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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눈'으로 본 우리의 모습 또는 중생의 실체는 어떨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나의 성격도 모른 채 좌충우돌 평생을 산다. 끊임없는 부딪힘과 갈 곳 모르는 마음, 채워지지 않는 집착은 분심을 유발하고 갈 곳을 모르는 분심은 결국 슬픔을 택한다. 화병 또는 우울증 등은 모두 채워지지 않는 바람이 차곡차곡 쌓여 생긴 마음의 병이다. 급기야 가족도 소용없고 세상도 다 소용없다며 혼자만의 고립을 택한다. 하지만 요동치는 마음은 그대로다.

그림 1 <육도윤회승침도> 꽈배기처럼 돌아가는 탁한 에너지 속에 물고기 · 자라 ·제비 ·달팽이 ·개구리 ·개 ·돼지 ·말 ·사람 ·천인 등이 서로 엉켜 돌아가고 있다.

부정적인 마음이 쌓이면 썩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시뻘겋다가 더 지나면 시커멓게 덩어리 지는데 이것을 '업장'이라 한다. 부정적인 업장의 모습은 지난 연재 불타는 아귀의 모습과 미처 날뛰는 검은 소의 모습으로 보여드린 바 있다. 실제로 썩은 마음의 모습이 이렇다.

 

썩은 마음 덩어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검붉은 에너지로 무상하게 파도친다. 여기에 담배나 술이 가해지면 불타는 업장에 휘발유를 붓는 격이 된다. 순간, 수백 수천 배로 증폭된다. 그래서 음주 후에 스스로와 남을 해치는 사고 또는 방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에너지의 흐름이다.

 

관자재 vs 오욕자재

세상만물에는 '자성自性'이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유지하려는 성품을 말한다. 이것은 저절로 돌아간다. 저절로 돌아가며 자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을 끌어들여 몸집을 불린다.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자재自在'한다고 표현한다. '관자재보살'이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관자재, 관觀이 자재自在한다'는 말이다. 관(통찰지)이 자재한다는 말은 저절로 알아차림이 유지되어 뭐든지 다 꿰뚫어 보는 경지를 말한다.

 

반대로 '오욕자재천왕'이라는 말이 있다. 오욕(중생의 마음에 항상 요동치는 다섯 가지 욕망 : 식욕·수면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이 자재하는 도가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오욕을 키울 수도 있고, 반대로 통찰지를 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오욕의 밀물 같은 자동 작동 속에 휩쓸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먼저 오욕이 힘을 못 쓰게 하는 유일한 방법,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행이란, '알아차림의 유지'를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다. 우리가 일 초 알아차림 하면 일 초 부처님이고 일 분 알아차림 하면 일 분 동안은 부처님인 것이다. 반면 알아차림 못하면 오욕자재의 검은 파도에 하릴없이 놀아나게 된다. 이렇게 놀아나는 무명 속 중생 모습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다.

 

"저 중생들을 관찰하니/ 여섯 갈래 속에서 육도윤회 하면서/ 나고 죽음의 끝이 없네/ 그것은 거짓이고 견고하지 못하며 마치 파초 ·꿈 ·환영 같네."

 

이러한 모습을 사진을 찍는다면, 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육도윤회승침도」(그림 1.2)라는 이 장면은 해인사 명부전의 《시왕도》 중 한 폭인 <제10 오도전륜대왕> (그림3) 속에 그려져 있다.

그림 2. 오르락내리락 서로 모습을 바꾸어 환생하며 아등바등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이 엉킴의 실타래를 누가 풀 것인가?"

우리가 육도를 자맥질하듯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이다. '승침'이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모습으로, 마음이 무명에 갇혀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 낸 것이다. 죽어서 형체가 없을 때에도 '무명의 마음'이 중음이라는 터널을 지나 어떻게 다시 몸 받아 환생하는지 소개하였다.

 

섬광 전개되는 자동반응: 갈애와 집착

「육도윤회승침도」 그림3 를 보면 집착과 갈애의 불꽃에서 소용돌이처럼 누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그것은 여섯 갈래로 나뉘어 돌아간다. 꽈배기처럼 돌아가는 에너지 속에는 물고기 ·자라 ·제비 ·달팽이 ·개구리 ·개 ·돼지 ·말 ·사람 ·천인 등이 서로 엉켜 돌아가고 있다. 서로 모습을 바꾸어 환생하며, 부질없는 삶을 유지하려 아등바등 고통 속에 몸부림친다.

그림 3. 갈애의 불꽃에서 누런 회오리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는데, 그 속에는 여섯 갈래(육도)가 꼬여 돌아가고 있다.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습니까?" 「청청도론」「제1장: 계」에 나오는 첫 질문이다. 우리 중생들은 안팎으로 '갈애의 그물'로 서로 꼬여서 엉켜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장착된 육근[안이비설신의]도 이미 꼬인 채로 있고, 이것이 육경과 만나면 또 꼬일 수밖에 없다.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는 것은 이미 오염된 반응 체계를 말한다.

 

굳어진 오온의 반응체계, 이것을 쉽게는 업의 패턴, 더 쉽게는 성격 또는 성향이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는 순간 초스피드의 광속으로 이미 반응은 전개일로이다. 꼬인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니 꼬여 보이고, 또 꼬인 반응이 다시 업장으로 쌓이게 된다.

 

안팎으로 또 너도 나도 모두 꼬여 있다. 그러니 "이 실타래 엉킴을 도대체 누가 푼다는 말 입니까?"라는 천신의 질문이다. 이에 붓다는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라고 답하신다. 여기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머물러서'라는 문구에서 '계戒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해석에 나와 있다. 해석 첫 문장은 "계란 의도이다."라고 나온다.

 

여기에서 막혀서, 약 5년 전 「청정도론」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의도라니? 지금은 이해가 된다. 즉, 우리가 세상을 인지 또한 인식하는 순간, 이미 집착이 자동적으로 따라붙는다. 오염된 반응체계가 발동한다. 그러니 알아차림으로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이미 생긴 불순한 의도는 상카라[행行]의 길을 걷는다.

 

'반응'을 잡아라! '알아차림'으로!

붓다는 "업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답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다. 중생은 의도를 가지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계가 '의도'이듯이, 업도 '의도'이다. 우리는 이미 장착된 오염된 반응체계로 부지 불식 간에 '의도'를 낸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는 순간 알아차림 못한 채 반응하였다면 이미 끝나버린 거다. 계는 지켜지지 않았다.

 

업은 이미 부정업이다. 알아차림이 동반되었다면 그것은 청정도이고, 마음의 정화가 가능하다. 이것은 《청정도론》의 핵심 요지이다. 섬광으로 전개되는 우리의 오염된 반응체계, 이것에 내 마음을 도둑질당하지 않으려면,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한다. '실타래의 얽힘'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림의 날카로운 칼날'이다. 붓다 실참 수행법의 핵심경전인 《대념처경》의 요지, 신수심법[몸·느낌 ·마음 ·법]의 알아차림! 먼저 나의 행동방식, 반응방식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마음 정화의 첫걸음이자 윤회를 끊는 첫걸음이다.

 

 

월간통도. 2022. 0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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