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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을 가리키는 말은 아주 다양하다. 같은 곳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규모에 따라 각기 구별해 부르곤 한다. 게다가 개별 사찰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일정한 규칙이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흔한 관음사나 약사사, 지장사 등은 주불로 모시는 부처님 명호를 따라 지은 경우이지만 봉奉, 국國, 흥興 자가 들어간 사찰처럼 국가와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고, 지형이나 풍수를 고려해 지은 이름들도 있다.

불국사 회랑 ; '사원'이라는 말은 '절(寺)'이라는 말과 '담장'을 둘러쳤다(院)'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가람伽蓝과 사寺

  불교에는 사찰을 나타내는 많은 명칭이 있다. 이 중 가장 상위개념이 바로 가람 伽蓝과 사寺이다. '가람'은 인도불교에서 절을 가리키던 상가라마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그 음이 차용돼 승가람마가 되고, 이것이 축약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가람을 절의 총칭으로 보야도 문제가 없다.

 

  인도 승려였던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후한의 명제 때인 영평 10년, 즉 기원후 67년에 수도인 낙양에 오자 후한 정부에서는 이들을 사신의 예로 대했다. 그래서 당시 홍로시라는 일종의 영빈관에 모시게 된다. 그런데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이 홍로사에 도착해 눌러앉고는 다음 해인 68년에 이를 절로 바꾸게 된다. 홍로사의 '寺' 자는 관청 시와 절 사의 두 가지 음을 가진다. 마치 '金' 자가 쇠 금과 성 김으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스님들이 관청에 살 수 없으니 시라는 발음을 사로 바꾸고, 명칭도 홍로에서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데리고 온 백마를 기념해서 백마로 변경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인 낙양의 백마사이다. 즉 '사'란 중국에서 가람에 상응하는 절의 총칭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총칭에 해당하는 우리 식 표현이 바로 '절'이다. 사를 왜 절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학설이 없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절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은 향과 함께 인도 문화가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인데, 통아시아 사람들에게 특이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배 형태의 명칭과 예배 장소의 명칭이 일치된 경우이다. '머리에서 머리(카락)가 자란다.'는 것도 같은 경우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사찰寺刹과 사원寺院

  사찰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예전에는 '신성 공간' 앞에 찰간이라는 국기 게양대와 같은 시설문을 세웠다. 요즘처럼 관청이나 학교에 국기게양대를 만드는 것도 유사하다. 사찰은 '절[寺]'에 이 신성한 공간 표식인 '찰간'이라는 단어가 결합돼 만들어진 단어다.

 

  또 절이 산이 아닌 도심에 있을 경우는 담을 둘러서 삿된 범접을 금하고 권위를 수립했다. 경복궁과 같은 왕궁의 담장 정도를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담을 둘러쳤다는 의미에서 '원院'이라고 한다. 원의 기원은 인도에서 우기 때 비를 맞지 않고 다니기 위해 절의 통로에 지붕을 씌운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바깥쪽으로 점차 담이 만들어지면서 사원의 형태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사'나 '사원'의 경우 불교와 관련된 것이지만, 불교가 동아시아 전통에 깊이 침투하면서 이런 표현은 이후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용어들은 다른 종교의 종교시설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의 모스크를 이슬람사원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이슬람사원을 일컬어 청진사라고 하는 경우 등이다.

 

암자庵子와 토굴土窟

  불국사와 같이 '사' 자가 들어가는 절은 과거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이었다. 즉 '사'란 국가가 인정한 일정 규모 이상의 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절들은 때에 따라서는 작은 부속 사찰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부속 사찰을 '암庵'이라고 한다. 암은 암자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정상적으로 잘 지은 절이 아니라 수행을 위해서 풀로 지은 임시 초막과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차 규격을 갖추면서 명칭만 암으로 남게 된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현대에 널리 쓰이고 있는 '토굴'이라는 것이 있다. 토굴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은 진짜 흙집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번듯한 경우가 많다. 이도 본래 의미가 전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산사와 같은 경우 부속된 암자를 산내 암자라고 한다. 이는 산 안에 있는 부속 암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사찰의 책임자를 주지라고하는 것과 달리 암자의 책임자는 암주라고 해서 차등을 둔다. 또한 암자는 사가 '직영'하기 때문에 주지와 암주의 관계는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처럼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제는 사라진 이름 난야蘭若

  암자와 같이 부속되지 않은 절이면서 또 사와 같이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 개인이 지은 절을 과거에는 '난야 蘭若'라고 해서 구분했다. 난야란 아란야를 음차해서 축약한 것으로 본래는 숲 속의 고요한 수행처를 의미했다. 이것이 차용되어 절의 의미로 수용된 것이다. 인도의 아란야가 동아시아로 와서 중국의 관청을 의미하는 '사'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참 멀리 와서 고생이 많은 경우라고 하겠다.

 

  절을 가리키는 용어 중 난야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가 과거처럼 정부의 인정을 받는 절만을 의미하지 않게 되면서 명칭이 위계가 높은 사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난야보다는 사가 더 있어 보이므로 '사'로 통합이 일반화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우리나라 절 이름에 들어간 한자의 비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사찰 이름은 관음사다. 관음신앙이 우리민중에서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약사사나 미타사라는 이름도 자주 보인다. 이 역시 '신앙'과 관련된 이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크게 분류해 이야기하지 않고 사찰 하나하나 이름의 의미를 찾아가면 끝이 없다. 그중에 가장 일반화된 것이 '봉奉' 자와 '원院' 자가 들어간 사찰 이름이다. 봉 자가 들어간 사찰의 경우 능침사찰의 기능을 한 곳이 많았고, 원 자가 들어간 사찰은 역참 기능을 했다. 이밖에 '흥興' 자와 '국國'자가 들어간 사찰 역시 '국가'와 관련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인조 때 창건된 남한산성의 국청사는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와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국청사라는 같은 이름의 사찰이 부산 금정산에도 있는데 금정산 국청사 현판에는 "숙종 29년(1703년) 금정산성 중성을 쌓은 후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보호하니 그 이름을 국청사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興 자가 들어간 사찰 역시 꽤 많다. 서울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죽자 그 능을 정릉으로 정하고 세운 사찰이다. 조선 시대에만 이런 이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려 시대 문종의 원찰이었던 흥왕사는 절의 규모만 2,800칸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에서 세운 절이다. 이밖에 부석사나 호압사처럼 창건 설화나 풍수를 고려해서 이름을 붙인 사찰들도 있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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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의 본래 기능은 기도와 수행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부가되었고, 이런 기능들이 역으로 불교 안팎에 많은 변화를 주기도 했다.

 

비보사찰, 전 국토에 침과 뜸을 뜨다

운주사 천불천탑 비보사찰

  신라는 992년을 유지한 세계 최고의 장수 왕조 중 하나다. 또한 경주는 신라 시대 내내 수도의 위치를 내어 준 적이 없다. 그래서 경주 앞에 붙는 수식이 바로 '천년고도'다. 통상 중국의 왕조 교체 주기는 200년 안팎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려와 조선이 500년 안팎이고 신라는 천년이나 되니 실로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왕조가 오래갈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보사탑설을 꺼내 든다. 비보사탑은 마치 한의학에서 인간의 몸에 침을 놓고 뜸을 뜨듯이 국토 즉 산천의 중요한 자리에 사찰과 탑을 건립해서 국가의 기운을 순일하고 안정되게 보충해 왕조를 오래 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보사찰의 개념은 신라 말 그리고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비등해졌다. 실제 존재 여부가 확실치 않으나 도선(827~898)이 지었다는 「도선비기道詵秘記」에는 모두 3,800개의 비보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책은 실제 존재 여부를 떠나 비보사탑설이 당시 조정이나 민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방증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비보사찰은 평지뿐 아니라 산속에도 많았다. 이는 우리나라 사찰이 산속으로 들어간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국가 차원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산천에 들어서는 사찰이 불교의 보급과 확대에 매우 긍정적인 역학을 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비보사찰의 논리는 역으로 불교의 쇠퇴를 설명하기도 한다. 지세와 풍수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사찰이 들어서게 되면 국가와 불교의 명운이 단축되었다는 논리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 태조 왕건이 박술희에게 전해서 후손들에게 경계하게 했다는 열 가지 조항인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설치된 사찰들은 풍수지리에 따라서 정해 놓은 것이니 함부로 사찰을 창건해서 지덕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또 이와 함께 '신라가 망한 것이 신라 말에 과도한 사탑이 건축되어 지덕이 손상된 결과이니 경계'하라고 하였다.

 

역참驛站 기능을 했던 사찰

  어느 국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국교國敎가 지정되면 해당 종교의 사원은 주요 도시나 이동 통로에 별처럼 늘어서게 된다. 때로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국가가 하지 못했던 여러 기능들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의료나 역참의 기능을 들 수 있다.

 

  종교시설은 특성상 개방적이며 다수를 수용할 수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가 쉽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하다 보면 종교시설을 연결하는 길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곧 국가의 주요한 교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찰이 역참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것은 역원이라는 명칭에 절을 나타내는 '절 원院' 자가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역참 기능을 동시에 담당했던 사찰들은 고려 시대의 것들이 눈에 띄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뚫린 고갯길인 충북 충주 하늘재의 미륵대원, 영남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자리 잡았던 경북 안동의 제비원 그리고 개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했던 경기도 파주의 혜음원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혜음원은 규모가 무척 거대했던 정황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사찰과 별도로 숙박시설이 따로 갖춰져 있었고, 여기에 행궁까지 겸비되어 있었을 정도이다.

 

왕의 명복을 빌었던 능침사찰

  죽은 선왕의 사후 명복을 빌고 재를 올린 목적으로 건립된 사찰도 있는데 이를 능침사찰이라고 한다. 이런 능침사는 숭유억불기인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대표적인 능침사찰 중 하나가 바로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다. 봉선사가 자리 잡고 있는 광릉은 세조, 즉 수양대군의 무덤이다. 고려 시대에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있던 절을 능침사찰로 지정해 이름을 선왕을 받든다는 뜻인 봉선사로 바꾸고 크게 중창했다. 또 유명한 능침사로는 서울 강남의 봉은사가 있다. 봉은사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주역인 제11대 중종의 정릉을 위한 사찰이다. 봉선사와 봉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능침사찰에는 '받들 봉奉' 자가 주로 들어간다. 이는 임금의 은덕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이외에 능치사찰 같지 않은 명칭의 능침사찰인 경기도 화성의 용주도 빼놓을 수 없다. 용주사는 정조가 뒤주 속에서 죽은 비운의 왕세자인 부친 사도세자를 위해서 천하의 명당에 이장한 융릉의 능침사이다. 사도세자는 정적들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무덤마저도 형편없는 곳에 쓰였다. 이를 한탄하던 정조가 천하의 명당을 수소문해서 찾은 곳이 바로 현재의 융릉 자리다. 그러나 이곳은 한양에서 80리 안에 왕릉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벗어난 88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왕릉이 되지 못한 이유다. 그러나 정조는 왕명으로 이를 80리로 고치도록 했다. 왕명에 의해서 축지법이 단행된 것이다.

 

  이렇게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고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건설하게 되는데, 사찰의 낙성식 전날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다. 용이란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는 임금을 상징하니 여의주를 문 용의 스천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한이 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서상을 길이 새기기 위해서 사찰의 이름도 용주사라고 한 것이다. 용주사에도 사도세자의 원한이 효자 정조와 부처님에 의해서 풀어진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셈이다.

 

  또 능침사찰 중 학문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곳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을 위한 평양의 정릉사를 들 수 있다. 정릉사는 고구려의 사찰 양식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능침사찰의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에도 알 게 된다.

 

조선왕조의 역사와 성곽을 지켰던 사찰

  조선 시대 승군의 역할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전후의 시기에 산성 축소와 보수에 승려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반인은 많지 않다. 현재도 북한산성 안에 승가사, 문수사, 봉국사, 도선사, 보광사, 진관사, 삼천사, 선운사가 있고, 남한산성에도 국청사, 개원사, 장경사, 망월사가 남아 있다. 본래는 더 많은 사찰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이 또한 사라지게 된다.

 

  산성 축조 외에 전란의 시기에 「실록」과 「의궤」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 사찰도 있다. 조선은 서울의 춘추관에 내사고內史庫 그리고 충주 · 전주 · 성주에 외사고外史庫를 두었는데, 이 중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기록물들이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훼손되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실록」과 「의궤」를 강화도와 깊은 산속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1782년 강화도 행궁에 만들어진 외규장각은 어람용 「의궤」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곳의 관리는 전등사가 맡았다. 강화도 외에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이 사고로 지정되는데 이때 각 산에 있던 큰 절들에 사고史庫가 들어선다. 애초 묘향산에 있던 사고는 전북 무주의 적상산 적상산성 안으로 옮겨졌으며, 관리는 안국사가 맡았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가 관리했으며,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의 관리 속에 별도의 사고사가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산으로 간 조선의 대표적인 기록물들은 사찰의 영향 속에서 승려들의 손에 의해 지켜지게 된다.

 

 

 

 

 

 

 

「자현스님 " 사찰의 비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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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山寺라는 말이 대변하듯 옛 사찰이라 하면 으레 숲이 울울창창한 산속에 있으려니 짐작한다. 하지만 사찰이 처음부터 마을과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찰이 들어서야 하는 곳에 대해 '마을과 멀거나 가깝지 않은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사분율」) 실제로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수행처인 기원정사(19~25년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는 당시 번화했던 도시 중 하나인 사위성에 자리 잡은 7층 목조건물이었다. 물론 부처님 당시 수행처가 모두 이런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숲속이나 나무 밑에 의지처 삼아 수행하는 수행자도 매우 많았다. 하지만 부처님이 머물렀던 여러 사원의 위치를 봤을 때 애초 사찰이 위치하고자 했던 곳이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입지 선택은 당시 수행자들의  탁발 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도 운문사

 

탁발 때문에 결정된 사찰의 위치

  부처님 당시 사찰은 요즘과 달리 '부엌'이 없었다. 당연히 사찰에서는 음식을 조리할 수 없었다. 당시 수행자들은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빌어 온 후 적당한곳에서 공양하는(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불교도 이런 전통을 따랐다. 이런 인도의 탁발 문화는 자연스레 사찰이 마을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도의 탁발 전통은 기후나 이에 따른 음식 문화와도 무관치 않다. 인도는 무덥고 강우량이 많기 때문에 농사에 맞춤인 땅이다. 그런데 이 농사라는 게 특성상 한철에 집중적인 과過 생산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상추나 깻잎을 심게 되면 어느 순간 도저히 혼자 혹은 한 집이 다 먹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시골의 '넉넉한 인심'은 이런 농업의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도는 먹거리가 넘쳐 나는 지역이다. 여기에 인도의 기후 특성이 또 탁발 문화에 한몴을 한다. 더운 날씨 탓에 음식이 금방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을 음식'을 미리 나눠 주는 풍습은 이런 이유에도 기인한다. 재가인은 수행자에게 음식을 보시하면서 남을 음식을 줄이고 공덕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고마움은 통상 탁발받는 수행자가 아니라 보시하는 재가자가 표현하게 된다. 이렇게 탁발 문화가 일반화된 곳에서 사찰의 위치는 당연히 마을과 인접한 곳이어야 했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도심에 자리 잡아

  황룡사는 신라의 정복군주이자 전륜성왕轉輪聖王 에 비견되는 진흥왕이 황궁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서상瑞祥을 입어 사찰로 바뀌었다는 신라 최대의 가람이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사찰의 건립 입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왕이 사는 궁궐은 당연히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즉 황룡사는 인도의 기원정사처럼 도시의 안쪽에 있었던 사찰인 것이다. 황룡사가 가까운 북쪽에는 원효 스님이 주석한 것으로 유명한 분황사가 있고 바로 남쪽에는 미탄사가 인접해 있다. 모두 시내라고 할 만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도와 달리 탁발 문화가 없었고 사원 안에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도 있었는데 왜 산이 아닌 도시에 위치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왕이나 귀족들이 수시로 참배 다니던 사찰은 당연히 이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찰은 누구나 가까이서 즐겨 찾는 곳이었기 때문에 마을과 먼 산에 위치할 수 는 없었던 것이다.

 

선종의 흥기와 산사의 탄생

  불교가 번성한 중국 당나라 때에 이르면 도심 사찰은 현대의 교회처럼 포화 상태에  이른다. 이때 선종이 내면적인 명상을 주장하며 후발주자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사찰 일부가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시에는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었고, 또 참선 수행에 있어서도 도시 보다는 산속이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은 신도들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선농일치禪農一致 와 같은 자급자족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백장스님(749~814)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당시의 척박한 산사 문화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 선종의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그 결과 신라 말부터 유행하는 선종의 아홉 학파는 한결같이 산속에 자리하게 된다. 이를 9산선문, 즉 '아홉 산에 자리 잡은 선종의 학파'라고 한다. 최치원 남기 4비문[四山碑銘] 중 하나인 <지증대사비>에는 9산선문보다 5개가 많은 14산선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14산선문 역시 모두 산을 끼고 있었다.

 

신성사상과 군사적 목적도 한몫

  우리나라는 산이 매우 많다. 덕분에 '선仙'과 같은 산악숭배 문화가 발달한다. '仙'이란 글자를 풀어 보면 사람이 산에 기대어 있는 모습(人+ 山)이다. 발해만 쪽에서 흥기했던 신선사상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이런 산악숭배 전통은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직도 큰 절에 가면 삼성각에 산신이나 독성을 모셔 놓곤 한다. 이는 신선사상과 불교의 습합을 잘 보여 주는 예다.

 

  자연스레 군사적 역할을 일부 담당했던 사찰도 있다. 자장 율사가 창건한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는 삼국 시대 신라의 최전방에 건립된 사찰이다. 이 절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동북방의 지역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군사적 목적의 전환이 가능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월정사는 한국전쟁 당시 후퇴하는 아군에 의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또 전쟁이나 민란이 잦은 경우 사찰에는 자체 방어 인력이 있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승군이다. 이들을 수원승도隨院僧徒의 군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해당 사찰을 방어하는 경비부대인 것이다. 이들 중 군대의 성격이 보다 강한 것으로 항마군, 즉 마귀를 항복받는 군대라는 것도 있다. 이때의 승군은 수행승과는 질적으로 다른 승려들로, 그 자체가 하나의 신분을 형성하는 직업군이었다. 산사에 존재했던 이런 자체 방어군의 정신은 후일 임진왜란 때의 승군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라지는 도시 사찰, 살아남은 산사

  조선이라는 숭유억불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사찰은 철거되거나 양반집 등으로 용도가 변경된다. 한옥은 나무를 짜 맞춰서 건축하기 때문에, 이를 풀어서 옮기거나 새로운 건물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은 당시 권세가들이 신속하게 집을 짓는 과정에서 헐리기 일쑤였다. 또 호젓하고 운치 있는 곳에 위치하던 사찰은 서원과 같은 유교 교육시설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다. 이 서원은 본래 쇠락한 숙수사宿水寺 자리에 들어선 것으로 아직까지 당간지주나 불상 등의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도심의 사찰들이 양반들의 주된 표적이 된 것과 달리, 산사의 의도적으로 방치된 측면이 있다. 물론 산사까지 찾아가서 파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원활하게 물자를 유통시키거나 산짐승을 피해 줄이기 위해서는 산사가 그 나름의 충분한 효용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산사에는 '여관'이나 '역참'의 기능도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풍수지리설과 연관되어 흔히 말해지는 비보사찰裨補寺刹도,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통 · 통신에 있어서 국가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산속에 국가시설을 건립한다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사찰은 조선의 경제 발달과 유지에 막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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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니기 좋은 지형으로 곳곳에 약자들을 배려한 구조물이 있어 가족 단위의 참배객들이 많다. 평지의 사찰이 가진 이점이 크다. 많은 이들이 통도사를 편안한 도량으로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도량 옆으로는 통도천이 흐르고 있고, 산문을 지나 총림문,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기까지 완만한 길이 이어진다. 산책길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선이다. 하지만 참배를 목적으로 한다면 약간의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여러 문을 거쳐 중심 법당으로 가면, 도착했을 때 대웅전의 정면과 마주한다. 하지만 통도사는 도착지인 중심법당에 이르면 우리는 정면이 아닌 측면을 마주한다. 이처럼 독특한 가람배치는 통도사의 긴 역사 동안 가람이 꾸준히 확장되며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통도사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사세를 유지해 온 국내 최고의 사찰이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왕실과 대중의 비호 속에 한국불교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시대 억불과 임진왜란의 전화를 극복하며 사세를 이어 왔다.

통도사 가람 배치도

  오늘날 통도사에 남아 있는 수많은 건물들은 창건 이후 1,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끊임없이 건립되고, 중수되고, 이전된 결과이다. 통도사는 역대 우리나라 불교 건축이 창출한 모든 상징과 공간활용 기법들이 응집되어 있어 한국 사찰 건축의 척도로 평가되고 있다. 수많은 불전을 보유한 통도사의 건축에 대해 통도사에 없는 전각은 국내 어느 사찰에도 없다는 이야기가 통용된다.

 

  통도사의 불전 배치를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건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과연 어떤 전각을 중심으로 전체가 형성되고 있는지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주문을 시작으로 천왕문, 불이문,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복잡하게 전개된 건물들 속에서도 대웅전의 중심성이 흐트러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일주문에서 이어지는 중심축은 천왕문과 곧바로 통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천왕문에서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시계의 변화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즉 천왕문에서 불이문을 바라봤을 때 문틀을 통해 기단의 계단만을 드러내던 대웅전이 불이문을 향해 진입해 들어갈수록 기단에서 기둥 - 공포 -처마 -지붕으로 상승해 가다가 불이문의 계단 앞에 이르면 마치 액자의 틀과도 같이 불이문의 문틀 안에 꽉 차게 전체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는 곧 불이문의 두 기둥을 화폭으로 가정할 때 대웅전의 전체도가 화폭에 꽉 차도록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현재 관음전 건물이 대웅전을 일부 가리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전각이 증가하면서 발생한 불가피한 부지 선정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통도사의 가람은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구분할 수 있다. 향을 올리는 곳, 즉 노전이 세 곳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은 각각의 중심 전각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어 독립성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통도사는 과거 노전별로 사찰의 살림이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각 노전이 개별 운영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장 지위가 높은 상로전에는 통도사의 상징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의 정면에는 대중법회와 행사를 여는 대형 건축물인 설법전이 있다. 좌우로는 명부전과 응진전을 배치하였다. 응진전의 남쪽에는 노전인 일로향각一爐香閣이 있고, 서쪽으로는 삼성각과 산령각이 배치된 작은 공간이 나오며, 그 가운데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상로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이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이곳에는 주지 스님의 처소인 보광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그 뒤로 방장 스님의 거처인 정변전이 자리하고 있다.

 

  중로전의 중심 전각은 대광명전이다. 영산전과 함께 통도사의 초장 건물로 추정되며, 대광명전 앞에는 용화전, 용화전 앞에는 관음전이 있다. 대광면전 옆에는 최근에 건립된 문수전이 있다. 영산전은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있고 용화전에는 미륵부처님,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 대광명전은 대웅전에 버금가는 수려한 건축기법을 볼 수 있어서 조성 당시 굉장히 공을 들여 지은 전각임을 알 수 있다. 불이문에서 보면 관음전은 중로전 구역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하다. 관음전 뒤로는 개산조당 · 세존비각 · 해장보각 · 용화전 · 장경각 · 전향각이 남향하여 배치되었는데, 맨 뒤의 대광명전만 서쪽으로 약간 틀어 앉았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용화전 앞에는 장차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게 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세운 봉발탑이 독특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학인 스님들의 경전을 수학하는 강원 건물인 황화각과 3동 요사가 있고, 황화각 뒤로 통도사 역대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이 있다. 그리고 관음전 앞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감로당과 원통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두 건물 지하에 대중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공양간이 있다. 이 외에도 작은 객실과 원주실, 후원 등이 있다.

 

  하로전의 중심 법당인 영산전은 통도사 창건 당시 초창 건물로 추정된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며,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영산전은 원래 이름이 '대웅전'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통도사에서는 중요한 입지를 지닌 전각이다. 또 하로전의 입구이자 도량의 초입인 천왕문 옆에는 통도사 도량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가람각이 자리한다. 가람각 전면에는 아침저녁 예불의식에 사용되는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 둔 2층의 범종각과 연이어 만세루가 자리해 있다. 범종각의 오른편에는 서향으로 돌아앉은 극락보전과 이를 마주 보고 있는 약사전이 있으며, 그 사이에 남향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앞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이 외에 영산전 뒤로 응향각과 명월료, 통도사 종무소와 금당 · 은당 등의 요사가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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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은 보통 석가모니부처님의 불상을 보시고 있는 가장 큰 법당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대웅전 내부의 큰 창을 통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을 향해 예경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불상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다면, 상징물인 불상은 필요가 없다. 또한 통도사는 창건 당시부터 사리탑을 참배하는 용도로 사리전을 조성했고, 이 사리전이 훗날의 대웅전이 된다. 따라서 사리를 참배하는 장소로서는 대웅전이 존재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제자들은 부처님을 떠올릴 수 있는 상징물에 대한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에 직접 뵙거나 법문을 들으면 됐으므로 상징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반하신 이후에는 잔존 유해인 영골사리에 부목한다. 오늘날에는 사리를 생각할 때 오색영롱한 구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당신에는 화장한 이후에  남은 육신의 잔해 전체를 사리라고 칭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당시의 화장법에 의해 법구를 다비했고 이때의 영골을 수습하여 근본 8탑을 건립한다. 사리가 모셔진 탑은 곧 부처님을 상징하므로 매우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훗날 사리를 봉안한 불탑이 성행하게 되었다. 사리를 봉안한 불탑은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그 영향력과 상징성을 그대로 이어 간다. 신라에서도 사리는 막강한 상징성을 지닌 성물로 인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는 549년 중국의 육조시대, 남조의 양나라에서 진흥왕에게 보내온 사리"라고 전한다. 자장 스님이 사리를 모셔 오기 이전에도 다수의 사리가 전래되어 국내로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사리의 수는 유한하지만 부처님을 상징하는 최고의 상징물로써 불법의 전파와 함께 부처님의 사리가 전해진 것이다.

대웅전 내부 불단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자장 스님만큼 사리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은 없다. 현대 5대 보궁으로 전해지는 통도사 · 오대산중대 · 정암사 ·법흥사 · 봉정암이 모두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 온 사리에 입각한 보궁임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 이외에도 적멸보궁을 표방하는 강원도 고성 건봉사와 속리산 법주사 역시 통도사의 사리가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손괴되는 것을 우려해 이운되는 과정에서 남긴 사리들에 의한 사찰이니, 이들 보궁 역시 근원을 따지면 모두 자장 스님과 통도사로 소급된다. 이 외에 북한의 묘향산 보현사도 불사리로 유명한데, 이 사리 역시 사명대사에 의해 이운된 통도사의 사리가 서산대사에게 보관되는 과정에서 일부가 남게 된 것으로 역시 통도사로 귀속될 수 있다. 즉 현존하는 적멸보궁과 관련해서는 자장 스님과 통도사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사리의 영험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1378년 음력 8~9월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 과정에서 통도사의 사리가 탈취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주지 월송 스님이 사리를 수도인 개경으로 이운한다. 이때 월송 스님이 모신 사리는 정골사리 1과 · 사리  4과와 여기에 비라금점가사 1령이 더 있었다. 월송 스님이 먼저 찾은 곳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득분의 집이었는데, 이때 병환 중이던 이득분은 사리를 친견하고 병이 씻은 듯 낫게 된다. 이후 사리는 개경 송림사에 봉안되는데,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귀족들이 구름같이 운집해서 사리가 분신하기를 기원한다. 그 결과 이득분 3과 · 영창군 왕유 3과 · 시중 윤항 15과 · 회성군의 부인 조씨 30과 · 천마산의 승려들 3과 · 성거산의 승려들 4과 · 황회성 1과 등 59과의 분신사리가 나타나는 이적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우왕禑王의 명으로 1379년 음력 5월에 이색이 그 전말을 글로 남기게 된다. 이는 고려 말 사리 이적으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아래는 목은 이색이 쓴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의 전문이다.

 

     홍무洪武 12년(1379) 기미년 가을 8월 24일, 남산종 통도사 주지, 원통무애변지대사 사문 신 월송이 그 절에서 대대로 소장해 오던, 자장율사가 중국에 들어가서 구해 온 석가여래 정수리뼈 1매, 사리 4과, 비라금점가사 1벌 보리수 잎에 쓴 불경 약간을 받들고 서울로 가서 문화평리 이득분을 찾아뵙고 말하였다.

 

     "저는 을묘년(1375)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이 절의 주지를 맡고 있었습니다. 정사년(1377) 4월에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그 목적은 사리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숨겼으나 그래도 적들이 파서 가져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등에 지고 도망했습니다. 올해 윤5월 5일에 왜적이 또 쳐들어왔기에 또 등에 지고 절 뒤의 산등성이로 올라가서 개암나부로 가려진 덤불 사이에 숨었습니다. 적이 '주지는 어디 있는? 사리는 어디 있는가?라고 하며 절의 하인을 잡아다 볼기를 치며 다급하게 추궁하였습니다. 마침 하늘이 깜깜해지면서 비도 그치지 않고 내려서 쫓아오는 자가 없기에 양산을 넘어 언양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날 절의 하인이 내 말을 가지고 왔기에 만나서 서로 붙잡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절로 돌아가려고 해도 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마침 주지도 새로 오기로 되어 있어서 봉안할 만한 곳이 없어서 그대로 받들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때 이공은 몸이 좀 좋지 않아서 손님을 사절하고 있다가 사리가 왔다는 말을 듣자 벌떡 일어나 "사리가 우리 집에 왔단 말인가."라면서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아프던 몸이 다 회복되었다. 그리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아뢰려고 하는데 장씨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찬성사 목인길 사의 홍영통이 임금 앞에 아뢰었다. 태후와 근비가 다 지극한 공경으로 예를 올렸고, 태후는 은그릇과 보주를 내리는 한편 내시인 참관 박을생에게 명하여 송림사에 사리를 봉안하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이 절을 이공이 중수하여 낙성 법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안의 단월들이 귀천과 지우를 막론하고 파도처럼 몰려와 사리에 기도하고 나누어 가졌으니, 이공은 3매를 가졌고 영창군 유는 3매를 가졌고 윤시중은 15매를 가졌으며 회성군 황상의 부인 조씨는 30여 매를 가졌고 천마산의 여러 납자들은 3매를 가졌으며 성거산 여러 납자들은 4매를 갖고 황회성의 부보가 1매를 가졌다. 이때 월송은 마침 밖에 나가 있었기에 단원들이 몰려와 사리를 구걸하고 떠난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해 6월 19일 이공이 신 이색을 찾아와서 말하였다. "과거 강남의 감옥에 있었을 때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 살아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으로 우리나라의 명산을 친히 예배하고 다녔는데, 그때 통도사도 실로 나의 눈에 들어 있었습니다. 돌아오고 나서 현릉께서 특별히 향을 내리셔서 제가 직접 각처를 찾아다니며 예를 행하였습니다. 통도사에 이르러 사리를 구해서 6매를 얻었으니 내가 사리에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리가 통도사에 있게 된 것은 신라 선덕대왕때부터인데, 우리 고려국에 들어와서도 오백 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사리가 송경에 이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새로 이엄하신 초기, 신하들의 관직이 정비된 이때에 월송 스님이 사리를 받들고 이르렀으니, 이 일은 분명 우연이 아닙니다. 제가 임금께 아뢰었더니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문 신하 이색에게 글을 쓰게 하여라'라고 하셨기에 제가 이렇게 왔습니다." 그래서 신 이색은 월송 스님에게 그 일을 확인하고 나서 이공의 말에 따라 글을 쓰고 그 제목을  <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라고 하였다.

 

  사리는 불교에서 최고의 신성한 성물이다. 이 때문에 사리가 모셔진 보궁에는 새가 앉지 못하고, 그 위를 날아서 가로지르지 못하는 등 다양한 이적이 발생하게 된다. 사리에서 성스럽게 강력한 에너지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 동물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대웅전 금강계단에는 <불탑게>라 하여 주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적혀 있다.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든 것이 몇 해인던가.

문수보살이 성보를 모시고서 때를 기다렸다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이제 여기 있으니,

널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함을 쉬지 않게 하는구나.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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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는 2018년 '산사, 헌국의 산지승원'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1,400년 가까운 오랜 역사 동안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와 문화를 인정받은 것이다.

통도사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와 창건했으며, 계율정신 선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게 건립되었다. 또한 창건 이래 단 한 번도 폐사된 적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면면히 이어 왔다. 이로써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보종찰이자 한국불교의 근본을 잇는 불지종가이며 세계가 인정한 세계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닌 통도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 최상의 사찰임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자장 스님은 왜 통도사를 창건하셨을까?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에는 문수보살이 "신라는 산천이 험난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성품이 거칠고 드세다. 이 때문에 삿된 견해를 많이 믿는다."라고 전하며 당시 불교 전래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삼산三山 · 오악五嶽과 같은 산악숭배의 양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삿된 견해를 물리치는 것은 정견, 즉 바른 견해다. 백성들이 삿된 견해에 휩싸여 있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통해 정견을 갖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었던 것이다.

 

  자장 스님은 638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당의 2대 황제인 당태종을 친견하고 639~641년 3년간 장안 남쪽의 종남산 운제사 동쪽에서 깊은 선정과 계율을 수행했다. 이후 스님은 산서성 오대산으로 문수보살 친견을 위한 성지순례 길에 오른다. 오대산에 이르러 동대에 올랐다 북대로 가는데, 이곳에서 제석천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문수보살이 나타나 수기를 주면서 「화엄경」의 범어 게송을 가르쳐 주는 이적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다음 날 문수보살의 화신을 직접 친견하고 부처님의 가사와 정골(두개골)사리, 지골(손가락뼈)사리와 육신사리 100과 등의 성물을 받아 신라에 모실 것을 부촉받는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문수보살이 부촉하는 내용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문수보살이 자장 스님에게 말하였다.)

"이 성물들은 본사이신 석가여래께서 직접

착용하시던 가사와 진신사리 및

부처님 정골사리 등 부처님의 유물입니다.

당신은 말세에 계율을 잘 갖춘 승려이므로

내가 이 성물들을 부촉하는 것이니,

당신께서는 잘 받들어 지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본국인 신라의 경계 남쪽에

축서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신령한 연못이 있습니다.

그곳은 독룡이 머무는 곳입니다.

용은 언제나 악독한 마음을 가져

폭퐁우를 일으켜 곡식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 인민을 곤궁하게 합니다.

당신은 저 용이 사는 못에 계단을 축조하여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십시오.

그러면 물 · 불 · 바람의 삼재가 침노하지 못하여

영원토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상주하는 장소가 되며,

천룡팔부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

긴나라 ·마후라가)가

떠나지 않고 옹호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1642년

 

 

  신라로 돌아온 자장 스님은 황룡사구층목탑의 정상인 상륜부와 맨 아래의 주심초석에 문수보살께 받은 사리를 봉안한다. 이는 부처님의 위신력이 탑 전체를 휘감아 뻗쳐서 신라의 국운이 융성하기를 염원한 것이다. 또 목탑이 완성된 직후인 646년 하반기에 자장 스님은 다시금 언양 축서산(현 양산 영축산)에 계단을 설치한 사찰(계단사찰)인 통도사를 개창하고, 전골사리와 치아사리 및 지골사리와 부처님의 가사를 봉안한다. 부처님의 성물을 모심으로써 출가하는 승려들 모두가 견고한 수행자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계단을 통한 득도와 계율이 안정되지 않으면 수행자 집단인 승단은 개별성으로 흐르기 쉽다. 이런 경우 당시 위기의 신라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이것은 곧 모든 백성의 고통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의 해결이 부처님 사리 중에서도 정수인 정골사리를 모시고 또 이와 함께 의발衣鉢의 상전相傳이라는 상징성을 가지는 가사를 배치하여 수계 득도를 통한 신라 불교의 단속과 도약이었다. 즉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마하가섭을 통해 미래불인 미륵에게 금란가사를 전달하는 것처럼, 통도사를 통한 수계는 새롭게 출가하는 승려들에게 부처님의 출가 정신이 온전히 전달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통도사의 계단 건립은 황룡사구층목탑이 완공되는 646년 이루어진다. 이는 수도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구층목탑을 통해 불력을 과시하고 국론을 통합한 직후에 통도사 창건을 통해 승단의 안정과 정비를 시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라의 귀족과 백성에게는 거대하고 장엄한 구층목탑을, 그리고 승려들에게는 부처님과 직결되는 경건함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속고승전」에는 자장 스님의 교화로 인해 당시 신라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 집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도선스님의 사제인 도세스님의 「법원주림」 <당사문석자장>에는 "신라의 불교에 갖추어진 법식과 승려의 위의 등이 모두 당나라와 대등해졌다."라고 적혀 있다.

 

  즉 신라불교의 미비로 인해 자장 스님이 귀국할 때 대장경과 장엄물을 가져온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구층목탑과 계단 건립을 통한 교화가 단기간에 신라불교를 일신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도선 스님은 「속고승전」 <자장전>에서 자장 스님을 '호법보살'이라고까지 극찬했던 것이다.

 

  열에 아홉 집이 불교를 믿는 상황에서 불교의 안정은 신라가 융성하는 토대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신라 부흥의 초석은 이때 자장 스님에 의해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물이 이후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무왕 법민에 의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위대한 결실로 완료된다. 자장 스님의 불교 진흥과 승단 정비의 최대 수혜자는 중대 신라를 열어젖힌 김춘추였다.

 

  통도사 창건은 사찰의 건립이라는 목적 이상을 의미한다. 창건 역사를 짚어 보기 위해서는 당대 신라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불교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곧 신라의 융성이라는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불교 교단의 확립이라는 통도사의 창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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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는 브랜드의 헤리티지에 자연과 환경을 레이어링해가고 있다. 나일론 백을 명품 백으로, 스포츠를 하이패션으로 신분 상승시킨 미니멀리즘의 혁신가, 그리고 지금은 지속 가능한 지구의 미래를 위한 미니멀리스트로 진화해가고 있다.

프라다의 DNA 나일론을 에코닐로

미우치아 프라다는 1984년 처음 나일론 소재 액세서리를 선보였다. 1980년대는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였고, 모든 럭셔리 브랜드들은 최고급 소재를 추구했다. 이런 물질주의적 시대에 프라다는 대담하게 대중적인 나일론 소재에 브랜드 로고를 붙이는 모험에 도전했다. 기존의 럭셔리 패션 하우스들은 하이패션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며 이런 대범한 행보에 반발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가죽 백에 비해 가볍고 편하며 오염에 강하고 관리가 쉬운 프라다의 나일론 백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프라다 나일론 백은 가장 놀라운 대반전의 패션 역사 중 하나로 기록됐다.

나일론은 오늘날의 프라다를 이룬 브랜드 헤리티지이자 핵심적인 DNA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이란 지구와 인류의 생존 과제 앞에서, 가장 먼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브랜드의 DNA이기도 했다. 이를 대체할 소재와 생산 과정을 계속 탐색할 것이라 약속했고, 그 약속의 결과는 ‘프라다 리나일론(Re-Nylon)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프라다는 합성 섬유 제조 분야에서 반세기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이탈리아 섬유 원사 생산업체 아쿠아필(Aquafil)과 파트너십을 맺었고, 무한정 재활용할 수 있는 재생 나일론 원사 에코닐(ECONYL®)을 탄생시켰다.

프라다 홈페이지


에코닐은 전 세계 쓰레기 매립지와 바다에서 수거한 플라스틱 등을 재활용하여 만들어진다. 어망, 버려진 나일론, 카펫, 산업 폐기물 등을 분류하고 청소하여 회수된 나일론의 양을 최대화한다. 이 나일론 폐기물을 원래 순도로 재생시킨 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와 이탈리아 아르코에 있는 생산 공장에서 새로운 공정을 거쳐 재생 나일론 원사로 재변환된다. 

 

생산되는 에코닐 10,000톤당 70,000 배럴의 석유가 절감되며, 65,100 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절감되고, 석유 연료로 생산한 나일론이 지구 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을 90% 절감한다. 프라다는 2021년 말까지 리나일론 소재로의 전화 과정을 거쳤고, 2023년 7월부터 프라다 리나일론 수익금의 1%는 ‘시 비욘드(Sea Beyond) 프로젝트’에 사용된다. 

 

2020년에 시작된 첫 번째 ‘시 비욘드(Sea Beyond) 프로젝트’는 전 세계 중학교와 연계하여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환경오염 문제, 바다의 이익을 위한 지속 가능한 생산 과정에 대한 패션 산업의 기여라는 주제를 탐구했다. 2021년엔 프라다 그룹과 유네스코 IOC(정부간해양학위원회: Intergovernmental Oceanographic Commission)가 함께 해양 보존 인식을 높이기 위한 고등학생들의 제안 중에서 우승 캠페인을 선발했다.

럭셔리 브랜드 최초 재활용 골드 파인 주얼리, 프라다 이터널 골드

프라다가 책임의식을 가진 건, 나일론과 함께 골드였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에서 최초로 인증받은 100% 리사이클드 골드를 사용한 파인 주얼리 컬렉션 ‘프라다 이터널 골드(Eternal Gold)’를 탄생시켰다. 프라다 그룹은 고급 소재 및 다이아몬드 공급망의 주요 관계자들과 협력하여, 파인 주얼리 업계의 지속 가능한 제조 과정에 대한 개선을 이끌어냈다. 프라다의 파인 주얼리에 사용된 골드 전부는 인증받은 재생 골드로 주얼리 산업 관행 책임위원회(Responsible Jewellery Council)의 관리 체계 표준을 충족한다.

주얼리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스크랩 폐기물, 폐기된 전자 기기에서 복원한 골드 등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은 골드 채굴을 줄여 환경뿐 아니라 인권 보호에도 도움을 준다. 프라다는 인권, 노동 안전, 환경 보전, 비즈니스 윤리와 관련해 최고 수준의 산업 기준을 충족하는 고급 메탈 및 스톤 공급업체와만 협력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프라다 이터널 골드’ 컬렉션은 ‘힘, 존재, 열정’이란 테마 아래 스네이크 팔찌, 하트 모티브, 체인 목걸이, 리본 초커 등으로 디자인됐다. 또한 프라다의 아이코닉 트라이앵글을 모든 아이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라다의 트라이앵글은 잠금쇠 여밈, 귀걸이, 펜던트에 담겼으며, 트라이앵글의 각도를 통해 체인 링크와 스네이크 팔찌의 머리 부분에 놓은 하트 형태를 완성한다.

 

자원 낭비와 오염의 최소화를 위한 미니멀리즘

프라다의 노력은 환경보호의 선순환에도 적극적이며 높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프라다가 전 세계적으로 조달하는 전기의 53%가 재생 가능 에너지원에서 생산되며, 16%는 자체 태양광 발전소에서 생산된다. 또한 2019년 이후 자체 생산 전력을 52% 증가시켜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있다. 재생 및 인증 종이의 사용이 89%, 직영 매장은 100% LED 조명을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혁명에 가까운 미니멀리즘의 혁신을 일으켰던 프라다. 그 시대에는 과다한 장식과 고급 소재의 사용을 최소화했다면, 이제 프라다의 미니멀리즘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자원의 낭비와 오염을 최소화하는 혁신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다.

 

 

 

 

프라다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미니멀리즘

[Luxury Inside] ESG Story ③ 프라다프라다는 브랜드의 헤리티지에 자연과 환경을 레이어링해가고 있다. 나일론 백을 명품 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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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들어온 불교는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 수용 초기에는 미륵신앙이 성행하고, 삼국시대 말기부터 통일신라 초기에는 화엄사상에 의한 화엄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중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중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신앙이 서민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으며 통일신라 말기에는 지방 호족 세력과 결합한 선종이 고려 초기까지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약사불신앙과 밀교신앙도 함께 유행했다.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로부터 화두話頭를 탐구하는 임제선臨濟禪이 들어왔는데 국가의 지원 아래 다양한 신앙 형태를 받아들인 고려불교는 사원 규모, 승려 수와 경제력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통도사 대웅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내세워 불교를 억압했지만 왕실과 사대부, 일반 서민의 부녀자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다. 그리하여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사찰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 다양한 신앙형태를 포함한 통합불교적인 사원 구조를 가지고 있다.

 

  646년 선덕여왕 15년에 창건된 통도사는 1,4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나면서 꾸준히 사찰 규모를 키워 온 한국불교의 으뜸 사찰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는 불보不寶사찰로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많은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큰 사찰이 되었고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스님과 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오늘날의 통도사를 이룩했다.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규모가 큰 사찰이 많이 사라졌다. 화재가 나거나 허물어지면 중창하는 데 엄청난 불사 비용이 들기에 엄두도 못 내고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실화失火나 전화戰火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는 가운데서도 굳건한 불심으로 가람의 재건을 이루었다.

 

  사찰의 규모는 사찰을 찾는 신도 수에 비례하고 신도는 성스러운 예경물이 있거나 영험 있는 불상이나 고승대덕이 계신 사찰을 찾는다. 오늘날 통도사가 불교의 으뜸 사찰로서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것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고 부처님과 자장율사의 가사를 봉안하고 있으며 많은 대덕스님들이 전통을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통도사' 이름의 유래

  통도사의 사명은 창건 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 유래에 대해사 정확히 명시된 바는 없으나 여러 기록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담율사가 쓴 「통도사사적」에 따르면 대략 아래와 같은 이유로 사명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차산지형 통어인도영축산야 此山之形 通於印度靈築山也

이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는 통도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기에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셨던 인도 영축산과의 관계성을 뜻하는 것이니 통도사는 부처님이 늘 상주하는 설법처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위승자통이도지 爲僧者通以度之

승려가 되려는 자는 이곳에서 득도해야 한다.

금강계단을 통한 수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통도사 창건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는

통만법도중생 通萬法度衆生

만 가지 법을 통달해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 가지 뜻을 종합해 보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통도사는 참다운 승려와 불자를 배출하여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사찰이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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