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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가 시작된 인도는 나라가 크고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사는 만큼 탑도 여러 양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표적인 탑'을 들라면 단연 기원전 3세기 중엽 아소카 왕 이 건설하기 시작해 뒤에 확장되는 산치탑이다. 그런데 산치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탑'의 모양이 아니다. 외형만 놓고 보자면 벽돌로 된 거대한 봉분형의 무덤이다. 굳이 무덤과 구분하자면 꼭대기에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일산과 난간을 두른 장엄물이 있는 것 정도이다.

 

  인도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파라솔과 같은 거대한 일산을 사용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다 보니 존중의 대상이 되는 불상이나 탑에도 일산을 씌우는 양식이 적용된다. 이런 일산은 변형된 형태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탑 정상부에도 남아 있다. 여하튼 이런 봉분형이 우리나라에 와서 석가탑과 같은 형태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탑의 상륜부

명당 건축과 동아시아의 탑

 

  중국의 고건축에는 명당明堂 건축이라는 것이 있다. 명당 건축이란 여러 층으로 된 누각 건물을 의미한다. 요즘으로 치면 고층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중국의 권력자들은 여기에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부여했다. 랜드마크와 신성함의 결합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왕궁 건축에 버금가는 위세를 가지는 명당 건축이다.

 

  부처님의 사리가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종교적인 신성함에 입각해 사리는  명당 건축에 모셔지게 된다. 이로 인해 다층의 누각 형태로 된 중국탑 양식이 정착된다. 우리나라의 탑 역시 중국에서 사리를 모신 여러 층으로 된 누각의 명당 건축을 화강암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하늘과 땅, 홀수와 짝수

 

  명당 건물과 탑의 신성함 역시 고도의 상징성과 관련이 있다. 이런 상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세로로서의 하늘과 가로로서의 땅이다. 중국문화에서는 이게 홀수와 짝수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탑은 세로로는 3층 · 5층  · 7층  · 9층  · 13층과 같이 하늘이라는 홀수의 상징을 가지게 되고 가로로는 4 각형  · 8 각형  · 12 각형과 같은 땅이라는 짝수의 상징이 나타난다. 즉 동아시아의 탑은 수직으로는 홀수이고 수평으로는 짝수인 것이다. 

 

  하늘과 땅 중 무엇이 더 가치가 높을까?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니, 답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런 부분에 대한 가치를 규정해 놓았다. 천/지, 홀/짝, 남/여 따위가 그것이다. 이중 먼저 언급된 것이 더 우월한 가치를 갖는다. 이를 언어의 우월성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는 '가로세로'라고 하지만 한자에서는 종형, 즉 '세로가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왜 탑의 수직과 수평이 홀수와 짝수가 되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천(하늘) - 홀 - 종(세로) - 남

          지(땅) - 짝 - 횡(가로) -여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천존지비天尊地卑"라 하여, "하늘은 높고 땅은 비천하다."는 언급이 있다. 이 말은 후일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라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또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1.1)  · 삼짇날(3.3)  · 칠석(7.7)  · 중양절(9.9)은 모두 홀수가 겹치는 날이다. 이는 홀수가 하늘의 양명함을 상징하는 상서롭고 길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탑의 층수가 홀수라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10층 탑은 짝수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문화재 중에는 경천사지 10층석탑(국보 제86호)이나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2호)처럼 '10층'이라는 예외가 존재한다. 이러한 예외가 유독 10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10진법 체계에서 10이 완정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0 x 10인 백에는 '온전'과 '모두'의 의미가 있다. 즉 탑에 나타나는 10층은 기존의 홀수적인 관점과는 다른 각도에서의 완전성을 상징한다는 말이다.

 

  또 10층 탑은 대부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와는 다른 관점에 의한 시대적 요청을 예술이 수용한 결과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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