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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문수보살장은 부처님께 인지법행을 열어 보여 주기를 청해서 정원각을 깨닫게 했고, 여기 보현보살장은 부처님께, 다시 깨달음을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키게 한다.

 보현보살은 세 가지를 질문한다. 먼저 '본래 있는 것이 아닌 허깨비와 같은 무명을 어떻게 허깨비 같은 몸과 마음으로 닦을 수 있는가'인데, 이는 문수보살장에게 "허고의 꽃인 줄 알면 곧 윤회가 없다."는 경문에서 이어진 질문이다. 해석하면 몸과 마음이 이미 허깨비 같다고 하면 능히 아는 것도 바로 허깨비가 될 터인데, 곧 허깨비로서 허깨비를 어떻게 닦느냐는 물음이다. 이에 법과 비유를 들어 보겠다.

월간통도. 2020. 02


하나의 수건을 묶어 한 마리 말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수건 자체는 진성에 배대가 되고, 말을 만든 기술은 심식[의식]에 배대가 되며, 말의 모습은 의타기법 곧 인연으로 생긴 것에 배대가 된다. 그러나 본래 말은 없기에 이는 공함에 배대가 되며, 또한 어리석음으로 집착해 말로 여기는 것은 미혹하여 주체와 경계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허깨비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

두 번째 질문은 '만약 온갖 허깨비 같은 무명이 멸했다면 몸과 마음도 없어져야 될 터인데, 누가 수행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다. 곧 모든 것이 끊어져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수행하겠는가 하는 질문으로서, 허깨비가 공해서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인식마저도 모두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떨쳐 무엇을 수습하며, 어떻게 다시 허깨비 같은 삼매를 수행하라 하는가 하는 질문인 것이다. 금강경에 "중생의 마음이, 성품이 본래 공적 함이요, 공적한 마음은, 실체엔 색상이 없거니 어떻게 수습해서 본래 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세 번째 질문은 '무명이 허깨비인 줄 모르고 망상 속에 빠져 사는 중생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가'이다. 곧 닦지 않는 실수를 멈추게 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체가 허깨비 같아서 깨달음 아닌 것이 없으며 또 깨달음의 성품은 생겨남이 없이 본래 청정한데 무엇을 수행하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러한 실수를 멈추게 하는 가르침으로, 본래 공하다 해서 애당초 닦지 않으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겠는가? 결국 허깨비와 같이 공한 사고에 빠져 닦지 않는 실수를 멈추게 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닦아야 모든 헛된 것들을 영원히 여윌 수 있는가? 일찍 논(논장)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진여 곧 본래 청정하고 공한 진리만을 생각하고 방편으로써 갖가지 훈습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침내 청정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또한 수능엄경에 이르되  "이치로는 단박에 깨쳤음이라 깨달음으로 인해 아울러 녹아지거니와, 현상은 단박에 제거되지 않음이라. 차제 곧 수행의 점차를 밟아 다한다."라고 했다.

허깨비 같은 삼매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 허깨비 같은 줄 깨달아, 곧 명백하게 알아 본각 진여에 명합하면, 마치 거울에 영상이 비춘 것과 같아서 수용하거나 거절하지도 않게 된다는 의미로, 또한 정수라고 한다. 여기서 정이라는 것은 산란한 마음을 여윈다는 의미이며, 수는 무념무상 곧 망상이나 망념이 없는 경계에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또한 일체가 허깨비와 같음을 깨달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원각 · 진여 · 여래장 ·법계 · 열반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허깨비를 닦는다는 것은, 허깨비가 다한 것은 원래 끊어져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논에 이르기를 "자성청정심이 무명풍으로 인해 움직이며 내지 무명은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는 것이, 마치 바람이 그침에 움직임이 사라지는 것 같으나 습한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 것 같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여래원각묘심은 곧 성정진심 일심이라고 하는데, 온갖 상을 여윈 것을 원이라 하고, 공하지 않기에 각이라 하며 물들되 물들지 않는 것을 묘라 한다. 해석하면 온갖 상을 여윈 도리를 깨쳐 인연을 따르되 물들지 않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허깨비가 다해 끊어져 사라진다는 것은, 능소 곧 주체와 객체가 모두 없어져 원각에 계합하는 것으로서, 허깨비가 다 사라졌으나 개달음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치 파도가 물로 인해 일어났다가, 파도가 사라져도 물은 존재하듯이, 허깨비가 깨달음으로부터 일어남에, 허개비가 사라져도 깨달음은 온전히 그대로인 것과 같다.

허깨비를 여의고 수행함에 공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허물을 털어내야 하는데, 먼저 허깨비에 의지한 깨달음이 인연을 상대해서 일어난다면, 이 또한 허깨비임을 털어낸 것이요, 다음에 허깨비를 상대한 깨달음은 바로 허깨비이지만, 허개비를 상대하지 않은 본래 갖추고 있는 깨달음은 마땅히 허깨비가 아닐진대, 만약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면 곧 허깨비와 같다 했으며, 그리고 허깨비를 깨달은 각과 본래 갖추고 있는 각이 모두 없는 것을 진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허깨비와 같기에, 마음을 일으켜 생각이 움직여서 헛되고 참되다고 [진망] 이르는 것이, 허깨비 아닌 것이 없다.

허깨비가 사라진 것을 부동 곧 움직임이 없다고 말한 것은, 만약 사라져 의지함이 없어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의지한다면, 원각의 진심이 자연히 드러나 원래 허깨비의 변화도 없을 것이기에 부동 곧 움직임이 없다고 한다. 거듭거듭 허개비를 여윈다는 것은, 먼저 모든 허깨비의 경계를 여의고, 다음에 허깨비를 여의었다는 마음마저 여의며, 또한 허개비를 여의었다는 여윔마저도 떨쳐 버려 종국에는 떨치고 떨친다는 의미이다.
 
모두 멀리 여윈다는 것은, 지관으로 설명되겠다. 여의는 것을 지라 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쉬어 영원히 반연을 좇지 않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만남에 응당 함께 거쳐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여의는 것을 관 한다는 것은 허망한 법은 체성이 모두 공한 것이 마치 꿈속에 수갑을 차고 있다가 깬 후에는 이미 없는 격이라 하겠다. 그래서 "허개비를 안 즉 여의었다." 했으며, 입불경계경에서는 "제법이 마치 허깨비와 같음이요, 허개비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 했다. 그리고 매이지 않는 것을 관이라 하기에, 모두 지관으로써 여윔에 곧 정혜가 평등한 것이다.

허개비가 제거되어 여윌 것이 없다는 것은, 진각 곧 참된 깨달음에 계합한 것이며, 진각 속에서는 허깨비를 여윌 것이 없다는 의미겠다. 하택 선사는 "허망함이 일어난 것이 곧 개달음이니, 허망함이 사라지고 깨달음이 사라져서 깨달음과 허망함이 모두 사라지면, 이것이 진여"라고 했다. 이는 허깨비 같은 깨달음의 허물을 털어 버리고, 공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과 세상을 모두 무상 · 무아 괴로움으로 보는 반면, 본래부터 생멸이 없는 원각의 마음이 중생들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땅으로써 원각이 비유하면, 나무가 본래 당에서 나옴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태워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오직 땅은 남아 있는 것과 같고, 갖가지 허깨비의 변화가 원각묘심에서 생기는 것과 같아, 허개비의 변화는 거듭 떨쳐 다한다 해도 원각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다.

 지환즉리 이환즉각 곧 허깨비 같은 줄 알면 바로 여의고, 여읜즉 깨닫는다는 것인데, 단박에 무명이 허깨비 같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돈오 곧 단박에 깨치는 최상승의 법문이겠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꿈에서 몸을 병을 보고 의사에게 물어 약을 구했다가, 깨고 나서는 이미 꿈인 줄 알게 되어 다시 어떠한 처방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수행함에 있어 만약 방편으로 닦아 점차 여의기를 기대한다면, 이는 실로 법이 있다고 집착하는 변계소집 곧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라, 진정한 수행이라 할 수 없다.

 보현보살은 수행의 근본 곧 수행법과 수행하는 자에 대해 묻는다. 허개비로서 허깨비를 어떻게 닦는가, 허개비가 사라진다면 무엇으로 수행하는가, 허개비와 같이 공하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허개비 같은 변화가 모두 여래의 원각모심에서 나왔으니, 마치 허공 꽃이 허공에서 생긴 것과 같다 하겠다. 또한 허깨비에 의지해 허깨비가 사라졌다 해도, 깨달은 마음은 온전히 그대로이다. 이에 허개비 같은 깨달음의 허물을 털어 버려야 하며, 허깨비를 여의고 수행함에, 공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허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나무를 서로 비벼 불이 나면, 나무는 타 없어지고 재는 날아가 연기마저 사라지듯이, 허깨비는 사라지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니기에, 이는 물질 불생불멸의 도리이다.

보현보살이 깨달음에 드는 방편과 점차를 물으니 부처님은 끊어야 할 무명이 원래 허깨비인 줄 알면 나고 죽음을 벗어나며, 나고 죽음을 벗어나면 바로 깨달음이기 때문에 방편과 점차를 세울 것이 없다고 답하신다. 무명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실체 아닌, 나고 죽음을 실로 있다고 보는 환상을 무명이라 이름하였기에 무명은 허깨비와 같다. 그러므로 무명이 본래 공적한 곳에서 공도 다시 공한 줄 알면, 억지로 닦아서 얻음 없이 계급과 차제를 넘어 여래의 공덕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게송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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