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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음보살은 변재 곧 말솜씨가 뛰어나 막힘이 없는 보살로서, 일체법에 자재하며, 깊고 예리하게 분석하여 통달하며, 실상을 설하며, 물음이나 설명에 단절함이 없으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대승법을 설한다 해서 변음보살이다.

변음보살은 앞서 부처님께서 위덕자재보살에게 수행의 기본 방편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시는 것을 듣고, 그중의 하나만 택해서 닦아야 하는지, 세 가지를 병행해서 닦아야 하는지, 또 무엇을 앞에 닦고 무엇을 뒤에 닦아야 하는지 그 차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이에 중생의 병통에 따라 보살이 삼관을 몇 가지로 닦아 익히는가를 묻는다. 중생의 치우침에 따라 어떤 대는 차제로 점차 닦아 가기도 하고 한 생각에 뚜렷이 닦기도 하여 스물다섯 가지의 차별이 생기나, 그 모두가 원각에서 일어나 중생이 실상을 깨달도록 해 주니 그 닦음은 닦음 아닌 닦음이다. 변음보살의 물음은 나만을 위한 이기심 곧 아상이나 법을 얻었다는 아만에서 나온 물음이 아니라, 말세 중생이 실상을 깨달아 원각의 문에 들어서도록 하는 대비의 마음에서 나온 물음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변음보살을 찬탄하고 스물다섯 가지 선정의 차별에 대해 답해 주길 허락하신다.

또한 수행의 근본이 삼관법 곧 정관·환관·직관을 수행하는 데 있어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한 사람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하는가, 세 사람이 각기 하나를 닦아야 하는가, 전·후로 닦아야 하는가, 동시에 닦아야 하는가, 차례로 닦아야 하는가, 차례를 초월해서 닦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했는데, 수레바퀴는 무찌른다는 뜻으로 미혹과 장애를 무찔러 바른 지혜로 전환시키는 의미가 있다. 삼관의 수행법은 수레바퀴가 둥글게 서로 연결되었듯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삼관을 선정의 수레바퀴에 비유한 것은, 운반이라는 의미가 있어 사마타와 삼마발제와 선나가 하나의 선정이 되어 수행자를 원각이라는 목적지로 운반해 주는 까닭이다.


수행하는 법은 비록 중생의 취향과 근기에 따라 정해짐이 없이 스물다섯 가지로 분별되지만, 그 수행하는 마음가짐은 모두 반드시 닦아 익힐 것이 없는 원각에 의지해야 하기에, 허개비의 힘으로 닦아 익혀야만 한다.

주체와 객체 그리고 식의 모습이 고요하므로 나의 고요한 마음에 시방 여래의 마음이 나타나고, 나의 마음이 시방 여래의 마음이 나타나고, 나의 마음이 시방 여래의 두루하게 되는 것을 사마타라 한다. 이는 있고 없는 모습을 통달함으로써, 모습에 물든 망상을 사마타행을 통해 바로잡아 닦아 가는 것이다. 사마타를 통해 일체 번뇌가 멸하며, 몸과 마음에 있어 선·악을 조화시키며, 오욕을 여의게 하며, 탐·진·치 삼독을 청정케 한다. 사마타는 지라 번역하며, 정의 다른 이름이며, 적관의 뜻이다. 이는 물들고 청정함의 경계에 마음이 망령되어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사마타라 한다.

'고요하게 비추는 힘'은 능히 살피는 지혜의 힘이니 공관으로 허망한 생각과 이 몸이 좇아온 곳이 없음을 바로 살피며, 나고 죽음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열반을 성취하니 이것은 사마타를 홑으로 닦되 고요함의 행인 이 관이 흐린 물을 맑게 하듯 번뇌의 흐름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깨달음 속에서 어떠한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로서, 곧 고요히 앉아 항상 스스로가 체득한 내적인 즐거움에 머물러 그것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서 한번 열린 원각의 문을 더 활짝 열어 놓는 관행을 닦는 것이다.

심성은 식으로서, 식이 육근 육진으로 더불어 셋이 화합하여 각기 자성이 없으며, 다만 이는 무명이 진을 미혹해 일어났기에 허깨비 같다고 한다. '변화시킨다'는 것은, 차별적인 허깨비 같은 지혜를 변화해 일으켜서,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에 대해 낱낱이 진정한 청정에 들게 하며, 갖가지 방편을 변화해 일으켜서 근기에 응해 설법해서 허깨비 같은 중생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 곧 경안이라는 것은 유식의 용어인데, 마음 작용에 있어 심신이 평안하며 융통성이 있고 경쾌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고 침울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하는 혼침의 대비되는 개념이며, 대비심이 정으로부터 일어난 마음이다.

흙이 싹을 자라게 한 것과 같다는 것은, 종자와 곡식이 흙에 의거해서 싹이 자라나 거둘 때에는 싹과 흙을 모두 버리는데, 종자는 깨달은 마음에 비유하며, 흙은 법에 비유하며, 싹은 지혜에 비유가 된다. 청정한 깨달음의 마음으로 모든 허깨비 같은 법을 좇아서 허망한 마음을 잊고 깨달음에 들어간즉, 앞에서 좇았던 법과 허망한 마음을 모두 잊는 것이다.

삼마발제는 등지라고 번역하며, 혼침 곧 몸과 마음이 들뜨고 소란스러운 상태를 여윈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로서 관이라고 하며, 경문의 '여환삼매'를 일컫는다.

나고 죽음 없는 열반에도 머무름 없이 대자비를 성취하여 원각의 땅에서 묘한 행을 일으키는 보살의 수행을 삼마발제라고 하며, 나고 죽임 끊어진 원각의 본바탕은 땅과 같고, 깨달음의 땅에서 발현되는 대비의 행과 살핌 없이 살피는 지혜는 당이 길러 내는 싹과 같다.

사마타행이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데 반해, 삼마발제는 고요함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중생을 향한 자비로써 그 수행을 삼는다. 마치 흙에서 싹이 나와 자라듯 고요한 땅에서 자비의 싹이 나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며, 자비는 원각에서 일어나고 다시 그 원각을 더욱 뚜렷하게 한다.

'다라니에서 고요한 생각과 모든 조용한 지혜를 잃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이대의 다라니는 원각의 다른 말이다. 지금 있는 모습과 한 생각을 허깨비처럼 살펴 있음에 걸리지 않고 공한 삶의 터전에서 묘한 작용을 일으키되 늘 고요한 한 생각을 잃지 않으면 허깨비 같은 변화의 작용을 자유자재하게 운용하는 것이다. 원각은 능히 모든 세계와 존재를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에 다라니라 하며, 다라니라는 말은 총지로 해석되며 '일체법을 간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나를 닦는 것은, 허개비 같은 무명을 타파하고 갖가지로 중생을 교화하되 그 교화하는 행위 역시 허깨비임을 알아, 그 행을 마음 가운데 주지 않고 지혜로서 번뇌가 끝까지 다한 실상의 자리를 증득해 들어가는 수행이다.

환관법인 공관 수행을 계속해서 원각이 열리며 사마타의 고요한 지혜와 삼마발제의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가 갖추어지며, 선나는 바로 이 같은 사마타와 삼마발제의 경계를 다시 환관법으로 돌려 원각의 개달음을 완성시킨다.

묘한 개달음의 경계는 몸과 마음이 있는 경계가 미칠 수 없으며, 중생상 수명상의 두 가지 장애를 끊어져 그 두 가지 장애가 한갓 들뜬 생각이 되는 것이며, 나고 죽음의 허깨비와 열반의 고요함을 모두 취하지 않고 바로 원각에 수순하는 이것이 바로 움직임에 움직임 없고 고요함에 고요함마저 없는 중도의 바른 관 곧 중도정관이며 선나의 방편이다.

한 마음에 바로 삼관을 갖추면, 있음에 들어가도 있음이 아니고 없음에 들어가도 없음이 아니며, 나아가 중도를 말해도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가운데 모습도 없다. 이처럼 묘한 관을 두렷이 닦으면 '경계에 나아가 바로 중도'이므로 모습에 나아가도 개달음이고, 모습 없는 성품에 나아가도 개달음이며, 모습도 아니고 모습 아님도 아닌 중도를 말해도 깨달음이다. 이렇게 살펴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한 마음에 갖춰진 세 가지 관 곧 일심삼관이니, 경에 '세 가지 관을 뚜렷이 닦아 자성의 청정함에 수순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각의 실상을 깨닫는 데는 몇 가지 방편이 있는지를 묻고, 허깨비의 힘으로 닦는 데는 스물다섯 가지 방편이 있으니, 사마타는 번뇌를 끊고 고요함에 드는 것이며, 삼마발제는 고요함 속에서 일어난 원각의 힘으로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며, 선나는 실상을 증득한 것이라 한다.

사마타를 선두에 하여 삼마발제와 선나를 닦는 관법이 7 방편이 있으며, 삼마발제를 선두로 하여 사마타와 선나를 병행해서 닦는 관법이 7 방편이 있으며, 사마타 · 삼마발제 · 선나를 통합해서 닦는 한 가지 방편을 모두 종합해서 스물다섯 가지 방편이 있고, 스물다섯 가지로 굴려 쓰는 선정이 바로 보살이 받아 지녀야 할 바른 수행이다. 이는 법행과 젖정과 사유의 방편으로, 참회로써 구하고 발원해야만 한다.

『금강경』에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온갖 보배로 보시'한 공덕도 금강경의 사구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곧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한결같이 허망한 줄 알아, 모든 상을 여의었을 때 참다운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는 게송을 타인을 위해 설해 준 공덕에 비교할 수 없다고 했듯이, 어떤 사람이 원각의 걸림 없는 법문을 듣고 한 찰나 사이에 수순하고 닦아 익힌 공덕에 그 어떠한 것도 비교할 수 없겠다.

사마타행 · 삼마발제 · 선나의 방편으로 인해 중생들의 허망한 집착의 병을 여의게 하며, 필경에는 병을 다스리는 관행의 자취마저도 여의어 원각에 들게 한다.


대혜 선사의 게송에,

뒤바뀐 생각 일어나면 나고 죽음 이어지고
뒤바뀐 생각 사라지면 나고 죽음 끊어지네.
나고 죽음 끊긴 곳이 열반의 공적함이나
열반의 공적한 곳도 눈 속의 가루로다.
열반 이미 공적하다면 눈 속 가루 무엇인가,
흰 구름은 푸른 산에 올 수 있지만
밝은 달은 하늘에서 내려오게 할 수 없노라.

 


라고 하였다. 이는 삼관의 방편도 중생의 병에 따르는 약일뿐 단박 깨침의 길에는 한갓 눈 속의 가루와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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