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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은 보통 석가모니부처님의 불상을 보시고 있는 가장 큰 법당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대웅전 내부의 큰 창을 통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을 향해 예경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불상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다면, 상징물인 불상은 필요가 없다. 또한 통도사는 창건 당시부터 사리탑을 참배하는 용도로 사리전을 조성했고, 이 사리전이 훗날의 대웅전이 된다. 따라서 사리를 참배하는 장소로서는 대웅전이 존재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제자들은 부처님을 떠올릴 수 있는 상징물에 대한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에 직접 뵙거나 법문을 들으면 됐으므로 상징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반하신 이후에는 잔존 유해인 영골사리에 부목한다. 오늘날에는 사리를 생각할 때 오색영롱한 구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당신에는 화장한 이후에  남은 육신의 잔해 전체를 사리라고 칭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당시의 화장법에 의해 법구를 다비했고 이때의 영골을 수습하여 근본 8탑을 건립한다. 사리가 모셔진 탑은 곧 부처님을 상징하므로 매우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훗날 사리를 봉안한 불탑이 성행하게 되었다. 사리를 봉안한 불탑은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그 영향력과 상징성을 그대로 이어 간다. 신라에서도 사리는 막강한 상징성을 지닌 성물로 인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는 549년 중국의 육조시대, 남조의 양나라에서 진흥왕에게 보내온 사리"라고 전한다. 자장 스님이 사리를 모셔 오기 이전에도 다수의 사리가 전래되어 국내로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사리의 수는 유한하지만 부처님을 상징하는 최고의 상징물로써 불법의 전파와 함께 부처님의 사리가 전해진 것이다.

대웅전 내부 불단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자장 스님만큼 사리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은 없다. 현대 5대 보궁으로 전해지는 통도사 · 오대산중대 · 정암사 ·법흥사 · 봉정암이 모두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 온 사리에 입각한 보궁임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이외에도 적멸보궁을 표방하는 강원도 고성 건봉사와 속리산 법주사 역시 통도사의 사리가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손괴되는 것을 우려해 이운되는 과정에서 남긴 사리들에 의한 사찰이니, 이들 보궁 역시 근원을 따지면 모두 자장 스님과 통도사로 소급된다. 이 외에 북한의 묘향산 보현사도 불사리로 유명한데, 이 사리 역시 사명대사에 의해 이운된 통도사의 사리가 서산대사에게 보관되는 과정에서 일부가 남게 된 것으로 역시 통도사로 귀속될 수 있다. 즉 현존하는 적멸보궁과 관련해서는 자장 스님과 통도사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사리의 영험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1378년 음력 8~9월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 과정에서 통도사의 사리가 탈취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주지 월송 스님이 사리를 수도인 개경으로 이운한다. 이때 월송 스님이 모신 사리는 정골사리 1과 · 사리  4과와 여기에 비라금점가사 1령이 더 있었다. 월송 스님이 먼저 찾은 곳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득분의 집이었는데, 이때 병환 중이던 이득분은 사리를 친견하고 병이 씻은 듯 낫게 된다. 이후 사리는 개경 송림사에 봉안되는데,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귀족들이 구름같이 운집해서 사리가 분신하기를 기원한다. 그 결과 이득분 3과 · 영창군 왕유 3과 · 시중 윤항 15과 · 회성군의 부인 조씨 30과 · 천마산의 승려들 3과 · 성거산의 승려들 4과 · 황회성 1과 등 59과의 분신사리가 나타나는 이적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우왕禑王의 명으로 1379년 음력 5월에 이색이 그 전말을 글로 남기게 된다. 이는 고려 말 사리 이적으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아래는 목은 이색이 쓴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의 전문이다.

 

     홍무洪武 12년(1379) 기미년 가을 8월 24일, 남산종 통도사 주지, 원통무애변지대사 사문 신 월송이 그 절에서 대대로 소장해 오던, 자장율사가 중국에 들어가서 구해 온 석가여래 정수리뼈 1매, 사리 4과, 비라금점가사 1벌 보리수 잎에 쓴 불경 약간을 받들고 서울로 가서 문화평리 이득분을 찾아뵙고 말하였다.

 

     "저는 을묘년(1375)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이 절의 주지를 맡고 있었습니다. 정사년(1377) 4월에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그 목적은 사리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숨겼으나 그래도 적들이 파서 가져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등에 지고 도망했습니다. 올해 윤5월 5일에 왜적이 또 쳐들어왔기에 또 등에 지고 절 뒤의 산등성이로 올라가서 개암나부로 가려진 덤불 사이에 숨었습니다. 적이 '주지는 어디 있는? 사리는 어디 있는가?라고 하며 절의 하인을 잡아다 볼기를 치며 다급하게 추궁하였습니다. 마침 하늘이 깜깜해지면서 비도 그치지 않고 내려서 쫓아오는 자가 없기에 양산을 넘어 언양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날 절의 하인이 내 말을 가지고 왔기에 만나서 서로 붙잡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절로 돌아가려고 해도 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마침 주지도 새로 오기로 되어 있어서 봉안할 만한 곳이 없어서 그대로 받들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때 이공은 몸이 좀 좋지 않아서 손님을 사절하고 있다가 사리가 왔다는 말을 듣자 벌떡 일어나 "사리가 우리 집에 왔단 말인가."라면서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아프던 몸이 다 회복되었다. 그리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아뢰려고 하는데 장씨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찬성사 목인길 사의 홍영통이 임금 앞에 아뢰었다. 태후와 근비가 다 지극한 공경으로 예를 올렸고, 태후는 은그릇과 보주를 내리는 한편 내시인 참관 박을생에게 명하여 송림사에 사리를 봉안하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이 절을 이공이 중수하여 낙성 법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안의 단월들이 귀천과 지우를 막론하고 파도처럼 몰려와 사리에 기도하고 나누어 가졌으니, 이공은 3매를 가졌고 영창군 유는 3매를 가졌고 윤시중은 15매를 가졌으며 회성군 황상의 부인 조씨는 30여 매를 가졌고 천마산의 여러 납자들은 3매를 가졌으며 성거산 여러 납자들은 4매를 갖고 황회성의 부보가 1매를 가졌다. 이때 월송은 마침 밖에 나가 있었기에 단원들이 몰려와 사리를 구걸하고 떠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해 6월 19일 이공이 신 이색을 찾아와서 말하였다. "과거 강남의 감옥에 있었을 때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 살아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으로 우리나라의 명산을 친히 예배하고 다녔는데, 그때 통도사도 실로 나의 눈에 들어 있었습니다. 돌아오고 나서 현릉께서 특별히 향을 내리셔서 제가 직접 각처를 찾아다니며 예를 행하였습니다. 통도사에 이르러 사리를 구해서 6매를 얻었으니 내가 사리에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리가 통도사에 있게 된 것은 신라 선덕대왕때부터인데, 우리 고려국에 들어와서도 오백 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사리가 송경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새로 이엄하신 초기, 신하들의 관직이 정비된 이때에 월송 스님이 사리를 받들고 이르렀으니, 이 일은 분명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임금께 아뢰었더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문 신하 이색에게 글을 쓰게 하여라'라고 하셨기에 제가 이렇게 왔습니다." 그래서 신 이색은 월송 스님에게 그 일을 확인하고 나서 이공의 말에 따라 글을 쓰고 그 제목을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라고 하였다.

 

  사리는 불교에서 최고의 신성한 성물이다. 이 때문에 사리가 모셔진 보궁에는 새가 앉지 못하고, 그 위를 날아서 가로지르지 못하는 등 다양한 이적이 발생하게 된다. 사리에서 성스럽게 강력한 에너지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 동물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대웅전 금강계단에는 <불탑게>라 하여 주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적혀 있다.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든 것이 몇 해인던가.

문수보살이 성보를 모시고서 때를 기다렸다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이제 여기 있으니,

널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함을 쉬지 않게 하는구나.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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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는 2018년 '산사, 헌국의 산지승원'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1,400년 가까운 오랜 역사 동안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와 문화를 인정받은 것이다.

통도사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와 창건했으며, 계율정신 선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게 건립되었다. 또한 창건 이래 단 한 번도 폐사된 적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면면히 이어 왔다. 이로써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보종찰이자 한국불교의 근본을 잇는 불지종가이며 세계가 인정한 세계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닌 통도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 최상의 사찰임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자장 스님은 왜 통도사를 창건하셨을까?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에는 문수보살이 "신라는 산천이 험난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성품이 거칠고 드세다. 이 때문에 삿된 견해를 많이 믿는다."라고 전하며 당시 불교 전래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삼산三山 · 오악五嶽과 같은 산악숭배의 양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삿된 견해를 물리치는 것은 정견, 즉 바른 견해다. 백성들이 삿된 견해에 휩싸여 있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통해 정견을 갖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었던 것이다.

 

  자장 스님은 638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당의 2대 황제인 당태종을 친견하고 639~641년 3년간 장안 남쪽의 종남산 운제사 동쪽에서 깊은 선정과 계율을 수행했다. 이후 스님은 산서성 오대산으로 문수보살 친견을 위한 성지순례 길에 오른다. 오대산에 이르러 동대에 올랐다 북대로 가는데, 이곳에서 제석천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문수보살이 나타나 수기를 주면서 「화엄경」의 범어 게송을 가르쳐 주는 이적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다음 날 문수보살의 화신을 직접 친견하고 부처님의 가사와 정골(두개골)사리, 지골(손가락뼈)사리와 육신사리 100과 등의 성물을 받아 신라에 모실 것을 부촉받는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문수보살이 부촉하는 내용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문수보살이 자장 스님에게 말하였다.)

"이 성물들은 본사이신 석가여래께서 직접

착용하시던 가사와 진신사리 및

부처님 정골사리 등 부처님의 유물입니다.

당신은 말세에 계율을 잘 갖춘 승려이므로

내가 이 성물들을 부촉하는 것이니,

당신께서는 잘 받들어 지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본국인 신라의 경계 남쪽에

축서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신령한 연못이 있습니다.

그곳은 독룡이 머무는 곳입니다.

용은 언제나 악독한 마음을 가져

폭퐁우를 일으켜 곡식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 인민을 곤궁하게 합니다.

당신은 저 용이 사는 못에 계단을 축조하여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십시오.

그러면 물 · 불 · 바람의 삼재가 침노하지 못하여

영원토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상주하는 장소가 되며,

천룡팔부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

긴나라 ·마후라가)가

떠나지 않고 옹호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1642년

 

 

  신라로 돌아온 자장 스님은 황룡사구층목탑의 정상인 상륜부와 맨 아래의 주심초석에 문수보살께 받은 사리를 봉안한다. 이는 부처님의 위신력이 탑 전체를 휘감아 뻗쳐서 신라의 국운이 융성하기를 염원한 것이다. 또 목탑이 완성된 직후인 646년 하반기에 자장 스님은 다시금 언양 축서산(현 양산 영축산)에 계단을 설치한 사찰(계단사찰)인 통도사를 개창하고, 전골사리와 치아사리 및 지골사리와 부처님의 가사를 봉안한다. 부처님의 성물을 모심으로써 출가하는 승려들 모두가 견고한 수행자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계단을 통한 득도와 계율이 안정되지 않으면 수행자 집단인 승단은 개별성으로 흐르기 쉽다. 이런 경우 당시 위기의 신라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이것은 곧 모든 백성의 고통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의 해결이 부처님 사리 중에서도 정수인 정골사리를 모시고 또 이와 함께 의발衣鉢의 상전相傳이라는 상징성을 가지는 가사를 배치하여 수계 득도를 통한 신라 불교의 단속과 도약이었다. 즉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마하가섭을 통해 미래불인 미륵에게 금란가사를 전달하는 것처럼, 통도사를 통한 수계는 새롭게 출가하는 승려들에게 부처님의 출가 정신이 온전히 전달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통도사의 계단 건립은 황룡사구층목탑이 완공되는 646년 이루어진다. 이는 수도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구층목탑을 통해 불력을 과시하고 국론을 통합한 직후에 통도사 창건을 통해 승단의 안정과 정비를 시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라의 귀족과 백성에게는 거대하고 장엄한 구층목탑을, 그리고 승려들에게는 부처님과 직결되는 경건함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속고승전」에는 자장 스님의 교화로 인해 당시 신라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 집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도선스님의 사제인 도세스님의 「법원주림」 <당사문석자장>에는 "신라의 불교에 갖추어진 법식과 승려의 위의 등이 모두 당나라와 대등해졌다."라고 적혀 있다.

 

  즉 신라불교의 미비로 인해 자장 스님이 귀국할 때 대장경과 장엄물을 가져온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구층목탑과 계단 건립을 통한 교화가 단기간에 신라불교를 일신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도선 스님은 「속고승전」 <자장전>에서 자장 스님을 '호법보살'이라고까지 극찬했던 것이다.

 

  열에 아홉 집이 불교를 믿는 상황에서 불교의 안정은 신라가 융성하는 토대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신라 부흥의 초석은 이때 자장 스님에 의해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물이 이후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무왕 법민에 의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위대한 결실로 완료된다. 자장 스님의 불교 진흥과 승단 정비의 최대 수혜자는 중대 신라를 열어젖힌 김춘추였다.

 

  통도사 창건은 사찰의 건립이라는 목적 이상을 의미한다. 창건 역사를 짚어 보기 위해서는 당대 신라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불교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곧 신라의 융성이라는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불교 교단의 확립이라는 통도사의 창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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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는 브랜드의 헤리티지에 자연과 환경을 레이어링해가고 있다. 나일론 백을 명품 백으로, 스포츠를 하이패션으로 신분 상승시킨 미니멀리즘의 혁신가, 그리고 지금은 지속 가능한 지구의 미래를 위한 미니멀리스트로 진화해가고 있다.

프라다의 DNA 나일론을 에코닐로

미우치아 프라다는 1984년 처음 나일론 소재 액세서리를 선보였다. 1980년대는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였고, 모든 럭셔리 브랜드들은 최고급 소재를 추구했다. 이런 물질주의적 시대에 프라다는 대담하게 대중적인 나일론 소재에 브랜드 로고를 붙이는 모험에 도전했다. 기존의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은 하이패션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며 이런 대범한 행보에 반발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가죽 백에 비해 가볍고 편하며 오염에 강하고 관리가 쉬운 프라다의 나일론 백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프라다 나일론 백은 가장 놀라운 대반전의 패션 역사 중 하나로 기록됐다.

나일론은 오늘날의 프라다를 이룬 브랜드 헤리티지이자 핵심적인 DNA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이란 지구와 인류의 생존 과제 앞에서, 가장 먼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브랜드의 DNA이기도 했다. 이를 대체할 소재와 생산 과정을 계속 탐색할 것이라 약속했고, 그 약속의 결과는 ‘프라다 리나일론(Re-Nylon)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프라다는 합성 섬유 제조 분야에서 반세기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이탈리아 섬유 원사 생산업체 아쿠아필(Aquafil)과 파트너십을 맺었고, 무한정 재활용할 수 있는 재생 나일론 원사 에코닐(ECONYL®)을 탄생시켰다.

프라다 홈페이지


에코닐은 전 세계 쓰레기 매립지와 바다에서 수거한 플라스틱 등을 재활용하여 만들어진다. 어망, 버려진 나일론, 카펫, 산업 폐기물 등을 분류하고 청소하여 회수된 나일론의 양을 최대화한다. 이 나일론 폐기물을 원래 순도로 재생시킨 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와 이탈리아 아르코에 있는 생산 공장에서 새로운 공정을 거쳐 재생 나일론 원사로 재변환된다. 

 

생산되는 에코닐 10,000톤당 70,000 배럴의 석유가 절감되며, 65,100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절감되고, 석유 연료로 생산한 나일론이 지구 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을 90% 절감한다. 프라다는 2021년 말까지 리나일론 소재로의 전화 과정을 거쳤고, 2023년 7월부터 프라다 리나일론 수익금의 1%는 ‘시 비욘드(Sea Beyond) 프로젝트’에 사용된다. 

 

2020년에 시작된 첫 번째 ‘시 비욘드(Sea Beyond) 프로젝트’는 전 세계 중학교와 연계하여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환경오염 문제, 바다의 이익을 위한 지속 가능한 생산 과정에 대한 패션 산업의 기여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2021년엔 프라다 그룹과 유네스코 IOC(정부간해양학위원회: Intergovernmental Oceanographic Commission)가 함께 해양 보존 인식을 높이기 위한 고등학생들의 제안 중에서 우승 캠페인을 선발했다.

럭셔리 브랜드 최초 재활용 골드 파인 주얼리, 프라다 이터널 골드

프라다가 책임의식을 가진 건, 나일론과 함께 골드였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에서 최초로 인증받은 100% 리사이클드 골드를 사용한 파인 주얼리 컬렉션 ‘프라다 이터널 골드(Eternal Gold)’를 탄생시켰다. 프라다 그룹은 고급 소재 및 다이아몬드 공급망의 주요 관계자들과 협력하여, 파인 주얼리 업계의 지속 가능한 제조 과정에 대한 개선을 이끌어냈다. 프라다의 파인 주얼리에 사용된 골드 전부는 인증받은 재생 골드로 주얼리 산업 관행 책임위원회(Responsible Jewellery Council)의 관리 체계 표준을 충족한다.

주얼리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스크랩 폐기물, 폐기된 전자 기기에서 복원한 골드 등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은 골드 채굴을 줄여 환경뿐 아니라 인권 보호에도 도움을 준다. 프라다는 인권, 노동 안전, 환경 보전, 비즈니스 윤리와 관련해 최고 수준의 산업 기준을 충족하는 고급 메탈 및 스톤 공급업체와만 협력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프라다 이터널 골드’ 컬렉션은 ‘힘, 존재, 열정’이란 테마 아래 스네이크 팔찌, 하트 모티브, 체인 목걸이, 리본 초커 등으로 디자인됐다. 또한 프라다의 아이코닉 트라이앵글을 모든 아이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라다의 트라이앵글은 잠금쇠 여밈, 귀걸이, 펜던트에 담겼으며, 트라이앵글의 각도를 통해 체인 링크와 스네이크 팔찌의 머리 부분에 놓은 하트 형태를 완성한다.

 

자원 낭비와 오염의 최소화를 위한 미니멀리즘

프라다의 노력은 환경보호의 선순환에도 적극적이며 높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프라다가 전 세계적으로 조달하는 전기의 53%가 재생 가능 에너지원에서 생산되며, 16%는 자체 태양광 발전소에서 생산된다. 또한 2019년 이후 자체 생산 전력을 52% 증가시켜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있다. 재생 및 인증 종이의 사용이 89%, 직영 매장은 100% LED 조명을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혁명에 가까운 미니멀리즘의 혁신을 일으켰던 프라다. 그 시대에는 과다한 장식과 고급 소재의 사용을 최소화했다면, 이제 프라다의 미니멀리즘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자원의 낭비와 오염을 최소화하는 혁신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다.

 

 

 

 

프라다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미니멀리즘

[Luxury Inside] ESG Story ③ 프라다프라다는 브랜드의 헤리티지에 자연과 환경을 레이어링해가고 있다. 나일론 백을 명품 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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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들어온 불교는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 수용 초기에는 미륵신앙이 성행하고, 삼국시대 말기부터 통일신라 초기에는 화엄사상에 의한 화엄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중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중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신앙이 서민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으며 통일신라 말기에는 지방 호족 세력과 결합한 선종이 고려 초기까지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약사불신앙과 밀교신앙도 함께 유행했다.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로부터 화두話頭를 탐구하는 임제선臨濟禪이 들어왔는데 국가의 지원 아래 다양한 신앙 형태를 받아들인 고려불교는 사원 규모, 승려 수와 경제력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통도사 대웅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내세워 불교를 억압했지만 왕실과 사대부, 일반 서민의 부녀자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다. 그리하여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사찰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 다양한 신앙형태를 포함한 통합불교적인 사원 구조를 가지고 있다.

 

  646년 선덕여왕 15년에 창건된 통도사는 1,4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나면서 꾸준히 사찰 규모를 키워 온 한국불교의 으뜸 사찰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는 불보不寶사찰로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많은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큰 사찰이 되었고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스님과 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오늘날의 통도사를 이룩했다.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규모가 큰 사찰이 많이 사라졌다. 화재가 나거나 허물어지면 중창하는 데 엄청난 불사 비용이 들기에 엄두도 못 내고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실화失火나 전화戰火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는 가운데서도 굳건한 불심으로 가람의 재건을 이루었다.

 

  사찰의 규모는 사찰을 찾는 신도 수에 비례하고 신도는 성스러운 예경물이 있거나 영험 있는 불상이나 고승대덕이 계신 사찰을 찾는다. 오늘날 통도사가 불교의 으뜸 사찰로서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것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고 부처님과 자장율사의 가사를 봉안하고 있으며 많은 대덕스님들이 전통을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통도사' 이름의 유래

  통도사의 사명은 창건 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 유래에 대해사 정확히 명시된 바는 없으나 여러 기록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담율사가 쓴 「통도사사적」에 따르면 대략 아래와 같은 이유로 사명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차산지형 통어인도영축산야 此山之形 通於印度靈築山也

이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는 통도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기에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셨던 인도 영축산과의 관계성을 뜻하는 것이니 통도사는 부처님이 늘 상주하는 설법처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위승자통이도지 爲僧者通以度之

승려가 되려는 자는 이곳에서 득도해야 한다.

금강계단을 통한 수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통도사 창건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는

통만법도중생 通萬法度衆生

만 가지 법을 통달해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 가지 뜻을 종합해 보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통도사는 참다운 승려와 불자를 배출하여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사찰이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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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4대 명절과 불교의 5대 명절을 알아보자

우리의 전통 명절과 불교의 명절

  우리나라의 전통 명절하면 설날과 추석 그리고 단오와 한식이 덧붙은 전통적인 4대 명절이다. 한 해의 시작의 설날과 추수 감사의 의미인 추석이 있다. 단오와 한식은 오늘날 현대인들은 지키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 의미를 잘 모른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일 년의 중앙과 남쪽의 양명한 기운을 상징하는 명절이다. 하루의 중간인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를 가리키는 오시와 정오의 개념을 생각하면 되겠다. 중국 북경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인데, 이는 남쪽으로 난 문이라는 의미이다.

 

  한식은 양력 4월 5일 또는 6일로 새로운 불을 기리는 의미가 조상숭배와 결합된 명절이다. 불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수단인 동시에, 목조 문화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전통에서 집안의 최고신은 불과 관련된 부뚜막신, 즉 조왕신이다. 아직도 대규모 목조 시설을 갖춘 사찰에서는 조왕신을 모신 조왕단이 부엌에 설치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의 재일

  불교에서는 명절보다는 재일이라는 표현을 한다. 재일이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말이라는 의미이다. 즉 자신을 바로 한다는 의미가 큰 것이다. 명절에 기념과 축하의 의미가 강하다면, 재일에는 경건한 거듭남이 큰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불교의 5대 명절은 그대로 5대 재일이 된다. 즐 재일이라는 불교적 관점이 동아시아의 전통인 명절이라는 측면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불교의 5대 재일은, 부처님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탄생· 출가 · 깨달음 · 열반의 네 가지 사건에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우란분절이 더해진 것이다. 이를 한 해의 날짜순으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①출가절(출가재일)            : 음력  2월   8일

②열반절(열반재일)            : 음력  2월 15일

③불탄절(부처님오신날)     : 음력  4월   8일

④우란분절(우란분재일)     : 음력  7월 15일

⑤성도절(성도재일)            : 음력 12월  8일

 

  이외의 불교 명절로는 고려 중기까지 정월 대보름 밤에 모든 삿된 것들을 물리치는 의미로 행해졌던 연등절(연등회)이 있다. 이 연등놀이는 무신정권기인 1245년 집권자 최우에 의해서 초파일 경축행사로 옮겨져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연등회는 2012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불교 5대 명절의 의미

부처님은 총 세 번의 탄생을 거친다. 이 세 번이 모두 불교 명절에 포함된다.

 

  첫째는 육체적인 탄생으로 부처님오신날인데 흔히 초파일이라고 불리고는 한다. 초파일이란 4월 초8일의 줄임말이다. 이날 사찰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당에 오심을 기뻐하는 축복의 법회를 가지며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켜 드리는 관욕 의식을 베풀어진다. 이때 사용되는 불상은 바로 천지불이다. 천지불이라는 이름은 불상이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속으로는 땅을 가리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관욕의식

 

  하늘과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처음 탄생하신 부처님이 이 자세로 '천상천하 유아위존'  즉 신들과 인간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고 천명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에 이러한 부처님의 존엄성을 기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 또 야간에는 연등에 불을 밝혀 무지와 삿됨을 불리치는 빛의 장엄궁전을 현실세계에 구현한다.

 

  둘째는 출가이다. 부처님은 출가를 통해서 비로소 수행자로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날은 왕위를 버리고 세상을 위해서 출가하신 부처님의 정신을 기리고 본받고자 서원하는 날이다. 영어로는 The Great Renunciation, 즉 '위대한 포기'라고 번역된다. 버림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완전한 자유, 그것이 바로 불교의 출가 정신인 것이다. 출가일인 2월 8일과 열반일인 2월 15일은 가깝기 때문에, 이를 발심대정진 기간의 출가열반 주간이라고 해서 집중수행을 하곤 하였다. 탑돌이는 이 기간에 이루어진, 모든 이들이 동참하는 과거의 대중적인 문화제전이었다.

 

  셋째는 깨달음이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증득하면서 인간 싯다르타는 비로소 어떤 존재도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존재 붓다로 거듭나게 된다. 마치 석탄이 강한 압력을 견디면서 다이아몬드로 거듭나는 것처럼 말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전 수자타라는 목장주의 딸이 공양한 우우죽을 드시고 힘을 내어, 샛별이 떠오르는 새벽녘에 마침내 그 누구도 성취하지 못한 최고의 깨달음을 증득하신다. 

 

  부처님이 세 번의 탄생을 마치는 것이 바로 열반이다. 열반이란 완전한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열반하면 죽음을 상기하지만, 원래는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유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불교의 기준 해인 불기의 시작은 바로 붓다의 탄생년이 아닌 열반년인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탄생 시점은 불기에 79를 더해야 한다.

 

  우란분절은 일종의 작은추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인도나 중국은 당이 넓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 계절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와 달리 7월 보름이 추수감사절이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인도에서는 4월 보름부터 시작된 3개월간의 우기 집중 수행 기간이 끝나는 때이다. 이 시기에 깨달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인도불교에서는 이날을 크게 기렸는데, 이것이 중국으로 넘어와 추석의 조상숭배와 연계되어 불교적인 조상숭배 전통을 만들게 된다.

 

  일반적인 제사나 설 · 추석이 남성의 혈족을 중심으로 하는 지계 조상숭배 문화라면, 우란분절은 그 대상으로 직계만이 아닌 외가 등 모든 지친至親을 두루 포함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과 평등의 정신이 잘 녹아 있는 명절이라고 하겠다. 또 동아시아적인 전통과 습합된 우란분절은 동아시아불교가 만들어 낸 최대의 문화 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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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피를 빠는‘ 후진국형 해충’ 빈대가 40여 년 만에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며 ‘빈대믹(빈대+팬데믹)’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겨울철 사라진 모기 자리를 빈대가 대신하며 사람들의 공포감도 더 커지고 있다. 이에 질병관리청은 최근 ‘빈대 정보집’ 을 발간해 빈대의 특징과 오해, 대처법 등을 소개했다. 

 

사람을 직접 무는 만큼 전염병을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빈대는 모기보다 7~10배 많은 피를 빤다. 겨울철 실내 온도인 섭씨 18~20도 사이에서 가장 오래 생존한다.

전문가들은 빈대를 박멸하려면 70도 이상의 뜨거운 물에 침대보, 옷감 등을 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빈대에 물렸을 때는 해당 부위를 긁기보단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라 피부를 진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빈대 물린 부위


실내 곤충의 일종인 빈대는 따뜻한 환경에서 왕성하게 서식한다. 흡혈하지 않고도 70일에서 150일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가정마다 대부분 난방을 켜는데, 20도 이상의 따뜻한 실내 온도가 빈대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며 빈대가 이미 집 안에서 나왔다면 실내 온도를 10도 이하로 낮춰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빈대는 집 안의 여러 가구 중에서도 침대 매트리스나 프레임, 쇼파, 책장 등에 주로 산다. 어느 정도 개체군을 형성하면 침대 주변에 서식하고 있다가 이른 새벽녘쯤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다시 서식처에 숨어 산다. 빈대의 또 다른 특징은 부산물이나 배설물과 같은 흔적을 남긴다는 점이다. 노린내 또는 곰팡이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문제는 일반 살충제로는 박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빈대는 이미 살충제에 대한 저항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죽지 않고 침대보나 옷, 커튼 등 빈대 서식이 확인된 세탁물은 70도 이상의 뜨거운 물로 빨거나 건조기에서 두 시간 이상 열을 쬐어줘야 없앨 수 있다. 세탁할 수 없는 곳에 빈대가 서식한다면 고열 스팀을 해당 위치에 분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오염된 모든 장소를 청소하고 진공 흡입물은 봉투에 밀봉해 폐기해야 한다.

방제를 마친 후에도 빈대가 다시 출몰하진 않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질병관리청 관계자는 "빈대는 주로 깊숙한 곳에 서식하기 때문에 꼼꼼히 청소해도 완전히 방제되지 않았을 수 있다"며 "알이 부화되는 시기 등을 고려해 7~14일 후 서식처 주변을 한 번 더 살펴야 한다"라고 말했다.

빈대에 물렸을 때 흔히 겪는 증상은 가려움이다. 심한 경우엔 빈혈과 고열이 동반될 수 있다. 보통 옷이나 이불로 감싸지 않은 노출 부위인 팔다리, 발, 얼굴이나 목 등에 빈대 물림이 흔히 나타나며 빈대는 여러 마리가 떼를 지어 피부에 달라붙어 많은 양을 흡혈하기 때문에 빈혈과 고열을 유발할 수 있고 이어 극심한 가려움으로 과하게 긁으면 염증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빈대에 물렸다면 가장 먼저 물과 비누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 가려움증을 완화하기 위해선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거나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고 온찜질하는 것이 좋다. 염증이 생긴 경우 항생제를 복용해야 한다.

질병관리청은 “빈대는 감염병을 매개하지 않는 곤충”이라며“ 물린 자국에 의해 유발되는 가려운 증상은 일반적인 치료 없이 1~2주 내 회복된다”라고 설명했다. 극심한 가려움이 있을 때는 2차 감염 예방을 위해 코르티코스테로이드가 함유된 크림이나 경구용 항히스타민제를 사용하면 된다. 빈대에 물린 흔적은 모기 자국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있다. 모기와 달리 혈관을 잘 찾지 못하다 보니 2~3곳을 연달아 물어 때때로 일렬이나 원형, 삼각형 형태의 피부 발진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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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는 한국의 사리신앙을 대표하는 불보사찰이다. 당에서 돌아온 신라의 고승 자장이 영축산에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금강계단을 조성한 이래 통도사의 불보종찰로서의 명성은 삼국, 고려, 조선을 이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자장은 통도사를 개창할 당시 당으로부터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함을 봉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강계단을 쌓았는데 그로 인해 통도사는 석가모니 진신사리라는 성보가 봉안된 불사리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한국의 계율을 상징하는 사찰이 되었다.

 

  불보종찰이자 계율도량으로서 통도사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계단을 보수할 때마다 시주에 동참한 사찰과 사부대중의 명단을 새겼는데, 여기에는 왕실과 중앙과 지방의 양반 사대부와 일반 백성은 물론 전국 각지의 사찰과 승려들이 사리탑 보수에 동참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는 통도사가 단순히 경상우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 아니라 조선 불교계의 신앙적 구심점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통도사가 지닌 명성과 위상에 비해 조선 왕실과의 인연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공식적인 기록상으로 통도사가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례는 헌종대 이전 기록에서 단 한 건도 확인되지 않는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기록은 대체로 사적기나 완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데 반해 통도사에서는 원당 지정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들이 거의 없다.

통도사 개산조당

 

  통도사의 왕실원당 연구는 건축사와 미술사 영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통도사에 위치해 해장보각의 건축적 특징이 왕실원당의 전형적 양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 특징을 고찰하는 연구가 먼저 진행되었고, 그 후 미술사 연구를 통해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왕실 관련 고미술품과 문헌들이 소개되면서 통도사의 왕실원당은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

 

  조선시대 통도사가 왕실원당으로 역할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는 통도사의 해장보각 건물이다. 통도사 왕실원당 연구가 문헌사학이 아닌 건축사 분야에서 먼저 이루어진 이유중의 하나는 통도사의 해장보각 건물이 왕실원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 개산조당은 관음전과 대웅전 사이, 금강계단 영역의 석축 밑에 조성되었다. 앞에는 3칸 솟을삼문이, 뒤에는 사당형의 본당이 있다.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원당 건축의 전형으로 통도사 개산조당이다.

 

  1997년 발간된 「통도사 대웅전 및  사리탑 실측 조사보고서」에서도 해장보각 건물이 유교식 사당 건물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점, 우물천장 중앙부에 '기블 喜' 자와 복 福'자 문양이 도안되어 있는 점 등 왕실원당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통도사 순조의 대상재 사찰로 지정되면서 조선 왕실과 밀접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조선 왕실의 축원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상으로는 순조의 대상재를 기점으로 왕실의 제사를 담당하고 사찰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에서 선왕선후의 추천재를 사찰에서 설행 할 때 수륙재의 형태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왕실에서는 고승을 초청해 법석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는데 태종이 수륙재를 제외한 모든 법석을 금지한 이후 왕실의 추천재는 대부분 수륙재 형태로 설행 되었다. 또 통도사에서 순조의 추천재 축문 가운데 낮에 지낸 재의 축문 제목이 「영산주별」인 것으로 볼 때, 순조의 대상재는 조선후기 유행한 영산재의 형태로 설행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36년 순조의 대상재가 설행 된 이후 1858년 순원왕후의 탄일재, 1891년에는 신정왕후의 탄일재가 통도사에서 봉행되었다. 1904년 황태자비(순명효정황후)가 사망하자 통도사에서 추천재가 설행 되었다. 통도사는 1887년과 1902년에 왕실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어필을 하사 받았다. 특히 1887년 신정왕후의 어필이 하사된 후 통도사 경내에 어필각이 설치됨으로써 통도사는 명실상부한 왕실원당이 되었다. 신정왕후의 어필은 삼회전에 봉안되었다가 1894년 축성각이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건물이 바로 오늘날의 해장보각이다.

 

  통도사 왕실원당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 왕실의 위기의식이 사리신앙으로 구현되어 왕실원당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순조의 대상재 사찰을 지정할 때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이 주된 요건이었다. 이처럼 19세기에 이르러 조선 왕실의 사리신앙이 부각된 데에는 국가의 어려움을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했던 조선 왕실의 위기의식이 깔려 있었다.

 

  두 번째는 통도사의 왕실원당은 조선 왕실의 불교식 상장례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불교식 의례는 연산군 대 이후 중단되었지만, 왕실 차원의 불교식 상장례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거쳐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통토사의 왕실 불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는 19세기 왕실 불사의 간소화로 인해 통도사는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매우 적은 혜택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통도사의 왕실 관련 문건들은 매우 제한적인데, 이는 통도사가 왕실의 추천재 사찰로 역할을 하고 원당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큰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19세기에 이르러 통도사에 왕실원당이 설치된 것은 나라 안팎으로 큰 어려움이 처했던 조선 왕실의 위기의식과 잡역의 과도한 부과로 폐사 위기에 몰렸던 통도사 승려들의 자구책이 맞물려 이루어진 '왕실과 사찰의 윈윈 전략'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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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외에도 다른 기록들을 찾아보면 김대렴 이전부터 차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으나, 문제는 우리나라에 차 씨앗이나 차 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라시대 당시 양반가 귀족, 화랑들이 차를 즐겨 마시고, 스님들이 차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은 다수 나오지만 이 차가 수입된 것인지, 재래종 차인지, 차 씨앗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통도사」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기록으로 찾을 수 있다."

 

  절의 사방 장생표의 터에는 삼천 대덕방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네 남쪽에는 포천 산동이 있는데 1천의 대덕이 사는 방이다. 북쪽 동을산에 있는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곳이다. 절에 바치던 차 부뚜막과 차샘이 지금도 남아 없어지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다소촌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장율사의 화향제자인 조일스님이 화향하고 남는 여가에 동봉에 가서 산천을 관람하고, 띠집을 짓고 살며 장생표를 설치하고 생애를 마감했다. 그 뒤 명하기를 조일암이라 했다. 사방 장생표를 세운 위치에는 논밭이 동남으로 펼쳐져 있고 붇다촌인 평교는 거화군의 경계이다. 또 동서의 원에는 3천 대덕들이 항상 나누어 살았다. 「통도사 사적기」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차를 따르는 모습

   

우리나라에 차문화가 828년부터 시작됐다고 본다면 일본의 805년보다 늦다. 그런데 일본보다 한국은 지리상으로 중국과 더 가깝고, 과거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다녀온 시기를 보더라도 일본보다 빨라야 함이 타당해 보인다. 김대렴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차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성환 원장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주목했다.

 

  통도사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사적기에는 차 역사에 관한 내용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적기를 보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통도사는 차밭과 차를 만드는 곳이 동을산에 있었고, 이곳에 차를 만드는 부뚜막과 차샘이 있었으며, 그곳에 자장율사의 화향제자 조일스님이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울산시 언양읍에는 조일스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조일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 차밭을 같이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차문화는 김대렴보다 180여 년 정도 앞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라시대 차문화는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사실 그 이전부터 차문화는 우리나라에 활성화되어 있었고 그 증거가 바로 자장율사의 화향제자 조일스님과 통도사인 셈이다.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 황룡사를 중창하고 태화사를 창건했다. 그렇다면 통도사에만 차밭을 만들었을까? 세 사찰에 모두 차밭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도사의 차밭이 울주군 상천리 장생표지석이 있는 곳이라면, 황룡사와 태화사의 차밭도 절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거리상으로 추측해 본다면 황룡사의 차밭은 울주군 언양의 다개리이고, 태화사의 차밭은 울산 중구 다운동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자장율사가 동시에 중 ·창건했다는 3사 중 황룡사와 태화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통도사만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통도사가 가진 사적기 기록으로 볼 때 한국 차문화의 태동을 알리는 기록상 가장 오래된 차밭을 통도사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록과 흔적이 통도사가 불지종가이자 다지종가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자장율사의 화향火香제자, 조일스님

 

  통도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밭을 가진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자장율사의 화향제자 조일스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향'이라는 단어를 두고 일부는 불전에 향을 올리는 노전스님으로 보기도 하고, 법맥을 이은 제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향제자를 현재의 노전과 같은 역할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것이 노 원장의 설명이다. 우선 노전스님의 거처는 예외 없이 법당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조일스님의 거처인 조일암과 통도사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다음으로 노전을 화향이라는 직함이 붙는 인물이 다수 나와야 함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 원장은 화향을 조일스님에게만 붙여진 특별한 칭호로 생각하고 제다 용어에서 그 뜻을 찾았다. "저는 화향을 제다 용어에서 그 뜻을 찾았다. "저는 화향을 제다 용어로 보았습니다. 제다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불 조절 기술을 화향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조일스님이 통도사 다소촌에 거처하며 화향하였다는 것은 그곳에서 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그를 제다 공정에서 화향 기술이 뛰어났던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체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도 자연스럽게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스님이 화향한 후 여가에는 산천을 관람하였다고 하는데 제다 공정의 피곤함을 잊기 위해 휴식차 산천유람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통도사 차밭을 자장율사의 제자 조일스님이 관리 감독하고 제다에도 직접 관여하였다는 사적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의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는 이야기와 부합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차문화는 7세기부터 시작됐으며, 그 중심에는 자장율사와 조일스님, 통도사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적기는 한국 차문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료로 볼 수 있다.

 

◈통도사 차문화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나아가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신 중봉 성파 대종사께서 우리나라 차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원력으로 설립한 통도사 차문화대학원이 3년 차를 맞았다. 차문화대학원은 노성환 원장을 중심으로 60여 명의 다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행다가 아닌 불교에 기반을 두고 차에 관한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 내는 교육을 한다.

 

  노 원장은 차문화대학원이 설립될 당시부터 통도사와 차 역사에 대해 생각했다. 차 전래에 관한 이야기는 가야시대 허황옥 등 김대렴 외에도 많은 설이 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통도사에는 사적기에 의한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라도 밖으로 끄집어내어 새로운 빛을 보게 하는 것이 노 원장의 바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계승 발전시켜 통도사 중심의 차문화를 새롭게 밝혀 나가고자 한다.

 

  1990년대 종정예하의 원력으로 통도사에 3000여 평의 차밭이 조성되었다. 이후 해마다 대중스님들이 함께 채다와 제다 원력에 동참하여 1300여 년 전 다소촌의 맥을 잇고 있다. 통도사 스님들이 정성으로 수확한 찻잎은 부처님 전 감로다가 되고, 맑은 기운은 도량에 스미어 불자들에게 향기로운 법향이 된다.

 

 

 

월간통도 202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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