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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범어로 수투파(Stūpa)을 뜻하며 saṃdarśana는 바라보는 행동 혹은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한역에서 ‘견보탑품’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견보탑품에서는 부처님 앞 땅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칠보탑이 솟아나 ‘세존께서 법화경 설법하시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 말한다. 모인 대중들은 이 신비로운 일에 놀라움과 찬탄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이때 대요설이란 보살이 세존께 대중들을 대신해서 그 이유에 대해 질문을 한다.

견보탑품도 부분 (다보여래와 석가여래).

부처님 앞에 솟아난 칠보탑

이 탑은 옛날 동방으로 무량 아승지 세계를 지나 보정(寶淨)이란 나라에 다보불(多寶佛) 계셨는데 큰 원력을 세우되 자신이 멸도한 이후 어디든지 법화경 설하는 곳이 있으면 자신의 탑이 경전을 듣기 위해 그 앞에 솟아나 증명하고 찬탄하리라는 서원을 세웠다. 세존께서는 그 대의 원력으로 이 탑이 지금 나타난 것이라 말씀하신다. 대요설이 다보불을 친견하고 싶다고 하자 세존께서는 시방세계에 흩어져 법을 설하는 자신의 모든 분신이 모여야 비로소 다보불을 친견할 수 있다하시며 세존의 분신을 왕사성 기사굴산에 모이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그때 부처님의 미간 백호상에서 한 줄기 광명을 놓으시니, 동방에 있는 무수한 국토의 부처님 설법하시는 모습이 보이며, 무수한 보살들이 중생을 교화하시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사바세계는 그대로 청정한 국토로 바뀌게 된다. 그때 부처님의 모든 분신이 사바세계 기사굴산에 모이신다. 비로소 석존은 손가락으로 다보탑을 열고 다보불은 그 속에서 깊은 선정에 들어 계시다가 석존의 법화경 설법을 증명하시며 자리를 반반으로 나누어 앉으신다. 그리고 두 분이 동시에 진리를 펼치신다는 내용이다.

통도사 영산전 <견보탑품변상도>

통도사 영산전 내부의 벽화 가운데 불상의 반대쪽 서벽에는 현존 국내 유일한 벽화인 <견보탑품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예배자의 위치에서 사리탑을 향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그려져 있으며 《법화경》의 내용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높이 540cm, 폭 220cm 크기의 <견보탑품변상도>는 영산전 내부 벽화 중 가장 크고 화려하여 다른 사찰의 영산전과 구별되는 통도사 영산전의 대표적 벽화이다. 이 벽화는 석가모니가 기사굴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화려하게 장식된 칠보탑이 솟아오르고 다보불이 석가모니불을 맞이하자 보살·천인 ·천룡팔부 등 참석한 대중들이 칠보탑에 공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벽면 중앙에 두 부처님이 나란히 앉은 웅장한 탑을 배치하고 탑 좌우에 보살과 제자 각 2위를 대칭적으로 그려 안정감이 있다. 화면 상부에는 화려한 채운과 탑을 장식한 각자 보령寶鈴과 영락瓔珞이 군청색의 바탕과 대비를 이루며 중앙의 탑을 부각시키고 있다. 9층 탑신에서 확산되는 나선형의 선은 '칠보탑이 솟아오르자 사방에 전단향이 가득하였다.'는 경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부의 전단향이 번지는 모습과 탑 주위의 합장한 보살·성중들이 표현은 탑 속에서 나오는 다보불의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공경한다는 <견보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내용 전체를 한 화면에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법화경》의 내용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인 칠보탑이 솟아오르고 다보불이 증명을 하는 <견보탑품변상도>는 국내에서 사경화나 영산회상도를 제외하고는 벽화나 탱화로 조성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

 

우리나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서 유래

석가탑은 국보 제21호이며, 본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다.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본래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의 내용으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하자 과거불인 다보불이 그 설법을 증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석가탑 아래에는 사방에 여덟 개의 연화좌가 있는데 이것도 견보탑품에 석존이 자신의 분신을 팔방에 앉게 한다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용산의 국립박물관 중앙에 있는 경천사 석탑과 종로에 있는 국보 2호인 원각사 석탑에도 견보탑품에 나오는 칠보탑이 허공에 솟는 장면과 두 분의 부처님이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는 이불병좌상(二佛坐像)이 있다. 앞의 장면은 법화회상도라 하며, 후자는 다보회상도라 한다. 이렇듯 견보탑품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가탑은 다보탑과 함께 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건립했다. 1966년 석가탑 해체 때 사리공에서 나온 중수기에 따르면, 석가탑은 고려 현종 15년(1024)과 정종 2년(1036), 정종 4년(1038)에 각각 대규모 지진 피해를 봤다. 이때 석탑 상당 부분이 무너졌고 현재 보는 석가탑은 복원 과정을 거친 것이다. 조선 선조 20년(1596)에는 우레에 상륜부가 파괴되었고, 400년 가까이 지난 후인 1970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을 모델로 복원한 것이다. 1966년 석가탑 도굴 미수사건으로 탑이 훼손되어, 부분 보수할 때 당시 사리공에서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석가탑 중수기’가 발견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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