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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聖人은 군주여야만 한다. 적어도 옛 중국에서는 그랬다. 적어도 옛 중국에서는 그랬다. 성인 아닌 군주는 있을 수 있지만, 군주가 아닌 성인을 있을 수 없다. 이런 논리를 성인군주론(聖人君主論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를 잘 몰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은 모두 '성인군주'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성인이지만 군주는 아니었다. 모순이다. 이런 모순은 당나라 현종 대(739년)에 이르러 해결된다. 공자에게 문선왕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와 안착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가 중국문화와 '동화'되었다는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부처님이 성인인 동시에 태자였다는 사실 이 불교의 중국 '동화'에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사찰의 기와와 단청

황제의 대우를 받은 부처님

  명 · 청대의 황궁인 자금성 지붕에는 황색 기와가 빼곡하다. 그런데 이 황색 기와는 중국의 유서 깊은 대찰들에서도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 황색은 황제만 사용하는 색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중국의 군주인 황제와 동급인 셈이다.
 
  이는 불상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동남아시아나 티베트 등에서도 불상은 금으로 개금 한다. 황금색 불상의 기원은 불교가 발생한 인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중국에서 부처님이 성인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황금색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태상노군으로도 불리는 노자의 상이 금으로 개금 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부처님이 계신 곳을 대웅전이라 하고 부처님의 사리를 보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하는데 각각 상ㅇ된 '전殿'이라는 글자와 '궁宮'이라는 글자만 봐도 부처님은 군왕급 예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민가에는 99칸 이상의 건물 증축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사찰에서는 가능했던 것, 그리고 단청을 했던 것을 통해서도 부처님은 성인과 군왕의 예우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99칸의 제한을 받지 않았던 사찰 건축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국왕은 국사國師나 왕사往師에게 절을 했다. 부처님이 왕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초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왕사에 책봉하고 절을 올린 이후, 이런 예는 다시 발견할 수 없다. 불교의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처님이 성이라는 위상은 유지되고 있었다. 사찰은 여전히 99칸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궁궐 건축에만 할 수 있었던 단청도 허용되었다.
 
  사찰에는 민가에 적용되는 99칸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민가에 비해 사찰이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가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단청이 사찰이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가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단청이 사찰에는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우유억불기에도 사찰은 양반가의 건축과는 비교될 수 없는 위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성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동아시아 문화의 특수성이 반영된 측면이다. 만일 이와 같은 배경 문화가 없었다면, 조선의 사찰들은 훨씬 더 위축되고 열악한 환경에 내몰렸을 것이다.
 

단청은 왕궁과 사찰에만 할 수 있었다

  단청丹靑이란 '빨갗고 파랗다.'는 뜻이다. 울긋불긋하다는 의미다. 사찰 건물에 칠해진 색을 보면 붉은색과 푸른색이 가장 도드라진다. 눈에 보이는 포인트를 잡은, 참 소박한 명칭이다. 그런데 언뜻 봐도 이 단청이 모두 같은 게 아니다. 나름의 위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단청 중 가장 단순한 형태는 가칠단청이다. 가칠단청에서 가칠이란 겉면을 덧칠했다는 의미로 세로기둥은 검붉은 색, 가로기둥은 녹색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 향교과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보다 한 급 높은 것이 긋기단청이다. 굿기단청은 세로 붉은 기둥은 놔두고 가로의 녹색 바탕에 단순한 선을 긋고 깔끔하게 장식하는 정도의 단청을 의미한다. 좀 더 위계가 높은 향교나 서원 등에 주로 사용된다. 또 향교나 서원 중에서도 특별히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는 긋기단청의 가로 부재 두 끝을 모로 단청이라는 화려한 함을 가미해서 완성하기도 한다.
 
  모로단청에서 모로는 머리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모로단청을 머리단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끝에만 단청을 하기 때문이다. 긋기단청에 모로단청을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조선의 왕궁이다. 그런데 단청에는 모로단청보다도 휠씬 더 화려한 금단청이라는 것이 있다. 금단청은 양 머리의 모로단청 사이를 화려한 비단자수를 놓듯이 빼곡하게 채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단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단청은 조선 시대에는 유일하게 사찰에서만 사용되었다. 조선의 임금이 넘볼 수 없는 위엄이 조선의 사찰에 있었던 것이다.
  
  금단청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조선의 임금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황색 의복 사용이다. 황색은 천자의 색으로 제후는 고사하고 황제의 동생조차도 사용할 수 없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임금은 붉은색의 제후복을 입게 된다. 물론 조선에서도 고종과 같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건원칭제한 경우는황색 복장을 사용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임금 중에는 유일하게 고종과 순종만이 부처님과의 차이를 좁힌 인물이라고 하겠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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