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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화승이 그린 초상화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았으리라 짐작되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몇 점에 불과하다. 16세기에 지방의 화승이 그린 신종위(1501~1583)와 김진(1500~1580)의 초상을 소개한다. 아울러 19세기 중엽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며 초상화로 명성을 얻은 화승 필안疋晏의 존재도 함께 알아본다.

 

약 400년 전 선비의 초상화

2009년 경북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엣ㅓ 초상화 특별전이 열렸다. 이때 초상화 한 점이 약 440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16세기에 경북 영덕에 살던 평산신씨 신종위를 그린 초상화다. 오사모에 홍색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이 초상화는 그려진 뒤 한 번도 집 밖을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신종위는 효행안에 이름을 올린 효자로 알려졌으며, 지방군수를 지냈다. 이 초상은 1580년(선조 13) 그가 임금이 내린 수직인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고서 이를 기념하여 그린 초상화로 추정된다. <신종위 초상>은 손이 드러나 있어 화승이 그린 초상이라는 데 심증이 간다.

 

함께 살펴볼 또 한 점의 초상화는 신종위 보다 7년 앞서 그려진 의성김씨 <김진 초상>이다. 김진은 안동에 거주했으며, 강학과 교육활동으로 안동의 선비문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진 초상>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화승이 그린 초상이 분명하다.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는 일생을 교육과 가문의 기반을 위해 헌신한 선비상의 전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초상화법의 비밀

신종위 , 김진 초상의 얼굴 부분

두 점의 초상화에서 유심히 봐야만 알 수 있는 두 가지 비밀스러운 특징이 있다. 하나는 얼굴의 형태를 그리는 방식이 두 점 모두 같다는 것이다. 이는 화승들의 인물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코드와 같은 독특한 요소이다. 이 두 인물의 얼굴에서  빨간색 원의 부분을 보면 코와 눈 부분이 좌우대칭을 이룬 정면이 시점에 가깝다.

 

그런데 파란색 부분은 약간 반 측면의 시점에서 귀와 연결된 얼굴 옆면의 일부를 정면상에 추가하여 그려 놓은 듯하다. 즉  빨간색 형태로 그리려면 파란색 부분은 귀만 남아야 하고, 파란색 형태로 그리려면 빨간색의 얼굴 각도가 달라져야 한다. 빨간색와 파란색이 함께 그려지면 얼굴이 좌우로 넓어지며 불합리해 보인다.

 

여기에서 화승들이 얼굴을 인식하여 그리는 독특한 틀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얼굴의 투시방법만 본다면 <김진 초상>과 <신종위 초상>은 한사람의 화승이 시기를 달리하여 그렸다고 할 만큼 유사성이 짙다.

 

두 초상의 또 다른 공통점은 턱수염의 끝을 꼬아 놓은 점이다. 특히 수염을 꼬아 그리는 방식은 다른 어떤 초상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는 활동하기에 편리하고 수염을 단정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행했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종위와 김진은 어떤 관계일까? 확인 해 보니 두 사람은 한 살 차이의 사촌 간이다. 신종위의 조부인 신명창의 딸이 김진의 어머니이며 신종위에게는 고모가 된다. 신종위와 김진은 고종사촌과 외사촌간이었다.

 

신종위가 평소 <김진 초상>에 관심을 가졌고 1580년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김진에게 화가를 소개받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신종위 초상>을 그린 화가는 <김진 초상>을 그린 화승이거나 그 밑에서 배운 화승의 솜씨가 틀림없다.

 

<신종위 초상>과 화승 필안

<신종위 초상>을 조사하던 중 19세기에 모사본 한 점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모사를 화승 필안이 맡았다는 사실은 1849년에 기록한 「물촌선생영정개모시일기」에 나온다. 내용 가운데 모사본 제작을 주관하던 문중의 한 인물이 필안을 소개한 대목이 있어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 · 수정사의 승인 '장순'이라는 자가 와서 말하기를 용담의 주지승 필안이 그 스승 선준에게서 화법을 전수받았다. 일찍이 경기에서 놀았는데 도화서의 여러 화사들과 함께 서로 실력을 다투었다. 전후로 경상도관찰사와 수령 중에서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개 정묘함이 서울의 화공보다 못하지 않음을 칭찬하였다. 여러 의론이 이르기를 다 같이 정모 하니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서 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했다. 또한 필안은 시에 능하고 글씨도 잘 쓴다고 전에 이름을 들었다. · · ·"

 

경북 용담사의 주지인 필안은 화승 선준에게서 화법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선준은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유명한 화승인데 생졸년과 이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1868년에서 1970년 사이에 그린 것이 많고 수화승 신겸의 작업에 활발히 참여한 사실이 있어 그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필안은 신겸과 선준의 계보를 잇는 화사였지만, 아쉽게도 작품이 전하지 않는다.

 

필안이 경기 지역에 있을 때, 도화서의 화원들과 실력을 겨루었다고 하는 대목은 당시 화원과 화승들 간의 교유가 긴밀히 이루어졌으며 화원들이 그린 초상화 양식을 화승들이 체험하고 익히는 계기가 도었음을 알려 준다. 즉 화승들의 그림에 초상화나 궁중회화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화원들과의 사적 교유라는 루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필연에게 그림을 의뢰하거나 재주를 시험해 보려는 관리들의 주문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또한 그림의 정교함이 서울의 화원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했으니 필안은 결코 만만한 기량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19세기의 모사본은 현존하는 <신종위 초상>과 형태는 같았겠지만 구체적인 화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세기 무렵에는 지방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화가를 서울에서 데려오지 않더라도 가까이서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섭외된 필안이 1849년에 <신종위 초상>의 모사본을 그렸지만, 그 그림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당시 모본이 되었던 16세기 작 <신종위 초상>만이 약 400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를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셈이다.

 

 

 

월간통도.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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