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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골프는 복장부터 클럽 형태와 숫자, 공의 위치에 따른 처리까지 어떤 스포츠보다 복잡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런 골프의 개념을 바꾸려는 도전이 있습니다. 바로 ‘투모로(TMRW) 스포츠’라는 단체가 만든 스크린 골프 리그 ‘TGL’입니다. ‘홀컵을 향해 공을 쳐서 집어넣는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항만 그대로입니다. 내년 1월 9일 시작해 4월까지 진행되는 이 리그에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매킬로이, 김주형을 비롯한 프로 골퍼 24명이 참여합니다. 뉴욕 메츠 구단주 스티브 코언, 애틀랜타 팰컨스 구단주 아서 블랭크 등이 구단주로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들이 자신 있게 골프를 재정의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배경에는 레이더 추적기와 고해상도 카메라, 시뮬레이터, 거대한 로봇 그린 같은 첨단기술이 있습니다. BBC는 “게임과 실제 프로스포츠를 통합하려는 가장 야심 찬 노력”이라고 했습니다. 스포츠는 합의된 규칙과 규격으로 진행됩니다. 간혹 유도처럼 도복 색상이 바뀌거나, 경기 진행을 빠르게 하기 위해 야구의 투구 시간을 제한하는 것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만 이 역시 오랜 논의와 공감대를 얻어 이뤄지기 마련이죠.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경기 방식을 아는 것이 스포츠의 본질인 셈입니다.

TGL 참가 예정인 골프 선수들. 왼쪽부터 로리 매킬로이, 타이거 우즈, 김주형.


◈프라임 타임에 골프 라이브 중계

TGL의 근거지는 플로리다주 팜비치 가든에 있는 돔구장 소파이(SoFi) 센터입니다. 미국 핀테크 회사 소파이는 이 시설 구축에 5000만 달러 (약 660억원)를 투입했습니다. TGL을 처음 구상한 것은 NBC 방송 스포츠 미디어 담당 임원이자 현 TMRW 스포츠 최고경영자(CEO) 마이크 매칼리입니다.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 프로그램인 ‘선데이 나이트 풋볼’의 책임자였던 그는 2019년부터 골프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가상(VR) 골프, 이른바 스크린 골프를 프로 대회에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와이어드 인터뷰에서 “골프 대회가 열리는 며칠 동안 TV 프로그램 전송에 최소 100만달러가 소요된다”면서 “몇 번의 번개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드는 일도 흔하다”고 했습니다. 특히 골프는 낮에 야외에서 진행되는 스포츠입니다. 스포츠 중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녁 시간대 ‘프라임 타임’에는 라이브 중계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매칼리는 2020년 골프 시뮬레이터 제조 업체 풀스윙의 라이언 도터스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본격적인 사업 구상을 시작합니다. 2021년 1월에는 우즈를 만나 사업을 설명했습니다. 매킬로이를 비롯한 올스타급 프로 골퍼를 잇따라 영입했고 “당신의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참여하겠다”는 답을 받습니다.

 

◈ 18홀 공식까지 깨

소파이 센터 관중석은 2000석입니다. 골프 대회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골퍼 뒤를 쫓아다니는 기존 갤러리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샷 하나하나에 마치 야구장의 투구와 타격처럼 열광하는 소리가 넘쳐날 겁니다. 샷마다 장면을 바꿔가며 다른 홀에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대신 같은 자리에서 1대1 또는 팀별 대결이 실시간으로 이뤄지면 마치 비디오게임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존 골프는 계속 걸으며 18홀을 이동해야 하는데 골프 중계가 길어지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하지만 매칼리와 TMRW 스포츠는 이동 과정을 모두 생략하면서 한 경기가 2시간 내에 끝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프라임 시간대 2시간’이라는 스포츠 중계의 성공 공식에 적합하다는 것이죠. 심지어 18홀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시간이 빠듯하다는 것을 파악한 뒤 3홀을 버리고 게임을 15홀로 설계했습니다. 매 샷에 40초 시간제한도 뒀습니다. 시간을 넘기면 팀에 1벌타가 돌아갑니다. 6팀은 4명씩으로 구성되고 각각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보스턴 등 6개 도시를 대표합니다. 시즌은 15라운드, 마지막에 2주간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이 가려집니다.

TGL이 골프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을 바꿀지, 골프라는 스포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물리적 현실과 디지털 현실을 혼합하려는 전 세계 테크 기업들의 경쟁 속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TGL이 성공하고, 새로운 시도가 늘어날수록 혼란스러워질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가 스포츠이고, 어디부터가 비디오게임인지 말입니다.

 

◈ 아이맥스 화면에 무한한 시점 가능

매칼리는 단순히 스크린 골프를 크게 키우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관련 기술 기업을 모두 모아 올랜도에 테스트 시설을 지은 뒤, 세계 랭킹 17위 골퍼 캐머런 영을 영입했습니다. 영은 각종 첨단 기기 최적화를 주도했습니다. 기존 스크린 골프 스크린 크기의 20배에 이르는 4K 초대형 아이맥스 스크린이 특별 제작됐습니다. 와이어드는 “바로 앞 스크린에 공을 치는 것과 달리 멀리 떨어진 스크린으로 공이 날아가는 과정을 상당 부분 보게 된다”면서 “이는 선수의 감각을 더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골프공의 외관과 타격감은 그대로지만 특수 소재를 사용해 레이더가 공의 회전을 더 쉽고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게 했습니다.


샷과 공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소프트웨어 역시 새로 개발했습니다. 이 덕분에 실제 플레이만큼 생생한 장면을 더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공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공의 시점에서 날아가는 과정을 중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TGL은 최고 수준의 골프를 보여주기 위해 실제 잔디와 벙커도 구현했습니다. 특히 홀컵에서 50야드 이내에 공이 들어갈 경우 90t 무게 거대 콘크리트 무대가 정교하게 움직이면서 퍼팅 그린을 만들어냅니다. 에어백과 함께 작동하는 189개의 액추에이터 덕분입니다. 골프 샷의 속도나 발사 각도, 회전뿐만 아니라 선수 심박수도 실시간 중계됩니다.

 

 

 

 

 

 

내년초 골프가 천지개벽… 우즈·매킬로이 등이 첨단 돔구장서 ‘스크린 골프’

내년초 골프가 천지개벽 우즈·매킬로이 등이 첨단 돔구장서 스크린 골프 WEEKLY BIZ 박건형의 홀리테크 게임과 합쳐지는 미래형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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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선수보살장은 이 경의 마지막 장으로 유통분에 해당된다. 유통이란 부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혼자만 받아 지니지 않고 후대에까지 끊이지 않도록 널리 중생들에게 전해 이익토록 하는 것이다.


현선수보살은 부처님의 지혜를 깨달아 모든 착하고 어진 법을 성취하고 실천하는 보살로, 부처님을 향해 이 경의 이름과 받들어 지니는 법과 공덕을 묻고, 이 경을 받아 지닌 사람들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며, 널리 유포하면 어느 곳에 이르게 되는지를 묻는다.

이 경을 유포하는데 열 가지 법행이 있다. 곧 공양 올리고 경을 베껴 쓰고, 베풀며,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설명하여, 사유하고, 수행하는 일이다.

원각경을 십이부경의 청정한 안목이라 한다. 십이부경은 부처님의 설해 놓으신 열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계경은 부처님의 일반적인 교설이며, 응송은 기야라고도 하는데 계경에서 설한 교법을 거듭 게송으로 설한 것이며, 고기송은 가타라고도 하는데 부처님 설법을 모두 게송으로 엮은 것으로 응송과는 달리 경문에 중복하지 않고 게송 자체로 이루어졌기에 고기송이라 한다. 

 

인연은 부처님 설법과 교화의 인연으로서 모든 경의 서품에 해당되며, 비유와 본사는 본생담으로서 부처님과 제자의 전생에 있었던 일이며, 본생은 부처님께서 전생에 수행한 갖가지 대비행이며, 미증유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희유한 일을 설한 것이며, 논의는 부처님의 제법의 체성을 결택하여 그 뜻을 명확하게 분별한 내용이며, 자설은 부처님의 스스로 설한 교법이며, 방광은 광대하고 심오한 교의를 설한 것이며, 수기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미래에 성불할 것을 증언한 것이다. 원각경은 이러한 경들의 청정한 안목이 된다 했는데, 안목이라는 것은 미혹의 근본을 미루어 궁구해서 깨달음의 근원을 사무쳐 아는 것으로서, 이로 인해 이치로는 경을 꿰고 뜻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가에서도 고착안 곧 안목을 높이 두라고 이른다.


원각경은 다섯 가지 이름이 있는데, 대방광원각다라니, 곧 크고 바르고 넓고 두루한 원각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수다라요의는 부처님의 경지를 완전히 드러내어 철저하게 설한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비밀왕삼매는 중생들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비밀한 부처님의 삼매경지 곧 근기가 되지 않으며 듣지 못하기에 비밀스럽다 했으며 근기에 다라 그만큼 듣는다는 것을 설한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여래결정경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는 부처님의 결정된 경지를 나타내 보인 경전이라는 의미이며, 여래장자성차별은 부처님의 마음자리인 여래장의 성품에 차별을 보인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돈교대승은 여러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승의 경지를 단박에 깨닫게 하는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무명을 단박에 여의어 더 닦을 것이 없어 곧바로 원각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점교는 갖가지 수행을 통해 점차로 깨달음을 이루어 원각에 드는 가르침을 이른다. 경문에서의 종취는 돈교요, 수행 측면에서는 점수문을 나타내고 있어서 결국 돈교, 점교를 모두 섭수하는 내용이다. 점교는 돈교를 포용할 수 없지만, 돈교는 점교를 포섭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바다를 돈교에 비유한다.


바다의 특징을 돈교에 비유했는데, 죽은 시체를 받지 않으며, 다른 물은 그 본명을 잃으며(시내, 강물), 한결같이 같은 맛이며, 광대무량하고 몸이 큰 중생이 살며, 조수 간만의 시기를 잃지 않으며, 아무리 큰 비가 온다 해도 가득 차서 넘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공덕에 대하여, 세상에 아무리 큰 복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경의 제목이나 한 글귀를 받아 지닌 사람만 같지 못하고, 광대한 세계를 일곱 가지 보배인 금·은·유리·자거·마노·진주·호박 등을 가지고 다 채워서 널리 베풀 수 있는 복을 지닌 사람도 원각경 반구절(곧 온전한 게송은 사구게지만 반 게송일지라도 뜻으로는 일체법이 본래 공적한 뜻이기에) 받아 지닌 사람에 비하면 그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금강경의 비유에 세상의 보배로 가득 보시한 것은 유루의 과를 돕고, 미묘법의 한마디는 보리의 보를 얻는다고 이른다.


이 경을 받들어 지닌 사람들은 마구니와 외도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흘리지 않아야 하리니, 외도는 삿된 지혜로 사람을 미혹해서 의심케 하여 마음을 홀리고, 마구니는 정신적으로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안하게 하여 병나게 만들어 몸을 홀리기 때문이다. 경에서는 "뭇 마구니라는 것은 생사를 좋아하는 것이고, 외도는 여러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수행하는 이들로 하여금 퇴굴심을 내지 말고 이 경을 지닌 사람들을 받들어 보호하라 이르며, 수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미묘한 법문에 나아가 퇴굴심을 내지 않게 된다고 이른다. 모쪼록 원각경을 공부하신 모든 분들이 부처님 가피로 충만하기를 축원드리며, 후기로써 마감하는 바이다.

돌아보건대 무시로 심해에 헤매다 광겁토록 생사의 물결에 떠다님일세. 수많은 부처님 인간 세상에 출현하셨으나 눈먼 거북이 떠다니는 나무를 만나듯 불법 만나기 어려웠더니 다행히 이 몸 이 경을 만나 천 갈래 의심덩이 얼음 녹듯 되었나이다. 지난 세월 익힌 훈습 살펴보면 다생의 선지식께 부끄러울 뿐이러라. 자비로 말세 중생 불쌍히 여기시어 한결같이 자상히 일러 주시니 부처님도 감응하여 마음의 근원에 칭합하사 본발에 막힘 없이 단박에 연설하시니 이미 경전을 갖추고 참된 적멸 구하던 차 부처님 뜻에 응해 경문에 알게 되었으니 이 공덕 널리 퍼져 중생을 향해지이다. 부디 모두가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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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보살은 이 경의 주제가 되는 원각의 경지에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방편으로 몸을 나타낸 보살로서, 말세 중생을 위해 어떻게 안거하며, 무엇으로 관행 곧 마음을 살펴 본성을 밝힐 수 있는지를 묻는다. 원각을 풀이하면, 모든 덕을 갖추어 두루 빠짐없이 교화가 미치는 것이 원이요, 지혜가 밝고 법이 명료함을 각이라 한다. 곧 원각이란 자타의 깨달음이 원만하면 본각과 같아서 지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이른다.

청결하고 조촐한 거처를 꾸며, 안과 밖으로 청정하게 하고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여 이치와 사리에 명합하면, 그때 비로소 정사유 곧 바르게 사유하게 되어 바깥 경계가 없는 경지에 든다는 것이다.

시방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참회하는 방법으로는,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인해 인색했던 장애가 제거되어 큰 이익을 얻게 되며, 부처님을 찬탄함으로 해서 잘못된 구업이 제거되어 무애변 곧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변재의 이익을 얻으며, 예불함으로써 아만의 장애가 제거되며 존귀한 몸을 얻게 되며, 지극히 참회함으로써 의보, 정보가 구족하게 되며, 부처님께 법륜 굴리기를 권하고 청함으로써 법을 비방하는 장애가 제거되어 다문지혜가 생기며, 타인의 좋은 일을 보고 기뻐함으로써 질투심이 제거되어 친한 이들을 많이 얻게 되며, 회향하는 마음이기에 옹색한 장애가 제거되어 크나큰 좋은 일을 성취하게 되며, 발원함으로써 퇴굴심 곧 물러서려는 마음의 장애를 제거하여 모든 것을 갖추게 되는 이익을 얻게 된다.


참회는 참마회과의 준말로, 참은 지난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고, 회는 지난 잘못을 고쳐 앞으로는 실수 없이 닦는다는 의미다. 참회함으로써 번뇌·업 · 잘못된 과보가 소멸되어 청정한 계가 성취된다. 참회는 이참과 사참으로 구분되는데, 주야로 부지런히 예불하는 것은 사참이요, 무심한 마음으로 잘못된 생각이 일어난 것을 참회하고자 단정히 실상을 생각하는 것은 이참이다. 또한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업으로서 모든 업장을 참회하여 제거하는 것이 사참이요, 모든 업의 성품이 마음에 머무르지 않으며 잘못된 마음이 머무르지 않도록 관조하는 것이 이참이다. 사참은 지말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요, 이참은 근본을 뽑아 버리는 참회다. 종합하면, 처음 발심해서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입으로는 찬탄하며 몸으로는 예불 올리고 주위를 청결히 하고 법비 내리기를 발원하며, 다른 이들을 섭수해서 함께 불법 속에 노닐며, 삼처 곧 보리·실제(실상)·중생에 회향하여 모두가 성불하기를 발원함으로써, 이에 이참· 사참을 갖추어 완전히 참회가 이루어진다.

섭념 곧 마음을 거둔다는 것은, 사마타 곧 지를 닦으려는 이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생각을 바르게 하며,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면 잘 거두어 바른 생각에 머물게 하는 것이니, 곧 유심일심이며 바깥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참으로 미혹한 업의 흐름을 제거하고 정념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공적하게 해야만이 부처님 경계의 모습이 나타나리라.

평등성지는, 제7 말라식을 전환하여 얻은 지혜로서 이에 의해 일체의 모든 사물과 현상 그리고 자기와 타인의 평등함을 알고 큰 자비심을 일으키는 지혜를 뜻한다. 곧 네 가지 미혹, 아치·아견·아만·아애롯 상응해서 망령되이 아뢰야를 계교하여 그 자체를 아로 삼아 평등한 이치 속에서 불평등한 견해를 일으켰지만 반연한 성품이 고요하고 칠식 자체가 여여해서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성지라고 한다.

수문은 곧 수식관으로서, 이는 마음의 총체적인 작용과 미세한 작용을 호흡을 통해 잘 다스려 점차로 묘한 경계에 들어가는 것을 이른다. 보살이 불도를 구하려면 수식관으로 마음을 고르게 해서 허깨비처럼 변화하는 것들은 생사와 열반이 아닌 줄 알고 평등한 지혜로써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어야만 중도에 들어가 불성을 보며 무생인을 증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삼관 곧 정관·환관·적관이 각기 증득한 상이 있지만 실로 원만히 수행해야만이 원각을 증득할 수 있다. 이에 천태지자 대사의 지·관 법을 살펴보면, 제법의 인연 곧 연기에 의한 존재를 살피는 가관으로부터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공관에 들며, 해야만이 원각을 증득할 수 있다. 이에 천태지자 대사의 지· 관 법을 살펴보면, 제법의 인연 곧 연기에 의한 존재를 살피는 가관으로부터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공관에 들며, 진제· 속제를 쌍으로 비추어 마음마다 적멸해서 자연스레 일체종지의 바다에 들어, 일념 중에 일체 불법을 갖추고 견성을 요달해 대승에 안주하여 행주좌와가 똑바르며 여래의 행을 행하고 육근이 청정하여 일체 도리를 체득하게 되는데, 이를 '초발심주보살'이라고 한다.

증득한 상에는 해증과 회증이 있는데, 해증은 걸림 없는 지혜로써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고 자연스레 법계를 원만히 체득하는 것이요, 회증은 미묘한 지혜와 환히 밝아 법계를 비추어 걸림 없이 통달하는 것을 이른다.

부처님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신 것은, 중생들에게 수습하도록 하는 인연을 짓게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삼관이 다 갖추어지면 온갖 것이 원만해짐으로 해서, 이때 부처님이 출현한 때라 하겠다. 수행하고자 하는 이는 업과 미혹을 끊고자 거듭 서원을 세우고, 지난날 지은 업과 장애들에 대해 깊이 참회를 해야 하리니,

<보현관경>에 이르기를
'지은 바 온갖 업장의 바다 망상을 좇아 생겨났으니
모든 죄업 참회코자 한다면 단정히 앉아 실상을 생각하라.
모든 죄업 아침의 서리와 이슬 같아서 지혜의 해가 모두 없애 주리라.
항상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육근 · 육진으로 지은 죄업 참회할지어다.'

<천수경>의 참회게에서는
'예부터 지은 모든 업은 끝없이 오래전 익혀 온,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이요,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업들을 내 이제 참회하옵니다.'라고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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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보살은 깨달음이 법계에 두루하여 가득 찬 보살이다. 보각보살장에서는 무명을 돌이켜 지혜에 나아가는 올바른 수행과 선지식을 의지해서 네 가지 병과 미세한 미혹을 제거하기를 권하며, 앞에서는 아상이 있기에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장애가 제거되었기에 수습토록 한 내용이다.

수습함에 있어 시비가 있을 수 있을까 싶어 반드시 스승 곧 선지식을 의지해 네 가지 병에 빠지는 것을 면하게 한다. 그래서 보살이 대비로써 말세엔 성인과 현인이 숨고 정법이 장차 침몰하는 것이 안타까워 미래에 이익되도록 미리 이러한 질문을 하여, 지혜의 안목을 갖출 수 있도록 경책하고 있다. 이어 훌륭한 스승을 섬기도록 지시하며, 네 가지 병을 분별하여 제거토록 하며, 스승 섬기는 마음을 설명하고 병을 제거하는 관행을 밝혔으며, 발심이 매우 깊음을 드러낸다.

마음이 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범부의 번뇌 경계를 여윈 것으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깨달았다는 경계가 남아 있으며 상에 머문 것이다. 보리 열반도 취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세간의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경계에 머문다 하는가. 그래서 『금강경』에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른다. 그것이 바로 원각에 계합한 경계다.

진로라는 것은, 진은 육진을 말하고 로는 수고롭고 고달픈 것인데, 이는 육진으로 인해 수고롭고 고달픔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곧 번뇌를 의미한다. "말세의 중생이 부처님과 서로 떨어져 점점 멀어짐에 현인과 성인은 숨어 버리고 삿된 법이 불꽃처럼 일어난다." 한 것은 거성시요, 곧 부처님과 서로 떨어진 것이 멀다는 의미로서 부처님은 입적하셨어도 진리는 항상 하기에 단지 부처님과 떨어져 있을 뿐 진리와 면면히 이어진다는 뜻이다.

선지식을 어떻게 받들어 섬기며 법을 받듦에 있어 『대승사법경』에 "모든 비구들은 수명이 다하도록 결정코 선지식을 버리지 말라."라고 당부한다. 선지식은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자로서 훌륭한 선지식도 잘 섬겨야 하며, 선지식에 대해 신뢰와 교만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법구경』에 "만일 선지식의 모든 행위에 있어 터럭만큼이라도 의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라고 이른 것은, 선지식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심오한 법문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화현으로 방편의 도를 보이기에 헤아리기 어려우니, 다만 법문에 의지하고 자취에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의법불의인, 곧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다.

선지식을 의지하면 마음이 밝아져 시방세계를 비춘다 했는데, 이는 깨달음의 마음이 밝아짐으로 해서 지혜의 빛이 비추어 접촉하는 경계마다 물들임이 없어 심화, 곧 마음의 꽃이 빛난다 하리라.

마음의 병이 끝없지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교법으로써 기준을 삼지 않고 스승을 지도자로 삼지 않으며 단지 마음으로 생각하여 생긴 병을 이른다.

스승을 어떠한 마음으로 섬기며 수행하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어떤 것이 보살행인가?"라는 선재동자의 물음에 문수보살은 "선우를 가까이하는 일뿐"이라 답한다. 『법구경』에서는 선지식을 부모·사다리·보배 옷·교량·해와 달 등 21가지로 비유하는데, 이는 한결같이 선지식은 무량 공덕을 갖춘 것에 비유한다. 그래서 선지식을 가까이하라 이른다.

역순경계라는 것은, 멀리 여의는 것이 역경계요, 친근함이 순경계며, 뜻이나 생각을 거스르는 것이 역경계요, 뜻이나 생각을 따른 것이 순경계다. 『승만경』에 "모든 것을 수용해서 제도할 것은 제도하고, 끊어 조보 시킬 것은 조복해야만이 불법이 오래 머문다."라고 이른다. 호법신장인 사천왕의 역할이기도 하다.

종자, 곧 모든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으로 인해 도에 들어감에 미세한 병이 있고 또한 뚜렷이 밝은 깨달음에 계합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때문에 법을 듣고도 이리저리 헤아리게 되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게 되며, 허망함을 미워하고 참된 것을 좋아해서 능소를 잊지 못하기 대문에 이러한 병을 제거해야만 한다. 더불어 현행, 곧 종자로부터 벌어진 현상은 거친 번뇌로서 쉽게 할 수 있지만 종자는 미세해서 밝히기 어려운 것이다.

원수의 집과 부모가 둘이 없다는 것은, 비추어 살펴보면 열반과 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다르지 않기에 나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함도 없게 되며, 이렇게 구분하는 병이 있게 된 것은 참된 것을 사랑하고 망령된 것을 미워하기 대문이며, 나와 남을 구분하여 훌륭한 스승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생각을 일으켜 행동함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다. 앞에서는 사람을 관찰해서 잘못된 병을 제거하고 여기서는 법, 곧 경계를 잘 관찰하여 병을 제거하라 이른다.

수행에는 발심이 우선이고, 발심과 원력으로 정각을 이룬다. 원력이 없이 수행하면 성불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수레바퀴 하나가 빠진 것과 같으며, 새에게 오직 날개 하나만이 있는 것과 같다. 원대한 원력을 일으켜야만 보리를 성취할 수 있고, 이러한 원력을 받들어 교화한 것은 삼계의 모든 부처님이 이와 같은 원력으로 중생을 제도한 것이다. 제도하되 '나다, 남이다'하는 등의 상이 있으며 보살의 모습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원각의 성품은 억지로 지어서 얻는 것이 아니며, 생각을 맡기고 놓아 버리는 것으로는 원각의 성품에 다다를 수 없고, 망령됨을 그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의 작용이라 할 수 없으며, 고요함에 머무는 것으로도 원각에 계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무명을 돌이켜 지혜에 나아가는 올바른 수행과 선지식을 의지해 네 가지 병과 미세한 미혹을 제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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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업장보살은 모든 업의 장애가 다하여 청정해진 보살이다. 업이란 '행위·조작·일'의 뜻을 담고 있다. 업은 중생을 속박하고 생사의 세계에 빠지게 하며, 중생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끊임없이 업을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존재이다. 정제업장보살은 이와 같은 업이 모두 제거된 원각의 자리에서 중생들이 업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나타난 보살이다.

이 보살이 부처님께 여쭌 것은, 중생들이 본래부터 밝은 깨달음인 원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나고 죽음을 비롯한 갖가지 괴로움 속에서 헤매게 되었는가를 질문한다, 곧 원각이 본래 청정한데, 깨달은즉 응당 같거늘, 다시 무슨 법이 있어 불들여 나로 하여금 마음의 작용이 부처와 다르게 하며, 본래 청정하다면 이제 중생의 물듦이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중생은 더럽혀져서 나고 죽음의 굴레 속에 헤매게 되는지를 묻는다. 


망상 등이라는 것은, 없는 가운데 아등을 잘 못 헤아린 것으로서 사상을 총괄해서 아상이라 하며, 아상이 전전해서 네 가지 상이 전개된다. 이를테면 사상은 아를 자체로 삼고, 아를 여러모로 헤아려 계속해서 여타의 경계에 나아가는 것이 인이 되며, 아의 성쇠고락과 갖가지 변화되는 일들이 상속되고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이 중생이 되며, 아 하나의 과보인 생명체가 끊이지 않고 머무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 수자가 된다.


전도라는 것은, 참된 아 는 본래 있거늘 미혹으로 없다 이르고, 망령된 아 는 본래 공하거늘 집착하여 있다고 여겨서, 사상을 모두 잘못 계고, 곧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유마경』에 "법은 아 가 없으니 아의 허물을 여윈 까닭이며, 법은 인이 없으니 전후의 경계가 끊어진 까닭이며, 법에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허물을 여윈 연고며, 법에 수명이 없으니 생사를 여의었기 때문이다."라고 이른다.


사상은 아를 실체가 있다고 착각함으로 인해 아상이 있고, 아의 경계를 지어 개체적·절대적 상을 세우는 것이 인상이며, 아에 온갖 변화가 끊임없이 상속되는 것이 중생상이며, 아의 과보인 생명체가 끊이지 않고 머무는 것을 헤아리는 것이 수명상이다. 사상에 집착하여 실로 아의 실체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그로 인해 자신에게는 사랑이 생기고 타인에게는 미움이 생기며, 아를 따르는 이는 사랑하고 아를 거스르는 이는 미워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랑과 미움은 아에 집착함으로 인한 것이다.


나로부터 사랑하고 미워함이 일어나 여러 가지로 도에 장애 되는데, 이는 미혹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데 있어 비록 부지런히 여러 수행법에 힘쓸지라도 다만 무명을 도울 뿐 불과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며, 본래 무명으로부터 사랑하고 미워함이 일어나고, 사랑과 미움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여 종자와 현행이 상속해 끊어지지 않아, 이로써 도를 구함에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멋대로 집착하여 아로 여겼기에, 설사 도를 닦아 망령됨을 버리고 참된 것을 증득할지라도 깨달았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며 모두 아상이라고 한다. 이승열반을 사무쳐 아는 것이 아상일 뿐만 아니라, 설사 여래열반을 사무쳐 알지라도 또한 아상이며 열반은 오직 깨달음의 본체요, 따로 증득할 것이 없다. 열반을 증득해서 능소, 곧 주관과 객관을 잊지 못하면 아상이라 한다. 마음으로 깨달아 증득했다는 것은 그릇됨을 깨달은 것이며, 다시 잘 못 알지 않는다는 것은 증득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루 깨달았다는 것은 능소 곧 주관·객관과 깨달은 자와 깨달은 것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그 흔적마저도 초월한 것이다.


중생이란, 어떤 법을 깨닫고는 깨달았다는 자취가 여럿이 생겨나서 끝없는 집착을 이룬다는 뜻이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을 법이 있으며 아상이 되고, 능히 깨침이 있으며 인상이 됨을 사무쳐 알았으나, 아직 사무쳐 안 바를 두면 이러한 수행자의 집착이 중생상이다.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헐뜯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그들의 훼방을 목격하되 성내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사람도 아상이 있는 것이요, 진정으로 아공을 알았을 대 '나'를 헐뜯는 자가 없는 것이니, '나'를 헐뜯는 이를 인식하는 것마저도 여의어야 진정한 아공을 체득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원각의 마음 곧 본 성품이 본래 청정한데 중생은 무엇 때문에 번뇌로 물들여지는가에 대해 중생을 전도시키는 네 가지 병, 아상·인상·중생상·수명상이 무명의 근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원각의 마음이 본래 청정한데, 어떻게 물들어 중생들이 생사에 헤매게 되는가를 묻고, 이는 망상 대문에 사상에 전도되어 아체가 있다고 착각을 한다. 이어 사상에 집착하여 아의 실체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미움과 사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업의 길을 가게 되며, 깨달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깨달음이 막거나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나로부터 사랑과 미움이 일어나며 사랑과 미움은 무명이 자라게 하여 도에 장애 되는 것이다.


아상은 마음으로 얻은 바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며, 인상은 증득해 취한 것을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하며, 중생상은 어떤 법을 깨닫고는 깨달았다는 자취가 생겨나서 끝없이 집착하는 것을 이르며, 수명상은 앞의 삼상의 허물을 면하기는 했으나 집착 없는 업의 지혜가 면면히 끊이지 않는 것을 이른다. 이러한 사상의 병인 유위로는 성인의 과위를 성취할 수 없으며, 열반을 사랑하고 생사를 싫어해서는 참다운 해탈이라 할 수 없으며, 아상을 제거하지 못하면 청정한 원각에 들지 못한다. 아공을 체득해야 청정한 깨달음에 들어가며, 성인의 지혜를 잘못 알고 "얻었다""증득했다" 하지 말라고 경계하며, 결과만을 구하고 근본 원인에는 미혹하여 아견을 자라게 하지 말며, 허물을 여의고 용심을 잘해서 청정한 깨달음에 들도록 권하고 경책 하는 것이 정제업장보살장에서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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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음보살은 변재 곧 말솜씨가 뛰어나 막힘이 없는 보살로서, 일체법에 자재하며, 깊고 예리하게 분석하여 통달하며, 실상을 설하며, 물음이나 설명에 단절함이 없으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대승법을 설한다 해서 변음보살이다.

변음보살은 앞서 부처님께서 위덕자재보살에게 수행의 기본 방편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시는 것을 듣고, 그중의 하나만 택해서 닦아야 하는지, 세 가지를 병행해서 닦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앞에 닦고 무엇을 뒤에 닦아야 하는지 그 차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이에 중생의 병통에 따라 보살이 삼관을 몇 가지로 닦아 익히는가를 묻는다. 중생의 치우침에 따라 어떤 대는 차제로 점차 닦아 가기도 하고 한 생각에 뚜렷이 닦기도 하여 스물다섯 가지의 차별이 생기나, 그 모두가 원각에서 일어나 중생이 실상을 깨달도록 해 주니 그 닦음은 닦음 아닌 닦음이다. 변음보살의 물음은 나만을 위한 이기심 곧 아상이나 법을 얻었다는 아만에서 나온 물음이 아니라, 말세 중생이 실상을 깨달아 원각의 문에 들어서도록 하는 대비의 마음에서 나온 물음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변음보살을 찬탄하고 스물다섯 가지 선정의 차별에 대해 답해 주길 허락하신다.

또한 수행의 근본이 삼관법 곧 정관·환관·직관을 수행하는 데 있어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한 사람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하는가, 세 사람이 각기 하나를 닦아야 하는가, 전·후로 닦아야 하는가,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 차례로 닦아야 하는가, 차례를 초월해서 닦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했는데, 수레바퀴는 무찌른다는 뜻으로 미혹과 장애를 무찔러 바른 지혜로 전환시키는 의미가 있다. 삼관의 수행법은 수레바퀴가 둥글게 서로 연결되었듯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삼관을 선정의 수레바퀴에 비유한 것은, 운반이라는 의미가 있어 사마타와 삼마발제와 선나가 하나의 선정이 되어 수행자를 원각이라는 목적지로 운반해 주는 까닭이다.


수행하는 법은 비록 중생의 취향과 근기에 따라 정해짐이 없이 스물다섯 가지로 분별되지만, 그 수행하는 마음가짐은 모두 반드시 닦아 익힐 것이 없는 원각에 의지해야 하기에, 허개비의 힘으로 닦아 익혀야만 한다.

주체와 객체 그리고 식의 모습이 고요하므로 나의 고요한 마음에 시방 여래의 마음이 나타나고, 나의 마음이 시방 여래의 마음이 나타나고, 나의 마음이 시방 여래의 두루하게 되는 것을 사마타라 한다. 이는 있고 없는 모습을 통달함으로써, 모습에 물든 망상을 사마타행을 통해 바로잡아 닦아 가는 것이다. 사마타를 통해 일체 번뇌가 멸하며, 몸과 마음에 있어 선·악을 조화시키며, 오욕을 여의게 하며, 탐·진·치 삼독을 청정케 한다. 사마타는 지라 번역하며, 정의 다른 이름이며, 적관의 뜻이다. 이는 물들고 청정함의 경계에 마음이 망령되어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사마타라 한다.

'고요하게 비추는 힘'은 능히 살피는 지혜의 힘이니 공관으로 허망한 생각과 이 몸이 좇아온 곳이 없음을 바로 살피며, 나고 죽음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열반을 성취하니 이것은 사마타를 홑으로 닦되 고요함의 행인 이 관이 흐린 물을 맑게 하듯 번뇌의 흐름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깨달음 속에서 어떠한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로서, 곧 고요히 앉아 항상 스스로가 체득한 내적인 즐거움에 머물러 그것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서 한번 열린 원각의 문을 더 활짝 열어 놓는 관행을 닦는 것이다.

심성은 식으로서, 식이 육근 육진으로 더불어 셋이 화합하여 각기 자성이 없으며, 다만 이는 무명이 진을 미혹해 일어났기에 허깨비 같다고 한다. '변화시킨다'는 것은, 차별적인 허깨비 같은 지혜를 변화해 일으켜서,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에 대해 낱낱이 진정한 청정에 들게 하며, 갖가지 방편을 변화해 일으켜서 근기에 응해 설법해서 허깨비 같은 중생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 곧 경안이라는 것은 유식의 용어인데, 마음 작용에 있어 심신이 평안하며 융통성이 있고 경쾌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고 침울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혼침의 대비되는 개념이며, 대비심이 정으로부터 일어난 마음이다.

흙이 싹을 자라게 한 것과 같다는 것은, 종자와 곡식이 흙에 의거해서 싹이 자라나 거둘 때에는 싹과 흙을 모두 버리는데, 종자는 깨달은 마음에 비유하며, 흙은 법에 비유하며, 싹은 지혜에 비유가 된다. 청정한 깨달음의 마음으로 모든 허깨비 같은 법을 좇아서 허망한 마음을 잊고 깨달음에 들어간즉, 앞에서 좇았던 법과 허망한 마음을 모두 잊는 것이다.

삼마발제는 등지라고 번역하며, 혼침 곧 몸과 마음이 들뜨고 소란스러운 상태를 여윈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로서 관이라고 하며, 경문의 '여환삼매'를 일컫는다.

나고 죽음 없는 열반에도 머무름 없이 대자비를 성취하여 원각의 땅에서 묘한 행을 일으키는 보살의 수행을 삼마발제라고 하며, 나고 죽임 끊어진 원각의 본바탕은 땅과 같고, 깨달음의 땅에서 발현되는 대비의 행과 살핌 없이 살피는 지혜는 당이 길러 내는 싹과 같다.

사마타행이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데 반해, 삼마발제는 고요함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중생을 향한 자비로써 그 수행을 삼는다. 마치 흙에서 싹이 나와 자라듯 고요한 땅에서 자비의 싹이 나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며, 자비는 원각에서 일어나고 다시 그 원각을 더욱 뚜렷하게 한다.

'다라니에서 고요한 생각과 모든 조용한 지혜를 잃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이대의 다라니는 원각의 다른 말이다. 지금 있는 모습과 한 생각을 허깨비처럼 살펴 있음에 걸리지 않고 공한 삶의 터전에서 묘한 작용을 일으키되 늘 고요한 한 생각을 잃지 않으면 허깨비 같은 변화의 작용을 자유자재하게 운용하는 것이다. 원각은 능히 모든 세계와 존재를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에 다라니라 하며, 다라니라는 말은 총지로 해석되며 '일체법을 간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나를 닦는 것은, 허개비 같은 무명을 타파하고 갖가지로 중생을 교화하되 그 교화하는 행위 역시 허깨비임을 알아, 그 행을 마음 가운데 주지 않고 지혜로서 번뇌가 끝까지 다한 실상의 자리를 증득해 들어가는 수행이다.

환관법인 공관 수행을 계속해서 원각이 열리며 사마타의 고요한 지혜와 삼마발제의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가 갖추어지며, 선나는 바로 이 같은 사마타와 삼마발제의 경계를 다시 환관법으로 돌려 원각의 개달음을 완성시킨다.

묘한 개달음의 경계는 몸과 마음이 있는 경계가 미칠 수 없으며, 중생상 수명상의 두 가지 장애를 끊어져 그 두 가지 장애가 한갓 들뜬 생각이 되는 것이며, 나고 죽음의 허깨비와 열반의 고요함을 모두 취하지 않고 바로 원각에 수순하는 이것이 바로 움직임에 움직임 없고 고요함에 고요함마저 없는 중도의 바른 관 곧 중도정관이며 선나의 방편이다.

한 마음에 바로 삼관을 갖추면, 있음에 들어가도 있음이 아니고 없음에 들어가도 없음이 아니며, 나아가 중도를 말해도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가운데 모습도 없다. 이처럼 묘한 관을 두렷이 닦으면 '경계에 나아가 바로 중도'이므로 모습에 나아가도 개달음이고, 모습 없는 성품에 나아가도 개달음이며, 모습도 아니고 모습 아님도 아닌 중도를 말해도 깨달음이다. 이렇게 살펴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한 마음에 갖춰진 세 가지 관 곧 일심삼관이니, 경에 '세 가지 관을 뚜렷이 닦아 자성의 청정함에 수순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각의 실상을 깨닫는 데는 몇 가지 방편이 있는지를 묻고, 허깨비의 힘으로 닦는 데는 스물다섯 가지 방편이 있으니, 사마타는 번뇌를 끊고 고요함에 드는 것이며, 삼마발제는 고요함 속에서 일어난 원각의 힘으로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며, 선나는 실상을 증득한 것이라 한다.

사마타를 선두에 하여 삼마발제와 선나를 닦는 관법이 7 방편이 있으며, 삼마발제를 선두로 하여 사마타와 선나를 병행해서 닦는 관법이 7 방편이 있으며, 사마타 · 삼마발제 · 선나를 통합해서 닦는 한 가지 방편을 모두 종합해서 스물다섯 가지 방편이 있고, 스물다섯 가지로 굴려 쓰는 선정이 바로 보살이 받아 지녀야 할 바른 수행이다. 이는 법행과 젖정과 사유의 방편으로, 참회로써 구하고 발원해야만 한다.

『금강경』에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온갖 보배로 보시'한 공덕도 금강경의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곧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허망한 줄 알아, 모든 상을 여의었을 때 참다운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는 게송을 타인을 위해 설해 준 공덕에 비교할 수 없다고 했듯이, 어떤 사람이 원각의 걸림 없는 법문을 듣고 한 찰나 사이에 수순하고 닦아 익힌 공덕에 그 어떠한 것도 비교할 수 없겠다.

사마타행 · 삼마발제 · 선나의 방편으로 인해 중생들의 허망한 집착의 병을 여의게 하며, 필경에는 병을 다스리는 관행의 자취마저도 여의어 원각에 들게 한다.


대혜 선사의 게송에,

뒤바뀐 생각 일어나면 나고 죽음 이어지고
뒤바뀐 생각 사라지면 나고 죽음 끊어지네.
나고 죽음 끊긴 곳이 열반의 공적함이나
열반의 공적한 곳도 눈 속의 가루로다.
열반 이미 공적하다면 눈 속 가루 무엇인가,
흰 구름은 푸른 산에 올 수 있지만
밝은 달은 하늘에서 내려오게 할 수 없노라.

 


라고 하였다. 이는 삼관의 방편도 중생의 병에 따르는 약일뿐 단박 깨침의 길에는 한갓 눈 속의 가루와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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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혜보살은 미륵보살의 전애성자 곧 애욕을 전환해서 자비를 성취함으로서 인해 '중생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전환해서 지례를 이루게 했으며' 위덕자재보살은 청정혜보살의 전치성혜 곧 어리석음을 전환해서 지혜를 성취한 것을 이어 질문하기를 '중생으로 하여금 성냄을 전환해서 위엄을 이루게 했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자재롭게 하기에' 위덕자재보살이라 한다.


위덕자재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행 가운데 진리의 문에 드는 방편을 묻는다. 경문에서 성은 원각에 비유하고, 성에 있는 문은 수행문에 비유했는데, 이는 마치 동쪽으로부터 왔으면 서쪽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보살은 깨달음의 공덕이 법계에 두루하여 다함없는 가운데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걸림이 없는 보살이다. 부처님께 수행의 필요성을 사뢰고, 마치 성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듯이 수행법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지를 묻는다.  


'부처님의 원음을 듣고'에서 '원음'이란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의 음성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음성은 이 세계에 두루 퍼져 들리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다. '닦아 익히지도 않고 좋은 이익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으로 인해 혼자 힘으로는 세세생생을 거쳐 갖가지 고행을 해도 알기 어려운 이치를 단번에 깨닫게 하여 큰 이익을 얻게 하였다는 의미다.


여래를 출생한다는 것은, 시방제불이 한결같이 증득하고 닦는 것을 뜻하며, 일체법과 더불어 동체 이어서 평등하다는 것은, 색심이 둘이 아니며 범부와 성인이 차별이 없어서 모두 깨달음의 성품에 의거했기에 동체이어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여는 중생에 있어서는 불성이라 하며 중생이 아닌 것에는 법성이라고 한다.


위없는 묘한 깨달음은 중생과 세계와 부처의 근본이다. 즉 묘한 깨달음의 자리인 원각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에 깨달았다고 해서 부처를 따라가고 어리석다고 해서 중생을 따라가지 않는다. 온갖 인연이 펼쳐졌다 할지라도 그 인연을 다라 변하거나 흐르지 않으며, 이 묘한 깨달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그 자리만을 지키고 있지는 않아서,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만법의 주체가 되어 부처와 중생을 창조하고 범부와 성인을 낳으며 더럽고 깨끗함을 나타낸다. 이것을 원각이 지닌 불변성과 수연성이라고 하는데, 불변성은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원각의 바탕이고, 수연성은 움직이고 않고 움직이지 않되 움직이고 있는 원각의 자리에서 보면 차별된 만 가지 현상은 그대로 평등하게 나타난다. 


'모든 수행에는 실제로 둘이 없지만, 방편으로 수순하는데에는 그 수효가 무량하고, 돌아갈 바를 거두려면 성품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라고 한 것은, 묘한 깨달음 자리인 원각은 갖가지 수행의 방법을 따라 새삼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성품이 한결같아 평등하므로 어떤 수행법을 닦아도 빠르고 더딜 것이 없고, 높고 낮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가 다르고 수행하는 차원이 다르기에 삼관 곧 사마타·삼마발제·선나로 나뉜다.


첫 번째 '사마타'는 중생의 번뇌와 망상이 그쳐서 고요해졌다는 듯으로 지로 표현한다. 이는 일어나고 꺼지는 중생 마음속의 번뇌가 그쳐 아주 평온해진 상태로 흙탕물 속의 흙이 가라앉듯 정화된 경지다. 또한 혼탁함을 맑혀 청정하게 하며, 작용을 쉬어 고요하며, 몸과 마음이 공함을 깨달아 잠깐의 허튼 생각이 없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상태다. 이는 지극히 고요함 속에서 공한 진리를 살피고 공관으로서 허망한 생각과 이 몸이 좇아온 곳이 없음을 바로 살펴, 나고 죽음이 의지할 곳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방편이다. 


다음은 삼마발제로서 '등지'로 번역하는 데, '등'은 탐욕·성냄·혼침·들뜸·의심과 같은 큰 번뇌들을 항복시켜 그 마음이 지극히 평등해진 상태를 말한다. 근본불교에서는 삼마발제를 정으로 보기 때문에 역시 정학에 속하는 수행법이다. '여러 가지 허깨비와 같은 모습을 지어 내어'라는 것은 참된 원각의 깨달음 마음자리에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은 마음자리에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크나큰 사랑과 갖가지 행위들도 결국 허깨비 같은 줄을 안다는 뜻이며, '허깨비 같은 중생의 무리를 깨우쳐 준다.'는 것은, 중생이 본래 중생이 아니어서 깨우쳐 준다는 것마저도 허깨비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대비심과 편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원각을 깨달은 수행자는 일반 중생이 일으키는 집착에 얽힌 사랑과는 다른, 일체가 허깨비 같은 줄을 알아 머무름이 없고 얽매임이 없는 사랑을 베풀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이 허깨비 같음을 관찰하는 것은 허깨비가 아니나 역시 허깨비와 같다고 여기는 까닭에 모든 허깨비 현상들을 벗어나게 되느니라.'라고 한 것은, 무명을 관찰할 때의 지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으로, 일체가 허깨비인 줄을 아는 그 마음은 분명 허깨비가 아닌 진실이며, 수행은 그 진실 역시 허깨비와 같다고 봄으로써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향상일로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삼마발제는 원각의 자리를 더욱 드러내기 위해 미혹한 중생들을 향해 일어나는 대비심을 관하는 것으로 수행 방편을 삼고 있다. 삼마발제를 흙이 싹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깨달음을 키워 나간다는 뜻이다. 오직 허깨비임을 살펴 상에 머물지 않되 허무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허깨비의 변화와 세계의 갖가지 작용을 머묾 없는 미묘한 행으로 굴려 써서 그 가운데 고요한 생각과 조용한 지혜를 잃지 않으면, 바로 삼마발제인 것이다.


세 번째 선나는 정려로 번역하며 고요하게 관찰한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와 망상의 자취가 끊어져 고요해진 상태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선나도 정학에 해당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원각을 이미 깨달은 상태에서 다시 마음을 닦아 들어가는 법을 가리키고 있다. '허깨비 같은 것들과 더불어 조용한 모습들 마저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삼마발제와 사마타의 경지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중도관을 설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장애가 되었음을 사무치게 아다.'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몸과 마음이 '나'라는 착각을 굳게 지니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장애인 줄을 모르고 집착하여 '나' '내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 몸과 마음이 참으로 번거롭고 부자유한 존재임을 실감하게 된다는 뜻이다.


'알고 느끼고 자각함이 없는 밝음은 온갖 걸림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각의 밝은 성품은 몸과 마음의 작용이 끊어진 지혜의 빛으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음을 이르며, 무지각명의 각은 몸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며, 지는 마음으로 아는 것을 이른다.


묘한 깨달음 곧 묘각은 원각이다. 원각은 중생의 헤아리고 분별하는 생각과 감정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므로 묘하다 한 것이다. 이 자리는 '나'와 '남'을 떠난 자리요, 허망한 마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오로지 생각과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고 몸과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허망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바로 볼 때 비로소 선나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선나는 허깨비 같은 무명을 타파하고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서, 모습을 깨뜨리지 않고 모습에 자재한 것이 마치 막힘 공간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담을 넘어 멀리 퍼지는 것과 같으며, 형상이 성품의 고요함을 묶어 두루 미묘하게 작용하며, 지혜와 덕이 깊고 미묘해서 도의 근간을 증득하며, 신령한 빛이 원만히 비춤에 번뇌의 기운이 영원히 고요해지며, 신령한 마음을 사무치게 비추어 미혹의 근원을 궁구하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삼관 수행은 원각에 의지하여 번뇌와 망상을 끊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사마타, 중생을 향한 대비심을 일으키되 그 대비심 역시 허깨비임을 관찰하는 삼마발제, 번뇌와 열반마저도 모두 벗어나 모든 것에 걸림 없음을 실천하는 선나, 이 삼관은 불법의 모든 수행을 포섭한다.


스물다섯 가지의 방편은 선정이 바로 보살이 받아 지녀야 할 바른 수행법으로서 공부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범행을 지녀야 하는 계행이요, 고요하게 사유하는 선정과 지혜이다. 이 처럼 삼학을 가지런히 해서 지난 세상의 죄업을 슬피 참회하고서야 삼관을 원만히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물다섯 가지 선정 가운데 스스로 방편문을 가질 수 있으며 그 방편문에 따라 닦아 가고, 스스로 가질 수 없으며 관문의 이름을 표 위에 기록해 접어 맺어 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한 표를 펴서 그 안에 적힌 관문을 따라 공부해야 하며, 그 안에 적힌 관문이 삼관을 한꺼번에 닦는 돈문의 방편이든 차체로 닦는 점문의 방편이든 그에 따라 수행할 뿐 한 생각이라도 의심하거나 후회하면 공부를 이룰 수 없다.


삼관 곧 사마타·삼마발제·선나를 정리해 보면, 사마타는 고요함이며 중생의 무명과 망상이 다한 자리로서 고요한 자리며 정관·정려이고, 삼마발제는 허깨비 같음을 관찰하고 보살의 행과 부처님의 힘이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비심으로 세계를 건립하며 다라니 곧 원각에서 지혜를 잃지 않고 작용하는 환관이 되며, 선나는 번뇌를 끝까지 다 끊은 상태로서 청정한 경계·적멸·실상을 증득한 적관이다.


광활한 바다를 원각·선나·실상·적관이라 한다면, 고요하고 잔잔한 모습은 사마타·정관이며, 파도는 온갖 작용을 일으키는 삼마발제·환관이 된다.


'성상에 각성을 여의지 않는다.' 한 것은, 자성 그 자체는 사마타 곧 정관이며, 상인 모습은 삼마발제·환관이며, 각성·실상을 증득한 자리는 선나 곧 적관·중도·적멸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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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혜보살장에서는 원각은 차별이 없지만 닦아 증득하는 데는 차별지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청정혜보살은 청정한 지혜를 지닌 보살이며, 청정은 밝고 깨끗함이다. 세상에서의 깨끗함은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물들고 더럽혀지지만, 이 보살이 누리고 있는 지혜의 맑고 깨끗함은 어느 것에 의해서도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깨끗함이다.

청정혜보살이 부처님께 물은 것은, 중생과 보살과 부처가 증득한 경지의 차이는 무엇이며 서로 같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원각은 차별이 없지만 닦아 증득하는 데는 차별지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부사의 한 일이라는 것은, 생각이나 말로 미칠 수 없기 때문이며, 윤회 근본 종성의 차별법이 있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깨달음에는 차별과 뒤섞임과 물듦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부사의하다고 한다. 『승만경」에 "물들지 않되 물드는 것과 물들되 물들지 않는 것을 모두 요지 하기 어렵다."라고 부사의를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보거나 듣지 못했다는 것은, 청정하고 물듦이 서로 차별이 있다거나 청정하고 물듦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은 익히 보고 들었지만, 여기서는 깨달은 성품에는 청정하고 물듦이 원융하게 통했다는 것을 일찍이 보고 듣지 못했다는 의미다. 곧 깨달음 마음은 일미로 돼, 인과가 층지고 차별되는 뜻을 묻고 있다.


중생의 깨치지 못한 지위와 보살의 닦아 가는 지위와 여래의 이미 깨친 지위가, 모두 본래 원만하게 깨쳐 있는 깨달음의 마음 자체에는 차별이 없지만 수행의 인과에는 깨치지 못함과 닦아감과 이미 깨침의 차별이 있어, 평등함과 차별됨의 두 가지 뜻이 모순되므로 이에 대해 청정혜보살이 의심을 두어 물음을 일으킨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여래는 평등함과 차별됨이 끝내 둘이 없는 수행의 인과를 보여 주고 있다.

차별됨을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거나 얻을 바가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얻었다는 마음과 나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증상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퇴굴심 곧 물러서려는 마음과 증상만 곧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마음을 모두 뛰어넘은 곳에 깨달음의 자기 활동으로 바른 수행이 있으며, 단박 깨침과 삶 속에 부단히 향상의 실천이 둘 일 수 없을 때, 해탈의 한 길에서 명함 곧 한치의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인연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 차별법 가운데 실로 얻을 것이 없으므로 경문에 '실상 가운데는 실로 보살도 없고 중생고 없다.'라고 한다. 이는 원각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여러 차별한 성품을 이루는 것으로서, 여러 성품이 일어날 때에 온전한 깨달음의 성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허망하게 공부를 한다는 것은, 『화엄경』에 "마치 꿈속에 약으로써 병을 치료해서 차도가 있으나, 꿈에서 깬 후엔 곧 약과 병이 모두 없는 것과 같나니, 고로 허망한 공부라, "라고 이른다.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지혜가 생기며, 인연이 이미 갖추어짐에 심성이 밝아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망령된 생각이 꿈에서 깨어날 때와 같아지는 일이다. 참된 깨달음에 곧 딱 들어맞아 일찍이 생각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마치 이는 선가에서 '한 소식'을 한 것 같은 경계라 하겠다.

이 삶이 공연히 번거롭다는 것은, 밖으로 실다운 경계가 없는데 어찌 미워하고 사랑할 것이며, 일어난 번거로움 당체가 스스로 번거로워할 따름이다. 중생의 깨치지 못한 모습과 보살의 수행과 여래의 깨달음이 끝내 고요해서, 고요함도 없고 고요하게 하는 이도 없음이요, 그러나 허깨비 같은 번뇌가 일어나므로 번뇌를 돌려 보리를 드러내는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세워지는 일이다. 그러나 본래 낱낱 중생이 원각을 구현하고 있으며 여래장의 공덕을 온통 쓰고 있지만, 그러나 실상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번뇌와 망상으로 왜곡되게 씀으로, 비록 번뇌 속에 있지만 진여의 이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계가 청정해졌다는 것은, 『화엄경」에 말하는 이사무애법계 곧 이법계와 사법계가 원융무애한 의미로서 이법계는 진여 속에서 모든 번거로운 번뇌를 끊어 육진 육경인 대상경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 하며, 사법계는 곧 온갖 차별되는 생각과 차별되는 경계와 대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 한다. 이사 곧 비유하면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일었다가가 파도가 잔잔해지면 온 바다가 고요해지듯이, 바다 자체를 이 곧 당체라 한다면 파도는 사 곧 현상이다. 다시 고요해진 바다는 이사가 원융한 모습이겠다.

비록 장애를 끊어 청정함을 이루었으나, 장애를 끊어 버리는 지혜의 자취가 있으면 그것 또한 법에 대한 애착이 되며, 법에 대한 애착을 넘지 못하면 원만한 개달음에 자제하지 못하므로, 법에 대한 애착을 여의어야 비로소 깨달음을 생활 속에 그대로 쓰는 이가 될 것이다.

보살은 '비추되 고요함'으로 전환하고 '고요하되 비춰짐'으로 전환되어, 비추되 비춤 없는 지혜 자체인 경계가 되면 그것이 깨달음에 머물지 않음이 된다. 또한 비추는 자와 비치는 것에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므로 모두 공적 한 줄 사무쳐 보면 비추는 자도 없고 비치는 것도 없어지게 되어, 경문에 "늘 깨달음에 머물지 않으면 비칠 것과 비추는 이가 동시에 적멸하게 된다."라고 이른다.

장애의 마음은 능히 비춤과 비추는 바가 있고 깨달아 앎과 깨달아 아는 바가 있는 마음이며, 장애 속에서 능히 비춤과 비추는 바가 본래 공한 줄 알면, 장애가 본래 없으므로 장애를 끊어 없애는 이도 없다는 것이다. 『수능경』에, 능히 비침과 비치는 모습이 있으며 깨달음을 장애 하여 깨달음의 원만한 밝음이 사라지고, 비침과 비치는 모습이 지양될 때 깨달음이 원만해진다고 한다.

게송에,
깨달음의 바다 그 성품 맑고 둥글어
둥글고 맑은 깨침 원래 미묘하네
원래 미묘한 밝음이 능히 비치어
비추는 바 모습을 일으켜 내고
비치는 모습이 세워짐으로
비춤 없이 비추는 성품 사라지노라

언어와 형상을 세운 것은 뜻을 얻는 데 있는 것이요, 언어와 형상이 없으며 전도되고 미혹됨이라, 언어와 형상에 집착해서도 실상에 미혹되는 것이요, 그러하기에 달을 가리킨 손가락으로써 부처님 교법에 비유했다. 달을 보는 데 있어 모름지기 손가락 끝을 빌린 것이요, 마음을 깨치는 데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빌린 것이다. 손가락으로 인해 달을 보는 것이니 달을 보고는 손가락을 잊음이요, 교법으로 인해 마음을 설명한 것이니 마음을 깨닫고는 교법을 잊음이요, 손가락이 그대로 있다면 본래의 달을 잃게 되며 교법에 집착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되며 교법에 집착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이요, 이는 실상을 얻고는 가리킨 것을 잊게 하는 도리로서 필경에는 달이 아니겠다. 『불정경』에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써 달을 가리키거든, 보는 이는 마땅히 달을 보아야 할 것이요, 손가락을 보아선 아니 될 것이니, 만약 손가락만 본다면 본래의 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또한 손가락까지도 잃는다."라고 한다.

정보와 의보 곧 중생과 중생이 의지해 사는 세계는 서로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닫혀 있는 것이 아니며, 중생과 세계는 모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 일어나 중생과 세계가 모두 있되 공한 중도의 실상인 것이다. 『열반경』에 "나는 부처의 눈으로 두루 삼계를 살피니, 유정과 무정, 온갖 사람과 경계가 모두 구경의 진리다."라고 이른다.

고락 곧 괴로움과 즐거움의 대비는, 선과 악, 괴로움과 즐거움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된 법이므로 실체가 없으며, 선업의 결과인 천궁과 악업의 결과인 지옥이 허공 꽃과 같은 줄 알면 선악에 막힘없이 참된 즐거움을 수용할 수 있어,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이리라. 『불정경』에 "육근 육진의 근원이 같고 속박과 벗어남이 둘이 없으며 인식하는 성품이 허망해서 마치 허공 꽃과 같다."라고 이른다. 이는 '온갖 번뇌가 끝내 해탈이며, 온갖 장애가 구경각'이라는 의미다.

법계해혜 곧 법계가 깊고 넓으므로 바다와 같고, 지혜는 법계와 더불어 무변 곧 끝없이 펼쳐졌기에, 종합해서 법계해혜라 한다. 이는 바다처럼 깊은 지혜로써 온갖 법과 모든 존재를 사무쳐 보아 그 모든 법에 실로 얻을 것 없음을 통달하면, 이것이 바로 여래가 개달음의 성품에 수순 한 도리이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은 연기된 마음이라 공한 것이니, 미세한 생각을 끊고 구경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살펴 본래 일어나는 첫 모습이 없는 줄 깨달아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의는 것이 구경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여래가 원각의 성품에 수순 한다는 것은, 망령된 마음을 단박에 증득하고 상을 여의어 근기에 맞춰 수순 하는 것으로서, 이는 차별과 평등이 융합한 것이니 곧 차별 속의 평등이요, 평등 속의 차별인 것이다.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망령된 것은 바깥 경계를 반연하고 취착 하는 것으로서, 깨달은 성품에 거스르기에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며, 또한 경계를 따라 온갖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러한 경계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망령된 생각을 쉬어 없애려 들지 말라는 것은, 이는 마치 소리를 내어 진동을 그치게 하려는 것과 같다. 또한 망상의 경계 속에 있으면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본래 스스로 지각하는데 거의에 안다고 하는 마음을 더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자연히 거울에 사물이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여래의 길을 가는 이는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과 보살님께 공덕의 뿌리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자리에 앉아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일을 행하는 자로서, 이런 사람을 일체종지 곧 일체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성취한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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