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고통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이 질문은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질문과 같다. '존재 = 고통'이라는 붓다의 고성제 苦聖諸 다음으로 붓다께서 말씀하신 집성제는 고성제의 원인을 설하신 것이다. 즉 고통 또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풀어놓으셨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고 나아가 통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소멸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겠다. 즉 존재를 소멸할 수 있는,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길 말이다. 존재나 윤회라는 다소 어렵고 느껴지는 말 또는 목표보다는, 당장 현재의 감정·번뇌 ·괴로움 ·문제를 타파하는 묘법이라는 표현이 더 와닿을 것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이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집성제]인가? 그것은 재생 再生을 일으키는 갈애이다. 즐거움과 탐욕을 동반하고, 항상 더 새로운 즐거움을 여기저기서 찾는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며 어디서 자리 잡는가?"

 

  집성제의 '집集'은 집착 ·취착 ·탐착 ·갈애를 말한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갈애는 들러붙고 유지하려는 성질을 갖는다. 그러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대념처경》의 「집성제」에 나오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구성 요소'로서 오온(색수상행식)의 작용을 간략히 알기 쉽게 요약한다. '존재 = 고통 = 오온'은 모두 같은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붓다의 말씀을 따라가 보자.

석가모님 부처님과 마군(고통)의 총공격. <팔상록> 수록 삽화

  먼저 우리 몸에 장착되어 세상과 소통하는 육근(안이비설신의) 자체에 이미 갈애(탐착)는 내장되어 있다. 눈은 더 아름다운 것을 찾고, 귀는 더 감각적인 소리를 찾고, 토는 더 향기로운 냄새를 찾고, 혀는 더 맛있는 음식을 찾고, 피부는 더 부드러운 것을 찾고, 생각 또는 마음은 더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육경(색성향미촉법)에도 이미 갈애(탐착)는 내장되어 있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면 각기 서로 대응되는 곳(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에서 감각접촉[觸]이 일어난다. 여기서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6처에서 각기 일어나는 감각접촉은 다시 6 처소에서 느낌[受]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6처소에서 일어난 느낌은 다시 6처소에서 인식[想]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서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인식은 6처소에서 의도[行]를 일으킨다. 그리고 일으킨 생각[曇]과 지속적 고찰[何]을 일으킨다. 오온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인쇄적 단계 또는 서로 상응하는 단계마다 갈애가 일어나고 자리 잡는다.

 

  그런데 이렇게 갈애와 더불어 일어난 오온이 영원히 계속 지속되지 않는다. 일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滅聖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과 멸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한 과정으로 바르게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한다. 사성제 중 마지막 도성제는 생멸의 무상성을 바르게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부정한 업이 소용돌이치지 않도록, 말을 삼가고 바른 생계를 유지하고, 처음에는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청정한 업이 일어나도록 애쓴다. 그리고 탐착, 호불호, 분별을 버리고 그저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린다 [正念]. 그러면 의식의 일어남과 흐름은 끊기고 선정에 든다 [正定]. 이로 인해 청정함의 완성도는 높아지고, 결국에는 해탈에 든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가 어째서 고苦인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集], 또 어떻게 소멸하는지 [滅] 모른 채 살아간다. 나의 마음과 몸의 메커니즘(오온)에 일체 무지한 채로, 그것에 할리없이 휘둘리며 사는데 휘둘리고 있는 줄도 모른다. 무명의 노예인 것이다. 하지만 붓다께서 밝혀 놓으신 나의 존재와 작용원리를 통해, 우리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라는 각성을 일깨움으로 인해, 우리의 의식은 몸에서 벗어나 몸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아는' 위대한 마음을 불성(佛性: 부처의 마음)이라 한다.

 

  무상성無常性을 모르는 무명의 마음은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파도친다. 그것은 내용을 가리지 않고 즐거운 마음이건 고통의 마음이건 존재만 하면 되기에 끊임없이 올라온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의 집요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내가 존재하고 또 내 마음이 일어난다고 착각하고 있다. 문제는 '나'라는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없는 데 있다고 착각하니 고통이 온다. 만약 '나'라는 주체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 모두 스스로의 갈애 속에서 알아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고통스럽지 않고자 하는 의식은 막강한 무의식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무의식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붓다께서 발견하신 의식적 '알아차림'이다.

 

  우리는 '존재하기에 미워하고 사랑한다'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반대이다.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기 위해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존재해서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려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를 통찰한 명언이다. 이제 존재하는 방식 오온을 붓다의 명철한 통창력으로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역이용하면 된다. 그 첫 단계는 마음이 존재하려고 고통과 번뇌를 끊임없이 던질 때, 먼저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마음의 환영인 것을. 그것이 갈애가 만들어 낸 집착인 것을. 강렬한 마음일수록, 강렬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을.

 

 

 

 

 

 

월간통도. 2023. 07.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