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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서는 행자들 / 통도사

  스님들 사이에 "행자 때 지은 복으로 평생 중노릇한다."는 말이 있다. 대중을 위한 하소임을 수행으로 여기며 살아온 행자의 삶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예전에는 행자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간 행자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가 되면 여섯 달 정도 행자생활을 한 뒤 계를 받고, 강원에 가서 4년간 공부하여 구족계를 받는 스님들이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자율적인 기간을 적용하는 사찰이 더 많았다.

  행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삭발이다. '머리를 깎는다.'는 말이 출가를 뜻하듯이, 삭발은 속가와 단절된 출세간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징표라 할 수 있다. 삭발하면서부터 비로소 행자로 받아주었는데, 머리를 깎아주는 시기 또한 사찰마다 달랐다.

  본래 행자는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행자를 마치고 예비 스님이 되는 수계를 득도식이라 불렀다. '득도'란 정식으로 불문에 든다는 뜻으로, 이때 머리를 깎아준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얼마간 지켜본 다음 스님이 될 자질이 있으면 삭발을 허락했는데, 이는 일찍부터 출가자로서 스스로 마음가짐을 다지게 하려는 뜻이 크다. 그 뒤 점차 삭발에 의미를 두면서 행자의 머리를 깎아주는 것을 득도식이라 부르고 있다.

  정식으로 행자가 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절에 들어와 살면서 얼마간의 시간을 거치도록 한 것은 물론, 아예 받아주지 않는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사찰마다 행자가 적지 않았는데, 절 살림이 힘들어 스님들도 각자 자비량을 니고 머물던 시절이었으니 행자를 무한정 수용하기가 힘들었을 법하다.

  따라서 큰 절에서는 행자실로 입방 하기 전까지 사찰 일꾼들과 함께 기거하며 일하도록 하는 곳이 많았다. 출가자의 자질을 인정받으면 비로소 머리를 깎아주고 행자복을 입게 한 것이다. 이후 행장들은 수계 때까지, 후원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한편으로 초심자의 공부를 익히며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처럼 삭발하여 정식 행자로 입방 하는 단계, 행자로 살아가는 단계를 차례로 거쳐서 비로소 사미·사 미니계를 받을 수 있었다. 긴 통과의례를 거치고 법복을 갖추어 '새 중'이 된 제자는, 은사와 함께 산중 어른들께 인사를 다니게 되는 것이다.

통도사 공양간에서 소임을 보는 행자의 모습

  속가에서 편히 살다가 출가해 호된 고생을 하며 성장해 가는 스님들의 행자생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행자시절이 매운 시집살이에 비유되고, '행자는 절집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말도 회자된다. 우연히 인연을 맺은 은사가 "보리 동냥해서 갱죽 끓여 먹어가며 수행할 자신이 있는가."라며 고생을 예고하는가 하면, 인연이 닿지 않아 이 절 저 절로 떠돌며 행자생활을 거듭하기도 했다. 

  행자가 많을 때는 거친 일부터 차례로 맡았다. 처음에는 나무를 해오는 부목, 아궁이에 불을 때는 화두, 물을 길어 오는 수두 등의 소임이 돌아왔다. 다음 행자가 들어오면 선임은 상을 차리는 간상 등을 맡고, 점차 국을 끓이는 갱두, 반찬을 만드는 채공을 거쳐 밥을 짓는 공양주를 맡게 된다. 찌개만 전담하는 '찌개행자'를 두거나, 선임과 후임이 짝을 이루어 상하 관계를 이루기도 하였다.

  일상의 후원 소임뿐만 아니라, 논농사 ·밭농사와 산나물 캐기까지 대중이 함께하는 울력에도 앞장서는 소임이 행자였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일이 많고 고된 나날이라도 새벽예불에는 빠질 수 없었고, 예불을 마치고 후원으로 달려가 공양 준비를 했다. 그런 가운데 행자로서 익혀야 할 공부도 있으니, 일하면서 경전을 외우고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두드리며 천수경을 외우던 시절이었다.

  1970~1980년대부터 행자 기간이 여섯 달로 정착되었지만, 가장 아래 소임으로 사중을 뒷받침해야 하는 삶은 늘 고되기 마련이다. 근래 통도사로 출가한 행자들의 경우, 일과는 오전 3시 40분 경이 시작된다. 조석과 사시의 삼시예불에 참여하고, 후원에서 세 차례 공양간과 주방을 오가며 밥과 반찬 만드는 일을 돕는가 하면, 사중의 곳곳을 청결히 정돈한다.

  초심자로서 정진과 습의에도 소홀함이 없다. 오전에는 행자실에서 교리와 경전을 익히며 정진하고, 오후에는 행자로서 익혀나가야 할 습의 교육이 이루어진다. 저녁예불을 마친 행자들은 통도사만의 독특한 의식을 이어나간다. 불이문 앞에서 대웅전을 등진 채 '옴! 불, 법, 승'을 외치고, 다시 대웅전을 향해 합장 반배하는 것이다. 떠나온 곳을 향한 다짐의 외침이자 가야 할 곳을 향한 확신의 외침이니, 더없이 여법한 수행자의 하루 마무리이다.

 

  대방은 행자들에게 선망의 공간이었다. 큰스님부터 학인스님에 이르기까지 대방에 모여 여법하게 발우공양을 하는 모습, 강원 ·선원의 대중이 경전을 읽거나 참선에 든 모습을 보면 신심이 절로 나곤 하였다. 하루빨리 그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물을 긷거나 나물을 다듬으러 대방 앞을 지날 때마다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발우공양 때 행자가 전체 대중과 함께하기 힘이 들었던 듯하다. "행자들은 공양할 때 윗스님들과 같이 못 앉았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어림도 없었다.", "행자와 학인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라서 한자리에 편히 앉지 못할 만큼 규율 엄했다."는 스님들의 말처럼, 아직 승려 신분이 아니기에 대방에 나란히 앉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일찍부터 행자들을 발우공양에 동참하게 하는 사찰 또는 드물지 않았다.

  무엇보다 행자 시절의 그러한 간절함에서 뚜렷한 초심자의 신념을 느낄 수 있다. 노스님들이 출가 이후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행자시절을 꼽은 이유도 그 시절의 간절함 때문이다. 경전 공부나 참선 공부보다 초심 시절의 공부가 더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갖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그만한 수행이 없었고, 신심이 솟아오르던 시절이었기에 고생 또한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출가하여 처음 배운 「초발자 경문」이 행자시절의 큰 지침이 되어, 이후에도 힘들 때마다 출가의 발심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 확신이 서면 현재의 고난 또한 의미 있는 것이 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을 용맹정진으로 무사히 마친 자만이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에 양관스님의 다음 글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바쁜 와중에서도 공부하고 소임에도 충실했던 행자들은 무사히 사미계를 받고
마치 연어처럼 강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피로에 지쳐 공부는 뒷전이었던
행자들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던 일도 생각난다."

 

 

 

출처 : 월간통도. 202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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