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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보살장에서는 수행방편과 어떻게 사유하며 어떻게 편안히 머물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대승을 공부하는 이들은 반드시 관행을 닦아야 하는데, 이해함에 있어서 차별이 있기에 곧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를 위한 가르침이 다르다. 법화경의 "듣기는 널리 들으나 깨닫는 것은 오직 사리불뿐이다."라는 말처럼, 법문을 듣지도 이해함에는 깊고 얕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보안보살의 관행이 부처님과 같음을 열어 보이고, 이어서 금강보살은 미혹과 깨달음의 근본을 묻고 해석하며, 다믕에 미륵보살은 윤회의 근본을 깊이 궁구하며, 계속해서 닦아 증득하는 지위를 간략히 나누는 경문으로 원각경은 전개된다. 관이 이루어져 애욕이 끊어진 경지에 이르는 데는 이른바 닦아 증득함이 원만해야 하는데,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을 닦아 과에 계합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자성이 없는 것을 개시해서 이공, 곧 아공 · 법공의 이치를 드러내 육근 · 육진이 청정하여, 경계를 보아 마음 쓰는 것이 단박에 부처님과 대등해진다는 것이다.


삼혜, 곧 문혜 · 사혜 · 수혜로 설명하는데 있어, 사유는 진망을 관찰하는 것으로써 사혜가 되고, 주지는 미묘한 경계를 깨우쳐 그 속에 안주해서 수지해 잃지 않는 것으로써 수혜가 되며, 다음에 부처님 설법을 듣는 것은 문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범부로부터 성인에 나아가는 것이, 반드시 삼혜를 닦아 이루어지기에 보안보살이 대중을 위해 법을 청한다.

삼매를 듣는다는 것은, 앞의 문수보살에서 환, 곧 허깨비를 안즉 허깨비를 여의는 법문에 이어 미혹하고 번민해서 능히 원각에 깨달아 들지 못할까 걱정되어 깨달음을 여는 방편을 청한 것이다.

이어서 가설방편, 곧 방편을 시설한 것은, 진정한 이치에서 말하면 깨달음의 본성은 원래 원만하고 허깨비의 허망함은 몬래 공해서 없지만, 그 도리를 알지 못하기에 부득이 있다고 말한 것이니, 알고 나면 곧 여의어서 허깨비를 여윈즉 깨달음이요, 실로 닦을 것이 없음이다.

그러나 중생의 번뇌 습기가 무거워 가히 단박에 제거되 어려우며, 비록 본래 공한 줄을 알았으나 아직 묶이어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보안보살이 부처님께 닦음 없는 중에 굳이 수습하는 방편을 설해 주실 것을 청해 방편을 가설한다 한 것이다. 대품경에 수행함에 있어 한결같이 무소득으로써 방편을 삼았지만, 원각경에서는 허깨비를 여의는 것으로써 방편을 삼았다고 설명한다.

정념을 무념이라 해석하는데, 지론에서는 "유념은 마업이요, 무념은 법인 곧 진리"라 했으며, 논에는 "일체중생을 각이 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상속해서 일찍이 망념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문에서의 정념은, 이환 곧 허깨비를 반복해서 여윔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이른다.

사마타는 번역하면 지로서, 지는 곧 정의 뜻이다. 이는 '지극히 고요한 것을 행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어지러운 마음에 계를 지니면 능히 관문에 들지 못하기에, 먼저 정에 들고 뒤에 계를 행한다고 한다. 경문에서는 계로 인해 정에 든다 했는데, 여기서는 먼저 정에 들고 뒤에 계를 행한다 한 것은, 수행에는 선후가 없다 하겠다. 계를 굳게 지닌다는 것은, 한결같이 반연을 끊어 딱히 고의로 범하지 않는 것을 굳게 지니는 것이다. 육근, 곧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를 막고 금하며 몸과 입을 단속한다 해서 금계라고 한다.

대중과 함께 편안히 머물다 한 것은, 곧 함께 보고 행하는 사람으로서 행업이 이미 같게 되어 서로가 탁마해서 한 마음으로 헤아려 도의 인연을 계속해서 맺게 되기에 편안히 머문다고 한다.

연좌정실, 곧 조용한 방에 편안히 앉는다는 것은, 편안함은 고요하고 안온한 것으로서, 앉는 것은 몸을 섭수하는 일이며 몸이 머문 즉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한즉 경계에 흔들림이 없어, 몸과 마음이 고요히 머문다는 뜻이다. 이는 정, 곧 고요한 마음과 지혜를 평등하게 하는 것으로서, 관행을 원만히 통함에 있어 지와 관을 서로 조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좋은 도반을 의지해야만이 혹 함께 보고 행하여, 종일토록 법문을 논의하고 마음을 운용하는데 있어 터럭만큼의 어긋남이 없이 천리 길을 함께 간다 하겠다. 정에 의지하고 계율을 지키며 대중들과 고요히 앉는다는 것은 앞에서 어떻게 머물러 유지하느냐는 주지에 대한 물음에 답한 대목이다.

 

자신의 육신을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 유마경에서는 "사대가 화합한 까닭에 이름을 빌려서 몸이라 한 것이요, 사대가 주체가 없으며 몸도 무아이니, 이 병이 생긴 것이 모두 아를 집착함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써 이미 병의 근원을 앎에 곧 아상과 중생상을 제거하게 된다."고 이른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무아인데, 무아를 관찰함에 대저 마음은 자상이 없어 경계에 의탁하여 바야흐로 일어나지만, 경계의 성품은 본래 공해서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남이요, 육근 육진이 화합해서 대상을 헤아리는 마음으로서, 이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길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마음을 요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을 것이니 진실로 능히 마음을 요달하면 원각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음은 육진을 의탁하고 육진은 사대를 의지하니, 사대는 실체가 없거늘 육진이 공함이요, 이런 까닭에 육진에 인연된 것이 각기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아의 인연을 수습하여 상속하는 모습을 멸 한 것을 열반이라 이름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결정코 실아가 없는 줄 안다는 것이며, 다만 제식이 있어 무시로부터 앞에 없어지고 뒤에 일어나 인과가 상속되어 허망한 훈습으로 아상이 나타난 것을, 어리석은 이는 그 속에 허망하게 집착해서 실체가 있다고 한다. 

경에 "색이 곧 공이요, 색이 멸해서 공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몸과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한 것으로서, 비로소 사라져서 공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공, 곧 아공 · 법공으로 드러낸 원각인 것이다. 앞에서 집착이 다함으로 말미암아 원각이 드러난 것이라 했는데, 마치 구름이 흩어짐에 달이 나온 것과 같아서 구름이 없는 것을 이른바 달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다만 구름이 없는 곳에 달을 볼 뿐이겠다. 허깨비가 없는 것을 곧 진여라 하지 않음이요 다만 허깨비가 없는 곳에 진리를 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원각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고 원명해서 유독 자체가 온전히 참됨이요 닦음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 아니요, 뭇 허깨비가 사라졌으나 자성은 항상 존재함이요, 인연을 빌러 일어난 것이 아니기에 '허깨비 같지 않은 것'이라고 이른다. 또한 제불과 보살은 비록 몸과 마음이 있으나, 허깨비의 공함을 요달함으로 말미암아 비환, 곧 '허개비 같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다. 

거울을 문지르지만 이는 도리어 때를 문대는 것이며, 도를 닦는다고 말한 것은 단지 허망함을 떨치는 것으로서, 대저 거울의 성품은 본래 밝아서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요, 때에 덮여 가려진 것으로 문대서 나타난 것이기에 가려지고 나타남이 비록 다르나 밝은 성품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거울의 비유는, 거울을 문지름으로 인해 나타난 모습은 집착을 파헤쳐 제거한 것에 비유가 되고, 본래 밝은 모습은 마니주의 본래 청정하고 밝아서 시방을 두루 비추는 것에 비유된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그림자와 영상이 사라져 끝없는 청정을 얻게 된 것은, 마침내 허공마저도 원각에서 발현된 것이요, 허공 또한 오직 식으로 나타났기에 수능엄경에 "만약 한 사람이 진제를 일으켜 근원에 돌아가면 시방허공이 일시에 녹아 사라진다."고 이른다. 국토의 맑고 더러움이 모두 각자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중생은 검이 다하면 사라지지만 국토는 편안한 것이요, 마음이 각성에 명 합하고 인식의 작용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서 몸이 의지하는 국토가 진여에 의지하여 더럽고 청정함이 모두 사라지며, 법계에 확 통해서 청정하고 고요한 것이다.

역으로 깨달음이 분명하지 못하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며,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보는 대상이 청정하지 못하며, 보는 대상이 청정하지 못하므로 안근이 청정하지 못하며, 내지 이와 같이 한 세계와 많은 세계가 청정하지 못하다는 원리다.공색무애, 곧 공과 색이 걸림이 없다는 것은 사라져 의지할 것이 없어서 법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으며, 허공은 이미 나고 멸하고 동요함이 없듯이, 제법도 또한 본래 생하거나 멸하지 않아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개달음의 성품이 이미 다해 허공과 같아서 모두가 움직임이 없으므로 곧 깨달음의 성품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파도가 일어나지 않음에 물은 고요해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고 평등한 의미와 같다.

법구경에 "제법이 본래부터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어 옳고 그른 모습이 적멸하며 본래 움직임이 없다."라고 이르고, 법화경에서는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음은 수미산 같아서, 온갖 법이 있다 할 수 없는 것은, 마치 허공과 같음을 살피면 견고함이 없고 생겨남도 아니고 나오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 않고 물러서지 않아 늘한 모습에 머물게 된다."라고 이른다.

증득 가운데는 능히 아는 이와 아는 바가 없고, 증득한 것도 증득한 이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원각의 고요하고 둘이 없는 바탕에 온갖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지 않으며, 가고 오지도 않음이요, 그러므로 깨달아 얻은 경계 또한 참됨을 얻고 망념됨을 잃지 않으며 나고 죽음을 버리고 열반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능히 깨닫는 마음에도 깨달아 얻는다는 분별이 없어지고 그치고 맡기고 소멸하는 네 가지 병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은 실로 깨달아 얻은 바가 있는 깨침이 아니라 본래 깨끗한 깨달음의 모습, 곧 청정각상이 그대로 실현된 모습이다. 결국 무변허공각소현발, 곧 끝없는 허공도 원각에서 나타나는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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