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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에서는 고려 때부터 자체적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불경을 인쇄하여 책을 만들어야 했기에 목판인쇄술과 함께 제지기술이 발달해 왔다. 또 사찰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어 시중에 내다 팔았다.

  종이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1827년에 통도사 스님들이 수군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에 종이 만드는 과정이 있다. 제지 공정은 닥나무의 불필요한 부분이나 표피 등을 제거하여 한지 원료인 백저白楮로 만드는 과정인 거형去荊, 백저를 잿물과 섞어 가마솥에 넣고 삶는 과정인 숙정熟正, 삶은 후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분해하는 과정인 타저打楮, 분해된 섬유질을 큰 통 속에 물과 함께 넣고 휘저어 발로 종이를 뜨는 과정인 부취浮取, 종이를 말리는 과정인 건취乾取, 종이의 티끌과 오물을 제거하는 과정인 택록擇鹿, 종이를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단단하고 윤택이 나게 만드는 과정인 도침壔砧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종이 만들기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일손 또한 많이 필요하였다.

  사찰은 스님들의 제지 기술과 함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사찰은 닥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산간 지역, 풍부한 물을 확보하고 있는 개울, 닥나무를 두드릴 평평한 바위, 그리고 건조할 넓은 공간과 땔감이 많은 곳에 있었다.

 

  불교가 핍박받던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지서 혁파와 수취체제 변화로 인해 승려의 종이 생산과 상납이 본격화되었다. 종이를 청나라 조공품으로 보내었기에 사찰의 종이 부역이 가중되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워낙 그 폐해가 심해 종이 부역을 피해 승려들이 도망가고 결국에는 폐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1727년 양산군수 김성발은 통도사와 같은 천년 명찰이 지역으로 하루아침에 공허해졌음을 지적하고, 지역을 혁파한다면 흩어진 승도僧徒가 다시 환집還集할 것이라고 하였다. 통도사에는 닥나무가 자라지 않아 울산과 경주 등지에서 닥나무를 사들여 종이를 제작하여 납부하였다. 다른 사찰보다 통도사는 과중한 부담과 수탈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봤다.

덕암당 혜경스님 진영

  덕암당 혜경스님이 통도사에 있을 때, 그의 고향 친구? 인 권돈인이 영의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통도사 대중들은 스님에게 권 대감을 만나 지역면제 요청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도성 출입이 스님들에게는 금지되었던 시절이라, 스님은 6개월 동안 머리를 기르고 나서 상투를 매고 도포를 입고 한양으로 갔다. 한양에 입성한 스님은 권 대감을 만가 위해 물장수로 위장하였다. 물장수만이 양반집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권 대감을 만난 스님은 지역면제 요청을 하고, 권 대감은 임금에게 알리었고, 마침내 임금이 교지를 내려 종이 부역이 혁파되었다는 이야기가 통도사에 전해 온다.

  이런 공적을 통도사 부도원에 새겨 놓았으니, <덕암당혜경지역혁파유공비, 1884년 고종 21> 그것이다. 비 앞면에 그의 공적을 칭송한 글이 새겨져 있다.

 

  (통도사의 형세가)

  우리 스승님 이전에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는데,

  우리 스승님 이후에는 태산같이 안정이 되었네.

  천 리에 있는 서울을 혼자서 갔다 돌아오시고 나니,

  보리수에 봄이 돌아오고 우거진 초목이 무성하였다네.

  그 수 헤아릴 수 없기에 머물고 거할 만하거늘,

  여기 큰 유공비 세웠는데 절만 있고 이제 스님은 안 계시네.

 

  그런데 권돈인이 당시 통도사에서 만난 사람은 덕암당혜경스님만이 아니었다. 성담 의전스님도 있었다. 그는 통도사 지역혁파에 공을 세운 <덕암대사잡역혁파유공기현판>을 쓰기도 했다. 이재 권돈인과 추사 김정희가 있었다.

 

  통도사의 위기는 덕암당이 한양을 다년온 후 안정이 되었다. 통도사 부도원에 권돈인의 영세불망비가 있다. 비석의 앞면 중앙에 <도순상국권공돈인영세불망비>라고 기록되었고, 앞면 아래쪽에 "다만 잡다한 부역의 폐해를 일체 감면하고 제거하였으니 그 은혜와 덕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넓다."라고 새겨져 있다. 경상남도순찰사 권돈인이 양산 통도사를 양산군수와 수군절도사와 함께 방문하여 여러 잡역을 면재해 준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이다.

 

  덕암당 스님이 머리 기르고 한양에 가서 만난 사람은 영의정이 아닌 산성판윤이나 병조판서인 권돈인이었다. 스님의 하소연을 들은 권돈인이 직접 경상감사로 약 1년간 있으면서 통도사의 종이 부역을 비롯한 각종 잡역을 혁파해 준 것이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는 1838년 경상도 감영에서 통도사에 잡역을 혁파해 준다고 발급한 문서인 <양산군통도사지역혁파급각양잡역존감절목>이 있다. 도순찰사가 천년고찰임을 감안하여 과도한 부역을 감해 주고 일부만 남겨 지속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백지白紙, 홍장지紅壯紙, 유지油紙 등 다양한 종이와 관모 및 신발 등의 의복류와 쌀과 메주, 산나물 등의 곡식류에 대한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1842년에 제작된 <덕암대사잡역혁파유공기현판>이 있다.

 

  훗날 이재 권돈인은 통도사에 자신의 필적을 남긴다. 1851년 국화가 만발한 가을에 쓴 해장보각海藏寶閣 편액과 주련이다. 그가 1851년에 유배를 가고 귀양지에서 사망하니 그의 마지막 유작일 수도 있다. 해장보각은 통도사의 불경 도서관이었다.

 

  보물 같은 경전을 옥함에 두루마리로 모셨으니

  서역에서 모아서 동토에서 번역했네.

  귀신이 지키고 천룡이 흠모하니

  달을 가리키는 지표요, 고해를 건너는 뗏목이라.

 

  권돈인과 김정희는 둘도 없는 친구로 추사의 그림자 같은 벗이 권돈인이었다. 김정희는 권돈인에 대해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는데, 예서 글씨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일찍이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극찬을 받았다. 두 사람의 친밀함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세한도歲寒圖>이다. 추사는 이재의 세한도에 발문을 썼다.

 

  권돈인은 성담 의전스님의 입적 후 진영에 기문과 헌시를 직접 쓰고, 끝에 '우랑又閬', '이재彝齋'라는 자신의 호를 낙관했다. 드문 일이다. 추사는 이재가 소개해 준 성담스님을 만나 후 편지를 보내고, 70세 때 성담스님 헌시를 짓는다. 통도사에 현판으로만 전해져 온 <성담상게聖潭像揭>, 곧 <성담스님의 상(진영)에 대한 게송>이다. 통도사에는 '탑광실塔光室', '노곡소축老谷小築', '산호벽수珊瑚碧樹', '일로향각一爐香閣'등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나무는 죽어서 종이를 남긴다고 하였다. 종이 부역으로 인해 사찰의 닥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종이 뜨는 기술은 단절되고 말았다. 과도한 부역 세금은 호환과 마마보다 무서운 것이다.

 

월간 통도  202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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