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다는 기원정사는 당시 인도 최고의 재벌이었던 급고독 장자가 기증한 사찰이다. 본당은 7층짜리 건물로 사위성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다. 기원정사는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또 기원정사의 정문은 급고독 장자의 신심에 감복한 기수 태자가 지어서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남문이 아니라 동문이었다. 이유는 무더운 인도 날씨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볕이 많이 드는 남쪽보다 동쪽을 숭상했기 때문에 동쪽으로 정문을 냈다. 동쪽은 불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싯다르타의 출가도 동쪽 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부다가야에서의 깨달음 역시 동쪽으로 앉아서 이루어진다.

산치대탑 앞의 토라나

  하지만 기원정사의 '담'은 예외적인 경우다. 기원전 1~2세기에 지어진 산치대탑 등을 보면 문은 담이 없는 '기념물'이었다. 물론 단순한 기념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도의 탑에 대한 예배 방식에는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고 해서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도는 것이 있다. 예배와 관련해 시작 장소인 정문 개념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 동쪽에 세워지는 것이 바로 기념문이 토라나이다. 토라나는 문 너머의 대상, 즉 탑의 신성을 상징하는 기념문이다.

 

  이 토라나는 불교가 인도를 넘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역시 폭넓게 수용된다. 바로 기둥 형식의 패방과 중국식 누각을 덧씌운 패루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로 전래되면서 변형된 것이 바로 홍살문과 사당의 솟을삼문(복례문)이다.

 

원을 좋아했던 인도 직선을 좋아했던 중국

   인도인들이 원형을 좋아한다면 중국인들은 네모난 방향을 선호한다. 또 유교문화는 서열을 정해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매우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때문에 인도의 원형적인 구조는 중국으로 오면서 수직적인 질서로 재편된다.

 

  인도불교에서는 문을 동쪽으로 하나만 내거나 필요하면 동서남북으로 네 개를 낸다. 그런데 중국문화는 이를 수직으로 변형시켜 남쪽으로 하나를 내거나 남북을 축으로 해서 전면에 3개나 5개를 중첩해서 만든다. 이를 3문 혹은 5문이라고 한다.

 

  3문은 제후나 사찰의 문이다. 제후나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난 3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보다 높은 5문은 황제의 문이다. 오늘날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본전인 태화전까지 가기 위해서는 '정양문→대명문 →승천문 →단문 →오문'의 5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는 조선의 경복궁이 본전인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광화문 →홍례문 →근정분'의 3문을 통과하는 것과는 다르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에 감히 5문을 두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의 궁궐터인 개성의 만월대 유적은 5문 구조로 되어 있다. 고려는 조선과는 위계가 다른 웅비하는 황제의 기상을 내포한 국가였던 것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