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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경제와 문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1970~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친 기성세대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물론 오산이다. 특히 문화는 그 사회를 반영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인구 100만 명에 세계 10대 도시 중 하나였던 통일신라의 경주에서 만들어진 석굴암의 미감과 기교를 따라가는 불상은 아직까지 한반도에 다시 출현하지 못했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외침外侵을 한 세대 동안이나 방어하면서 결국 자치권과 부마국의 위상을 확보한 고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 역시 후대의 어떤 자기瓷器도 그 신비한 아름다움을 뛰어 넘기는 어려웠다. 한반도의 탑은 통일신라 시대가 정점이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쇠퇴를 반복했고 현대는 아예 덧칠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고선사지 3층석탑(통일신라시대 초기)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

  통일신라 시대 석탑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기단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기단의 면석과 탱주가 각각 세 개 그리고 두개였다는 점을 둘째, 셋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는 기단의 수평적인 공간 분할이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넷째로 한옥 구조의 화려함을 모방하고 있는 옥개석 받침이 다섯 개라는 점이다. 옥개석 받침은 옥개석 밑에 층계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석탑에 있어서 마치 계급장과도 같다. 후대로 갈수록 이 층받침이 줄어 네 개 그리고 세 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일신라 시대 석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단이 복잡한가 그리고 옥개석 받침이 몇 개인가를 알아야 한다. 물론 이외에도 세세한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지식은 번잡하기보다는 간단하게 습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런데 왜 통일신라 시대 석탑을 가장 아름답다고 할까?

 

  불상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앉아 있는 불상이 그대로 일어났을 때 어떤 상태가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일어섰을 때도 신체 비례가 맞고 전체적인 구조가 수려하고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그 작품은 수작이다. 석굴암 부처님이 그대로 일어나서 움직인다고 상상해 보라! 석탑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봐서 시원하고 아름답다면 그걸로 끝이다. 아름다움(美)에는 정답이 없지만 사람들이 보는 눈은 대개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석탑을 만들 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선입견은 화강암이라 질료에서 오는 무게감이다. 우리는 돌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석탑을 만들 대는 이런 '선입견'을 지워야만 한다. 석가탑이 신라 최고의 석탑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진중하면서 경쾌하다'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부분을 석가탑은 균형있게 소화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의 내적인 긴장감은 문화나 경제력이 조금만 흔들려도 구조에 대한 석공의 이해가 조금만 떨어져도 곧 한쪽으로 쏠리며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모든 예술품이 가장 경계하는 정신의 몰락이다.

 

 

다양성으로 승부를 본 고려시대 석탑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탑에도 양식적인 혼란과 퇴화가 나타난다. 또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의 유입은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을 강조하는 풍조를 몰고 왔다. 그러다 보니 자율적인 양식이 강조된다. 통일신라 말기로 가면서 석탑은 기단의 갑석과 탱주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게 된다. 즉 수평적인 공간 분할이 두 개로 축소되는 것이다. 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중기단이 하나의 기단으로 간소화되는데 이런 경향은 조선조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옥개석 닫침도 다섯 개에서 네 개로 줄어들게 된다. 전체적으로 양식이 고착화되면서 간소해지고 왜소하게 변화된다고 보면 되겠다.

 

  고려 시대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콜라병과 같은 날씬한 자태와 5층 ·7층 ·9층 ·13층과 같은 3층을 벗어나는 자유로움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기 때문에 북방 기마민족의 정서가 있다. 그렇다 보니 남방의 경주를 중심으로 정착한 지 오래되는 신라와는 문화적 색깔이 조금 다르다. 이것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날씬한 미감과 다층구조이다.

 

  중국도 한족이 만든 예술품과 유목민이 만든 예술품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유목민인 선비족이 조성한 운강석굴은 한결같이 호리호리한 자태를 뽐내는 데 반해 한족화된 당나라의 용문석굴은 불상들이 모란꽃과 같은 풍만함을 자랑한다.

 

  고려는 통일신라의 석탑 문화를 계승한다. 그럼에도 신라의 방정함보다는 날씬함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이러한 차원에서 3층으로 일반화된 통일신라의 석탑과 달리 5층 ·7층 ·9층처럼 더 높아서 시원하게 보일 수 있는 층수를 선호했다. 또 통일신라의 탑이 4각형이라면 고려의 석탑에는 8각형도 등장한다. 고려의 대표하는 석탑으로는 묘향산 보현사의 8각13층석탑과 개성 현화사의 7층석탑 그리고 국보 제 48호인 월정사 8각 9층석탑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시대의 석탑은 양식이 고착화되고 이후 퇴화하면서 날씬함을 넘어 쇠잔하고 파리해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원나라 간섭기에 이르면 우리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석탑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탑이 국립중앙박물관 입구에 있는 제86호 경천사지 10층석탑이다. 이 탑은 원나라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탑을 모사한 것이 현재 서울 탑골공원 안에 있는 보물 제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다.

 

  고려의 석탑에는 원 간섭기 티베트불교의 탑과 우리 전통의 고려 탑 양식이 중층으로 결합된 보물 제 799호 공주 마곡사 5층석탑과 같은 경우도 있다. 이 탑은 고려의 5층석탑이 청동으로 된 티베트의 라마탑을 상륜부에 얹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조선과 현대의 탑

  조선의 석탑들은 조선 전기의 원각사지 10층석탑 정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볼 만한 것이 없다. 양식적으로 어떤 특징이 있기보다는 마구잡이로 대충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잘 차려진 한정식이 아닌 국밥과 같이 여러 가지가 아무렇게나 섞여 있는 것이 조선의 탑이라고 하겠다.

 

  현대에도 석탑은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현대의 석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겉만 그럴듯하게 덧칠이다. 현대의 석탑들은 현대의 기술로 국보나 보물급의 수작들을 모사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우수하다. 그러나 과거를 재해석해서 현대화하지 못하는 단순히 습자지를 놓고 모사하는 것과 같은 작업은 덧칠함에 불과하다. 그것은 예술도 종교도 아닌 그저 거리의 기성복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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