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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연에선 여러 여성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여성 관객을 중심으로 하는 종전 공연계에서는 자연스레 남성 배우 중심으로 공연을 많이 제작해 왔습니다. 최근 공연계에 일어나는 변화는 여성 서사가 더욱 확장된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무대에서 사랑받는 여성 주인공을 다룬 세 작품을 만나봅니다.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 소송을 다룬 '호프'

뮤지컬 ‘호프’공연 장면. 오른쪽은 원고를 의인화한 캐릭터 ‘K’와 에스더 호프의 극중 캐릭터 '마리'. /알앤디웍스


뮤지컬 '호프'(다음 달 11일까지·서울 종로구 유니플렉스 1관)는 책과 한 여성의 인생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부제는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입니다. 이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두고 에바 호프라는 여성과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 사이에서 실제 열린 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카프카는 '변신' '심판' '성' 등 현대 인간 존재의 불안과 소외, 외로움을 통찰하는 글을 쓴 작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41세라는 이른 나이에 오스트리아 빈 근교 요양소에서 폐결핵을 진단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작품은 카프카의 유작을 맡은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서 시작합니다. 브로트에겐 여비서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뮤지컬 주인공인 에바 호프의 어머니, 에스더 호프입니다. 에스더 호프와 막스 브로트는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자 이스라엘로 도망칩니다. 그들은 보관하고 있던 카프카의 여러 유작을 출판하면서 큰 명성을 얻죠. 자식이 없던 브로트는 죽기 전에 보관하고 있던 카프카의 미발표 유작을 에스더 호프에게 맡기고, 그 원고는 딸 에바 호프에게 전해집니다.

이후 원고의 소유권을 둘러싼 에바 호프와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의 오랜 재판은 결국 '카프카의 유산은 한 개인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읽혀야 한다'는 판결로 이어집니다. 2012년 이후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이 카프카의 원고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2018년 에바 호프는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국내 제작진이 창작한 뮤지컬 '호프'는 서사가 잘 담겨 있는 가사와 조화로운 음악, 그리고 연출력이 돋보이는 무대 전환 등이 완성도를 더했습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끝까지 원고에만 집착한 에바 호프가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자신을 찾아간다는 메시지가 깊은 감동을 줍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고난과 외로움을 이겨내라고 이렇게 다독이지만 "넌 수고했다. 넌 충분하다. 넌 살아냈다. 늦지 않았다."

19세기 야한 상상하는 여성 이야기 '레드북'

뮤지컬 ‘레드북’ 공연 장면. 아래는 주인공 안나(왼쪽)와 안나의 연인 브라운. /아떼오드


뮤지컬 '레드북'(28일까지·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여성에게 금기시됐던 '야한 소설'을 쓰는 안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여왕이 대영제국을 통치하던 시대였지만, 여성의 지위는 가부장제가 엄격한 조선 시대만큼이나 열악했습니다.

그 시대 영국에서 여성은 '집 안의 천사'라 불렸는데, 정숙한 아내와 현명한 어머니를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현모양처'쯤 됩니다. 남성이 바라보는 이상적인 여성상이자, 자신을 희생하고 가정을 가꾸는 여성을 숭고하게 부르는 이름이었지만 여성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 당시 많은 여성은 '집 안의 천사'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유산을 받을 수 없고 자신의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금지됐던 이때, 안나는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고 "나는 야한 여자야!"라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그는 당당히 실명으로 '19금(禁)' 소설을 출간합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지만, 출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안나는 고소까지 당합니다. 그러나 안나는 결코 자신이 '미쳐서' 한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세상에 외칩니다.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영국이지만 여성 인권 신장과 사회 참여라는 보편적 주제는 한국 관객들에게도 큰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는 솔직하고 명랑한 '안나'라는 캐릭터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창작한 이 작품은 2017년 트라이아웃(시범 공연) 한국뮤지컬 대상, 차범석 희곡상 등을 받으며 세 번째 공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음악이 주목할 만한데요, '사랑은 마치'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등 세련되고 안정적인 멜로디의 곡들은 유튜브 조회 200만 회를 넘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공연과 별도로 '뮤지컬 넘버 감상회'가 열렸을 정도입니다.

나혜석의 인생 다룬 음악극 '소녀의 꿈'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왼쪽)과 나혜석(오른쪽 위). 오른쪽 아래는 음악극‘소녀의 꿈’포스터. /위키피디아·금나래아트홀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러 단편 소설과 시를 발표한 작가 나혜석은 1900년대 초반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자각하자고 큰 소리로 외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여성들이 교육받기도 어려웠던 시대에 동경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거침없이 자유연애를 했으며, 결혼 후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이혼까지 이르죠.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많은 책과 공연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음악극 '소녀의 꿈'(지난달 26일·서울 금천구 금나래아트홀)은 가수 하림이 스토리텔러로 등장해 연주자들과 함께 나혜석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색다른 형식의 공연입니다. '신접살림 풍경' '사의 찬미' 등 음악을 배경으로 그가 남긴 저서 '이상적 부인' '이혼 고백서' '못된 감상기' 등의 주요 구절을 읊으면서 관객들에게 나혜석의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왜 '현모양처라는 말만 있고 현부양부는 없을까'라는 나혜석의 질문은 지금도 되새김해 볼 만합니다.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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