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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는 한국의 사리신앙을 대표하는 불보사찰이다. 당에서 돌아온 신라의 고승 자장이 영축산에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금강계단을 조성한 이래 통도사의 불보종찰로서의 명성은 삼국, 고려, 조선을 이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자장은 통도사를 개창할 당시 당으로부터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함을 봉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강계단을 쌓았는데 그로 인해 통도사는 석가모니 진신사리라는 성보가 봉안된 불사리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한국의 계율을 상징하는 사찰이 되었다.

 

  불보종찰이자 계율도량으로서 통도사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계단을 보수할 때마다 시주에 동참한 사찰과 사부대중의 명단을 새겼는데, 여기에는 왕실과 중앙과 지방의 양반 사대부와 일반 백성은 물론 전국 각지의 사찰과 승려들이 사리탑 보수에 동참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는 통도사가 단순히 경상우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 아니라 조선 불교계의 신앙적 구심점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통도사가 지닌 명성과 위상에 비해 조선 왕실과의 인연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공식적인 기록상으로 통도사가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례는 헌종대 이전 기록에서 단 한 건도 확인되지 않는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기록은 대체로 사적기나 완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데 반해 통도사에서는 원당 지정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들이 거의 없다.

통도사 개산조당

 

  통도사의 왕실원당 연구는 건축사와 미술사 영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통도사에 위치해 해장보각의 건축적 특징이 왕실원당의 전형적 양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 특징을 고찰하는 연구가 먼저 진행되었고, 그 후 미술사 연구를 통해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왕실 관련 고미술품과 문헌들이 소개되면서 통도사의 왕실원당은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다.

 

  조선시대 통도사가 왕실원당으로 역할을 하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는 통도사의 해장보각 건물이다. 통도사 왕실원당 연구가 문헌사학이 아닌 건축사 분야에서 먼저 이루어진 이유중의 하나는 통도사의 해장보각 건물이 왕실원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 개산조당은 관음전과 대웅전 사이, 금강계단 영역의 석축 밑에 조성되었다. 앞에는 3칸 솟을삼문이, 뒤에는 사당형의 본당이 있다.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원당 건축의 전형으로 통도사 개산조당이다.

 

  1997년 발간된 「통도사 대웅전 및  사리탑 실측 조사보고서」에서도 해장보각 건물이 유교식 사당 건물의 구조를 띠고 있다는 점, 우물천장 중앙부에 '기블 喜' 자와 복 福'자 문양이 도안되어 있는 점 등 왕실원당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통도사 순조의 대상재 사찰로 지정되면서 조선 왕실과 밀접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조선 왕실의 축원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상으로는 순조의 대상재를 기점으로 왕실의 제사를 담당하고 사찰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에서 선왕선후의 추천재를 사찰에서 설행 할 때 수륙재의 형태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왕실에서는 고승을 초청해 법석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는데 태종이 수륙재를 제외한 모든 법석을 금지한 이후 왕실의 추천재는 대부분 수륙재 형태로 설행 되었다. 또 통도사에서 순조의 추천재 축문 가운데 낮에 지낸 재의 축문 제목이 「영산주별」인 것으로 볼 때, 순조의 대상재는 조선후기 유행한 영산재의 형태로 설행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36년 순조의 대상재가 설행 된 이후 1858년 순원왕후의 탄일재, 1891년에는 신정왕후의 탄일재가 통도사에서 봉행되었다. 1904년 황태자비(순명효정황후)가 사망하자 통도사에서 추천재가 설행 되었다. 통도사는 1887년과 1902년에 왕실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어필을 하사 받았다. 특히 1887년 신정왕후의 어필이 하사된 후 통도사 경내에 어필각이 설치됨으로써 통도사는 명실상부한 왕실원당이 되었다. 신정왕후의 어필은 삼회전에 봉안되었다가 1894년 축성각이 신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건물이 바로 오늘날의 해장보각이다.

 

  통도사 왕실원당의 특징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조선 왕실의 위기의식이 사리신앙으로 구현되어 왕실원당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순조의 대상재 사찰을 지정할 때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이 주된 요건이었다. 이처럼 19세기에 이르러 조선 왕실의 사리신앙이 부각된 데에는 국가의 어려움을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했던 조선 왕실의 위기의식이 깔려 있었다.

 

  두 번째는 통도사의 왕실원당은 조선 왕실의 불교식 상장례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불교식 의례는 연산군 대 이후 중단되었지만, 왕실 차원의 불교식 상장례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거쳐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통토사의 왕실 불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는 19세기 왕실 불사의 간소화로 인해 통도사는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매우 적은 혜택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통도사의 왕실 관련 문건들은 매우 제한적인데, 이는 통도사가 왕실의 추천재 사찰로 역할을 하고 원당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큰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19세기에 이르러 통도사에 왕실원당이 설치된 것은 나라 안팎으로 큰 어려움이 처했던 조선 왕실의 위기의식과 잡역의 과도한 부과로 폐사 위기에 몰렸던 통도사 승려들의 자구책이 맞물려 이루어진 '왕실과 사찰의 윈윈 전략'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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