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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다는 기원정사는 당시 인도 최고의 재벌이었던 급고독 장자가 기증한 사찰이다. 본당은 7층짜리 건물로 사위성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다. 기원정사는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또 기원정사의 정문은 급고독 장자의 신심에 감복한 기수 태자가 지어서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남문이 아니라 동문이었다. 이유는 무더운 인도 날씨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볕이 많이 드는 남쪽보다 동쪽을 숭상했기 때문에 동쪽으로 정문을 냈다. 동쪽은 불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싯다르타의 출가도 동쪽 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부다가야에서의 깨달음 역시 동쪽으로 앉아서 이루어진다.

산치대탑 앞의 토라나

  하지만 기원정사의 '담'은 예외적인 경우다. 기원전 1~2세기에 지어진 산치대탑 등을 보면 문은 담이 없는 '기념물'이었다. 물론 단순한 기념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도의 탑에 대한 예배 방식에는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고 해서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도는 것이 있다. 예배와 관련해 시작 장소인 정문 개념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 동쪽에 세워지는 것이 바로 기념문이 토라나이다. 토라나는 문 너머의 대상, 즉 탑의 신성을 상징하는 기념문이다.

 

  이 토라나는 불교가 인도를 넘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역시 폭넓게 수용된다. 바로 기둥 형식의 패방과 중국식 누각을 덧씌운 패루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로 전래되면서 변형된 것이 바로 홍살문과 사당의 솟을삼문(복례문)이다.

 

원을 좋아했던 인도 직선을 좋아했던 중국

   인도인들이 원형을 좋아한다면 중국인들은 네모난 방향을 선호한다. 또 유교문화는 서열을 정해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매우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인도의 원형적인 구조는 중국으로 오면서 수직적인 질서로 재편된다.

 

  인도불교에서는 문을 동쪽으로 하나만 내거나 필요하면 동서남북으로 네 개를 낸다. 그런데 중국문화는 이를 수직으로 변형시켜 남쪽으로 하나를 내거나 남북을 축으로 해서 전면에 3개나 5개를 중첩해서 만든다. 이를 3문 혹은 5문이라고 한다.

 

  3문은 제후나 사찰의 문이다. 제후나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난 3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보다 높은 5문은 황제의 문이다. 오늘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본전인 태화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정양문→대명문 →승천문 →단문 →오문'의 5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조선의 경복궁이 본전인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광화문 →홍례문 →근정분'의 3문을 통과하는 것과는 다르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감히 5문을 두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의 궁궐터인 개성의 만월대 유적은 5문 구조로 되어 있다. 고려는 조선과는 위계가 다른 웅비하는 황제의 기상을 내포한 국가였던 것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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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장시간 쉬지 않고 인터넷 게임을 하다가 죽은 사람에 대한 뉴스가 나오곤 한다. 게임에 빠져 잠도 자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수면욕은 식욕과 더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욕구를 꺾어 버릴 수 있는 게임의 힘은 뭘까? 그것은 바로 잘 짜인 '세계관'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게임 공간은 이 세계와는 다른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과학의 발달이나 교육 때문에 현대인들은 '거의'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그들의 눈높이와 이해 방식에 따라 제각각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 또는 중국과 인도의 신화들이 바로 이와 같은 세계관 속의 이야기이다.

불교의 우주론 수미산

불교의 우주론宇宙論

  세계관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우주는 언제, 누구의 의해, 무슨 이유로, 어떻게 생겨났으며, 무엇에 의해 움직여 나가는지에 대한 생각을 통틀어 우주론이라고 한다. 유력한 종고들은 대부분 그 자체의 우주론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우주론은 수미산이라는 사상의 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를 흔히 '수미산 우주론'이라고 한다.

 

  그리스 · 로마 신화가 우주의 중심인 올림포스 산을 배경으로 하는 제우스  정범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면, 불교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제석천을 정점으로 하는 신들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 두 세계관과 신화의 구조에서는 상당히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언어군을 분류할 때도 역시 인도유럽어족을 하나로 묶는다.

 

  여하튼 모든 우주론에서 중요한 것은 우주의 중앙 즉 신체의 '배꼽'과 같은 존재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우주산이라는 신령한 산이고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제우스나 제석천과 같이 최고신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불교 역시 이 같은 관점을 차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존재하시는 곳으로 수미산의 산정을 상정하게 된다. 이는 종교적인 예배 대상에 대한 신성과 존숭을 상징한다.

 

일주문, 첫 번째 문

  사찰은 전체적으로 수미산의 구조를 모사하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이것을 제일  잘 드러낸 것이 소위 삼문三門이다. 보통 '일주문→천왕문 →해탈문'의 순서로 이어진다. 올림포스 산은 신들이 거처하는 성역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성스러운 공간이 된다. 불교의 수미산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수미산의 입구에 해당하는 장소에 앞으로의 공간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상징문이 세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일주문이다.

 

  일주문이란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기둥의 문이라는 의미다. 왕릉이나 충신 · 효자 · 열녀의 사당 앞에 건립되어 있는 홍살문을 생각하면 되겠다. 홍살문의 연원 자체가 인도의 불교 탑문, 즉 토리나이다. 일주문은 거기에서부터 수미산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일주문 너머는 부처님의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인 셈이다.

 

천왕문, 두 번째 문

  일주문이라는 수미산 영역부터 성역의 상징성이 부여되지만 더 높이 올라갈수록 신성함이 강해진다. 수미산은 우주의 중심 산이기 때문에 수미산 중턱에 네 방위신이 머물며 그 밖의 허공에는 해와 달이 위치한다고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이러한 네 방위신의 처소를 사왕천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동서남북에 각각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 그리고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이 살고 있다.

 

  수미산 중턱의 사왕천을 상징하는 것이 사찰에서는 천왕문이다. 그러나 인도의 원형적인 건축 구조는 동아시아의 중국문화권으로 전파되면서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 형태로 변형된다. 그로 인해 남쪽에 위치한 천왕문에 사천왕이 모두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불교 우주론에서 동방 지국천왕이 관장하는 곳은 승신주다. 승신주는 몸이 수승하다는 의미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이쪽 지역은 몸짱과 얼짱이 사는 곳이라고 하겠다. 남방 증장천왕이 관장하는 섬부주贍部洲로 이곳이 우리들이 사는 세계다. 흔히 사찰에서 축원을 할 때 '사바세계娑婆世界 차사천하此四天下 남섬부주南贍部洲 해동대한민국海東大韓民國' 운운하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서방 광목천왕의 관찰 지역은 우화주牛貨洲이다. 소를 화폐로 하는 유목분화가 번성한 곳이라는 의미다. 끝으로 북방 다문천왕이 관장하는 세계는 구로주俱盧洲인데 이곳은 선진국보다 더 살기 좋은 복지세상이라고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4방위를 관장하며 악으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 낸다. 사찰 입구의 서천왕 역시 같은 의미다. 부처님의 성역을 모든 악과 삿된 견해로부터 지켜 내는 상징이다.

 

해탈문, 세 번째 문

  해탈문은 수미산 정상에 입구를 나타낸다. 경복궁으로 치면 근정문인 셈이고 그 너머가 사찰에서는 근정전에 해당하는 대웅전이 된다. 그런데 해탈문은 일주일이나 천왕문과는 달리 찾기가 어렵다. 숨은 문, 즉 비밀의 문인 것이다. 해탈문은 대우전 등 주요한 전각으로 진입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비밀의 문'처럼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주요 전각을 좀 더 장엄하게 바라보게 하기 위한 '누하진입樓下進入' 혹은 '우각진입隅角進入'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사찰에 들어가는 방법, 누하진입과 우각진입

 우선 누각 아래의 좁은 공간을 통과하는 누하진입에 대해 알아보자. 산사는 지형적인 특성상 경사각이 발생한다. 그런데 대웅전이 위치한 곳은 평평하게 터를 바른 네모난 공간이다. 그렇다 보니 전면의 입구와 높이 차이가 발생한다. 그래서 대웅전 앞에 축대를 다져 만세루와 같은 누각을 만들고 그 사이에 좁은 계단식 통로를 만들게 된다.

 

  누하진입은 누각 아래라는 좁고 어두운 폐쇄형 공간 구조를 통과하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서 참배객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인데 이는 부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사찰 건축의 숨은 의도이다. 또 어두운 누각 아래에서 보면 대웅전의 밝은 영역이 광명의 신성함으로 다가오게 된다. 어둠 속에서 보는 밝은 빛, 이것이 바로 중생의 어둠을 떨쳐 내는 부처님의 환한 미소인 것이다.

 

  두 번째는 우각진입이다.

  대문을 열어 놓았는데 집안이 훤히 보인다면 이건 좀 가벼워 보이며 운치가 없다. 그래서 현대의 아파트에서도 현관문을 열었을 때 곧바로 거실이 보이지 않도록 꺾이는 설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꺾는 설계에는 툭 느인 당당한 기상이 없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대문 안쪽에 시선 차단용 가림벽을 설치하곤 한다. 이는 담 같은 용도와는 다른 것으로 여름에 치는 발과 같은 기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누각의 측면을 돌아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우각진입이라고 한다. 이는 어른의 중앙 전면을 피하는 동아시아 문화와는 연관되는데, 측면으로 접근하면 대웅전의 날렵한 처마 곡선을 볼 수 있어 참배객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적인 선의 미학에 흠뻑 취하게 된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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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의 발달과 함께 1960년대부터 심장이 멎고 호흡이 중지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살려내는 심폐소생술이 점점 더 발전하여 인공호흡으로 공기를 기도에 불어넣고 두 손으로 흉부를 반복해서 압박하는 현재의 형태로 정립이 되었다. 이 시술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데 이들 중 대략 10~25% 정도가 심장이 멎어 있던 동안의 경험인 근사체험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물질 위주의 과학이 발달하면서 개발된 심폐소생술로 인해 주류 과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정신세계의 체험이 알려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례로 우리나라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마취과 의사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이다. 그 의사는 유대인이 세운 큰 병원에서 주로 심장 수술의 마취를 담당하였는데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 의사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평소 동양인을 비하하였다. 그래서 이 한국인 마취과 의사도 그에게 늘 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이 외과 의사의 심장이 멎는 응급사태가 발생하자 의료진이 달려들어 심폐소생술을 했는데 30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이 한국인 마취과 의사는 평소에 자신을 늘 무시하긴 했지만 수술 실력이 뛰어난 의사라 포기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심폐소생술을 더 해 보겠다고 자청한다. 미국인 의료진이 멀뚱히 보고만 있는 가운데 한국인 의사는 비지땀을 흘리며 심폐소생술을 했고 30분쯤 지났을 대 기적적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그런데 심장이 멎어 사망 판전을 받았던 이 외과 의사가 심폐소생술 도중 체외이탈을 하여 소생술 현장의 공중에 붕 떠서 자신의 육체가 소생술을 받고 있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내려다보니까 자기 친구들인 미국인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거의 흉내만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이 늘 무시하던 한국인 마취과 의사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몸에 비지땀을 흘리며 심폐소생술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생한 후에는 한국인 마취과 의사가 자신을 살렸다고 감사하며 이후 그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고 한다.

 

  이 사례는 의사가 직접 경험한 근사체험이어서 더욱 신뢰가 간다. 왜냐하면 의사들은 대학 때부터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입각한 과학교육을 받아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현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은 단순한 환각이나 꿈,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근사체험자들이 모두 똑같은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조금씩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근사체험의 회의론자들은 체험자의 개인적인 문화가 반영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근사체험이 뇌가 만들어 낸 환영일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근사체험의 요소 중 '빛과의 만남'이 있다. 그런데 근사체험자들은 이를 자신의 종교적 배경에 따라 해석하게 되는 수가 많다. 개신교 신자가 성모 마리아를 만나는 일은 없고 불교 신자가 예수를 만나는 체험은 하지 않는다. 각자의 종교에서 중요한 인물을 조우하게 되는 것인데 종교가 없는 사람은 빛 그 자체로 보지  날개 달린 천사를 만나지는 않는다. 이처럼 체험은 내용이 다르더라도 중요한 것 빛 또는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깊은 산골에서만 살아온 세 사람에게 서울 구경을 잠깐 시켜 주고 자기가 본 걸 얘기하라고 하면 말하는 내용이 모두 다를 것이다. 누구는 남산타워를, 누구는 경복궁을, 또 다른 사람은 63 빌딩이나 롯데타워를 얘기할 것인데 이를 두고 "똑같이 서울을 보고 와서 하는 애기가 이렇게 다르니 이들이 같은 장소에 다녀왔다는 걸 믿을 수 없다."라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본 것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부터 얘기하는 건 당연할 테니까.

 

  또한 신비가 영매 또는 최면 퇴행을 통해서 전해지는 '죽음, 그 후'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수명을 다해 육신을 벗아나면 근사체험의 여러 요소들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근사체험 때와는 달리 좀 더 영역이 확장되고 체험 내용이 깊어진다. 예를 들어 생의 회고만 하더라도 근사체험 때는 수십 년 살았던 이번 생만을 되돌아보게 되나 우리가 죽어서 하게 되는 생의 회고 때는 바로 직전의 생뿐만 아니라 전전생 그리고 그 이전의 수백 년 전의 삶까지도 회고하면서 여러 경험을 통합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는 각자 훗날 수명을 다해 육신을 벗어나는 시점에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된다.

 

  근사체험만을 알고 있으며 근사체험이 진실인지 의심하는 단계에 오래 머물 수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 그 후'까지 탐구의 범위를 확장시키면 근사체험의 진정성 여부를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 1층의 맞은편에 담장이 있고 그 너머에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를 때 1층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이 건물의 4, 5층까지 올라가 보면 담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궁구의 범위를 확장시켜 봄으로써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다.

 

 

 

월간 통도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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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 물이 흐르는 수맥이 있으면 건강에 안 좋다는 말이 있다. 흐르는 물 위나 곁에서 자면 신체의 기운이 쓸려나가 피곤하다는 것이다. 해서 수맥 차단을 위해 동판이나 은박지 또는 전용 매트가 사용되기도 한다.

 

수맥과 명당에 얽힌 불교 이야기

수맥이 인체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또는 수맥 차단 용품이 효과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수맥 차단 용품 중에 불교의 '달마도'도 있어 주목된다.

달마는 인도의 왕자 출신 승려로 중국에 선(禪) 수행이라는 명상법을 전수해 준 분이다. 또 무협소설과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 소림사의 확립자이기도 하다.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중국 말에 익숙하지 않은 인도 승려의 영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말부터 선불교가 주류가 되면서 달마는 신격화되기 시작한다. 사림파가 조선을 장악하자 조광조가 급부상한 것처럼, 달마 역시 '안사의 난(755∼763)' 이후 당나라 불교의 재편 속에서 신화의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여기에 직업 화가가 아닌 문인들이 여가에 그리는 문인화 소재로 달마가 채택되면서, '달마도'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수호신 같은 이미지가 첨가된다. 그러다 결국 한국에서 수맥 차단용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수맥은 안 좋은 데 반해, 샘솟는 연못은 명당이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신라의 국찰 황룡사와 백제를 대표하는 익산의 미륵사, 또 양산의 통도사나 경주의 기림사 등은 모두 연못을 메우고 창건된 사찰이다. 똑같은 물이라도 용솟음치는 물길에는 치솟는 물길의 강력한 에너지가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또 물이 솟구치는 연못에는 용의 전설도 존재한다. 황룡사가 진흥왕이 왕궁을 짓는 과정에서 용이 출현해 사찰로 바뀌었다는 것이나, 통도사에 9마리 용이 살다가 1마리가 남아 사찰을 지킨다는 구룡지 등의 전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물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삼국유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사찰 터가 명당으로 나오는 곳도 있다. 평창의 오대산 월정사다. '대산월정사오류성중'에는 "국내의 명산 중 이 월정사(적광전·寂光殿) 자리가 가장 좋은 땅으로 불교가 오래도록 흥성할 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명당은 다른 곳보다 '기온이 미세하게 높고 바람이 잔다'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간혹 0° 근처에서 눈이 내릴라치면, 다른 곳은 눈이 가득한데 적광전 지붕만 눈이 녹는 이적이 발생하곤 한다. 믿기 어렵지만 사진이 있어 안 믿을 수도 없는 자못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는 무소유의 종교가 아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에 법정스님의 ‘무소유’(無所有)가 있다. 1976년 출판돼 100만 부가 판매된 우리나라 수필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다.

이 무소유의 히트는 ‘불교=무소유’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교는 무소유를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며, 법정의 무소유 개념에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무소유란 ‘소유가 없는 것’으로 적게 가지는 절제와 검약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삶은 ‘최소주의’ 일뿐 무소유가 아니라는 말씀.

인도에는 진짜 무소유를 주장하는 종교가 있다. 불교와 동시대 만들어진 자이나교다. 이들은 무소유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옷을 입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닌다. 그래서 이들을 ‘허공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자이나교가 진정한 무소유다. 자이나교에서 불교는 소유를 떨치지 못한 집단이었다. 해서 이들은 붓다 당시 불교를 ‘탐착을 가진 소유자들’이라고 비판했다. 법정의 무소유보다 더 최소였음에도 소유라는 비판에 직면했던 것이다.

붓다는 자이나교의 무소유 비판에 대해 역으로 비판한다. ‘자이나교는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은 소유의 문제기도 하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와 배려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갈 때, 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자이나교는 무소유에 매몰되어 모든 사람 앞에서 나체로 다닌다. 이를 붓다는 ‘이기심에 의해 도덕적인 배려가 없다’고 비판했다. 바바리맨이 범죄가 되는 것과 같은 비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붓다는 문제의 핵심은 소유가 아닌 집착에 있다고 봤다. 우리는 앞선 세대에 비해 더 많이 소유하고 있지만, 더 많은 갈등과 불행을 느끼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풍요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며, 또 결핍으로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을 컨트롤하는 것은 소유와 결핍이 아닌 ‘집착’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집착의 구조 속에서 3인칭 시점으로 한발 물러나 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되면 소유의 문제를 넘어선 무집착의 자유로운 해법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첨예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행복의 코드를 잃지 않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무집착은 ‘결핍 속의 자유를 추구하는 무소유’나 ‘최소주의를 통해 만족하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다. 물질 속에서의 대자유를 말하는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가치다. 인간 욕구는 닫아걸거나 억제하는 게 아니라, 승화시켜야만 해소되는 관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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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유명을 달리할 경우 화장을 하고, 그때 수습된 사리나 유골을 부도에 안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큰 사찰 입구에 늘어서 있는 부도는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인도에서 전래한 화장 문화와 우리 전통의 매장 문화 사이에 지난한 갈등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어 흥미롭다.

다비식

 

화장火葬은 유목문화의 전통

  유목민은 가축을 데리고 초지를 따라 이동하며 생활한다. 그렇다보니 무덤을 쓰고 이를 지속적으로 보호·관리할 수가 없다. 또 유목민들에게는 그들의 생활 터전인 초원이 단조로워서 하늘에 대한 외경의식이 더 크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장례 풍습이 바로 화장 火葬 이다. 유목민들은 화장을 하면 이때 발생하는 연기를 타고 죽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인도 아리안족의 오화설五火說이나 유대인들의 번제燔祭가 이를 방증한다.

 

  이와 같은 화장 문화는 불교를 타고 전래되어 우리 문화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을 소각해서 망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관념이 있고 또 불교에서는 7월 보름이 우란분절에 조상들을 천도하면서 노잣돈인 지전이나 종이옷 등을 태우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한다면 유교의 소각 문화 역시 실크로드를 넘어 들어온 인도불교의 전통에 의한 것일 뿐이다.

농경문화와 매장

  농경문화는 유목문화와 달리 정주定住 문화다. 매장 문화는 이러한 농경문화의 유산이다. 또 농사는 소위 말하는 '머릿수'가 자산이기 때문에 대가족이 훨씬 유리하다. 이런 연유로 농경문화에서는 최고 어른을 정점으로 하는 문화와 이에 잇따른 조상 숭배가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매장 문화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봉분의 형식은 아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에는 공자가 최초로 어머니인 안징재의 무덤에 봉분을 만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인즉 공자가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을 표시할 만한 석물을 갖출 수 없어 봉분을 만들어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봉분에 벼락이 떨어져 무덤이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공자는 고인들이 하지 않던 것을 자신이 했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자책한다. 이 기록은 봉분이 만들어지는 것이 공자에게서 시작되고 그 이유가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즉 공자 이전의 무덤은 봉분이 없는 평장에 석물을 이용한 표지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 산둥 성 취부의 공자 무덤 즉 공림이나 추성의 맹자 무덤에 가 보면 무덤 위로 거대한 나무가 자라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나무를 통해서 재생한다는 고대의 종교적 관념이 잔존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요즘으로 치면 수목장과 연관해서 이해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화장이 아닌 매장된 고승들

  인도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준 충격 두 가지를 꼽으라면 노출 문화와 화장을 들 수 있다. 삭발이나 오른쪽 가슴을 드러내는 노출은 감싸고 여미는 것에 익숙한 동아시아인들에게는 해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문화적 충돌이 《홍명집》의 「사문단복론」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화장도 마찬가지다. 장례나 묘제 및 상 · 제례는 전통이 비교적 잘 고수되는 분야다. 변화가 늦고 바뀌더라도 다른 것을 온전히 수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 신라인의 특수한 묘제 양식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를 한 묶음으로 그리고 신라를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 전통을 갖는 다른 한 묶음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정부의 대대적인 노력에 의해 모제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상  · 제례는 여전히 전통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문호적인 저항에 의해서 수백 년 이상, 승려들조차 화장을 하지 않았다. 중국 저장성 천태산의 지자 대사 육신보전에 가 보면 천태종의 시조인 천태 지자 대사를 매장한 뒤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지자 대사의 수제자인 장안 관정도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즉, 이분들은 처음부터 화장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적인 장례 문화의 영향으로 육조 혜능이나 구화산의 김지장 스님과 같은 분들도 육신이 썩지 않는 등신불이 될 수 있었다. 만일 이분들이 부처님처럼 열반하시자마자 화장되었다면 육신이 썩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을 것이다.

 

  고승의 매장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경우는 달마 대사가 아닐까? 달마 대사의 이야기에는 달마가 죽고 난 뒤 서쪽에서 돌아오던 사신이 짚신 한 짝을 들고 가는 달마를 마주쳤다는 것이 있다. 사신이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자 국왕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무덤을 파게 하였는데 관 속에는 짚신 한 짝만 있었다는 것이다. '수휴척리 手㩗隻履'라고 하는 유명한 일화인데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달마 대사도 열반한 뒤 화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고승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승의 무덤인 부도가 있으면 당연히 그 속에는 화장한 사리 등이 안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대가 올라가는 부도들을 보면 부도 안에 사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도 아래에 석관이 있고 그 속에 승려의 뼈가 안치되어 있다. 즉 화장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옥룡지 도선국사다.

 

  도선은 선승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풍수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도선의 도호인 옥룡지를 딴 전남 광양 옥룡사지의 도선 부도를 1994년부터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도 밑에서 유골을 안치한 석관이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석관 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 외부에 전시된 보불 제265호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부석관 등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관들을 보면 성인이 들어가기에는 무척 작은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3년상 과정에서 초분草墳을 쓰거나 가묘假墓를 만들어서 살과 근육 등을 녹이고 이후 뼈만 추려서 석관에 모셨기 때문이다. 한자의 장례 장葬 자를 보면 아래에 평상을 놓고 위에 시신을 안치한 뒤 그 위를 풀로 덮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의 장묘 풍습을 전해 주는 글자로 초분의 설치 양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또 신라 때에는 초분이나 가묘 후 뼈를 추려서 골호에 담았는데 이 과정에서 좋은 뼈와 나쁜 뼈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이것이 제도화된 것이 성스러운 뼈(성골)와 진짜 뼈(진골)로 구분하는 골품제이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전통적인 장묘법이 불교와 석이면서 매장한 후 부도를 건립하는 특수한 양태가 발생하는 흥미로운 모습을 환인해 보게 된다.

능지탑의 미스터리

  우리는 스스로를 일러 '단일민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개념이 생긴 건 고려 때가 처음이다. 고려 중기에 몽골이 침략하면서 국론을 결집할 필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당시에 이런 개념이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은 국가의 안정 및 번영과 발전을 위한 단일화의 필연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삼국의 공통분모인 불교를 통해서 시도하는 이가 바로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사후에 화장을 해 장묘법에 일대 변화를 준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도선이 통일신라 말기의 인물임에도 화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 문무왕의 화장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대전환의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서 통일신라는 문무왕의 화장지에는 능지탑 혹은 연화탑이라고 부르는 탑을 건립하게 된다. 능지란 왕릉을 대신한다는 의미이고 연화는 방형의 탑신에 연꽃잎이 빙 둘러서 조각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능지탑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거대한 형태다. 현재의 모습은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으며 무너져 있던 것을 수십 년 전에 고구려의 장군총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정방형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다만 그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어 주변에는 많은 부재들이 정리되어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정방형의 탑 형식에 4면에 불상을 안치한 꼭대기가 평평한 3층의 피라미드형으로 탑의 정상에는 문무왕을 위한 재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유행하던 목탑 양식에 왕릉 구조를 합하고 여기에 재실을 추가한 아주 창의적인 구조라고 하겠다. 그러나 너무 창의적이면 뒷사람이 정확히 알기 어려운 법 능지탑은 오늘도 그 원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세월의 영광만을 말해 주고 있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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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밤 자승 전 총무원장이 경기도 안성 칠장사의 화재 현장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계종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경찰은 자승 스님의 유서로 보이는 문서를 현장 인근에 있던 자승 스님의 승용차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 문서에는 "칠장사 주지 스님께, 이곳에서 세연(세상의 인연)을 끝내게 되어 민폐가 많았소" "경찰분들께 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연을 스스로 끊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자승 스님 스스로가 세상의 인연을 정리하겠다는 뜻을 남긴 유서로 해석됐다.

자승 스님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 자승 스님 승용차의 대시보드 위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칠장사 주지스님과 경찰에게 남긴 메시지가 담겼다. 자승 스님 측근을 포함한 불교계 인사들은 이 유서에 대해 자승 스님의 필적이 맞는다고 했다.


그러나 조계종 안팎에서는 "자승 스님은 최근까지도 조계종 중흥을 위해 의욕을 보여왔다"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믿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자승 스님은 최근까지도 조계종의 미래에 대한 포부를 공개적으로 밝혀왔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31일에는 동국대에서 중앙종회 의원 대부분을 소집한 가운데 "10년 후를 대비해야 한다"며 "조계종이 현재에 안주하면 장자(長子) 종단이라는 위상조차 흔들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 천주교서울대교구가 2027년 개최할 예정인 세계청년대회를 예로 들며 "우리 불교도 세계 불교 청년대회를 개최하면 좋겠다"며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는 방안을 내년 3월 종회(宗會) 전에 제출해 주기 바란다"고도했다.

이 때문에 자승 스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놓고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다. 경찰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자승 스님의 죽음을 다각도로 수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화재 당시 칠장사 경내에 있었다는 승려 등 5명의 소재를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유서'를 작성한 정확한 시점도 규명 중이다.

자승 스님은 지난 10여 년간 조계종의 최고 실력자였다. 1954년 춘천 태생인 스님은 1972년 해인사에서 지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1974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은사(恩師)는 조계종 제30대 총무원장을 지낸 정대 스님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총무원 주요 보직과 조계종 입법기관인 중앙종회 의원을 맡으면서 대표적 사판승(행정 담당 스님)으로 성장했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2006~2008)과 제33·34대 총무원장(2009~2017)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도 '상월결사(霜月結社)' 회주와 조계종 입법기관인 불교광장 총재, 동국대 건학위원회 총재, 봉은사 회주 등을 맡아 조계종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을 지휘해 왔다.

조계종은 과거 정치적 파벌 다툼이 극심했으나 자승 스님이 중앙종회 의장과 총무원장을 맡으면서 파벌이 사라졌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편에선 이 과정에서 종단 권력이 자승 스님에게 집중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상월결사'는 2019년 자승 스님을 중심으로 한 스님들이 위례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비닐하우스 천막을 치고 겨울 3개월 동안 수행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순례를 거쳐 지난 봄에는 40여 일에 걸쳐 인도 부처님 성지 1167㎞를 도보로 순례한 바 있다. 인도 순례를 마친 후 자승 스님의 행보는 더욱 활발해졌다. 지난 3월 23일 귀국 후 조계사 회향법회에서 그는 "성불(成佛) 보다 부처님 법(法)을 전합시다"라며 전법(傳法) 캠페인을 선언했다. 이후 전국 교구본사별로 대학생 등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전법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마지막 가르침 - 자승 스님이 직접 쓴 열반송. 열반송은 스님이 입적에 앞서 자신의 깨달음을 후학들에게 전하는 말이나 글

 

 

 

https://www.chosun.com/MIBVGRDCPNDOVKITM4V57XX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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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에 흔히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옛 스님들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부도밭이다. 하지만 몇몇 사찰에서는 하마비와 당간을 먼저 보게 된다. 하마비와 당간은 '잘나가던 시절' 사세나 사찰의 종파를 짐작하게 해 주는 유물이다.

 

하마니, 모두 가마에서 내리라

  하마비下馬碑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려 인종 때 처음 세워졌다는 설이다. 하지만 문헌의 근거는 없다.문헌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는 조선 태종 때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태종 13년(1413)의 기록에는 예조에서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봉선사 하마비

  "궐문 동구에 마땅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표목을 세우고 그 전면에 쓰기를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이곳에 들어온 자는 가운데 길로 다니지 못한다. 궐문 밖에 이르면, 1품 이하는 10보步 거리에서 3품 이는 20보 거리에서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리라.' 하고 종묘 동구에도 표목을 세우시고 그 전면에 쓰기를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하소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 하마비는 불교의 유물이 아니었다. 왕실의 사당인 종묘 그리고 궐문 밖에 설치되었고 시간이 지나자 성균관과 왕릉의 앞 그리고 몇몇 서원으로까지 확대된다.

 

  하마비가 사찰로까지 확대된 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 유생들이 사찰에서 벌인 횡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람을 할 때 승려들을 불러 경마잡이를 시키는가 하면 사찰에서 기생을 끼고 노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능침사인 정인사와 여말선초의 최대사찰인 회암사에서 유생들이 기물을 부수고 사찰의 보물을 훔치는 훼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조선 시대 불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조선의 측천무후 문전왕후였다. 문정왕후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자 선교 양종의 수사찰首寺刹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에는 아예 유생의 출입을 금지해 버린다. 난동을 벌인 주모자 역시 투옥되었다.

 

  물론 유생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시 문정왕후를 옆에서 보좌하던 보우(普雨, 1515~1565) 대사의 목을 베야 한다고 상소가 올라갔다. 하지만 상소물을 본 문정왕후는 더욱 불같이 화를 낸다. 불이 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격노한 문정왕후는 전국의 큰 사찰 입구에 다수의 하마비를 세우도록 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마비는 사찰로까지 들어오게 된다. 아직까지 하마비가 남아 있는 사찰은 많지 않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비롯해 경기도 양주 봉선사, 부산 범어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 등 손에 꼽을 만하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하마평이라는 말도 이 하바비에서 유래했다. 궁궐 밖의 하마비 앞에는 궁으로 들어간 양반들을 말과 함께 기다리는 경마잡이들이 모여 있었다. 자연스레 정치인들의 운전기사 모임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들은 양반들은 지근거리에서 모시기 때문에 정보들이 많았고 요즘으로 치면 '~카더라' 소식통이나 증권가의 '찌라시' 같은 역할도 했다. 이들이 주인을 기다리면서 떠드는 과정에서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것이 하마비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마평이 되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우쭐대며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이야기하는 하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재미있다.

부처님 재세 시에도 하마비가 있었다?

  부처님 재세 시 신심이 깊었던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은 수도인 왕사성의 영취산에 올라 부처님을 뵐 때면 산 입구에서 내려 걸어서올라가곤 하였다. 어쩌면 '교양인'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귀족이나 양반이 모두 '교양인'이지는 않다. 또 부처님이 거처하시던 영축산은 산이라는 특성상 열려 있는 곳이었고 전축물이 없었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은 영축산 길목에 '하승下乘'과 '퇴범退凡'이라는 기념탑을 건립했다고 《대당서역기》는 기록하고 있다.

 

  하승이란 수레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뜻이고, 퇴범이란 불경스러운 이는 범접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또 퇴범에는 속된 마음을 버리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다가오라는 뜻도 있다. 하마비의 연원이 하승과 잇닿아 있는 부분이다.

 

  경북 경주 포석정 옆, 남산의 진입로이기도 한 삼불사 사찰 입구에는 '세심단속문'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절에 들오기에 앞서 마음을 씻고 세속의 속된 기운을 끊으라는 의미다. 종교를 통해서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자신을 통해서 더 크게 변한다는 점에서 깊이 새겨볼 말이 아닌가 한다.

당간幢竿, 기둥 하나로 사찰의 소속과 규모를 말하다

  신성한 곳에 높은 깃발을 세우는 문화는 아시아 전 지역에서 발견된다. 인도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사리탑 앞에 장엄한 깃발을 장식한 큰 깃대를 두 개씩 세웠는데 이를 표찰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궁궐 앞에 화표라고 해서 쌍으로 된 돌기둥을 세워 존엄을 표시했다. 본래 중국 전설의 요임금 때부터 나무를 세워 표시하던 것이 후일 돌기둥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샤머니즘을 숭상하던 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신장대라고 해서 신이 오르내리는 통로가 되는 거대한 나무를 신성 지역에 세우는 문화가 있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이런 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솟대가 되고 경상도의 강신무들이 점집 앞에 세우는 신장대가 되었다. 우리의 신장대 문화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동이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북과 방울을 매달아 놓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확인되는 신장대는 두 개가 아닌 하나이다.

 

  인도와 중국은 입구에 촛대처럼 좌우로 벌려 세우는 쌍문화였고 유목의 샤머니즘 전통은 피로침처럼 외문화였다. 우리나라 고대 사찰들은 흥미롭게도 인도불교의 전통인 쌍문화를 수용하지 않고 외문화를 받아들인다. 이는 불교 이전에 존재하던 샤머니즘 전통을 한국불교가 배척하지 않고 수용한 결과이다.

 

존재하지만 잊힌 당幢 문화

  깃대를 세우는 것은 당幢 문화라고 하는데 여기서 당이란 깃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깃발을 허공에 달 수는 없다. 깃발을 세우기 위해서는 장대로 된 깃대, 즉 당간이 있어야 한다. 또 이 당간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지주가 있어야 하는 이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설명이 일견 복잡한 듯하지만 관공서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기게양대의 구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런데 후일 이 당 문화가 사라지면서 사찰의 진입로가 삼문구조가 변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절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일주문이다.

 

  당간은 충북 청주 용주사지나 충남 공주 갑사처럼 철로 만들거나 경남 양산 통도사나 전남 담양 객사리의 석당간처럼 돌로 만든 경우가 있지만 나무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썩는 경우가 많아 현재는 당간을 지지해 주던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당간지주는 거대한 나무를 지탱해야 했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당간에 특정 깃발을 매달아 소속 종파나 법회의 내용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하고는 했다.

 

  또한 당은 곧 간판과 같은 것이니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의 크기가 당시 그 사찰의 사세와 위상을 나타내 주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보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원도 강를 굴산사지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5.4미터나 된다. 당간지주가 이럴 경우 그 속에 세워지는 강간은 적어도 30미터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또 그 위에 걸리는 당, 즉 깃발도 10미터 가까이 되었을 것이니 그 장엄함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장엄한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사찰 입구 한편에서 미리 알고 찾아오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서글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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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살이 될 무렵 부친이 그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주역(周易)’과 가까이하거라. 어디서 살든 날마다 주역을 보면 인생의 왕래(往來)에서 순조로운 길이 넓혀짐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세 권 3300여 쪽 분량의 주역과 십익 해설서를 낸 윤재근 교수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순(九旬) 나이에 접어든 윤재근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새 책 세 권을 냈다. ‘주역’ 상·하경과 공자가 지었다는 주역 해설서인 ‘십익(十翼)’(이상 동학사)이다. 모두 3300여 쪽, 원고지 2만 2000장 분량이다. 주역과 십익을 해부하듯, 따로 자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히 풀어내고 문장을 자세히 해석했다. 서울 광진구 윤 교수 자택에 있는 12권짜리 ‘중문대사전’엔 포스트잇 수백 장이 빼곡했다. 키보드를 치느라 손톱이 닳을 지경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1991년 ‘장자(莊子)’를 쉽게 풀어쓴 책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등이 밀리언셀러가 됐던 왕년의 인기 작가다. “사람들이 5공화국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어요. 길면 길다고 자르고 짧으면 짧다고 늘리려 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책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필에 꼬박 반세기가 걸렸다는 이번 책은 어디에도 대중서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윤 교수는 산골 소년이었다. 경남 함양 백운산 자락에서 약초를 캐는 채약인(採藥人)의 아들로 자랐다. 6·25전쟁이 나자 가족은 빨치산이 창궐하는 산에서 내려와야 했고, 부친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청년 윤재근은 출가하려고 절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고암(1899~1988) 스님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는 중이 되지 말고 대학에 가서 학자가 되거라. 네가 쓴 책 수만 권을 세상 사람들이 읽게 될 것이다.” 늦은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영문과에 들어갔을 때 서른 살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하는 한편 부친의 뜻을 받들어 주역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왜 주역인가? “많은 사람들이 주역을 점술서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윤 교수는 “주역이 이끌어주는 점은 복채를 들고 점쟁이를 만나는 점치기가 아니라, 내 삶의 왕래를 나 스스로 날마다 점쳐보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책입니다.” 주역의 점치기를 역수(易數)라고 하는데 이것은 역수(逆數)와 통하는 말이다. 미리 거슬러 [逆] 헤아려보라 [數]는 것이다.

  그렇게 내다봐야 할 앞날이란 결코 먼 미래가 아니라고 윤 교수는 말했다. “예전에는 ‘인생 닷새’란 말이 있었습니다. 그제·어제와 오늘, 내일·모레의 5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죠.” 주역은 오늘로써 그제·어제를 반추하고 곧 다가올 내일·모레의 삶을 건강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길잡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일신성덕(日新盛德·훌륭한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함)인데 허황된 미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부리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라는 뜻이다. 경쟁하는 삶이 사납고 치열해질수록 길잡이가 되는 책이 주역이라는 말이다.

  “주역은 6·25 전까지만 해도 식자층의 필독서였어요. 주어가 신(神)인 성경, 여래(如來)인 불경과 달리 주역은 주어가 ‘나’로 돼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점차 서양 문물이 들어오며 주역은 잊히고 오해받게 됐다는 것이다. ‘논어’ ‘맹자’와 ‘노자’ ‘장자’의 번역서도 낸 윤 교수는 “그 책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주역 풀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주역 64괘(卦)를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주역을 열어 드러나는 괘가 바로 그날 심독(心讀)할 인연이라는 것이다. “경문 자체가 삶의 길잡이인지라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마음에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25괘를 펴 들면 ‘밭 갈면서 수확을 생각하지 않고 첫째 밭을 일구면서 삼 년 뒤에 좋은 밭이 되리라 여기지 않으니, 곧 갈 바가 있어 이롭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을 하면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윤 교수는 자택 연구실에서 또 다른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과거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했던 ‘장자’의 결정판이라고 한다. “중요한 부분을 정선해서 책만 보고 독학이 가능하도록 쓰고 있어요. ‘장자’ 훈장 노릇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반세기 걸쳐 ‘주역’ 풀어냈다, 3300쪽 해설서 낸 90세 학자

반세기 걸쳐 주역 풀어냈다, 3300쪽 해설서 낸 90세 학자 주역과 십익 해설서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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