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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에 흔히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옛 스님들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부도밭이다. 하지만 몇몇 사찰에서는 하마비와 당간을 먼저 보게 된다. 하마비와 당간은 '잘나가던 시절' 사세나 사찰의 종파를 짐작하게 해 주는 유물이다.

 

하마니, 모두 가마에서 내리라

  하마비下馬碑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고려 인종 때 처음 세워졌다는 설이다. 하지만 문헌의 근거는 없다.문헌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는 조선 태종 때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태종 13년(1413)의 기록에는 예조에서 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봉선사 하마비

  "궐문 동구에 마땅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여 표목을 세우고 그 전면에 쓰기를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이곳에 들어온 자는 가운데 길로 다니지 못한다. 궐문 밖에 이르면, 1품 이하는 10보步 거리에서 3품 이는 20보 거리에서 7품 이하는 30보 거리에서 말에서 내리라.' 하고 종묘 동구에도 표목을 세우시고 그 전면에 쓰기를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하소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 하마비는 불교의 유물이 아니었다. 왕실의 사당인 종묘 그리고 궐문 밖에 설치되었고 시간이 지나자 성균관과 왕릉의 앞 그리고 몇몇 서원으로까지 확대된다.

 

  하마비가 사찰로까지 확대된 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 유생들이 사찰에서 벌인 횡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람을 할 때 승려들을 불러 경마잡이를 시키는가 하면 사찰에서 기생을 끼고 노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능침사인 정인사와 여말선초의 최대사찰인 회암사에서 유생들이 기물을 부수고 사찰의 보물을 훔치는 훼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조선 시대 불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조선의 측천무후 문전왕후였다. 문정왕후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자 선교 양종의 수사찰首寺刹이었던 봉은사와 봉선사에는 아예 유생의 출입을 금지해 버린다. 난동을 벌인 주모자 역시 투옥되었다.

 

  물론 유생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시 문정왕후를 옆에서 보좌하던 보우(普雨, 1515~1565) 대사의 목을 베야 한다고 상소가 올라갔다. 하지만 상소물을 본 문정왕후는 더욱 불같이 화를 낸다. 불이 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격노한 문정왕후는 전국의 큰 사찰 입구에 다수의 하마비를 세우도록 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마비는 사찰로까지 들어오게 된다. 아직까지 하마비가 남아 있는 사찰은 많지 않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를 비롯해 경기도 양주 봉선사, 부산 범어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순천 선암사와 송광사 등 손에 꼽을 만하다.

 

  우리가 자주 듣는 하마평이라는 말도 이 하바비에서 유래했다. 궁궐 밖의 하마비 앞에는 궁으로 들어간 양반들을 말과 함께 기다리는 경마잡이들이 모여 있었다. 자연스레 정치인들의 운전기사 모임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들은 양반들은 지근거리에서 모시기 때문에 정보들이 많았고 요즘으로 치면 '~카더라' 소식통이나 증권가의 '찌라시' 같은 역할도 했다. 이들이 주인을 기다리면서 떠드는 과정에서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것이 하마비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하마평이 되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우쭐대며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이야기하는 하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재미있다.

부처님 재세 시에도 하마비가 있었다?

  부처님 재세 시 신심이 깊었던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은 수도인 왕사성의 영취산에 올라 부처님을 뵐 때면 산 입구에서 내려 걸어서올라가곤 하였다. 어쩌면 '교양인'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귀족이나 양반이 모두 '교양인'이지는 않다. 또 부처님이 거처하시던 영축산은 산이라는 특성상 열려 있는 곳이었고 전축물이 없었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은 영축산 길목에 '하승下乘'과 '퇴범退凡'이라는 기념탑을 건립했다고 《대당서역기》는 기록하고 있다.

 

  하승이란 수레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뜻이고, 퇴범이란 불경스러운 이는 범접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또 퇴범에는 속된 마음을 버리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다가오라는 뜻도 있다. 하마비의 연원이 하승과 잇닿아 있는 부분이다.

 

  경북 경주 포석정 옆, 남산의 진입로이기도 한 삼불사 사찰 입구에는 '세심단속문'이라는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절에 들오기에 앞서 마음을 씻고 세속의 속된 기운을 끊으라는 의미다. 종교를 통해서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자신을 통해서 더 크게 변한다는 점에서 깊이 새겨볼 말이 아닌가 한다.

당간幢竿, 기둥 하나로 사찰의 소속과 규모를 말하다

  신성한 곳에 높은 깃발을 세우는 문화는 아시아 전 지역에서 발견된다. 인도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사리탑 앞에 장엄한 깃발을 장식한 큰 깃대를 두 개씩 세웠는데 이를 표찰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궁궐 앞에 화표라고 해서 쌍으로 된 돌기둥을 세워 존엄을 표시했다. 본래 중국 전설의 요임금 때부터 나무를 세워 표시하던 것이 후일 돌기둥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 샤머니즘을 숭상하던 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신장대라고 해서 신이 오르내리는 통로가 되는 거대한 나무를 신성 지역에 세우는 문화가 있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이런 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솟대가 되고 경상도의 강신무들이 점집 앞에 세우는 신장대가 되었다. 우리의 신장대 문화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동이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북과 방울을 매달아 놓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확인되는 신장대는 두 개가 아닌 하나이다.

 

  인도와 중국은 입구에 촛대처럼 좌우로 벌려 세우는 쌍문화였고 유목의 샤머니즘 전통은 피로침처럼 외문화였다. 우리나라 고대 사찰들은 흥미롭게도 인도불교의 전통인 쌍문화를 수용하지 않고 외문화를 받아들인다. 이는 불교 이전에 존재하던 샤머니즘 전통을 한국불교가 배척하지 않고 수용한 결과이다.

 

존재하지만 잊힌 당幢 문화

  깃대를 세우는 것은 당幢 문화라고 하는데 여기서 당이란 깃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깃발을 허공에 달 수는 없다. 깃발을 세우기 위해서는 장대로 된 깃대, 즉 당간이 있어야 한다. 또 이 당간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지주가 있어야 하는 이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설명이 일견 복잡한 듯하지만 관공서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기게양대의 구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런데 후일 이 당 문화가 사라지면서 사찰의 진입로가 삼문구조가 변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절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일주문이다.

 

  당간은 충북 청주 용주사지나 충남 공주 갑사처럼 철로 만들거나 경남 양산 통도사나 전남 담양 객사리의 석당간처럼 돌로 만든 경우가 있지만 나무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썩는 경우가 많아 현재는 당간을 지지해 주던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당간지주는 거대한 나무를 지탱해야 했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당간에 특정 깃발을 매달아 소속 종파나 법회의 내용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하고는 했다.

 

  또한 당은 곧 간판과 같은 것이니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의 크기가 당시 그 사찰의 사세와 위상을 나타내 주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보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원도 강를 굴산사지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5.4미터나 된다. 당간지주가 이럴 경우 그 속에 세워지는 강간은 적어도 30미터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또 그 위에 걸리는 당, 즉 깃발도 10미터 가까이 되었을 것이니 그 장엄함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장엄한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사찰 입구 한편에서 미리 알고 찾아오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서글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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