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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림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지도론》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승가를 번역하면 중衆이라고 한다.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서 화합하는 것을 승가라고 한다. 비유하면 많은 나무가 모인叢 것을 숲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이 외에도 산스크리트를 인용하며 여러 가지 설명을 하지만 대체로 많은 대중이 울창한 숲과 같이 모여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현재 조계종단에서는 선원, 율원, 염불원, 강원 등의 수행도량과 교육기관이 갖추어진 곳을 총림으로 지정한다. 하지만 선원, 율원, 염불원, 강원을 모두 갖추고 종단의 정식인가를 받은 곳은 8대 총림 중 현재 영축총림 통도사가 유일하다.

1990년대 초반 부도전을 정비하면서 건립한 총림문.  靈鷲叢林 편액

영축총림(靈鷲叢林)

일제강점기 불교계는 신교육 우선 정책과 왜색화로 강원은 지방학림으로 전환되고, 선禪을 공부하는 수좌들은 선방에 기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관권에 의탁하면서 종단과 사찰의 운영권을 갖고 있던 주지들은 점차 전통선원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져 갔다. 그러나 통도사는 선원의 부흥과 전통강원의 설립에 이어 율부를 신설하면서 삼학을 구족하였고, 또한 현재의 염불원으로 일컬을 수 있는 '만일염불회'를 만들어 1953년까지 이어 나갔다.

 

일제강점기 통도사의 강원, 선원, 율원, 염불원은 오늘날 총림의 출발이 되었다. 불교계의 지형에서 통도사의 이러한 행보는 수행도량의 참모습을 지켜 나가는 모범이 되었다. 통도사에는 1899년 7월 이전 백운선원이 존재하여 그 선맥을 이어 오고 있었다. 여기서 1899년 근대 최초의 선원으로 꼽히는 퇴설선원을 개설한 경허 스님이 통도사 백운선원으로 와 1900년 보광선원을 개설하면서 경허 스님에 의해 주도된 정혜결사와 만일염불화활동이 전해졌다. 이후 1914년 성해 스님이 보광선원장이 되어 납자들의 화두참구를 지도하면서 통도사의 수선가풍은 일신되었다.

 

1905년에는 통도사 내원암에 선원을 개설하여 방한암 스님을 조실로 추대하였고, 1916년에는 안양암 선원을 개설하여 서해담 스님을 조실로 추대하였다. 1926년에는 용성 스님이 망월사에서 열린 '만일참선결사회'를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겼다. 이는 근대불교 초기 결사운동의 두 주축이던 경허 스님의 수선결사와 용성 스님의 만일결사가 모두 통도사로 그 맥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통도사에서 선풍이 더욱 진작된 것은 1928년 경봉 스님이 극락암 선원을 개설하여 많은 청풍납자들이 수선안거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통도사가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는 것은 1928년 발간된 전국선원 현황에서 전국 69개 선원 중 11곳이 통도사 본 ·말사에 개설되어 있었다는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통도사는 선원의 개설과 운영에서 모법을 보였을 뿐 아니라 강원의 설립과 교육에서도 불교계의 참모습을 보였다.

 

한국불교계의 전통교육기관인 강원이 통도사에 설립된 것은 1906년이었다. 성해 스님이 황화각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한 것이 그 출발이다. 성해 스님은 원장 소임을 보면서 1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고, 황화각을 중수하여 1918년 6월 불교전수부 대강당도 마련하였다.

 

불교전수부는 1941년에는 '통도사 전수학원'으로 불리며 초등학교를 졸업한 승려 자제 및 그 관계자를 수용하여 불교와 기타 승려로서 필요한 과목을 중심으로 중등학교 4년 정도의 보통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었다. 통도사는 불교전통교육기관인 불교전문강원의개설에 그치지 않고 1918년 산내 말사인 옥련암에 서해담 율사를 강사로 하여 비구니 강원의 효시로 평가되는 니생강당尼生講堂을 설립하여 비구니에 대한 승려 교육에서도 선구자의 모습을 보였다.

 

통도사는 1915년 가을 율부도 신설하였다. 이로써 통도사는 사내에 삼학을 갖춘 수행도량이 되었다. 통도사 율원의 시원은 신라의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워 우리나라 최초 율원을 설립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승려들의 기강을 세우고 올바른 율법을 가르쳐 구족계를 받게 하려는 목적에서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율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최초의 율원으로 보고 있다.

 

출가를 위해서는 율사로부터 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자장율사 이후 계맥이 전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해담율사는 통도사의 계맥을 정리하기를 석가세존 -문수보살-자장율사-조일율사-월송율사-졸암율사-삼학율사-해담율사-구하율사로 기록하였고, 구하율사 이후는 월하율사 - 청하율사 - 현산율사 - 해남율사로 이어지고 있으니 통도사의 계맥은 오랜 역사 동안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율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이전에 율사들에 대한 기록을 포함해 율장을 연구하고 실천했던 내요이 있기는 하나, 율원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쓰인 것은 한국전쟁 직후 자운 스님이 통도사에서 율장을 공부하면서부터다. 이때 지관, 일우, 석암, 일타 스님 등 5`6명이 함께 공부하면서 천화율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천화율원은 이후 자운 스님이 수행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곳곳에 붙여졌고, 해인사에도 천화율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천화율원은 계율전문교육기관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도 통도사에는 강원, 선원, 율원이 세워져 전통불교의 맥을 이어 오고 있었는데 조선 후기까지 존재하다 복원되지 못한 염불원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1925년 3월 10일 경봉 스님이 염불당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통도사 극락암 인근에 만일염불회를 만들어 이끈 것이 그 시초이다. 이후 근래에 통도사염불대학원이 설립되면서 염불의 맥이 내려오고 있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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