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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聖人은 군주여야만 한다. 적어도 옛 중국에서는 그랬다. 적어도 옛 중국에서는 그랬다. 성인 아닌 군주는 있을 수 있지만, 군주가 아닌 성인을 있을 수 없다. 이런 논리를 성인군주론(聖人君主論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를 잘 몰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은 모두 '성인군주'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성인이지만 군주는 아니었다. 모순이다. 이런 모순은 당나라 현종 대(739년)에 이르러 해결된다. 공자에게 문선왕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와 안착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가 중국문화와 '동화'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부처님이 성인인 동시에 태자였다는 사실 이 불교의 중국 '동화'에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사찰의 기와와 단청

황제의 대우를 받은 부처님

  명 · 청대의 황궁인 자금성 지붕에는 황색 기와가 빼곡하다. 그런데 이 황색 기와는 중국의 유서 깊은 대찰들에서도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 황색은 황제만 사용하는 색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중국의 군주인 황제와 동급인 셈이다.
 
  이는 불상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동남아시아나 티베트 등에서도 불상은 금으로 개금 한다. 황금색 불상의 기원은 불교가 발생한 인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중국에서 부처님이 성인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황금색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태상노군으로도 불리는 노자의 상이 금으로 개금 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이 계신 곳을 대웅전이라 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보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각각 상ㅇ된 '전殿'이라는 글자와 '궁宮'이라는 글자만 봐도 부처님은 군왕급 예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민가에는 99칸 이상의 건물 증축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사찰에서는 가능했던 것, 그리고 단청을 했던 것을 통해서도 부처님은 성인과 군왕의 예우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99칸의 제한을 받지 않았던 사찰 건축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국왕은 국사國師나 왕사往師에게 절을 했다. 부처님이 왕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초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왕사에 책봉하고 절을 올린 이후, 이런 예는 다시 발견할 수 없다. 불교의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처님이 성이라는 위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사찰은 여전히 99칸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궁궐 건축에만 할 수 있었던 단청도 허용되었다.
 
  사찰에는 민가에 적용되는 99칸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민가에 비해 사찰이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가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단청이 사찰이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가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단청이 사찰에는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우유억불기에도 사찰은 양반가의 건축과는 비교될 수 없는 위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성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동아시아 문화의 특수성이 반영된 측면이다. 만일 이와 같은 배경 문화가 없었다면, 조선의 사찰들은 훨씬 더 위축되고 열악한 환경에 내몰렸을 것이다.
 

단청은 왕궁과 사찰에만 할 수 있었다

  단청丹靑이란 '빨갗고 파랗다.'는 뜻이다. 울긋불긋하다는 의미다. 사찰 건물에 칠해진 색을 보면 붉은색과 푸른색이 가장 도드라진다. 눈에 보이는 포인트를 잡은, 참 소박한 명칭이다. 그런데 언뜻 봐도 이 단청이 모두 같은 게 아니다. 나름의 위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단청 중 가장 단순한 형태는 가칠단청이다. 가칠단청에서 가칠이란 겉면을 덧칠했다는 의미로 세로기둥은 검붉은 색, 가로기둥은 녹색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 향교과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보다 한 급 높은 것이 긋기단청이다. 굿기단청은 세로 붉은 기둥은 놔두고 가로의 녹색 바탕에 단순한 선을 긋고 깔끔하게 장식하는 정도의 단청을 의미한다. 좀 더 위계가 높은 향교나 서원 등에 주로 사용된다. 또 향교나 서원 중에서도 특별히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는 긋기단청의 가로 부재 두 끝을 모로 단청이라는 화려한 함을 가미해서 완성하기도 한다.
 
  모로단청에서 모로는 머리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모로단청을 머리단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끝에만 단청을 하기 때문이다. 긋기단청에 모로단청을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조선의 왕궁이다. 그런데 단청에는 모로단청보다도 휠씬 더 화려한 금단청이라는 것이 있다. 금단청은 양 머리의 모로단청 사이를 화려한 비단자수를 놓듯이 빼곡하게 채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단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단청은 조선 시대에는 유일하게 사찰에서만 사용되었다. 조선의 임금이 넘볼 수 없는 위엄이 조선의 사찰에 있었던 것이다.
  
  금단청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조선의 임금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황색 의복 사용이다. 황색은 천자의 색으로 제후는 고사하고 황제의 동생조차도 사용할 수 없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임금은 붉은색의 제후복을 입게 된다. 물론 조선에서도 고종과 같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건원칭제한 경우는황색 복장을 사용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임금 중에는 유일하게 고종과 순종만이 부처님과의 차이를 좁힌 인물이라고 하겠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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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아함경》과 《장아함경》에 <선생경善生經>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는 <육방예경>에는 선생 善生이라는 사람이 매일 일어나서 동남서북과 상하의 여섯 방위에 절을 올리는 내용이 나온다. 부처님이 이 광경을 보고 까닭을 묻자, 선생은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전통'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내용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각각의 방위마다 의미를 부여해 가족과 사회 및 종교인을 대하는 존중의 윤리에 대해 설명해 준다.

 

  선생이 아침마다 여섯 방향에 절을 한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방위 숭배의 잔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본 부처님 은 그것의 헛됨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북돋아 주면서 '재해석'을 통해 승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도 당시 소의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다양한 사물들과 날카로운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적'과 '조화'를 통해 교단을 넓혀 간 예도 경전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불교는 전파되는 과정에서 선주 문화와 충돌하지 않고 융합 ·발전해 가며 침략이나 분쟁 없이 안착하는 특징을 보이는 종교이기도 하다.

치성여래와 북두칠성(조선시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라

  불교는 이렇게 사찰 안으로 전통 신앙을 수용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관용의 종교라 하더라도 자신들과 다른 신앙을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다. 존중은 하지만 수직적으로 받들어 줄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안으로 받아들여져 버젓한 각閣이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없는 곳에 배치해 놓는다.

 

  대다수의 사찰이 산에 위치하다 보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불교적인 것이 아님에도 비중이 크다. 때문에 절에서 산신각 찾기가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부엌에만 모셔져 있는 조왕신, 즉 부뚜막신은 사찰의 부엌에 가지 않으면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또 집을 호위하는 신과 같은 역할의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은 통도사 같은 일부 사찰 외에는 없으며 통도사 역시 입구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어 아는 사람 외에는 찾기가 어렵다. 성황신을 모신 성황각도 마찬가지다. 월정사의 성황각은 지금은 변경된 일주문 안쪽에 위치해 있지만 원래 일주문이 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보면 일주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알고 가지 않으면 그 앞을 지나가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도 완전히 관대하지는 않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가람 배치의 '원칙'과도 관련이 있다. 애초 설정된 가람 배치에 이런 전각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림으로는 이들을 모두 대웅전에 모셔 주는 관용을 보인다. 대웅전의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보통 신중단이 위치한다. 신중단이란 신의 무리를 모신 단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원래 이곳에 모셔지는 인도 신격은 39위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오면 104위로 늘어난다. 65위나 늘어난 것이다. 이 65위의 신이 바로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숭배되던 신들이다. 불교가 이들을 냉대한 것만은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특별히 두 번 모셔지는 '산신'

  전통적인 숭배 대상들 중 산신의 위치는 상당히 강력하다. 산신각은 보통 가로 한 칸 세로 한 칸의 약 한 평쯤 되는 넓이로 대웅전 뒤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삼성각 안에도 산신이 있다는 것이다. 한 사찰에 두 번씩 등장하는 것은 교조인 석가모니불 외에는 없다. 산신은 엄청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산신이 인기가 좋은 것은 산악숭배의 영향도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사찰의 대다수가 조선이라는 숭유억불기를 거치면서 산사로 남기 때문이다. 스님들 역시 또 다른 측면에서의 산신 지지자인 것이다.

 

  삼성각에는 일반적인 북극성을 불교적으로 표현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독성과 산신이 모셔진다. 치성광여래를 그린 <치성광여래도>에는 북극성만이 아니라 북두칠성과 일월 그리고 남극노인성과  청룡·주작 ·백호 ·현무의 사신 28수 등이 모셔진다. 즉 그 자체가 고대 별 숭배의 종합판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삼성각은 전통적인 숭배 대상을 모시고 있음에도 산신각이나 성황각처럼 외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각의 영역에 버젓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실제로 삼성각은 산신각이나 가람각처럼 작은 전각이 아니라 제법 규모가 큰 번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하늘을 찌를 듯한 이들의 인기를 불교가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삼성각에는 독성(나반존자)이라 해서 신선 숭배와 같은 측면도 존재하는데 이 역시 불교의 빈두루 존자로 연결되면서 불교적인 위상을 확보한다. 이렇게 되자 삼성각은 불교 밖에서 유래한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불교 안에서도 자유로운 위치를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삼성각은 대다수의 큰 사찰에는 모두 존재하며 그것은 당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민중의 지지를 잃어버리지 않은 신은 상황이 변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의 관점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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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를 '석가모니 부처님을 숭배하고 따르는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은 맞지 않는 설명이다. 힘들 때 의지할 곳을 찾는다는 사람까지 굳이 말릴 필요야 없겠지만, 불교는 '진리를 통해서 스스로 깨쳐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다. 그렇다면 깨친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뿐일까?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다양한 부처님 들이 존재한다.

 

  하나 더! 보통 불교라고 하면, 하나의 통합된 견해나 의견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것이 인도불교에서는 학파가 되고 중국불교에서는 종파로 발전한다. 서로 다른 학파와 종파는 근거로 삼는 중심 경전이 달랐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다. 또 '부처님'을 보는 방식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마치 예수를 신성으로 이해하느냐 인간으로 이해하느냐,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할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불국사 안양문(사진 앞)과 자하문(사진 뒤쪽) / 자하문을 통과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로, 안양문을 통과하면 아미타 부처님께로 가게 된다.

중심 전각과 부처님

  중국에 종파 불교가 성립된 시기는 대략 5~7세기경이다. 이후 이런 경향은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꽤 오랜 시간 영향을 주게 된다. 종파 사이에는 소의경전(所依經典, 고리와 신행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이나 수행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중심 전각에 모시는 부처님 역시 다르곤 했다.

 

  대부분의 종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셨다. 이런 경우 본존불은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고, 중심 전각은 대웅전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아미타불이나 비로자나불 또는 미륵불과 같은 다양한 부처님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 중심 전각에 모시는 본존불이 다르고, 이와 함께 중심 전각의 명칭도 변하게 된다.

 

  여컨대 경북 안동 부석사의 주불전은 무량수전이며 본존불은 아미타불이다. 또 경남 합천 해인사처럼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의 주불전은 대적광전이며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이외에도 충북 보은 법주사나 전북 김제 금산사처럼 과거에 유가법상종에 속했던 사찰에서는, 주불전이 미륵전이며 본존으로는 미륵불이 모셔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특색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급격히 변한다. 정권에 의해 불교 종파들이 강제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종파의 색깔을 잃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임진과 병자의 양란 이후가 되면, 오늘날과 같은 대웅전 중심의 사찰 구조가 보편화된다.

 

부속 전각에 모셔지는 불보살

  중국 건축의 기준과 방법을 집대성한 북송 시대 이계李誡의 저작 《영조법식》에는, "중요한 건물은 남북의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부수적인 건물들은 동서로 배치한다."는 건축 원칙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법식》은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당시 중국 건축의 일반론을  '집대성'한 성격이 크다. 그러므로 북송 이전부터 사찰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들이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수적인 건물'은 불교에서는 부속 전각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의 앞쪽 마당은 전면의 해탈문과 함께 口자 형 구조를 이루게 된다. 이때 좌우에 들어서는 건축물이 부속 전각이 된다. 부속 전각은 '부속'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만큼이나 상황에 따라서 편차가 크다.

 

  우선 강당(강원)선원의 배치에 대해 알아보자.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심검당尋劍堂, 우측에 설선당說禪堂이 들어서게 된다. 심검당이란 마음속의 검을 찾는다는 의미로 선원의 별칭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는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선불장이란 부처님을 뽑는 과거장이라는 의미다. 설선당이란 선을 설한다는 것으로, 경전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요즘 사람들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아 이런 편액을 보아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조금만 알고 보면 옛사람들의 표현이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으로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전이 모셔지고 우측에 강당이나 노전爐殿이 들어서는 경우이다. 지장전은 망자를 위한 49재나 천도재와 같은 제례가 모셔지는 전각이다. 강당은 강학 공간이며, 노전은 향로를 관리한다는 의미로 주불전을 전속으로 담당하는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다른 불전들과 달리 주불전은 위계가 높기 때문에 이곳을 담당하는 승려의 위계 또한 높다. 그래서 거주처를 노전이라고 높여서 불러 주는 것이다. 노전은 승려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그리 넓은 면적은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당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좌측의 지장전은 동일한데 우측에 천불전이나 나한전 또는 영산전과 같은 전각이 들어서는 경우다. 천불전은 1,000분의 부처님을 보신 전각이고,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 중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다. 또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시던 영산, 즉 영축산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이런 전각들은 모두 석가모니불과 관련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다른 부처님을 모신 적각을 대웅전의 부속 건물로 둘 수는 없기 때문에, 같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존이 되는 전각이 들어서는 것이다.

 

  참고로 한 사찰 안에 아미타불이나 비로자나불을 같이 모실 경우는 아예 별도의 영역을 구축해서 모시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 간에는 차이는 있지만 높낮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국사나 통도사가 그 예가 된다. 불국사는 진입 계단이 둘이어서 자하문을 통과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로 가게 되고 안양문을 통과하면 아미타 부처님께로 가게 된다. 한지붕 두 가족인 것이다. 통도사는 비로자나불 영역을 완전히 구분해서 설치하고 있다. 이 경우는 들어가는 방향은 같지만 더 들어가느냐 덜 들어가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치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가서 내리느냐 두 정거장을 가서 내리느냐의 차이라고 할까? 과거에 이런  세심한 배치를 고려했다는 게 흥미롭기만 하다.

 

기타 전각에 보셔지는 존상들

  중심 전각과 부속 전각 간에는 명확한 위계가 있다. 다만 그 위계를 설정하기 힘들 때는 별도의 영역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에는 워낙 많은 불보살들이 계시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이도저도 아닌 다소 애매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중심 전각과 부속 전각 외에 별도의 전각을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나 장경각 또는 삼성각과 같은 전각이다.

 

  보통 2~3개 전각밖에 없는 사찰도 대부분 관음전은 있다. 관음전은 그만큼 우리 민중에게 인기 있는 전각이다. 그러나 대웅전의 부속 전각에 포함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별도의 영역을 설치해 주기도 애매하다. 이런 문제로 인해 관음전은 배치에 있어서 자율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장경각도 유사하다. 장경각은 경전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장경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또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특수 건물이다. 그렇다 보니 한구석으로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타 전각에 속하게 된다. 삼성각은 우리의 토속신앙과 결합된 것인데 이 경우는 인기가 많다. 그래서 멀리에 두지 않고 부속 전각 가까이 배치한다. 이런 점들을 보면, 사찰의 가람 배치는 위계 및 인기와 서열 등에 따른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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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미美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 실용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물론 둘의 조화만큼 이상적인 것이 있으랴만 현실로 내려오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관官에서 짓는 건물은 더욱 그랬다. 얼마 전만 해도 학교나 관공서 건축은 '성냥갑 건축'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직 공간 활용에만 건축의 목적을 두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연 친화나 시민 참여 등을 이유로 외양에서부터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해 이제는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정치적 '과시용'이라는 혐의를 받을 때 그 비난은 배가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시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에서 종교는 당연히 이상을 중시한다. 이는 종교미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실적인 가치만을 놓고 본다면 종교는 아편일 수 있으며 또 때로는 아편만도 못한 가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단세포동물처럼 눈앞의 현실에만 머물러 살 수 없다. 그래서 현실과 결부된 이상 또는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을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종교 및 종교적 상징의 옷을 입고서 현실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실요만을 따진다면 유럽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나 모스크의 돔 건축은 모두 부질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인간의 이상 추구를 통한 행복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것이 종교이며 진정한 종교 미술을 보는 눈인 것이다.

대승사 정료대(조선 시대) 야간에 관솔불을 피워서 올려놓던 곳이다

통일신라 석등의 비효율성

 

  석등은 크게 나누면 등을 받치는 하대와 등을 감싸고 있는 화사석 그리고 그 위 지붕들이 세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화사석이란 '불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등이 들어가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석등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하대는 화사석이 빛의 발산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높이 들어 올린 부분이며 지붕돌은 비와 같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화사석을 보호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등을 보면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은 등 하나를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많은 공을 들일 필요가 있느냐 그것도 돌로 조각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석등의 화사석은 8각현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구멍이 뚫려서 빛이 나가도록 되어 있는 부분은 네 방향뿐이다. 많은 빛을 원한다면 여덟 뱡향을 모두 뚫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석등이 과연 단순히 조명을 위한 기구였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화사석 안에는 등잔이 들어가고 뚫려 있는 화창에는 한옥의 문처럼 한지가 발린 격자로 된 창살이 설치되어 홈에 끼워지도록 되어 있었다. 실제로 사용된 석등의 홈에서는 작은 못 구멍들이 살펴지는데 이는 창문을 고정시켰던 흔적이다. 석등을 볼 때 못 구멍을 확인해 보면 이것이 오래전에 만들어 사용되던 것인지 최근 만들어진 것인지가 대번에 드러난다. 요즘 만들어지는 석등은 과거의 모습을 본뜨기는 해도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처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석등의 특징과 종교적인 상징

 

  통일신라 석등은 한 채의 잘 지어진 8각형 정자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정자를 활짝 핀 연꽃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불교에서 연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연꽃이 피어 있다는 것은 그 위에 깨달음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 석등은 단순한 가로등이 아니라, 빛을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빛을 통해서 신성을 일깨우는 방식은 중세 유럽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창과 같은 것으로도 확인된다.

 

  통일신라의 8각형 정자식 석등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전시하고 예배하던 공간에서 유래한다. 중앙에 사리를 모시고 원형으로 돌거나 예배하던 공간에서 유래한다. 중앙에 사리를 모시고 원형을 돌거나 예배하는 목적에는 4각형보다는 8각형 건축이 더 적합하고 또 건축물의 위계도 8각형이 4각형에 비해서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4각이 아닌 8각형의 건축물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건축 구조는 중국 목탑과 더불어 고승들의 사리 수납공간인 돌무덤, 즉 8각 원당형 부도의 시작점이 된다. 중국으로 전래된 부처님의 사리 숭배 방식이 변화하여 '동아시아 목탑'과 '통일신라 석등' 그리고 '8각 원당형 부도' 세 가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석등이 본래 사리 숭배 공간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그 속의 등은 당연히 사리 즉 깨달음의 결정에 상응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활짝 핀 연꽃이 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징성은 충북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에서처럼 사자가 왜 석등을 받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게 된다.

 

  인도에서 사자로 장식된 좌대를 쓰는 것은 군왕과 성자뿐이다. 이것이 불교문화로 수용되어 부처님의 좌대에 사자를 장식했고 이를 사자좌라고 한다. 그런데 석등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살펴지는 것이다. 사자를 좌대로 사용하는 또 다른 예로는 국보 제35호 전남 구례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이나 충북 제천 사자빈신사지 4사자 구층석탑, 전남 순천 선암사의 화산 대사 부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도 역시 탑· 부도· 석등의 일치점이 확인된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흔히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라고 말한다. 이 중 실천적인 측면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낸 것이 사성제와 팔정도다. 화사석의 8각형 구조와 4화창은  4성제가 중심이 되어 8정도를 실천하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의 석등이야말로 불교적인 이상을 그대로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신품神品이라 이를 만하다. 그 어떤 민족이든 문화든 등燈에 이와 같은 상징과 미감을 온축 한 경우는 없다. 이것이 바로 신라인의 위대성이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고려의 석등

  고려의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에 비해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화사석을 4각으로 만들어 네 방향을 모두 뚫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등 구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등이 내부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통일신라의 석등 안에는 등잔만 들어가고 한쪽을 여닫으며 스님이 등장에 불을 붙이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고려의 석등등 등잔에 외곽을 씌운 사각형 등 자체를 들이고 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화사석의 크기가 커지고 화사석 주위에 창문이 필요 없어진다.

 

  화사석의 크기가 커지면 석등은 가분수처럼 머리가 무거워 보인다. 전체 비례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려인들은 가분수와 같은 석등의 모양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권위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지나친 과장이 확인되는 부분인데 이와 같은 양상은 보물 제232호인 충남 논란 관촉사 석등이나 개성 현화사 석등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체를 크게 할 경우에는 당연히 하체가 빈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 고려인들은 하대의 기둥을 더 크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머리가 큰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어쩔 수 없다. 고려 시대 사람의 미감으로서는 이것이 훌륭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는 권위를 나타낸다기보다 그저 불균형으로 비칠 뿐이다.

 

  이렇게 고려의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과 같은 날렵하면서 정제된 모습은 사라지고 다소 해학적이며 둔중한 모습만 남게 된다. 이는 석등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화사석을 할짝 연꽃으로 떠받치던 모습도 사라지면서 더욱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통일신라기 주류를 이루었던 8각 원당형 부도 양식이 변화하여 석종형 부도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는 전체적으로 8각형의 전각에 사리를 모시고 예배하던 풍조가 사라지면서 이에 수반되는 문화구조 자체가 한국 문화재 전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로 오면 고려의 머리가 무거운 과장된 장엄의 상징성마저도 사라지고 완전히 불을 밝혀서 주변을 환하게 한다는 실용성만 남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석등의 문화는 단절되고 석등의 자리는 정료대가 대체하게 된다. 정료대는 돌로 된 대 위에 직접 모닥불을 지피는 방식이다. 밝기 면에서 석등은 정료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료대의 실용성은 종교에서 강조하는 미학적 이상을 모두 잃어버린 퇴색한 조선불교를 나타내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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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는 우리가 문화재에 접근이 용이하다. 하지만 구석 구석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그냥 눈으로 대충 보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통도사의 이야기이다.

 

  "통도사에는 두 곳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일반적으로 통도사에는 금강계단 한 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통도사에는 두 곳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다른 한 곳은 바로 통도천 옆 사자목에 있는 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무너져 방치되다가 1992년 월하 스님이 새로 복원했다.

통도사 사자목 오층석탑

  이때 황룡사구층목탑에서 출토된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여기에는 당시 동국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황수영 박사의 역할이 주효했는데, 그는 "황룡사탑, 통도사탑, 태화사탑 등 세 탑의 사리는 모두 자장 스님이 봉안한 동일한 부처님 진신사라이므로 양도해도 무방하다." 고 고증했다. 실제로 황룡사구층목탑이 주심 초석과 상륜부에 봉안했으며, 통도사에 사리를 봉안하여 금강계단을 건립했으므로 이 두 곳의 사리는 동일한 것이다.

 

통도사 용화전 앞 '봉발탑' 의 상징

  탑이라 하면 흔히 여러 개의 지붕이 층층이 쌓인 모습을 떠올린다. 통도사 용화전 앞의 탑은 이런 일반적인 모양과는 다르다. 기둥 위에 무심히 밥그릇 하나가 툭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이름하여 '석조봉발탑'이다.예술적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 봉발탑이 상징하는 바를 들여다보면 불교의 '미륵신앙'에 대해 알 수 있다. 

  부처님의 발우를 형상화하고 있는 봉발탑은, 석등과 같은 몸통에 뚜껑이 있는 석조 발우를 얹어놓은 모양이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무처님이 지녔던 발우는 부처님 입멸 이후 사바세계에서 사라졌다가 미륵불이 출세할 때 다시 지상에 출현한다는 예언이 있다. 그래서 통도사 봉발탑은 그 미륵신앙에 따라 미래의 부처님을 상징하는 '미륵불'이 모셔진 용화전 앞에 세워진 것이다. 또 미래의 부처님을 위해 공양 올린다는 의미로 봉발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찌되었든,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용화전의 부처님을 위해 늘 발우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조금 특별한 돌기둥처럼 여겨지다가도, 부처님께 전하는 발우라는 의미를 알면 이 탑을 향해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한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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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중심 건물로 금강계단과 함께 1997년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에 자장율사에 의해 초창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모습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것을 조선 인조대에 우운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도사 대웅전과 관련된 자료는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정통원년명 풍탁'이 유일하다. 이 풍탁의 표면에는 "정통 원년병진유월일 사리전풍탁조 회주□□ 시주이영공송문"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풍탁이 1436년에 지금의 대웅전인 사리전의 풍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을 통해 임진왜란 이전 '사리전'으로 불리다가 1645년에 중건되면서 '사리각' 또는 '대법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대웅전이라는 명칭이 현 영산전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에서 19세기 초에 조성된 영산전 소재 불화의 화기에 봉안처를 대웅전이라고 기록한 것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통도사 전래 기록과 여러 유물에서 보이는 단서를 종합해 볼 때, 현재의 대웅전에 지금과 같이 대웅전이라는 이름이 정착된 시기는 19세기 말경으로 파악된다.

통도사 금강계단

  현재의 대웅전은 건물의 네 면에 동쪽 대웅전, 남쪽 금강계단, 서쪽 대방광전, 북쪽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와 같이 건물의 네 면에 편액을 거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또한 그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정면처럼 보인다. 통도사 대웅전이 독특한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자연 지형의 제한으로 인해 동서 방향을 축으로 확장 · 전개된 통도사의 가람배치 및 진입 방향과 관계된 것으로 해석한다. 대웅전은 금강계단의 전면에 배치된 불전이기 때문에 방향을 엄격히 따지면 정면은 남향한 건물이다. 

 

  이에 비해 사찰의 진입 방향은 동쪽이기 때문에 만약에 통도사 대웅전이 일반적인 불전 형식으로 건립되었다면 참배객들은 대웅전의 정면이 아니라 동쪽 측면을 마주하며 진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웅전을 출입할 때 측면으로 들어선다면, 사찰의 핵심 불전이 갖춰야 할 중심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통도사 대웅전의 정면과 측면의 구별을 배제한 '丁' 자형 지붕을 취하게 되고, 이것은 자연 지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창안된 형식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완성된 통도사 대웅전은 동서 축으로 확대된 가람배치로 인해 남향인 주불전이 전가된 이질성을 제거하고 사찰의 핵심 불전이 갖춰야 할 중심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대웅전 건축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단층 건물로, 마치 두 개의 건물을 결합한 듯하다. 통도사 대웅전 공포의 형식과 양식은 조선 중기 불전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丁' 자형의 독특한 지붕에는 북쪽을 제외한 세 면에 합각이 하나씩 설치되며,  '丁' 자의 용마루가 맞닿은 위치에 청도 보주를 장식하였다. 기와는 일반 기와와 더불어 일부 청동암막새와 철기와가 혼용되었다. 이처럼 청동기와와 철제기와가 사용된 중붕 현존하는 국내 건축물 가운데 유일한 사례이다. 

 

  막대기와 위에는 백자연봉이 설치되어 있다. 백자연봉은 불전에 장엄미를 더하고, 기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시킨 방초정의 광두가 부식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건물의 기단 네 모서리에 활주를 배치하여 추녀를 받치고 있는데, 활주의 끝에는 연화물을 새겼고 단면은 팔각형이다.

 

  내부의 천정은 우물천장으로 높낮이가 다른 단을 두어 중앙을 가장 높게 처리하였다. 장귀틀과 동귀틀 및 소란반자에는 연화문, 국화문, 모란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내부 바닥은 현재 우물마루가 깔려 있다. 기단은 지대석 위에 탱주가 모각된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으로 구성된 가구식 기단이다. 동쪽과 남쪽의 면석 및 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독특한 화문花紋을 근거로 대웅전 기단을 신라시대 원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통도사 대웅전 벽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측의 금강계단 쪽 2칸에만 토벽을 두고 나머지 모든 벽에는 창호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북측면 어칸의 창방과 중방 사이에는 창문을 마련하여 건물 내부에서 금강계단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벽체를 창호로 처리한 것은 원활한 통풍과 채광을 의도한 설계로 의식과 예배 중심 공간이 통도사 대웅전의 기능적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대웅전 사방 편액의 의미

동쪽 대웅전 大雄殿

대웅大雄은 큰 영웅을 뜻하는데 불교에서 가장 큰 영웅인 석가모님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불전을 이르는 말이다.

 

 

 

서쪽 대방광전 大方廣殿

대방광은 부처님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대방광전은 진리요,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이 상주하는 도량이라는 뜻이다.

 

 

 

남쪽 금강계단金剛戒檀

금강은 절대 깨지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계단은 수계를 받는 단을 말한다. 금강계단은 금강과도 같이 계율을 지킨다는 뜻으로 통도사가 계율도량임을 밝히고 있다.

 

 

 

북쪽 적멸보궁 寂滅寶宮

적멸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뜻한다. 불멸 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 탑, 암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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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경제와 문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1970~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친 기성세대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물론 오산이다. 특히 문화는 그 사회를 반영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인구 100만 명에 세계 10대 도시 중 하나였던 통일신라의 경주에서 만들어진 석굴암의 미감과 기교를 따라가는 불상은 아직까지 한반도에 다시 출현하지 못했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외침外侵을 한 세대 동안이나 방어하면서 결국 자치권과 부마국의 위상을 확보한 고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 역시 후대의 어떤 자기瓷器도 그 신비한 아름다움을 뛰어 넘기는 어려웠다. 한반도의 탑은 통일신라 시대가 정점이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쇠퇴를 반복했고 현대는 아예 덧칠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고선사지 3층석탑(통일신라시대 초기)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

  통일신라 시대 석탑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단의 면석과 탱주가 각각 세 개 그리고 두개였다는 점을 둘째, 셋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는 기단의 수평적인 공간 분할이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넷째로 한옥 구조의 화려함을 모방하고 있는 옥개석 받침이 다섯 개라는 점이다. 옥개석 받침은 옥개석 밑에 층계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석탑에 있어서 마치 계급장과도 같다. 후대로 갈수록 이 층받침이 줄어 네 개 그리고 세 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일신라 시대 석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단이 복잡한가 그리고 옥개석 받침이 몇 개인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이외에도 세세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지식은 번잡하기보다는 간단하게 습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런데 왜 통일신라 시대 석탑을 가장 아름답다고 할까?

 

  불상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앉아 있는 불상이 그대로 일어났을 때 어떤 상태가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일어섰을 때도 신체 비례가 맞고 전체적인 구조가 수려하고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그 작품은 수작이다. 석굴암 부처님이 그대로 일어나서 움직인다고 상상해 보라! 석탑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봐서 시원하고 아름답다면 그걸로 끝이다. 아름다움(美)에는 정답이 없지만 사람들이 보는 눈은 대개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석탑을 만들 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선입견은 화강암이라 질료에서 오는 무게감이다. 우리는 돌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석탑을 만들 대는 이런 '선입견'을 지워야만 한다. 석가탑이 신라 최고의 석탑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진중하면서 경쾌하다'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부분을 석가탑은 균형있게 소화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의 내적인 긴장감은 문화나 경제력이 조금만 흔들려도 구조에 대한 석공의 이해가 조금만 떨어져도 곧 한쪽으로 쏠리며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모든 예술품이 가장 경계하는 정신의 몰락이다.

 

 

다양성으로 승부를 본 고려시대 석탑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탑에도 양식적인 혼란과 퇴화가 나타난다. 또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의 유입은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을 강조하는 풍조를 몰고 왔다. 그러다 보니 자율적인 양식이 강조된다. 통일신라 말기로 가면서 석탑은 기단의 갑석과 탱주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게 된다. 즉 수평적인 공간 분할이 두 개로 축소되는 것이다. 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중기단이 하나의 기단으로 간소화되는데 이런 경향은 조선조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옥개석 닫침도 다섯 개에서 네 개로 줄어들게 된다. 전체적으로 양식이 고착화되면서 간소해지고 왜소하게 변화된다고 보면 되겠다.

 

  고려 시대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콜라병과 같은 날씬한 자태와 5층 ·7층 ·9층 ·13층과 같은 3층을 벗어나는 자유로움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기 때문에 북방 기마민족의 정서가 있다. 그렇다 보니 남방의 경주를 중심으로 정착한 지 오래되는 신라와는 문화적 색깔이 조금 다르다. 이것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날씬한 미감과 다층구조이다.

 

  중국도 한족이 만든 예술품과 유목민이 만든 예술품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유목민인 선비족이 조성한 운강석굴은 한결같이 호리호리한 자태를 뽐내는 데 반해 한족화된 당나라의 용문석굴은 불상들이 모란꽃과 같은 풍만함을 자랑한다.

 

  고려는 통일신라의 석탑 문화를 계승한다. 그럼에도 신라의 방정함보다는 날씬함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이러한 차원에서 3층으로 일반화된 통일신라의 석탑과 달리 5층 ·7층 ·9층처럼 더 높아서 시원하게 보일 수 있는 층수를 선호했다. 또 통일신라의 탑이 4각형이라면 고려의 석탑에는 8각형도 등장한다. 고려의 대표하는 석탑으로는 묘향산 보현사의 8각13층석탑과 개성 현화사의 7층석탑 그리고 국보 제 48호인 월정사 8각 9층석탑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의 석탑은 양식이 고착화되고 이후 퇴화하면서 날씬함을 넘어 쇠잔하고 파리해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원나라 간섭기에 이르면 우리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석탑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탑이 국립중앙박물관 입구에 있는 제86호 경천사지 10층석탑이다. 이 탑은 원나라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탑을 모사한 것이 현재 서울 탑골공원 안에 있는 보물 제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다.

 

  고려의 석탑에는 원 간섭기 티베트불교의 탑과 우리 전통의 고려 탑 양식이 중층으로 결합된 보물 제 799호 공주 마곡사 5층석탑과 같은 경우도 있다. 이 탑은 고려의 5층석탑이 청동으로 된 티베트의 라마탑을 상륜부에 얹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조선과 현대의 탑

  조선의 석탑들은 조선 전기의 원각사지 10층석탑 정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볼 만한 것이 없다. 양식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기보다는 마구잡이로 대충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잘 차려진 한정식이 아닌 국밥과 같이 여러 가지가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것이 조선의 탑이라고 하겠다.

 

  현대에도 석탑은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현대의 석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겉만 그럴듯하게 덧칠이다. 현대의 석탑들은 현대의 기술로 국보나 보물급의 수작들을 모사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우수하다. 그러나 과거를 재해석해서 현대화하지 못하는 단순히 습자지를 놓고 모사하는 것과 같은 작업은 덧칠함에 불과하다. 그것은 예술도 종교도 아닌 그저 거리의 기성복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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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가 시작된 인도는 나라가 크고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사는 만큼 탑도 여러 양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표적인 탑'을 들라면 단연 기원전 3세기 중엽 아소카 왕 이 건설하기 시작해 뒤에 확장되는 산치탑이다. 그런데 산치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탑'의 모양이 아니다. 외형만 놓고 보자면 벽돌로 된 거대한 봉분형의 무덤이다. 굳이 무덤과 구분하자면 꼭대기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일산과 난간을 두른 장엄물이 있는 것 정도이다.

 

  인도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파라솔과 같은 거대한 일산을 사용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다 보니 존중의 대상이 되는 불상이나 탑에도 일산을 씌우는 양식이 적용된다. 이런 일산은 변형된 형태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탑 정상부에도 남아 있다. 여하튼 이런 봉분형이 우리나라에 와서 석가탑과 같은 형태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탑의 상륜부

명당 건축과 동아시아의 탑

 

  중국의 고건축에는 명당明堂 건축이라는 것이 있다. 명당 건축이란 여러 층으로 된 누각 건물을 의미한다. 요즘으로 치면 고층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중국의 권력자들은 여기에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부여했다. 랜드마크와 신성함의 결합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왕궁 건축에 버금가는 위세를 가지는 명당 건축이다.

 

  부처님의 사리가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종교적인 신성함에 입각해 사리는  명당 건축에 모셔지게 된다. 이로 인해 다층의 누각 형태로 된 중국탑 양식이 정착된다. 우리나라의 탑 역시 중국에서 사리를 모신 여러 층으로 된 누각의 명당 건축을 화강암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하늘과 땅, 홀수와 짝수

 

  명당 건물과 탑의 신성함 역시 고도의 상징성과 관련이 있다. 이런 상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세로로서의 하늘과 가로로서의 땅이다. 중국문화에서는 이게 홀수와 짝수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탑은 세로로는 3층 · 5층  · 7층  · 9층  · 13층과 같이 하늘이라는 홀수의 상징을 가지게 되고 가로로는 4 각형  · 8 각형  · 12 각형과 같은 땅이라는 짝수의 상징이 나타난다. 즉 동아시아의 탑은 수직으로는 홀수이고 수평으로는 짝수인 것이다. 

 

  하늘과 땅 중 무엇이 더 가치가 높을까?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니, 답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런 부분에 대한 가치를 규정해 놓았다. 천/지, 홀/짝, 남/여 따위가 그것이다. 이중 먼저 언급된 것이 더 우월한 가치를 갖는다. 이를 언어의 우월성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는 '가로세로'라고 하지만 한자에서는 종형, 즉 '세로가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왜 탑의 수직과 수평이 홀수와 짝수가 되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천(하늘) - 홀 - 종(세로) - 남

          지(땅) - 짝 - 횡(가로) -여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천존지비天尊地卑"라 하여, "하늘은 높고 땅은 비천하다."는 언급이 있다. 이 말은 후일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라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또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1.1)  · 삼짇날(3.3)  · 칠석(7.7)  · 중양절(9.9)은 모두 홀수가 겹치는 날이다. 이는 홀수가 하늘의 양명함을 상징하는 상서롭고 길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탑의 층수가 홀수라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10층 탑은 짝수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문화재 중에는 경천사지 10층석탑(국보 제86호)이나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처럼 '10층'이라는 예외가 존재한다. 이러한 예외가 유독 10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10진법 체계에서 10이 완정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0 x 10인 백에는 '온전'과 '모두'의 의미가 있다. 즉 탑에 나타나는 10층은 기존의 홀수적인 관점과는 다른 각도에서의 완전성을 상징한다는 말이다.

 

  또 10층 탑은 대부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와는 다른 관점에 의한 시대적 요청을 예술이 수용한 결과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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