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탁발'은 음식을 구하고자 '그릇鉢을 내미는托' 행위를 묘사한 말로, 곧 걸식을 뜻한다. 따라서 걸인의 구걸을 일컫는 '동냥'이라는 말도 스님의 탁발에서 비롯되었다. 동냥은 '동령動鈴'에서 나온 말로, 스님이 탁발할 때 요령을 쓰기도 하여 '요령鈴을 흔든다動'는 의미에 따라 생겨났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기 중국불교에서 대중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스님을 '교화자敎化子'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해 걸인을 '화자花子·규화자叫化子'라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얀마 스님들의 탁발행렬

  초기 율장律藏에, "비구로서 자기 마음대로 입에 넣을 수 있게 허락된 것은 물과 이쑤시개뿐"이라 하였다. 당시의 이쑤시개는 양치용의 작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출가자는 오로지 탁발로써 재가자가 발우에 담아주는 음식에 의지해 살아가야 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라 하겠다. 걸식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물질에 대한 집착을 없애며, 최소한의 음식으로 수행에 힘쓰는 일이 출가자의 본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이어온 탁발도 초기불교와 그 정신은 같지만, 양상은 차이를 지닌다. 탁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남방불교와 달리, 대승불교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수행을 위해 탁발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탁발로 얻는 보시도 조리된 음식보다 곡식이나 화폐가 주는 이루었다.

 

  그런데 사찰경제가 힘든 시절에는 대중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할 수 없어, 스님들이 자신의 식량을 직접 마련해야 했다. 선방 수좌와 강원 학인은 물론 다른 사찰에 잠시 머물 때도 자신의 식량을 내야 했는데, 이를 '자비량自備糧·自費糧'이라 불렀다. 따라서 1960년대 무렵까지 탁발은 일상의 수행이자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스님들의 전기를 엮은 「동사열전」을 보면, "본래 가진 재물이 아무것도 없어서 탁발로 학문의 비용과 식량을 마련했다."는 청해凊海스님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궁핍한 시절에 탁발하여 식량은 물론 경전과 학비를 마련한 것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출가수행자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탁발을 나갈 때면 규범이 분명하였다. 반드시 가사를 수하여 수행자의 위의를 갖추었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나가되 가능하면 젊은 스님은 노스님과 함께하도록 하였다. 재가자와의 관계에서 자칫 실수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기 위함이다. 탁발 시간 또한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를 피했음은 물론이다.

 

  탁발승이 절어진 걸망에는 대개 두 개의 자루가 있어 재가자가 주는 쌀과 보리를 구분해서 담았다. 가난한 마을에서는 보리쌀과 잡곡이 주를 이루니 쌀자루는 아예 꺼낼 일 없었고, 잡곡이 섞이는 걸 꺼리는 절에서는 자루를 네 개씩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형편이 나은 마을에서는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면 걸망이 묵직해졌고, 곡식뿐만 아니라 철 따라 고추나 감자·나물 등을 주기도 했으니 걸망을 멘 어깨와 등이 아프기 일쑤였다.

 

  노스님은 목탁을 들고 젊은 스님은 발우를 든 채 집 앞에 다다르면 목탁을 쳐서 방문을 알리고 염불을 하는데, 반야심경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주를 이루었다. 시주 여부와 무관하게 염불을 끝까지 마치고 성불을 바라는 축원으로 재가자에게 복을 지어주게 된다. 스님이 대문 앞에서 염불 하면, 부엌에서 곡식 종발을 들고 염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는 안주인도 있었다. 자신의 집이 잘되도록 축원하는 스님의 염불을 온전히 듣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부터 탁발은 재가자의 재보시와 출가자의 법보시가 오가며 공덕을 쌓아온 현장이었다. 수행자의 하심을 기르고 재가자에게 선근을 심어주는 탁발은 부처님을 본받는 일로, 재가자와의 관계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20세기 중반이면, 마을 곳곳에 기독교가 확산하고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스님들의 지위도 회복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대부분 민중은 불교에 우호적이었지만, 이러한 변수들이 늘 도사리고 있어 탁발에 큰 장애가 되었을 법하다. '사찰을 찾는 재가불자'와 '집집을 다니며 만나는 일반 재가자'는 분명 다르고, 수행자의 탁발이 일상화된 남방불교권과 다종교사회인 한국에서의 탁발 또한 큰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갓 출가한 스님은 첫 탁발 때 차마 발우를 내밀지 못했는가 하면, 문전박대를 당한 뒤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들은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며, 문제는 재가자의 홀대가 아니라 출가자의 마음에 있다고 보았다. 하심과 인욕忍辱을 체득하는 탁발이야말로 수행에 더없이 좋은 현장 실습이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대하는 모습이 다르고, 그것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곡식을 내주는 모습도 조금씩 달랐다. 가장의 밥그릇에 쌀을 담아 두 손으로 부어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밥뚜껑이나 바가지로 푹 퍼서 주기도 하고, 물 묻은 접시에 쌀을 담아 반은 도로 가져가게 되는 때도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중생들과 부대끼며 감사함을 배우는 마음공부의 거름으로 삼으니, 탁발 걸식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위대한 선택을 한 출가수행자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탁발은 전통 개념과 다른 '자비탁발'의 방향으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자비탁발은 승속僧俗을 떠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행하는 탁발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재가자에게 보시를 받는 일방향의 탁발에서, 다시 중생에게 환원되는 양방향의 순환으로 또 다른 탁발의 참뜻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자비탁발은 어려운 이들에게 보시하는 불교의 역사와 함께해왔고, 탁발의 역사 속에서도 실천해 온 일이다. 자비탁발이 구호모금과 다른 것은, 출가자가 직접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 한 명 한 명과 만난다는 점이다. 금액에 연연하지 않고, 받는 자와 주는 자 모두 발우에 담기는 공감을 함께 체감하고 연대한다. 굳이 종교적 의미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미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지극히 불교적인 행위이다.

 

 

월간통도 2023.06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