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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방송 강의를 통해 규봉 스님의 『원각경』 대소를 번역하여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그래서 앞으로 『원각경』을 기술하는 데 있어 가급적 경문을 적게 싣고 핵심 개념이나 내용을 담았다.

『원각경』은 요의경으로서, 마음의 요체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경이며 이망증진, 곧 허깨비 같은 망념이나 망상을 여의어 진여실상을 증득케 하는 지침서라 하겠다.

먼저 경의 서문 격인 전문이다. 경문을 개괄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도안 스님이 주창한 서분, 정종분, 유통분, 삼분으로 분류해 왔다. 처음 경전이 설해지는 서분에서는 여섯 가지 요건을 구비하는데 이를 육성취라 한다. 믿음의 성취, 들음의 성취, 설법할 때의 성취, 경을 설할 분의 성취, 경을 설할 장소의 성취, 경을 듣는 이의 성취다.

그중에 가장 처음은 믿음의 성취 곧 여시다. 이는 부처님께 직접 들었다는 의미이며, 부처님께서 친히 맡기고 부탁한 것이며, 또한 아난이 일찍이 의심을 벗게 된 것으로서, 아난이 '법을 받는 사실'이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믿음으로 따르는 말'이며, 불법대해에 믿음으로 능히 들어가고, 지혜로 능히 건너간다 하겠다. 믿음으로 인해 말한 이치가 순조롭고, 순조로운 즉 스승과 제자의 도가 이루어지는 감응도교이겠다.

월간통도. 2020. 01


여는 이치의 측면에서 모든 것을 다 이르고, 시는 무비 곧 아닌 것이 모든 것이 잘못됨이 없다는 의미다. 『원각경』에서 여시는 곧 범부 성인의 인과가 원각과 다르지 않은 것을 "여"라 하고, 이 인과가 허물과 잘못됨을 떨쳐 버리는 것이 "시"라 하겠다. 그래서 여는 진여, 진제, 진리 그 자체이며, 시는 진리 그 자체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 것이다.

들음의 성취는 이근 이 식을 일으키는 곧 이식으로서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성품을 의미한다. 이를 『능엄경』에서는 반문문성, 곧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으로서, 성품과 식으로 듣기에, 이는 미묘한 귀로 진제와 속제의 무애한 법문을 듣는 뜻이겠다.
 
설법할 때의 성취는, 스승과 제자가 한데 모여 설하는 것이 원만한 것을 총괄적으로 일시라고 했다. 단순히 시간을 표하기보다는 어디에도 걸림 없는 두루 하다는 의미로 '일'이라고 했다. 이는 설하고 들을 때에  마음과 경계가 사라지고, 이치와 지혜가 융합되고 범부와 성인이 같고, 본각 곧 본래 갖춘 깨달음과 시각 곧 수행해서 얻은 깨달음이 모여 이 모든 두 법이 한결같이 하나가 되는 때라 하겠다. 또한 시간을 정해 놓으면 경에 따라 같지 않은 번거로움이 있기에 모든 경에 통하도록 '일시'라고 했다.

설법한 장소의 성취는, 대부분 경이 설법한 구체적인 장소, 곧 국토를 표하는데 반해 『원각경』은 근본삼매인 참다운 지혜, 곧 진지의 경계에 나아가는 '신통대광명장삼매'가 장소다. 이는 수용신 곧 증득해서 깨달은 몸으로, 수용토 곧 법열을 받아들이는 정토에서 설한 의미이며, 깨달은 법을 스스로 누리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뜻이다.

서분은 육성취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시 곧 진리를 아난으로부터 대중이 함께 듣고 확인됨으로 해서 증거가 되어,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수용토록 하며, 수승한 법회에 '바가바' 곧 온갖 덕을 갖춘 석가모니불께서 타수용토 곧 교화하는 국토인 불이경계제국토에서 신통대광명장삼매에 들어 대보살 십만 대중 그리고 열두 상수보살과 함께 평등법회를 펼치고 있다.

이어서 문수보살장을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여래의 인지법행 곧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 방법과 그에 따른 과정을 묻는 것이 핵심 냉용이다. 인지법행이란,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성취하는, 다시 말해 수행을 해서 법성 곧 불성을 증득한다는 뜻이다. 대집경에 법행이란, 몸과 마음을 관해서 마음에 밖으로 일체 상에 탐착 하지 않고 겸허하게 뜻을 낮추어 교만을 내지 않으며, 애욕에 물들거나 끄달리니 않고, 경계에 모두 쉬고, 길이 번뇌를 여의며, 그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면 이를 일러 법행이라 했다. 이러한 경지에 되면 "마치 도공이 진흙을 잘 반죽해서 물레 위에 놓고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인지법행은 '일실경계'와 뜻을 같이 한다. 일실경계 곧 평등하고 진실한 깨달은 경계로서, 중생심의 본체가 본래부터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자성이 청정하여 장애가 없고, 평등하게 두루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모양으로서, 일체중생심과 성문 벽지 보살의 마음과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한결같이 불생불멸하여 물듦 없이 적정해서 진여의 모습이라 하겠다. 마치 허공이 분별하지 않고 평등하고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하겠다.

 '보살들이 대승 중에 청정심을 일으켜 모든 병을 멀리 여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실 것을 청했는데, 여기서 청정심이란, 대지심이며, 직심 곧 순순하고 곧은 마음,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진여만을 올바로 생각하는 마음이며, 유무를 모두 여의고 능소 곧 주체와 객체가 끊어지는 등 일체심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으로, 모든 병을 여의고, 병을 여읜 후에 길이 망실함이 없고, 어떠한 마구니에게도 유혹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미래의 말세 중생이 대승을 구하는 이들로 하여금 사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기를 세 번 청했는데, 법을 세 번 청하는 것은, 한두 번 청하는 것은 성의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세 번을 넘기면 번거로워 어지러울 수 있기에, 세 번을 청함으로써 정성스레 공경함을 표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주위를 세 번 도는 의식과도 같다.

말세에는 거성요원 곧 성인과 떨어져 있는 것이 멀고 멀어서 근심이 매우 깊은 때를 이르는데, 성인과 떨어져 있다는 것은, 부처님은 입멸하셨지만 법은 지속되기에 떨어져 있다고 표현한다. 법이 지속되어 그 속에서 법열을 느낀다면 결코 말세라 할 수 없으리라

사견에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본심 밖에 따로 구하는 것으로서, 곧 참되고 허망한 일을 보게 되는데, 그로 인해 바른 견해를 얻기 어려우며, 마음이 오욕에 방종하며, 혹 이도에 미혹되어 익히며, 이승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대승의 마음을 일으켜 법문을 듣게 한다는 의미다.

'일체 청정과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그리고 바라밀을 유출하여 보살에게 가르치셨다.'는 경문에서 『원각경』에서의 보리 곧 깨달음이라는 것은, 시각 곧 가르침을 받아 수행한 깨달음과, 본각 곧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이 합치한 것을 뜻한다. 또한 삼법 곧 반야, 해탈, 법신의 세 개념을 통합해서 같은 의미인데, 이를 하나의 밝고 깨끗한 둥근 구슬에 비유하면, 밝은 즉 반야요 깨끗한 즉 해탈이며 원만한 본체는 법신이요 모두를 종합해서 '대열반'이라 하는데, 이는 원각자성에서 발현된 것이겠다. 그래서 '유출'이라고 했는데, 이는 원각으로부터 건립 곧 성취된다는 의미로, 깨달음은 본체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고 중생 본각의 심지 곧 마음바탕이라 하겠다. 비록 오염된 듯하지만 오염되지 않으므로 '청정'이라 하고, 또 종래부터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므로 '진여'라 한다. 이는 무명으로 덮여 있는 까닭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제불 여래께서 인지 곧 수행 과정에서 시각의 지혜를 밝히고, 무명을 다 끊어서 시각과 본각이 합일한 구경각을 성취하며, '보리'라는 결과를 얻어 '적멸일심'에 희귀하는 것을 '원적'이라 하며, 이를 '열반'이라 부른다. 이러하므로 모든 부처님의 과덕은 원각일심을 의지하여 다 건립하므로, 그래서 '유출한다'라고 했다.

결국 원각자성의 광명에 의지하여 적멸인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를 돌이켜 비추어 보며, 나아가 원만하고 사무치게 비추어 남음이 없어, 무명이 영원히 끊어지고 법신을 원만하게 증득하고 되는데, 이는 '원조청정각상'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서야 비로소 불도를 이룬다 하겠다. 여기서 무명이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올바른 지혜가 없는 것을 말한다. 곧 진리에 어두워서 사물에 통달하지 못하고 사물과 현상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 상태로 어리석음을 뜻한다. 무지, 우매, 특히 불교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명의 명을 법으로 해석해서 '법'이 없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되며, 이로 인해 수많은 번뇌가 일어나 끊임없는 윤회가 이루어진다 하겠다.

무명과 생사본말의 실체가 없는데, 다만 중생이 이렇게 없는 중에 미혹한 정으로 어긋나게 잘못 생사를 보게 되기에 무생 중에 망령되이 생멸을 본다 하겠다. 『화엄경』에 "일체법이 생함이 없으며 일체법이 멸함도 없으니, 능히 이와 같이 알면 제불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라고 이른다.

"허공의 성품은 항상 움직이 않는다." 했는데, 허공의 성품은 일체법이 공해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본래 생하거나 멸하는 일이 없는 것이기에, 털어내어 궁극에 공하도록 한 것이 아니며, 일체법이 여여해서 오고 가지 아니하며 이미 간 것도 아니며 현재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겠다.

『불장경』에  "일체법이 공해서 터럭만큼의 모습도 없다." 했다.







선행 스님께서는
진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통도사 승가대학과 율원을 거쳐, 승가대학원 1기로 졸업했다.
백양사· 선운사 승가대학장을 역임했으며

불교방송에서 『원각경』 강의를 진행했다.
현재 통도사에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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