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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들어온 불교는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 수용 초기에는 미륵신앙이 성행하고, 삼국시대 말기부터 통일신라 초기에는 화엄사상에 의한 화엄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중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중기에는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세음보살신앙이 서민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으며 통일신라 말기에는 지방 호족 세력과 결합한 선종이 고려 초기까지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약사불신앙과 밀교신앙도 함께 유행했다.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로부터 화두話頭를 탐구하는 임제선臨濟禪이 들어왔는데 국가의 지원 아래 다양한 신앙 형태를 받아들인 고려불교는 사원 규모, 승려 수와 경제력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통도사 대웅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내세워 불교를 억압했지만 왕실과 사대부, 일반 서민의 부녀자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앙했다. 그리하여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사찰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 다양한 신앙형태를 포함한 통합불교적인 사원 구조를 가지고 있다.

 

  646년 선덕여왕 15년에 창건된 통도사는 1,4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나면서 꾸준히 사찰 규모를 키워 온 한국불교의 으뜸 사찰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는 불보不寶사찰로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많은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큰 사찰이 되었고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도 스님과 신도들이 마음을 모아 오늘날의 통도사를 이룩했다.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규모가 큰 사찰이 많이 사라졌다. 화재가 나거나 허물어지면 중창하는 데 엄청난 불사 비용이 들기에 엄두도 못 내고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실화失火나 전화戰火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는 가운데서도 굳건한 불심으로 가람의 재건을 이루었다.

 

  사찰의 규모는 사찰을 찾는 신도 수에 비례하고 신도는 성스러운 예경물이 있거나 영험 있는 불상이나 고승대덕이 계신 사찰을 찾는다. 오늘날 통도사가 불교의 으뜸 사찰로서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것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고 부처님과 자장율사의 가사를 봉안하고 있으며 많은 대덕스님들이 전통을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통도사' 이름의 유래

  통도사의 사명은 창건 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그 유래에 대해사 정확히 명시된 바는 없으나 여러 기록을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담율사가 쓴 「통도사사적」에 따르면 대략 아래와 같은 이유로 사명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차산지형 통어인도영축산야 此山之形 通於印度靈築山也

이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는 통도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기에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셨던 인도 영축산과의 관계성을 뜻하는 것이니 통도사는 부처님이 늘 상주하는 설법처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위승자통이도지 爲僧者通以度之

승려가 되려는 자는 이곳에서 득도해야 한다.

금강계단을 통한 수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통도사 창건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는

통만법도중생 通萬法度衆生

만 가지 법을 통달해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 가지 뜻을 종합해 보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통도사는 참다운 승려와 불자를 배출하여 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사찰이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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