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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는 2018년 '산사, 헌국의 산지승원'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1,400년 가까운 오랜 역사 동안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와 문화를 인정받은 것이다.

통도사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와 창건했으며, 계율정신 선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게 건립되었다. 또한 창건 이래 단 한 번도 폐사된 적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면면히 이어 왔다. 이로써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보종찰이자 한국불교의 근본을 잇는 불지종가이며 세계가 인정한 세계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닌 통도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 최상의 사찰임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자장 스님은 왜 통도사를 창건하셨을까?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에는 문수보살이 "신라는 산천이 험난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성품이 거칠고 드세다. 이 때문에 삿된 견해를 많이 믿는다."라고 전하며 당시 불교 전래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삼산三山 · 오악五嶽과 같은 산악숭배의 양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삿된 견해를 물리치는 것은 정견, 즉 바른 견해다. 백성들이 삿된 견해에 휩싸여 있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통해 정견을 갖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었던 것이다.

 

  자장 스님은 638년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당의 2대 황제인 당태종을 친견하고 639~641년 3년간 장안 남쪽의 종남산 운제사 동쪽에서 깊은 선정과 계율을 수행했다. 이후 스님은 산서성 오대산으로 문수보살 친견을 위한 성지순례 길에 오른다. 오대산에 이르러 동대에 올랐다 북대로 가는데, 이곳에서 제석천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문수보살이 나타나 수기를 주면서 「화엄경」의 범어 게송을 가르쳐 주는 이적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다음 날 문수보살의 화신을 직접 친견하고 부처님의 가사와 정골(두개골)사리, 지골(손가락뼈)사리와 육신사리 100과 등의 성물을 받아 신라에 모실 것을 부촉받는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는 문수보살이 부촉하는 내용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문수보살이 자장 스님에게 말하였다.)

"이 성물들은 본사이신 석가여래께서 직접

착용하시던 가사와 진신사리 및

부처님 정골사리 등 부처님의 유물입니다.

당신은 말세에 계율을 잘 갖춘 승려이므로

내가 이 성물들을 부촉하는 것이니,

당신께서는 잘 받들어 지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본국인 신라의 경계 남쪽에

축서산이 있는데,

그 아래에 신령한 연못이 있습니다.

그곳은 독룡이 머무는 곳입니다.

용은 언제나 악독한 마음을 가져

폭퐁우를 일으켜 곡식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 인민을 곤궁하게 합니다.

당신은 저 용이 사는 못에 계단을 축조하여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십시오.

그러면 물 · 불 · 바람의 삼재가 침노하지 못하여

영원토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상주하는 장소가 되며,

천룡팔부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

긴나라 ·마후라가)가

떠나지 않고 옹호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1642년

 

 

  신라로 돌아온 자장 스님은 황룡사구층목탑의 정상인 상륜부와 맨 아래의 주심초석에 문수보살께 받은 사리를 봉안한다. 이는 부처님의 위신력이 탑 전체를 휘감아 뻗쳐서 신라의 국운이 융성하기를 염원한 것이다. 또 목탑이 완성된 직후인 646년 하반기에 자장 스님은 다시금 언양 축서산(현 양산 영축산)에 계단을 설치한 사찰(계단사찰)인 통도사를 개창하고, 전골사리와 치아사리 및 지골사리와 부처님의 가사를 봉안한다. 부처님의 성물을 모심으로써 출가하는 승려들 모두가 견고한 수행자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계단을 통한 득도와 계율이 안정되지 않으면 수행자 집단인 승단은 개별성으로 흐르기 쉽다. 이런 경우 당시 위기의 신라는 더욱 위태로워지고 이것은 곧 모든 백성의 고통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의 해결이 부처님 사리 중에서도 정수인 정골사리를 모시고 또 이와 함께 의발衣鉢의 상전相傳이라는 상징성을 가지는 가사를 배치하여 수계 득도를 통한 신라 불교의 단속과 도약이었다. 즉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마하가섭을 통해 미래불인 미륵에게 금란가사를 전달하는 것처럼, 통도사를 통한 수계는 새롭게 출가하는 승려들에게 부처님의 출가 정신이 온전히 전달되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통도사의 계단 건립은 황룡사구층목탑이 완공되는 646년 이루어진다. 이는 수도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는 구층목탑을 통해 불력을 과시하고 국론을 통합한 직후에 통도사 창건을 통해 승단의 안정과 정비를 시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라의 귀족과 백성에게는 거대하고 장엄한 구층목탑을, 그리고 승려들에게는 부처님과 직결되는 경건함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속고승전」에는 자장 스님의 교화로 인해 당시 신라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 집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도선스님의 사제인 도세스님의 「법원주림」 <당사문석자장>에는 "신라의 불교에 갖추어진 법식과 승려의 위의 등이 모두 당나라와 대등해졌다."라고 적혀 있다.

 

  즉 신라불교의 미비로 인해 자장 스님이 귀국할 때 대장경과 장엄물을 가져온 상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구층목탑과 계단 건립을 통한 교화가 단기간에 신라불교를 일신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도선 스님은 「속고승전」 <자장전>에서 자장 스님을 '호법보살'이라고까지 극찬했던 것이다.

 

  열에 아홉 집이 불교를 믿는 상황에서 불교의 안정은 신라가 융성하는 토대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신라 부흥의 초석은 이때 자장 스님에 의해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물이 이후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무왕 법민에 의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위대한 결실로 완료된다. 자장 스님의 불교 진흥과 승단 정비의 최대 수혜자는 중대 신라를 열어젖힌 김춘추였다.

 

  통도사 창건은 사찰의 건립이라는 목적 이상을 의미한다. 창건 역사를 짚어 보기 위해서는 당대 신라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불교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곧 신라의 융성이라는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불교 교단의 확립이라는 통도사의 창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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