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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는 불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빼어난 자연풍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이다. 통도사의 '무풍한송로'는 걷기에도 좋아 2018년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 길 주변에는 많은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석이다. 각석에는 사람의 이름과 역사 기록이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를 통합하여 '이름바위'라고 부른다. 관심을 가지고 이름바위를 탐구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찾은 바위가 137개, 이름이 1,981명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많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름을 남기기를 원한다. 한국인의 낙서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림과 글자를 즐겨 남기는 민족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낙서는 통도사와 가까운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선사시대의 그림 낙서라고 한다면,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와 그 이후의 역사가 공존하는 그림과 문자 낙서로 가득하다. 한때 화랑들의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어 화랑 각석이라 했다. 전국 어디에나 풍광 좋은 곳에 문자와 이름을 새긴 바위들이 많다.

 

통도사뿐만 아니라 범어사와 해인사와 같이 계곡을 끼고 있는 산사의 바위에는 이름바위가 존재한다. 이름바위는 그 지역을 밝혀 줄 소중한 자산이며 역사의 방명록으로 역사 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름바위에는 사람의 이름뿐만 아니라 역사적 기록과 시문을 남겼다.

 

이름바위

통도사에서 이름바위가 가장 많은 곳은 통도사 산문 입구에서 무퐁한송로를 지나 부도원까지 이르는 길이다. 바위는 길가와 산 쪽 그리고 하천에 있다. 이름바위를 살펴보면 전문 석수장이가 새긴 이름은 한자 이름이 뚜렷하다. 그리고 인근 지역의 관료나 권세, 부유함에 따라 이름의 크기와 굵기가 달랐다.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보기 좋은 장소의 바위를 택했다.

이름바위

심지어 이미 새겨진 이름을 파내고 자신의 이름을 크고 굵게 새긴 경우도 있었다. 이름바위가 성행했을 때는 이름의 크기 경쟁이 치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름바위에 붉은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름을 새긴 후에 색칠한 듯하다. 최근에 새긴 이름들은 개인이 새긴 것으로 새김이 다소 서툴고 가늘고 투박한 편이다.

 

이름이 새겨진 스님들

이름바위 중에 스님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이름은 30명 정도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1680년 차왜 영접관들의 이름을 남산에 새긴 죽봉과 취원이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각석자가 없어서 통도사의 스님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은 1968년 입산하면서 새긴 혜공이다. 부도바위에는 특히 스님들의 부도마애비를 새겼다.'화엄종주 애운당봉흡출세탑', '관허대사 병형출세탑'으로 총 4개의 부도마애비가 있다. 공통점은 화엄종 계통의 스님으로서 통도사에 주석했던 19세기 중후반의 고승이다. 

 

화엄종주 대운당 봉흡  스님은 1860년대 통도사에 주석한 스님이다. 스님은 각종 탱화 조성에 참여하여 증명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내원사 아미타삼존탱(1857), 통도사 아미타회상도, 백련암 신중탱화(1864), 안양암 칠성탱(1866), 통도사동치 3년 현왕탱과 신중도 등이다. 그리고 현재의 안양암인 '통도사보상암신건기 현판'(1868)에는 건물 신축 때 대운봉흡이 3량을 시주한 기록이 있다. 그는 청허휴정(서산대사)의 문인이었다. '보상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구봉당 지화 스님은 통도사 '지장전 중수번와개금기 현판'(1845)에 1량 시주, '사리탑중수기 현판'(1872)에 10량 시주의 기록이 있다. '창주선교양종구봉당지화대 사지 진(1878)'의 영정이 영각에 있다. 사리탑 중수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주지 스님의 소임을 맡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건운당 스님은 밀양 표충사 승련암 구품탱화(1882) 증명에 건운선관의 이름이 있다. 부도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스님의 공통점은 화엄종주로서 통도사의 중요 직책을 맡은 스님이며, 부도원에 스님의 부도가 있다. 또 휴정 스님의 법맥을 이은 스님으로 여겨진다.

 

선자바위에 새겨진 도총섭 포령당 유종 스님은 통도사 소속이었다. 도총섭은 조선시대의 최고 승직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승군의 궐기를 부르짖고 일어선 서산대사 휴정에게 8도 선교 16종 도총섭의 승직을 제수한 이후 보편화된 직명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승군의 대장 격이자 동시에 전국 사찰과 승려를 통솔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통도사 중흥의 기초를 닦은 구하 스님은 통도사 주지로서 현재 무풍교 석교 방함과 무풍 너럭바위, 청류길 세 곳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장동천의 세이석

예로부터 산과 계곡의 경치가 빼어난 곳을 동천洞天이라 불렀는데 통도사에는 두 곳이 있다. 통도사 입구 계곡의 '청류동천'과 자장암의 '자장동천'이다. 자장동천은 풍류를 즐기던 스님들이 시회를 즐기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경봉 스님의 일기에 보인다. 구하 스님과 경봉 스님은 자장동천을 노래하는 시를 남겼다.

 

통도사 자장암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자장동천을 자장암 주차장 아래쪽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산길이나 계곡을 따라가면 더 넓고 풍경 좋은 곳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산길을 다라 걷다 약 100m 지점 아래 하천으로 내려가면 큰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와 조금 위쪽의 바위가 넓기에 한때 풍류객들의 시회가 열린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너럭바위에는 비록 '폭'자는 깨져서 보이지 않지만 '자장폭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초팔일서'는 글자가 희미하고 글 쓴 사람의 이름도 마모가 심해 알 수가 없다. 초파일 석가모니의 탄신일이기도 하지만 자장 스님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이 너럭바위에서 서쪽에 물이 흐르고 그 곁으로 바위가 직각으로 깨진 곳이 보인다. 이곳에 세이석이란 글자가 역시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세이석은 귀를 씻은 곳이다. 자장 지계의 사실적 장소이다. 선덕여왕의 국사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한 후, 국사 요청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내 차라리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자장 스님은 계를 지키겠다며, 국사 요청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며 흐르는 물로 귀를 씻어 '세이석'이라 새겼다고 한다. 글씨는 자장 스님의 친필로 전해 오지만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 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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