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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로 태어난 붓다는 안락하고 호화스러운 왕궁 생활을 누렸다. 그 예로, 전기 자료에는 그가 계절에 따라 옮겨 가며 거주했던 '삼시전(三時殿)'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열대 기후 지역인 인도는 일 년이 여름과 겨울, 우기(雨期)로 나뉘는데, 삼시전은 바로 그 각각의 계절에 머물기 좋은 세 채의 전각이었다

 

안락하고 호화로웠던 왕자 시절

중아함 권29 「유연경(柔軟經)」 등의 기록에서는 붓다가 호화로웠던 자신의 왕자 시절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곤 한다. 이에 따르면 붓다는 왕자 시절 전단향을 몸에 바르고, 새로 만들어진 비단옷만 입었으며,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하인에게까지 쌀밥에 고기반찬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가 2,600여 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붓다가 다른 이들에 비해서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로 전기 자료는 붓다 탄생 직후 있었던 예언을 들고 있다. 당시에는 새로 태어난 왕자의 운명을 점쳐 보는 풍습이 있었다. 붓다의 경우 '아시타'라는 선인이 '그는 장래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나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전륜성왕은 인도신화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1,000개의 바큇살을 가진 수레바퀴를 머리 앞에서 자전시키며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의 출현은 당시 석가족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정반왕은 아들의 붓다로서의 기질을 막고, 위대한 왕의 자질을 증장하기 위해서 더욱 특수한 배려를 했다고 한다.

전륜성왕의 대표적 인물 /아소카 대왕

 

또한 붓다는 미래의 군주로서 여러 분양에 걸쳐 교육을 받는다. 그 주된 과목은 국가 운영을 위한 통치술과 전쟁에 필요한 무술, 그리고 외교와 관련된 어학이었다. 이때 붓다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받은 교육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 통치술은 불교 교단의 조직 관리에서 활용되었으며, 어학은 여러 국가에서 불교를 전파하는 데 유용했다. 또 무술을 연마하여 얻은 건강한 신체는 출가 후 혹독한 수행을 감당할 수 있었던 자산이 되었다. 왕궁에서 받은 교육은 불교 교단이 붓다 당대에 거대한 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다.

 

야소다라와의 결혼과 아들 라후라의 탄생

붓다는 19세(혹은 17세)에 이웃 나라 콜리국의 공주이자 선각왕의 딸인 야소다라와 결혼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기 자료에는 각술쟁혼(角術爭婚)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 · 중세 시대 전사 집단에 있던 결혼 풍습 중 하나로 무술대회를 열어 우승을 한 사람이 결혼을 쟁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붓다가 무술에 능한 사람이었음을 방증한다.

 

붓다는 29세에 출가하므로 그들의 결혼 생활은 결코 짧지 않았다. 이 기간에 둘 사이에는 '라후라(羅㬋羅)'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라후라는 '장애'라는 의미인데, 출가하려는 붓다에게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붓다의 출가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꾸며진 이야기일 뿐, 실은 라후라가 탄생할 때 일식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즉 출가의 장애가 아닌 태양의 장애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라후라의 탄생은 왕가의 가계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붓다의 출가에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현대의 일반적인 시간이다.

 

사문유관을 통한 생로병사의 인식

붓다의 왕궁 생활은 화려했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마야 부인은 그를 생산하고 7일 후에 사망한다. 아마도 룸비니에서 급작스럽게 출산한 일이 원인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이 일이 붓다의 삶에 그늘을 드리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붓다의 출가와 관련해서 전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이다. '사문유관'이란, 그가 왕궁의 동, 남, 서, 북의 네 문을 차례로 나가면서 각각 노인과 병자, 그리고 죽은 자와 사문을 목격하게 되고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 일을 말한다.

 

전기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이 야기는 붓다의 출가가 노· 병 · 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 대안으로써 출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즉 붓다의 출가는 처음에는 자신의 삶과 관련된 직접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을 뿐 중생 구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삶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자현스님 불교사 100장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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