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청정혜보살장에서는 원각은 차별이 없지만 닦아 증득하는 데는 차별지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청정혜보살은 청정한 지혜를 지닌 보살이며, 청정은 밝고 깨끗함이다. 세상에서의 깨끗함은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물들고 더럽혀지지만, 이 보살이 누리고 있는 지혜의 맑고 깨끗함은 어느 것에 의해서도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깨끗함이다.

청정혜보살이 부처님께 물은 것은, 중생과 보살과 부처가 증득한 경지의 차이는 무엇이며 서로 같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원각은 차별이 없지만 닦아 증득하는 데는 차별지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부사의 한 일이라는 것은, 생각이나 말로 미칠 수 없기 때문이며, 윤회 근본 종성의 차별법이 있기 때문이며, 한결같이 깨달음에는 차별과 뒤섞임과 물듦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부사의하다고 한다. 『승만경」에 "물들지 않되 물드는 것과 물들되 물들지 않는 것을 모두 요지 하기 어렵다."라고 부사의를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보거나 듣지 못했다는 것은, 청정하고 물듦이 서로 차별이 있다거나 청정하고 물듦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은 익히 보고 들었지만, 여기서는 깨달은 성품에는 청정하고 물듦이 원융하게 통했다는 것을 일찍이 보고 듣지 못했다는 의미다. 곧 깨달음 마음은 일미로 돼, 인과가 층지고 차별되는 뜻을 묻고 있다.


중생의 깨치지 못한 지위와 보살의 닦아 가는 지위와 여래의 이미 깨친 지위가, 모두 본래 원만하게 깨쳐 있는 깨달음의 마음 자체에는 차별이 없지만 수행의 인과에는 깨치지 못함과 닦아감과 이미 깨침의 차별이 있어, 평등함과 차별됨의 두 가지 뜻이 모순되므로 이에 대해 청정혜보살이 의심을 두어 물음을 일으킨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여래는 평등함과 차별됨이 끝내 둘이 없는 수행의 인과를 보여 주고 있다.

차별됨을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거나 얻을 바가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얻었다는 마음과 나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증상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퇴굴심 곧 물러서려는 마음과 증상만 곧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마음을 모두 뛰어넘은 곳에 깨달음의 자기 활동으로 바른 수행이 있으며, 단박 깨침과 삶 속에 부단히 향상의 실천이 둘 일 수 없을 때, 해탈의 한 길에서 명함 곧 한치의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인연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 차별법 가운데 실로 얻을 것이 없으므로 경문에 '실상 가운데는 실로 보살도 없고 중생고 없다.'라고 한다. 이는 원각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여러 차별한 성품을 이루는 것으로서, 여러 성품이 일어날 때에 온전한 깨달음의 성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허망하게 공부를 한다는 것은, 『화엄경』에 "마치 꿈속에 약으로써 병을 치료해서 차도가 있으나, 꿈에서 깬 후엔 곧 약과 병이 모두 없는 것과 같나니, 고로 허망한 공부라, "라고 이른다.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지혜가 생기며, 인연이 이미 갖추어짐에 심성이 밝아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망령된 생각이 꿈에서 깨어날 때와 같아지는 일이다. 참된 깨달음에 곧 딱 들어맞아 일찍이 생각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마치 이는 선가에서 '한 소식'을 한 것 같은 경계라 하겠다.

이 삶이 공연히 번거롭다는 것은, 밖으로 실다운 경계가 없는데 어찌 미워하고 사랑할 것이며, 일어난 번거로움 당체가 스스로 번거로워할 따름이다. 중생의 깨치지 못한 모습과 보살의 수행과 여래의 깨달음이 끝내 고요해서, 고요함도 없고 고요하게 하는 이도 없음이요, 그러나 허깨비 같은 번뇌가 일어나므로 번뇌를 돌려 보리를 드러내는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세워지는 일이다. 그러나 본래 낱낱 중생이 원각을 구현하고 있으며 여래장의 공덕을 온통 쓰고 있지만, 그러나 실상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깨달음을 번뇌와 망상으로 왜곡되게 씀으로, 비록 번뇌 속에 있지만 진여의 이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계가 청정해졌다는 것은, 『화엄경」에 말하는 이사무애법계 곧 이법계와 사법계가 원융무애한 의미로서 이법계는 진여 속에서 모든 번거로운 번뇌를 끊어 육진 육경인 대상경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 하며, 사법계는 곧 온갖 차별되는 생각과 차별되는 경계와 대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 한다. 이사 곧 비유하면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일었다가가 파도가 잔잔해지면 온 바다가 고요해지듯이, 바다 자체를 이 곧 당체라 한다면 파도는 사 곧 현상이다. 다시 고요해진 바다는 이사가 원융한 모습이겠다.

비록 장애를 끊어 청정함을 이루었으나, 장애를 끊어 버리는 지혜의 자취가 있으면 그것 또한 법에 대한 애착이 되며, 법에 대한 애착을 넘지 못하면 원만한 개달음에 자제하지 못하므로, 법에 대한 애착을 여의어야 비로소 깨달음을 생활 속에 그대로 쓰는 이가 될 것이다.

보살은 '비추되 고요함'으로 전환하고 '고요하되 비춰짐'으로 전환되어, 비추되 비춤 없는 지혜 자체인 경계가 되면 그것이 깨달음에 머물지 않음이 된다. 또한 비추는 자와 비치는 것에 서로 의지해서 일어나므로 모두 공적 한 줄 사무쳐 보면 비추는 자도 없고 비치는 것도 없어지게 되어, 경문에 "늘 깨달음에 머물지 않으면 비칠 것과 비추는 이가 동시에 적멸하게 된다."라고 이른다.

장애의 마음은 능히 비춤과 비추는 바가 있고 깨달아 앎과 깨달아 아는 바가 있는 마음이며, 장애 속에서 능히 비춤과 비추는 바가 본래 공한 줄 알면, 장애가 본래 없으므로 장애를 끊어 없애는 이도 없다는 것이다. 『수능경』에, 능히 비침과 비치는 모습이 있으며 깨달음을 장애 하여 깨달음의 원만한 밝음이 사라지고, 비침과 비치는 모습이 지양될 때 깨달음이 원만해진다고 한다.

게송에,
깨달음의 바다 그 성품 맑고 둥글어
둥글고 맑은 깨침 원래 미묘하네
원래 미묘한 밝음이 능히 비치어
비추는 바 모습을 일으켜 내고
비치는 모습이 세워짐으로
비춤 없이 비추는 성품 사라지노라

언어와 형상을 세운 것은 뜻을 얻는 데 있는 것이요, 언어와 형상이 없으며 전도되고 미혹됨이라, 언어와 형상에 집착해서도 실상에 미혹되는 것이요, 그러하기에 달을 가리킨 손가락으로써 부처님 교법에 비유했다. 달을 보는 데 있어 모름지기 손가락 끝을 빌린 것이요, 마음을 깨치는 데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빌린 것이다. 손가락으로 인해 달을 보는 것이니 달을 보고는 손가락을 잊음이요, 교법으로 인해 마음을 설명한 것이니 마음을 깨닫고는 교법을 잊음이요, 손가락이 그대로 있다면 본래의 달을 잃게 되며 교법에 집착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되며 교법에 집착하면 본래 청정한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이요, 이는 실상을 얻고는 가리킨 것을 잊게 하는 도리로서 필경에는 달이 아니겠다. 『불정경』에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써 달을 가리키거든, 보는 이는 마땅히 달을 보아야 할 것이요, 손가락을 보아선 아니 될 것이니, 만약 손가락만 본다면 본래의 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또한 손가락까지도 잃는다."라고 한다.

정보와 의보 곧 중생과 중생이 의지해 사는 세계는 서로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닫혀 있는 것이 아니며, 중생과 세계는 모두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 일어나 중생과 세계가 모두 있되 공한 중도의 실상인 것이다. 『열반경』에 "나는 부처의 눈으로 두루 삼계를 살피니, 유정과 무정, 온갖 사람과 경계가 모두 구경의 진리다."라고 이른다.

고락 곧 괴로움과 즐거움의 대비는, 선과 악, 괴로움과 즐거움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된 법이므로 실체가 없으며, 선업의 결과인 천궁과 악업의 결과인 지옥이 허공 꽃과 같은 줄 알면 선악에 막힘없이 참된 즐거움을 수용할 수 있어,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이리라. 『불정경』에 "육근 육진의 근원이 같고 속박과 벗어남이 둘이 없으며 인식하는 성품이 허망해서 마치 허공 꽃과 같다."라고 이른다. 이는 '온갖 번뇌가 끝내 해탈이며, 온갖 장애가 구경각'이라는 의미다.

법계해혜 곧 법계가 깊고 넓으므로 바다와 같고, 지혜는 법계와 더불어 무변 곧 끝없이 펼쳐졌기에, 종합해서 법계해혜라 한다. 이는 바다처럼 깊은 지혜로써 온갖 법과 모든 존재를 사무쳐 보아 그 모든 법에 실로 얻을 것 없음을 통달하면, 이것이 바로 여래가 개달음의 성품에 수순 한 도리이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은 연기된 마음이라 공한 것이니, 미세한 생각을 끊고 구경각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살펴 본래 일어나는 첫 모습이 없는 줄 깨달아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의는 것이 구경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여래가 원각의 성품에 수순 한다는 것은, 망령된 마음을 단박에 증득하고 상을 여의어 근기에 맞춰 수순 하는 것으로서, 이는 차별과 평등이 융합한 것이니 곧 차별 속의 평등이요, 평등 속의 차별인 것이다.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망령된 것은 바깥 경계를 반연하고 취착 하는 것으로서, 깨달은 성품에 거스르기에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며, 또한 경계를 따라 온갖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러한 경계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망령된 생각을 쉬어 없애려 들지 말라는 것은, 이는 마치 소리를 내어 진동을 그치게 하려는 것과 같다. 또한 망상의 경계 속에 있으면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본래 스스로 지각하는데 거의에 안다고 하는 마음을 더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자연히 거울에 사물이 비추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여래의 길을 가는 이는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과 보살님께 공덕의 뿌리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자리에 앉아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일을 행하는 자로서, 이런 사람을 일체종지 곧 일체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성취한 이라 한다.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각경 ; 변음보살장  (0) 2023.11.15
원각경 ; 위덕자재보살장  (0) 2023.11.15
원각경 ; 미륵보살장  (0) 2023.11.14
원각경; 금강장보살장  (0) 2023.11.13
원각경 ; 보안보살장  (1) 2023.11.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