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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석교, 삼성반월교

삼성반월교는 일주문 동남쪽에 위치하여 통도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돌다리로 1937년 경봉 스님이 건립하였다. 삼성반월은 세 개의 별(三星)과 반달(半月)을 뜻하며, 이는 곧 세 개의 짧은 획과 하나의 긴 획으로 구성된 마음 '심心' 자를 상징한다.

통도사 삼성반월교

두 교각 사이에 형성된 세 개의 원과 그 위에 형성된 아치형의 다리로 구성된 석교의 형태는 마음 '심心' 자를 풀어서 조형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삼성반월교는 깨끗한 한 가지 마음으로 건너야 하는 다리, 즉 일심교一心橋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다리에는 난간이 없고 폭도 좁다. 헛된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다리에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다리를 건립한 경봉 스님은 통도사 일주문 옆의 징검다리를 장마철에도 안전하게 건너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로 바꾸어 놓겠다는 원력을 품고 공사에 충당할 자금을 꾸준히 모았으나 당시 통도사의 경제 상황으로 사찰의 기금만으로는 다리를 건립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천에 거주하는 김치수 거사가 스님을 찾아와서 이들의 불편한 다리를 고치기 위해 불공을 드리고자 하였다.

 

경봉 스님은 그를 냇가로 데리고 가서 요행을 바라기보다는 계곡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 수많은 사람의 다리 노릇을 해 주는 것이 더 큰 공덕이 된다는 것을 일깨웠다. 법문을 들은 김치수 거사는 크게 감동하여 다리를 짓는 불사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고 거금을 시주하였다.

 

이에 그동안 모아 놓은 기금과 김치수 거사의 시주금을 합하여 1937년 2월 17일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6월 5일에 낙성식을 가졌다. 낙성식에서 경봉 스님은 "통도사를 창건한 지도 벌써 1,300년, 그동안 시냇물에 이르러 몇 억만 명이나 신을 벗고 건넜을 것인가. 오늘 삼성반월교가 조성됨은 인연이 도래하여 꽃과 열매가 맺어짐과 같도다."라는 법문을 남겼다. 다리의 양측 표지석에 새겨진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영조운산리影照雲山裏'라는 글씨는 경봉 스님의 친필이다.

어긋난 짝사랑 '호혈석'

먼 옛날 통도사 백운암에는 젊고 잘생긴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수행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경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은 물론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성심껏 기원하였다. 여느 때처럼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경을 일고 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봄나물 가득한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었다.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은 처녀가 이리저리 해매면서 길을 찾다 백운암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에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온 처녀는 어렵더라도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방이 하나뿐인 곳에서 수행 중인 젊은 스님으로서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던 스님은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어 주고 윗목에서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호혈석(응진전, 극락전)

스님의 경 읽는 음성에 처녀는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 처녀는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흠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 가서 처녀는 상사병을 얻게 되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처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가 백운암에서 만난 젊은 스님의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듣게 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딸의 사연을 알게 된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그 스님을 찾아갔다.

 

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살림 차려 줄 것을 약속하며 혼인을 애걸했지만 젊은 스님은 결심을 흩트리지 않고 경전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죽음에 임박한 처녀가 마지막으로 스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였으나 그마저 거절하고 말았다. 얼마 후 처녀는 사모하는 한을 가슴에 안은 채 목숨을 거두고 사나운 영축산 호랑이가 되었다.

 

그 후 긴 시간이 지나고,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한 결과로 드디어 서원하던 강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많은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어느 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큰 호랑이가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하였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분명 스님들과 어떤 사연이 있을것이라는 데 중지를 모으고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졌다. 호랑이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갈기갈기 마구 찢으며 더욱 사납게 울부짖었다. 대중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자 강백 스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속세의 인연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나서 합장 예경하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사람들이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깊은 골짜기를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처녀의 원혼이 호랑이로 태어나 변고가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호랑이의 혈血을 제압할 목적으로 붉은색이 큼직한 반석 2개 도량 안에 놓았다. 이를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압석虎壓石'이라 부른다. 이것은 상로전의 응진전 바로 옆과 하로전의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한권으로 읽는 통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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