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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혜보살은 미륵보살의 전애성자 곧 애욕을 전환해서 자비를 성취함으로서 인해 '중생으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전환해서 지례를 이루게 했으며' 위덕자재보살은 청정혜보살의 전치성혜 곧 어리석음을 전환해서 지혜를 성취한 것을 이어 질문하기를 '중생으로 하여금 성냄을 전환해서 위엄을 이루게 했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자재롭게 하기에' 위덕자재보살이라 한다.


위덕자재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행 가운데 진리의 문에 드는 방편을 묻는다. 경문에서 성은 원각에 비유하고, 성에 있는 문은 수행문에 비유했는데, 이는 마치 동쪽으로부터 왔으면 서쪽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보살은 깨달음의 공덕이 법계에 두루하여 다함없는 가운데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걸림이 없는 보살이다. 부처님께 수행의 필요성을 사뢰고, 마치 성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듯이 수행법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지를 묻는다.  


'부처님의 원음을 듣고'에서 '원음'이란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의 음성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음성은 이 세계에 두루 퍼져 들리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다. '닦아 익히지도 않고 좋은 이익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으로 인해 혼자 힘으로는 세세생생을 거쳐 갖가지 고행을 해도 알기 어려운 이치를 단번에 깨닫게 하여 큰 이익을 얻게 하였다는 의미다.


여래를 출생한다는 것은, 시방제불이 한결같이 증득하고 닦는 것을 뜻하며, 일체법과 더불어 동체 이어서 평등하다는 것은, 색심이 둘이 아니며 범부와 성인이 차별이 없어서 모두 깨달음의 성품에 의거했기에 동체이어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여는 중생에 있어서는 불성이라 하며 중생이 아닌 것에는 법성이라고 한다.


위없는 묘한 깨달음은 중생과 세계와 부처의 근본이다. 즉 묘한 깨달음의 자리인 원각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에 깨달았다고 해서 부처를 따라가고 어리석다고 해서 중생을 따라가지 않는다. 온갖 인연이 펼쳐졌다 할지라도 그 인연을 다라 변하거나 흐르지 않으며, 이 묘한 깨달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그 자리만을 지키고 있지는 않아서, 움직임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만법의 주체가 되어 부처와 중생을 창조하고 범부와 성인을 낳으며 더럽고 깨끗함을 나타낸다. 이것을 원각이 지닌 불변성과 수연성이라고 하는데, 불변성은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원각의 바탕이고, 수연성은 움직이고 않고 움직이지 않되 움직이고 있는 원각의 자리에서 보면 차별된 만 가지 현상은 그대로 평등하게 나타난다. 


'모든 수행에는 실제로 둘이 없지만, 방편으로 수순하는데에는 그 수효가 무량하고, 돌아갈 바를 거두려면 성품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라고 한 것은, 묘한 깨달음 자리인 원각은 갖가지 수행의 방법을 따라 새삼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성품이 한결같아 평등하므로 어떤 수행법을 닦아도 빠르고 더딜 것이 없고, 높고 낮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가 다르고 수행하는 차원이 다르기에 삼관 곧 사마타·삼마발제·선나로 나뉜다.


첫 번째 '사마타'는 중생의 번뇌와 망상이 그쳐서 고요해졌다는 듯으로 지로 표현한다. 이는 일어나고 꺼지는 중생 마음속의 번뇌가 그쳐 아주 평온해진 상태로 흙탕물 속의 흙이 가라앉듯 정화된 경지다. 또한 혼탁함을 맑혀 청정하게 하며, 작용을 쉬어 고요하며, 몸과 마음이 공함을 깨달아 잠깐의 허튼 생각이 없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상태다. 이는 지극히 고요함 속에서 공한 진리를 살피고 공관으로서 허망한 생각과 이 몸이 좇아온 곳이 없음을 바로 살펴, 나고 죽음이 의지할 곳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방편이다. 


다음은 삼마발제로서 '등지'로 번역하는 데, '등'은 탐욕·성냄·혼침·들뜸·의심과 같은 큰 번뇌들을 항복시켜 그 마음이 지극히 평등해진 상태를 말한다. 근본불교에서는 삼마발제를 정으로 보기 때문에 역시 정학에 속하는 수행법이다. '여러 가지 허깨비와 같은 모습을 지어 내어'라는 것은 참된 원각의 깨달음 마음자리에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은 마음자리에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크나큰 사랑과 갖가지 행위들도 결국 허깨비 같은 줄을 안다는 뜻이며, '허깨비 같은 중생의 무리를 깨우쳐 준다.'는 것은, 중생이 본래 중생이 아니어서 깨우쳐 준다는 것마저도 허깨비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안으로는 대비심과 편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원각을 깨달은 수행자는 일반 중생이 일으키는 집착에 얽힌 사랑과는 다른, 일체가 허깨비 같은 줄을 알아 머무름이 없고 얽매임이 없는 사랑을 베풀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이 허깨비 같음을 관찰하는 것은 허깨비가 아니나 역시 허깨비와 같다고 여기는 까닭에 모든 허깨비 현상들을 벗어나게 되느니라.'라고 한 것은, 무명을 관찰할 때의 지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으로, 일체가 허깨비인 줄을 아는 그 마음은 분명 허깨비가 아닌 진실이며, 수행은 그 진실 역시 허깨비와 같다고 봄으로써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향상일로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삼마발제는 원각의 자리를 더욱 드러내기 위해 미혹한 중생들을 향해 일어나는 대비심을 관하는 것으로 수행 방편을 삼고 있다. 삼마발제를 흙이 싹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깨달음을 키워 나간다는 뜻이다. 오직 허깨비임을 살펴 상에 머물지 않되 허무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허깨비의 변화와 세계의 갖가지 작용을 머묾 없는 미묘한 행으로 굴려 써서 그 가운데 고요한 생각과 조용한 지혜를 잃지 않으면, 바로 삼마발제인 것이다.


세 번째 선나는 정려로 번역하며 고요하게 관찰한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와 망상의 자취가 끊어져 고요해진 상태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선나도 정학에 해당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원각을 이미 깨달은 상태에서 다시 마음을 닦아 들어가는 법을 가리키고 있다. '허깨비 같은 것들과 더불어 조용한 모습들 마저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의 삼마발제와 사마타의 경지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중도관을 설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장애가 되었음을 사무치게 아다.'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몸과 마음이 '나'라는 착각을 굳게 지니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장애인 줄을 모르고 집착하여 '나' '내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 몸과 마음이 참으로 번거롭고 부자유한 존재임을 실감하게 된다는 뜻이다.


'알고 느끼고 자각함이 없는 밝음은 온갖 걸림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각의 밝은 성품은 몸과 마음의 작용이 끊어진 지혜의 빛으로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음을 이르며, 무지각명의 각은 몸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며, 지는 마음으로 아는 것을 이른다.


묘한 깨달음 곧 묘각은 원각이다. 원각은 중생의 헤아리고 분별하는 생각과 감정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므로 묘하다 한 것이다. 이 자리는 '나'와 '남'을 떠난 자리요, 허망한 마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오로지 생각과 감정의 근원을 파악하고 몸과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허망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바로 볼 때 비로소 선나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선나는 허깨비 같은 무명을 타파하고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서, 모습을 깨뜨리지 않고 모습에 자재한 것이 마치 막힘 공간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담을 넘어 멀리 퍼지는 것과 같으며, 형상이 성품의 고요함을 묶어 두루 미묘하게 작용하며, 지혜와 덕이 깊고 미묘해서 도의 근간을 증득하며, 신령한 빛이 원만히 비춤에 번뇌의 기운이 영원히 고요해지며, 신령한 마음을 사무치게 비추어 미혹의 근원을 궁구하는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삼관 수행은 원각에 의지하여 번뇌와 망상을 끊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사마타, 중생을 향한 대비심을 일으키되 그 대비심 역시 허깨비임을 관찰하는 삼마발제, 번뇌와 열반마저도 모두 벗어나 모든 것에 걸림 없음을 실천하는 선나, 이 삼관은 불법의 모든 수행을 포섭한다.


스물다섯 가지의 방편은 선정이 바로 보살이 받아 지녀야 할 바른 수행법으로서 공부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범행을 지녀야 하는 계행이요, 고요하게 사유하는 선정과 지혜이다. 이 처럼 삼학을 가지런히 해서 지난 세상의 죄업을 슬피 참회하고서야 삼관을 원만히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물다섯 가지 선정 가운데 스스로 방편문을 가질 수 있으며 그 방편문에 따라 닦아 가고, 스스로 가질 수 없으며 관문의 이름을 표 위에 기록해 접어 맺어 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한 표를 펴서 그 안에 적힌 관문을 따라 공부해야 하며, 그 안에 적힌 관문이 삼관을 한꺼번에 닦는 돈문의 방편이든 차체로 닦는 점문의 방편이든 그에 따라 수행할 뿐 한 생각이라도 의심하거나 후회하면 공부를 이룰 수 없다.


삼관 곧 사마타·삼마발제·선나를 정리해 보면, 사마타는 고요함이며 중생의 무명과 망상이 다한 자리로서 고요한 자리며 정관·정려이고, 삼마발제는 허깨비 같음을 관찰하고 보살의 행과 부처님의 힘이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비심으로 세계를 건립하며 다라니 곧 원각에서 지혜를 잃지 않고 작용하는 환관이 되며, 선나는 번뇌를 끝까지 다 끊은 상태로서 청정한 경계·적멸·실상을 증득한 적관이다.


광활한 바다를 원각·선나·실상·적관이라 한다면, 고요하고 잔잔한 모습은 사마타·정관이며, 파도는 온갖 작용을 일으키는 삼마발제·환관이 된다.


'성상에 각성을 여의지 않는다.' 한 것은, 자성 그 자체는 사마타 곧 정관이며, 상인 모습은 삼마발제·환관이며, 각성·실상을 증득한 자리는 선나 곧 적관·중도·적멸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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