 안 된다. 수희는 몸과 마음이 '나'라는 집착하는 아상과 이기심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을 말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공덕이 되기에, '수희'와 '공덕'의 두 단어는 붙여서 '수히공덕' 한 용어로 부른다.

  "여기 모든 수행자들이여! 부디 그대의 마음이 이타적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라. 그래서 온 세상이 이타적인 기쁨으로 계속 가득하여, 적대감이나 악의 없는 그것으로 끝없이 넘치게 하라."라고 석가모니 붓다는 말씀하셨다. 또 수희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샘'이라고도 표현된다. "이 샘물을 더욱 깊이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자신 스스로의 풍요로운 행복 속에서 깊이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타인의 기쁨을 함께하는 행복이 더더욱 풍성해진다." 남이 성공에 수희 하면 할수록, 자신이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수희공덕품」에는 진리의 설법을 듣고 '따라 기뻐한 공덕(수희공덕)'이 얼마나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인지 역설하고 있다. 「 수희공덕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진리의 내용을 듣고 진실되게 공감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전달하게 된다. 이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한 인연은 일파만파를 일으켜, 진리가 바다처럼 파도치게 되는 공덕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 근기가 예리하고 지혜가 있으며, 백천만 번 태어나도 벙어리가 되지 않고,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나지 아니하며, 혀는 항상 병이 없고 입도 또한 병이 없으며, 치아는 때가 끼거나 검지 않으며 누렇지도 않고 성글지도 아니하며 빠지지도 않고 굽거나 덧니가 없으며 입술이 아래로 처지지도 않고 위로 걷어 붙지도 아니하며 거칠지도 않고 헐지도 않으며, 또는 언청이나 비뚤어지지도 아니하며 두껍지도 않고 크지도 않으며 검지도 않고 여러 가지 추한 것이 없으며, 코는 납작하지도 않고 비뚤어지거나 굽지 않으며, 얼굴색은 검지도 않고 좁고 길지도 아니하며, 또는 움푹하게 들어가 비뚤어지지도 않아 나쁜 인상이 하나도 없으며, 입술과 혀와 치아가 모두 보기 좋고, 코는 길고 높고 곧으며, 얼굴 모양이 원만하고, 눈썹은 높고 길며, 이마는 넓고 평정하여, 인상이 모두 훌륭하게 갖추어졌으며, 세세생생에 다시 태어나는 곳마다 부처님을 만나 뵙고 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믿고 받으리라." 좋은 구업[수희]을 지으면 단정한 입 모양과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게 되는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나쁜 구업[질투]을 지으면 단정치 못한 입 모양과 추한 용모를 갖게 된다는 것이겠다.

 

  "질투하면 내가 불타게 되고, 수희 하면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질투하면 내가 추하게 되고, 수희 하면 내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이는 인과를 말하는 불교에서 당연한 논리이다. 질투를 하면 질투하는 대상이 가진 우월함이나 성공을 내가 결코 가질 수 없게 된다. 반면 수희하면 언제 가는 반드시 나는 대상이 가진 우월함과 성공을 만끽하게 된다는 철칙이다. 이것은 '한 대로 받는다.'는 인과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질투를 하면 계속 질투하는 상황만 내게 오고, 수희를 하면 계속 수희 하는 상황이 내게 온다는 것입니다.

 

 

 

 

 

 

 

 

출처 : 월간통도 202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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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 행자들 / 통도사

  스님들 사이에 "행자 때 지은 복으로 평생 중노릇한다."는 말이 있다. 대중을 위한 하소임을 수행으로 여기며 살아온 행자의 삶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예전에는 행자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간 행자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가 되면 여섯 달 정도 행자생활을 한 뒤 계를 받고, 강원에 가서 4년간 공부하여 구족계를 받는 스님들이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자율적인 기간을 적용하는 사찰이 더 많았다.

  행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삭발이다. '머리를 깎는다.'는 말이 출가를 뜻하듯이, 삭발은 속가와 단절된 출세간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징표라 할 수 있다. 삭발하면서부터 비로소 행자로 받아주었는데, 머리를 깎아주는 시기 또한 사찰마다 달랐다.

  본래 행자는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행자를 마치고 예비 스님이 되는 수계를 득도식이라 불렀다. '득도'란 정식으로 불문에 든다는 뜻으로, 이때 머리를 깎아준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얼마간 지켜본 다음 스님이 될 자질이 있으면 삭발을 허락했는데, 이는 일찍부터 출가자로서 스스로 마음가짐을 다지게 하려는 뜻이 크다. 그 뒤 점차 삭발에 의미를 두면서 행자의 머리를 깎아주는 것을 득도식이라 부르고 있다.

  정식으로 행자가 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절에 들어와 살면서 얼마간의 시간을 거치도록 한 것은 물론, 아예 받아주지 않는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사찰마다 행자가 적지 않았는데, 절 살림이 힘들어 스님들도 각자 자비량을 니고 머물던 시절이었으니 행자를 무한정 수용하기가 힘들었을 법하다.

  따라서 큰 절에서는 행자실로 입방 하기 전까지 사찰 일꾼들과 함께 기거하며 일하도록 하는 곳이 많았다. 출가자의 자질을 인정받으면 비로소 머리를 깎아주고 행자복을 입게 한 것이다. 이후 행장들은 수계 때까지, 후원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한편으로 초심자의 공부를 익히며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처럼 삭발하여 정식 행자로 입방 하는 단계, 행자로 살아가는 단계를 차례로 거쳐서 비로소 사미·사 미니계를 받을 수 있었다. 긴 통과의례를 거치고 법복을 갖추어 '새 중'이 된 제자는, 은사와 함께 산중 어른들께 인사를 다니게 되는 것이다.

통도사 공양간에서 소임을 보는 행자의 모습

  속가에서 편히 살다가 출가해 호된 고생을 하며 성장해 가는 스님들의 행자생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행자시절이 매운 시집살이에 비유되고, '행자는 절집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말도 회자된다. 우연히 인연을 맺은 은사가 "보리 동냥해서 갱죽 끓여 먹어가며 수행할 자신이 있는가."라며 고생을 예고하는가 하면, 인연이 닿지 않아 이 절 저 절로 떠돌며 행자생활을 거듭하기도 했다. 

  행자가 많을 때는 거친 일부터 차례로 맡았다. 처음에는 나무를 해오는 부목, 아궁이에 불을 때는 화두, 물을 길어 오는 수두 등의 소임이 돌아왔다. 다음 행자가 들어오면 선임은 상을 차리는 간상 등을 맡고, 점차 국을 끓이는 갱두, 반찬을 만드는 채공을 거쳐 밥을 짓는 공양주를 맡게 된다. 찌개만 전담하는 '찌개행자'를 두거나, 선임과 후임이 짝을 이루어 상하 관계를 이루기도 하였다.

  일상의 후원 소임뿐만 아니라, 논농사 ·밭농사와 산나물 캐기까지 대중이 함께하는 울력에도 앞장서는 소임이 행자였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일이 많고 고된 나날이라도 새벽예불에는 빠질 수 없었고, 예불을 마치고 후원으로 달려가 공양 준비를 했다. 그런 가운데 행자로서 익혀야 할 공부도 있으니, 일하면서 경전을 외우고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두드리며 천수경을 외우던 시절이었다.

  1970~1980년대부터 행자 기간이 여섯 달로 정착되었지만, 가장 아래 소임으로 사중을 뒷받침해야 하는 삶은 늘 고되기 마련이다. 근래 통도사로 출가한 행자들의 경우, 일과는 오전 3시 40분 경이 시작된다. 조석과 사시의 삼시예불에 참여하고, 후원에서 세 차례 공양간과 주방을 오가며 밥과 반찬 만드는 일을 돕는가 하면, 사중의 곳곳을 청결히 정돈한다.

  초심자로서 정진과 습의에도 소홀함이 없다. 오전에는 행자실에서 교리와 경전을 익히며 정진하고, 오후에는 행자로서 익혀나가야 할 습의 교육이 이루어진다. 저녁예불을 마친 행자들은 통도사만의 독특한 의식을 이어나간다. 불이문 앞에서 대웅전을 등진 채 '옴! 불, 법, 승'을 외치고, 다시 대웅전을 향해 합장 반배하는 것이다. 떠나온 곳을 향한 다짐의 외침이자 가야 할 곳을 향한 확신의 외침이니, 더없이 여법한 수행자의 하루 마무리이다.

 

  대방은 행자들에게 선망의 공간이었다. 큰스님부터 학인스님에 이르기까지 대방에 모여 여법하게 발우공양을 하는 모습, 강원 ·선원의 대중이 경전을 읽거나 참선에 든 모습을 보면 신심이 절로 나곤 하였다. 하루빨리 그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물을 긷거나 나물을 다듬으러 대방 앞을 지날 때마다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발우공양 때 행자가 전체 대중과 함께하기 힘이 들었던 듯하다. "행자들은 공양할 때 윗스님들과 같이 못 앉았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어림도 없었다.", "행자와 학인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라서 한자리에 편히 앉지 못할 만큼 규율 엄했다."는 스님들의 말처럼, 아직 승려 신분이 아니기에 대방에 나란히 앉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일찍부터 행자들을 발우공양에 동참하게 하는 사찰 또는 드물지 않았다.

  무엇보다 행자 시절의 그러한 간절함에서 뚜렷한 초심자의 신념을 느낄 수 있다. 노스님들이 출가 이후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행자시절을 꼽은 이유도 그 시절의 간절함 때문이다. 경전 공부나 참선 공부보다 초심 시절의 공부가 더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갖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그만한 수행이 없었고, 신심이 솟아오르던 시절이었기에 고생 또한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출가하여 처음 배운 「초발자 경문」이 행자시절의 큰 지침이 되어, 이후에도 힘들 때마다 출가의 발심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 확신이 서면 현재의 고난 또한 의미 있는 것이 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을 용맹정진으로 무사히 마친 자만이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에 양관스님의 다음 글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바쁜 와중에서도 공부하고 소임에도 충실했던 행자들은 무사히 사미계를 받고
마치 연어처럼 강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피로에 지쳐 공부는 뒷전이었던
행자들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던 일도 생각난다."

 

 

 

출처 : 월간통도. 202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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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시 巳時(am 09:00 ~11:00) 무렵이면 마지 올리는 학인스님들의 발길로 통도사 후원은 바삐 움직인다. 본전의 부처님을 시작으로 각 법당에 공양을 올리기 위해 공양간에서는 매일 정성껏 밥을 지어 굽다리그릇에 담는다. 불기 佛器에 소복이 담긴 고봉의 마지는 사찰 후원에서 피워내는 신성한 꽃과 같다. 흰색이 지닌 성스러움과 봉긋하게 풍요로운 모습은 '밥'이 지닌 보편의 가치와 함께 부처님께 올리는 최상의 공양물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

  마지는 '공들여 만든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새겨 한자로는 '摩旨'라 쓰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다. 윤창화 선생은 마지가 범어 梵語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범어로 'maghi' 가  '영약靈藥의 약초'를 뜻하고, 당나라의 불교용어사전에도 한자는 다르나 음이 같은 '마지'가 있어 이를 신단神丹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어를 한국불교에서 한자로 음차音借했을 법하다.

  아울러 마지는 어른의 밥을 뜻하는 우리말 '진지'와 같은 어미語尾를 지녀, 두 용어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선후관계를 단언할 수 없지만 마지가 'maghi'에서 왔다면, 부처님의 밥을 공경의 뜻으로 '마지'라 부르게 된 데서 '진지'가 파생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지 또한 맛있는 음식을 뜻하는 '지旨'를 어미로 두기에 적합한 '珍旨'라 쓰기도 한다. 초기에는 한자가 없었더라도 그에 적합한 뜻으로 표기한 셈이다.

  사시에 올리는 불공은 부처님 재세 시 오후불식을 한 승단僧團의 공양 법식에서 유래하였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정오가 되기 전 하루 한 끼 공양하던 시간에 맞추어 정성껏 지은 밥을 올리며 행하는 예경 의식이기에, 이때 올리는 예불을 사시불공·사시예불이라 부른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암자에서도 출가 · 재가의 제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본사本師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각 전각에 마지를 나르기 시작하면서 공양간 가마솥에는 대중스님들의 오공午供을 위한 밥을 준비한다. 부처님의 사시 공양이 끝나고 그 뒤를 이어 제자들이 오시午時 공양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쌀에 돌과 싸라기가 많아 마지 올릴 쌀은 택미가 필수였다. 큰 상에 한지를 펴고 쌀을 부은 다음, 깨진 쌀은 물론 금이 간 쌀과 이물질을 일일이 골라내고 체로 걸러 작은티까지 모두 없앤다. 택미는 스님들이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 하여 재가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행하는가 하면, 마지 쌀에 쓰는 조리나 바가지를 따로 구분하기도 했다.

  또한 밥을 짓는 공양간과 반찬을 만드는 채공간을 따로 두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마지에 반찬 냄새가 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찰 부엌이 현대식으로 바뀌고 효율성을 우선하면서 이러한 풍습도 조금씩 바뀌었지만, 마지 쌀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정성 들여 마지를 짓는 데는 변함이 없다.

  마지 올릴 전각이 많은 큰 절에서는 솥을 따로 두었다. 지금도 장작불을 때어 밥을 짓는 통도사에는 전통 공양간에 네 개의 커다란 가마솥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맨 왼쪽의 것이 마지솥이다. 공양간 외벽에 전각 명칭을 스무 개 남짓 써놓은 탁자를 두고, 밥이 다 되면 이곳에서 각 전각의 불기에 마지를 뜨게 된다. 빈틈없이 계량해서 짓고 뜨니 마지 솥의 밥은 한 톨도 남지 않는다.

통도사 마지올리는 학인스님

  마지 올리는 소임은 학인스님들의 몫이다. 맨 먼저 대웅전에 올릴 마지가 나가면, 차례로 각 전각의 마지 올리기가 시작된다. 마지를 나를 때는 불기 밑부분을 오른손으로 받쳐 어깨 위로 올리고, 왼손은 오른쪽 팔꿈치를 받친 수 조심스레 걷는다. 도중에 큰스님을 만나더라도 절을 올리지 않는데, 이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무렵은 사시불공에 동참할 신도들이 절을 찾으면서 활기찬 움직임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학인스님은 대웅전 불단에 마지를 올리고 나서, 노전爐殿스님이 헌좌진언을 할 무렵 법당의 소종을 다섯 망치 울리고 마지 뚜껑을 연다. 부처님께 마지를 올린다는 신호로 이를 '마지쇠 · 마지종'이라 부른다.

  대웅전 마지를 올리고 나오면서 법당 바깥에 있는 소종을 다시 울리게 된다. 법당 안의 마지쇠가 부처님과 동참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라면, 법당 밖의 마지쇠는 각 전각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렇게 바깥 종성鐘聲으로 대웅전 마지 신호를 보내면, 각 전각에서 마지를 올리는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상의 마지는 백미로 지은 쌀밥이지만, 명절이면 불단에도 다채로운 절식이 마지로 오른다. 설날의 '떡국 마지'에서부터 대보름의 '오곡밥 마지', 동지의 '팥죽 마지'가 있고, 추석에는 쌀밥과 송편이 오르게 마련이다. 특별한 음식을 만들면 집안 어른께 먼저 드리듯이, 세시歲時에 맞는 음식을 부처님께 올리면서 제자들이 함께 공양하는 의미가 자연스레 실천되는 것이다.

  불단佛壇만이 아니라 각단各壇에도 마지가 오른다. 일상의 마지를 올리는 대상이 불보살에 국한되지 않고 산신 ·칠성신 ·조왕신 등에 이르기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 근래에도 부처님 마지를 지었을 때 다 함께 올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존격에 따라 마지 올리는 시간을 구분하였다.

  여러 의식집에 "사성四聖은 오전에 모시고, 육범六凡은 해질녘에 부른다."라고 했듯이, 본래 하단의 신격은 오후에 청하였기 때문이다. 사성은 불 ·보살 ·성문 ·연각이고, 육범은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윤회하는 중생이니, 존격에 따라 일상의 마지 시간을 구분한 것이다. 따라서 산신 ·칠성신 ·조왕신 등의 경우 사시에 함께 올리지 않고 늦은 오후에 따로 올렸다.

  예불을 마치면 마지를 중단으로 퇴공하여 중단예불을 올리고, 모든 전각의 마지를 퇴공 솥에 모아 대중공양으로 삼게 된다. 예로부터 신도들은 불단에 올랐던 마지를 귀하게 여겼다. 그 밥에 부처님의 가피가 깃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 밥을 먹는 존재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시불공을 마치면 헌식獻食 소임의 스님이 밥 한 술을 덜어 헌식대에 올려두는데, 이는 굶주린 이류중생異類衆生을 위한 보시이다. "헌식 공덕은 더없이 크다."고 하여, 예전에는 법랍 높은 스님이 헌식 소임을 맡을 수 있었다.

  이처럼 마지는 초월적 존재에게 올리는 공양물이지만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듯이 내려서 먹는 것이기에, 마지를 둘러싼 후원문화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부처님께 올린 마지가 신중과 사부대중에게 이어지고 굶주린 생명에게까지 베풀어지니, 널리 퍼져가는 마지 공덕이 무량하기만 하다.

 

 

 

 

월간통도. 20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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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 질문은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질문과 같다. '존재 = 고통'이라는 붓다의 고성제 苦聖諸 다음으로 붓다께서 말씀하신 집성제는 고성제의 원인을 설하신 것이다. 즉 고통 또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풀어놓으셨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고 나아가 통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소멸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겠다. 즉 존재를 소멸할 수 있는,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길 말이다. 존재나 윤회라는 다소 어렵고 느껴지는 말 또는 목표보다는, 당장 현재의 감정·번뇌 ·괴로움 ·문제를 타파하는 묘법이라는 표현이 더 와닿을 것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이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집성제]인가? 그것은 재생 再生을 일으키는 갈애이다. 즐거움과 탐욕을 동반하고, 항상 더 새로운 즐거움을 여기저기서 찾는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며 어디서 자리 잡는가?"

 

  집성제의 '집集'은 집착 ·취착 ·탐착 ·갈애를 말한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갈애는 들러붙고 유지하려는 성질을 갖는다. 그러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대념처경》의 「집성제」에 나오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구성 요소'로서 오온(색수상행식)의 작용을 간략히 알기 쉽게 요약한다. '존재 = 고통 = 오온'은 모두 같은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붓다의 말씀을 따라가 보자.

석가모님 부처님과 마군(고통)의 총공격. <팔상록> 수록 삽화

  먼저 우리 몸에 장착되어 세상과 소통하는 육근(안이비설신의) 자체에 이미 갈애(탐착)는 내장되어 있다. 눈은 더 아름다운 것을 찾고, 귀는 더 감각적인 소리를 찾고, 토는 더 향기로운 냄새를 찾고, 혀는 더 맛있는 음식을 찾고, 피부는 더 부드러운 것을 찾고, 생각 또는 마음은 더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육경(색성향미촉법)에도 이미 갈애(탐착)는 내장되어 있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면 각기 서로 대응되는 곳(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에서 감각접촉[觸]이 일어난다. 여기서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6처에서 각기 일어나는 감각접촉은 다시 6 처소에서 느낌[受]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6처소에서 일어난 느낌은 다시 6처소에서 인식[想]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서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인식은 6처소에서 의도[行]를 일으킨다. 그리고 일으킨 생각[曇]과 지속적 고찰[何]을 일으킨다. 오온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인쇄적 단계 또는 서로 상응하는 단계마다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렇게 갈애와 더불어 일어난 오온이 영원히 계속 지속되지 않는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滅聖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과 멸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한 과정으로 바르게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사성제 중 마지막 도성제는 생멸의 무상성을 바르게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부정한 업이 소용돌이치지 않도록, 말을 삼가고 바른 생계를 유지하고, 처음에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청정한 업이 일어나도록 애쓴다. 그리고 탐착, 호불호, 분별을 버리고 그저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린다 [正念]. 그러면 의식의 일어남과 흐름은 끊기고 선정에 든다 [正定]. 이로 인해 청정함의 완성도는 높아지고, 결국에는 해탈에 든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가 어째서 고苦인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集], 또 어떻게 소멸하는지 [滅] 모른 채 살아간다. 나의 마음과 몸의 메커니즘(오온)에 일체 무지한 채로, 그것에 할리없이 휘둘리며 사는데 휘둘리고 있는 줄도 모른다. 무명의 노예인 것이다. 하지만 붓다께서 밝혀 놓으신 나의 존재와 작용원리를 통해, 우리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라는 각성을 일깨움으로 인해, 우리의 의식은 몸에서 벗어나 몸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아는' 위대한 마음을 불성(佛性: 부처의 마음)이라 한다.

 

  무상성無常性을 모르는 무명의 마음은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파도친다. 그것은 내용을 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이건 고통의 마음이건 존재만 하면 되기에 끊임없이 올라온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의 집요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내가 존재하고 또 내 마음이 일어난다고 착각하고 있다. 문제는 '나'라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없는 데 있다고 착각하니 고통이 온다. 만약 '나'라는 주체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 모두 스스로의 갈애 속에서 알아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고통스럽지 않고자 하는 의식은 막강한 무의식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무의식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붓다께서 발견하신 의식적 '알아차림'이다.

 

  우리는 '존재하기에 미워하고 사랑한다'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반대이다.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기 위해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존재해서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려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를 통찰한 명언이다. 이제 존재하는 방식 오온을 붓다의 명철한 통창력으로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역이용하면 된다. 그 첫 단계는 마음이 존재하려고 고통과 번뇌를 끊임없이 던질 때, 먼저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마음의 환영인 것을. 그것이 갈애가 만들어 낸 집착인 것을. 강렬한 마음일수록, 강렬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을.

 

 

 

 

 

 

월간통도. 202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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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는 총 2271개의 현충시설이 있다. 현충시설이란 조국의 독림, 국가의 수호 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한 시설이라 명명되어 있다. 현충시설은 크게 독립운동시설과 국가수호시설로 구분된다. 독립운동시설은 일제강점기 당시 구국운동을 하다가 헌신한 이들을 기리는 시설이다. 불교계에서는 대표적으로 한용운선생 기념관(강원도 인제 백담사), 백용성 선사 추모비(경상남도 합천 용탑선원) 등이 있다. 국가수호실은 국가 수호 또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시설로서 대표적으로 6.25 전쟁 당시 제31육군병원 분원으로 쓰인 통도사가 해당된다. 국가수호시설은 전국에 1295건이 있으며, 그중 6.25 전쟁 관련 시설은 895건(6.25 전쟁 및 원남전쟁 포함)이다. 이들 중 통도사가 포함된 '장소' 항목에서는 17건이 있다. 그 밖에 비석 510견, 탑시설 252건, 동상 36건 등이 있다.

통도사 용화전

  현충시설의 대부분은 탐과 비석, 기념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 시설은 '기념'을 위해 후대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설문은 대개 보수나 개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충시설은 공간의 보존보다는 그곳에서 어떤 인물의 정신을 배우고, 장소가 주는 역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통도사가 31 육군병원 분원으로 쓰였다는 실체를 밝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51년, 당시 통도사가 육군병원으로 쓰였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오고 있었다. 현충시설에 대한 고증을 당사자가 직접 소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통도사 용화전 미륵부처님 복장에서 연기문이 발견되었고, 해당 연기문에는 불상 조성에 대한 연유가 상세히 밝혀져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해 1952년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확실한 기록이었다. 이와 함께 통도사 대광명전 내외부 벽체에서 당시 통도사에서 치료받던 군인들의 필적으로 보이는 낙서가 여럿 발견되었다. 여기에 힘입어 대내적으로 증언을 수집하여 녹취 기록을 남겼고 이러한 노력으로 2021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통도사 용화전 미륵불 복장 연기문 / 1952년 9월 통도사 스님들이 용화전 미륵불을 다시 조성하면서 봉안한 연기문에는&nbsp; "(육균병원)'퇴거 후 사찰 각 법당, 각 요사, 각 암자 전부 퇴패(頹敗, 무너지고 깨짐)는 불가형언중(不可形言中, 말로 표현할 수 없음)"라고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용화전 미륵불은 영위파손(永爲破損, 영원히 파괴)되야 불가견여(不可見餘, 못 볼 지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충시설은 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훗날 전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통도사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대광명전에서 참배를 하는 이 시간, 그 이전의 과거에는 아픈 병사들이 희망을 꿈꾸며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동일한 공간에 서로 다른 시간이 교차하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대광명전과 용화전뿐만 아니라 대웅전, 관음전, 영산전 등 통도사 대부분의 전각에서 군인들이 치료를 받으며 기거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한다. 통도사 경내의 모든 공간들이 한국의 아픈 시대사와 함께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역사의 굴곡마다 통도사는 오롯이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사찰이 그러하진 못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사찰들이 왜란으로 불타고, 전쟁의 국난 속에 무너졌다. 통도사는 단순히 현충시설을 넘어서서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진 사찰의 아픔을 기록하고 한국불교의 호국정신을 드높여왔다.

통도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이다. 통도사 도량을 거닐며 지켜낸다는 것, 지켜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바란다.

 

 

 

 

 

 

월간통도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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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무치에서 돈황을 가는 길에 트루판이 있다. 중국의 트루판은 옛날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주요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이다. 이곳은 옛날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활약했던 곳이고, 고국을 떠난 수많은 우리의 스님들이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신라승 혜초도 바닷길로 천축(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이곳을 지나갔다.

천불동의 막고굴

  투르판은 위그르말로 '파인 땅'이다. 해발 마이너스 154미터의 투르판 분지는 아주 오랜 옛날 바다였으나 지각운동으로 중국에서 표고가 가장 낮고 가장 더운, 육지 안에서 바다보다 낮은 분지가 됐다. 이곳은 '화로 도시', '바람의 도시', '포도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또한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으로도 유명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높이 800미터, 둘레 40킬로미터의 붉은 황토의 화염산이 투르판 분지 안에 우뚝 솟아 있다. 투르판 분지는 여름이면 기온이 40도가 넘는데 이 '불타는 듯한 산'은 2, 3도가 더 높다. 한 번도 비나 눈이 내린 적이 없는 붉은 산. 바람이 많은 이곳의 흙먼지는 봄철,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의 모래먼지와 함께 우리나라에까지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이곳 화염산 기슭 남쪽 계곡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다. 입구에는 소설  「서유기」의 현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입상이 있다. 영화  「서유기」를 촬영한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42시간을 기차로 달려 유원역에 도착,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지붕에 짐을 실어 밧줄로 묶은 후 사막을 달려 2시간 반을 지나자 돈황에 도착했다. 돈황은 비단길의 요충지로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의 교차로에 있으며 이 여행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돈황의 천불동(먹ㄱㅎ귤)을 가기 위해 투어를 이용했다. 즉석에서 팀이 이루어지는 마이크로 관광버스였다. 관람료는 갑과 을로 나누며, 갑은 75원에 동굴 30개, 을은 25원에 동굴 12개를 관람할 수 있다. 
 
  처음에 본 130호 석굴 부처님 좌상의 높이는 30미터쯤 되었는데 발 하나의 길이가 4~5미터쯤 되는 것 같았다. 석굴의 겉은 사암인 자갈과 모래로 되었으며, 부처님 좌상은 나무로 심을 만들고 겉은 진흙에다 짚을 섞어 이겨 바른 것이었다. 벽면은 진흙과 짚을 이겨 바르고 평평히 다져 회철을 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천장과 사면 벽이 모두 벽화로 되어 있어 신기했다. 4세기경부터 천여 년 동안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해당되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없어서일까, 아직도 색상이 무척 선명하다. 아마도 19세기까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개발이 잘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부처님의 형태와 표정도 가지가지다. 부처님 입적하실 때의 모습인지 와불(옆으로 누워 있는 부처)도 무척 재미있다. 우리나라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도 아니고 8등신의 섬세한 구성도 아니라서 만드는 데 힘이 덜 들었겠지만 대단한 집념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계속 만들어졌기에 하나의 돌산에 이토록 많은 부처님 동굴이 있는 것이다.
 
  천 개의 부처님 동굴이 있다고 천불동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492개라 한다.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이곳에 와 살게 된 유민들이 자신들의 평화를 염원하느라 이토록 많은 부처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라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사막 가운데의 깎아 세운 듯한 작은 절벽에 있는 동굴이라 관람 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어두컴컴한 굴 속에 전등조차 설치되지 않아 어두워서 자세히 구경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전지식이 없던 우리는 손전등조차 준비하지 않았기에 단체 관광객이 비추는 손전들을 따라가며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조명이 있으면 훼손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사막 속이라 전기를 끌어오기 어려워서인지 불빛이 없어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그래서일까, 벽화의 색상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곳 벽화에서 보면 여자의 얼굴은 한결같이 둥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미인은 흔히 어른들이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라고 믿는 둥근 얼굴이다. 부처님들은 대체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 편이었지만, 어떤 동굴에서는 벽화를 떼어간 모습도 보이고, 이교도들의 짓인지 부처님의 얼굴이 짓이겨지고 팔이 망가지기도 했다. 내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종교도 소중하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까? 부처님 코를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이 중국인에게도 있는 것일까? 코가 갈려 나간 부처님이 많았다. 그 많은 부처님상을 보면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과 소원이 성취되기를 갈구하는)을 헤아려본 귀중한 시간이었다.
 
 
 
 
월간통도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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