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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또는 연인, 부모와 자식, 도반과 동료 등 주변인들로부터 관심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사랑받고자 하는 집착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 중 하나다. 갓난아이가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이는 하나의 개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겠다. 관심과 보살핌으로 위태로운 생명, 몸과 마음은 안정을 찾고 성장을 한다.

  불교에서는 사랑받고자 하는 집착을 '갈애'라고 한다. 갈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란 용어의 단순한 뜻을 넘어, 존재의 뿌리와 직결되는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불교에서 갈애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집착'으로 우리를 '윤회하게 만드는 근원적 마음'으로 설정된다. 《앙굿따라니까야》에는 우리 몸을 존재하게 하는 요소의 네 가지로  "자양분 · 갈애 · 자만 · 성교"를 들고 있다.

 

  우선, 이성 간의 끌림에 있어 애욕인지 사랑인지부터 구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집착인지 희생인지 구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욕은 집착에 근간을 두고, 사랑은 연민에 근간을 둔다. 여기서 애욕과 사랑을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너는 나로 인해 행복하니?"라면 사랑이고, "너는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니?"라면 집착이다. 상대방의 행복이 안중에 없는 관계라면, 그저 내 욕망 채우는 비인간적인 관계일 뿐이다. 연인 사이 · 남편과 아내 사이 · 부모와 자식 사이 · 스승과 제자 사이는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집요한 불만과 강요가 계속된다. 또 희생이라는 탈을 쓰고 억울한 집착은 계속된다.

 

자비의 상징<수월관음도>의 부분, 》, 미국 하버드대학박물관 포그아트뮤지엄 소장

  불교에서는 '감각적 욕망은 여의어야 하는 것'이고 '자비는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성욕과 자비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방법으로 부정관不淨觀을 가르치셨다. 육체의 더러운 실체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면, 아름답다는 착각과 끌림에서 벗어나 오히려 염오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부정관으로 그러한 착각을 다스리도록 가르치셨다. 물론 통찰지가 균형을 이루면 염오 하는 마음을 넘어 연민하는 자비의 마음이 나온다는 논리이다.

 

  자비는 바라는 것 없고 분별하지 않는 무조건적이고도 무차별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대상은 나와 친밀함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람 또는 모든 존재로 확대된다.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일 때. 우리는 드디어 결핍의 감옥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을 구현하는 존재를 불교에서는 '보살'이라 한다.

  자비를 통해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 보살! 많은 보살 중에서도 자비의 대명사는 <관세음보살>이다. 《화엄경》에는 '보살의 마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아이가 삿된 견해에 빠져 인생을 헤매고 있는데, 혼자 깨달음을 구해 무엇하나. 어떻게든 아이를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헛된 고통에서 끌어내어 빛을 향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아이'는 우리들 '중생'을 말하고, '삿된 견해'는 '내가 있다'는 착각이다.

 

  부처님은 자비 또는 자애를 방사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무기'라고 표현하셨다. 《법구경》의 게송 40번 이야기를 보면 「자애경」을 설하게 된 인연과 그 내용이 나온다. " 살아 있는 생명이면 어떤 것이나/ 갈애가 있거나 없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태어났거나 태어날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귀신으로 모습을 나타내어 수행을 방해하는 목신들을 향해,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발원하는 「자애경」을 암송하니 그들의 공격성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따사로운 감정이 솟아나, 이제 수행자를 방해하기는커녕 호위하고 모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보호하는 무기로서 <자비관>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비를 방사하는 대상은 먼저 (1) 나 자신 (2)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또는 가까운 주변인 (3) 중립적인 사람 (4) 미워하는 사람의 순이다. 가장 먼저 '나에게 자애를 방사해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해 '불만 또는 성냄의 아픈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부족한 결핍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삿된 견해를 가장 가까운 주변에 투영하여, 그들이 사랑을 주지 않기 때문에 본인은 불행하다는 논리이다.

 

  <자비관>의 발원 문구는 이렇다. (1) 내가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2) 내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3) 내가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4)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다음으로 주변인과 타인으로 옮겨가는 방식을 염송 하면 된다. 이러한 <자비관>의 염송은 타인에 대한 또 세상에 대한 나의 오염된 반응체계를 정화시킨다. 중생들은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체례를 장착하고 있다. 그래서 칭찬보다는 질투를, 사랑보다는 미움을, 도움보다는 공격을, 격려보다는 헐뜯음을 즐겨한다. 고통을 초래하는 이러한 오염된 업장을 정화하는 첫걸음이 바로 <자비관>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베루는 보살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공성空性을 깨달은 보살은/ 만물을 실재로 간주하는 마구니에 사로잡힌/ 중생에게 특히 자비심을 일으키네"라고 한다. 먼저 자신이 공성, 즉 무아無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특히 고집부리는, 특히 심한 편견과 차별에 사로잡힌 중생이 더없이 불쌍해 보인다고 한다.

 

 

 

 

 

출처 : 월간통도 20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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