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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갠지스강

 

불교(佛敎, Buddhism)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창시된 인도 계통의 종교이다. 불교는 그가 펼친 가르침이자 또한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 · 깨우친 사람)가 될 것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신이 아닌 진리를 따르는 불교

인간의 이성이 닫혀 있던 미개한 시절,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요청했다. 이것이 종교학적으로 '강자에 대한 의존'이라고 하는 것, 바로 신이다. 이 시기의 신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고, 자신을 믿고 섬기는 이에게 영생을 선물해 주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하고 인간이 이성적인 사유를 하면서, 신이란 슈퍼맨처럼 신화 속에나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붓다는 인도 갠지스 강변에서 신을 믿는 사제를 만났다. 사제는 붓다에게 신을 믿고 받들면 죄가 없어져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붓다는 강물에 돌멩이를 던지고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저 돌멩이가 떠오르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사제가 "불가능하다"라고 하자, 붓다는 "선업(善業)을 지은 사람은 가라앉히려고 해도 뜨고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띄우려고 해도 가라앉는 것이지, 이것은 누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돌멩이는 가라앉고 스티로폼은 뜨는 것처럼, 질료의 속성이 그런 것이지 신이나 신앙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신이 아닌 진리가 불교의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에게 잘하면 "예쁜 놈 떡 하나 더 준다'와 같은 불합리성을 버리고, 진리의 합리성을 따르는 것이 바로 불교이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는 신이 아닌 진리를 추구한다. 이것이 불교의 첫 단추이다. 진리는 붓다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마치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붓다는 스스로를 "고성(古城)을 발견한 사람이며, 그곳으로 인도해 주는 길잡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늘날 모든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아래의 <예불문 禮佛文>에서처럼, 붓다를 '도사(導師)' 즉 인도자이자 가이드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붓다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 주는 위대한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예불문 禮佛文>

지심귀명례 至心歸命禮    

삼계도사 三界導師   

사생자부 四生慈父
시아본사 是我本師   

석가모니불 釋迦牟尼佛


온 우주의 인도자이시며 모든 생명 있는 존재의 자애로운 어버이신,
우리의 참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예경 올리옵니다.

 

우상숭배의 진실

선禪불교에서는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말이 있다. 또 붓다는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 뗏목을 이용하고는, 그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뗏목을 계속해서 끌고 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두 경우 모두 수단에 전도된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손가락과 뗏목은 목적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불고에서는 이것을 좋은 방편(선교방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중에는 손가락과 뗏목은 우상으로 바뀌게 된다.

개신교에서는 신이라는 목적을 위한 모든 수단은 우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톨릭의 마리아상이나 불상마저 우상이라고 비판한다. 우상비판에 더 철저한 이슬람교에서는 '기독교의 십자가'나 '여호와'라는 명칭 역시 신을 상징하는 우상숭배라고 부정한다. 실제로 이슬람의 모스크에는 신을 상징하는 그 어떤 표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알라신이란, 단지 유일신이라는 대명사일 뿐이다. 그런데 붓다는 진리로 인도해 주는 분이지 신이 아니다. 또 불교는 신을 좇는 종교도 아니다. 마치 대치동의 족집게 선생님처럼 진리의 핵심을 가르쳐 주는 분이 바로 붓다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붓다는 우상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 담벼락에 계속해서 낙서가 발생하자, 담에 '낙서금지'라고 적었다. '낙서금지'는 낙서를 금지하기 위한 방편의 낙서이다. 이것을 통해서 낙서가 사라지자, 주인은 '낙서금지'라고 쓴 낙서마저 지운다. 불상이란 이러한 '낙서금지'와도 같은, 우리의 내면을 자각하기 위한 좋은 방편인 것이다.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가 발견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좇는 종교이다. 나침반이 배를 직접 끌고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침반에 의해서 배는 바른 길로 인도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인간에게 바로 배의 나침반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진리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붓다가 될 수 있다. 붓다란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석가모니 붓다라는 표현은 붓다 가운데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다.

 

마치 조선 왕이라는 범주 속에 태조 · 태종 · 세종 등 27명이 포함되는 것처럼, 붓다라는 범주에는 석가모니불 · 아미타불 · 미륵불 등 진리를 자각한 모든 붓다가 포함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진리를 각성하면 붓다가 된다. 즉 붓다는 가르침을 주는 대상인 동시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마치 대학에서 교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또 다른 교수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받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찾아 진리에 의지하는 사람이 붓다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의 첫머리에 진리의 발견자로서 석가모니 붓다가 있다.



자현스님 "세상에서 가장 쉬운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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