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건축의 미美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 실용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물론 둘의 조화만큼 이상적인 것이 있으랴만 현실로 내려오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관官에서 짓는 건물은 더욱 그랬다. 얼마 전만 해도 학교나 관공서 건축은 '성냥갑 건축'이라고 불릴 정도로 오직 공간 활용에만 건축의 목적을 두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연 친화나 시민 참여 등을 이유로 외양에서부터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해 이제는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정치적 '과시용'이라는 혐의를 받을 때 그 비난은 배가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시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에서 종교는 당연히 이상을 중시한다. 이는 종교미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실적인 가치만을 놓고 본다면 종교는 아편일 수 있으며 또 때로는 아편만도 못한 가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단세포동물처럼 눈앞의 현실에만 머물러 살 수 없다. 그래서 현실과 결부된 이상 또는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을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종교 및 종교적 상징의 옷을 입고서 현실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실요만을 따진다면 유럽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나 모스크의 돔 건축은 모두 부질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인간의 이상 추구를 통한 행복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것이 종교이며 진정한 종교 미술을 보는 눈인 것이다.

대승사 정료대(조선 시대) 야간에 관솔불을 피워서 올려놓던 곳이다

통일신라 석등의 비효율성

 

  석등은 크게 나누면 등을 받치는 하대와 등을 감싸고 있는 화사석 그리고 그 위 지붕들이 세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화사석이란 '불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등이 들어가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석등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하대는 화사석이 빛의 발산을 효율적으로 하도록 높이 들어 올린 부분이며 지붕돌은 비와 같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화사석을 보호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등을 보면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은 등 하나를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많은 공을 들일 필요가 있느냐 그것도 돌로 조각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석등의 화사석은 8각현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구멍이 뚫려서 빛이 나가도록 되어 있는 부분은 네 방향뿐이다. 많은 빛을 원한다면 여덟 뱡향을 모두 뚫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석등이 과연 단순히 조명을 위한 기구였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화사석 안에는 등잔이 들어가고 뚫려 있는 화창에는 한옥의 문처럼 한지가 발린 격자로 된 창살이 설치되어 홈에 끼워지도록 되어 있었다. 실제로 사용된 석등의 홈에서는 작은 못 구멍들이 살펴지는데 이는 창문을 고정시켰던 흔적이다. 석등을 볼 때 못 구멍을 확인해 보면 이것이 오래전에 만들어 사용되던 것인지 최근 만들어진 것인지가 대번에 드러난다. 요즘 만들어지는 석등은 과거의 모습을 본뜨기는 해도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처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석등의 특징과 종교적인 상징

 

  통일신라 석등은 한 채의 잘 지어진 8각형 정자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정자를 활짝 핀 연꽃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불교에서 연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연꽃이 피어 있다는 것은 그 위에 깨달음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 석등은 단순한 가로등이 아니라, 빛을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빛을 통해서 신성을 일깨우는 방식은 중세 유럽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창과 같은 것으로도 확인된다.

 

  통일신라의 8각형 정자식 석등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전시하고 예배하던 공간에서 유래한다. 중앙에 사리를 모시고 원형으로 돌거나 예배하던 공간에서 유래한다. 중앙에 사리를 모시고 원형을 돌거나 예배하는 목적에는 4각형보다는 8각형 건축이 더 적합하고 또 건축물의 위계도 8각형이 4각형에 비해서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4각이 아닌 8각형의 건축물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건축 구조는 중국 목탑과 더불어 고승들의 사리 수납공간인 돌무덤, 즉 8각 원당형 부도의 시작점이 된다. 중국으로 전래된 부처님의 사리 숭배 방식이 변화하여 '동아시아 목탑'과 '통일신라 석등' 그리고 '8각 원당형 부도' 세 가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석등이 본래 사리 숭배 공간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면 그 속의 등은 당연히 사리 즉 깨달음의 결정에 상응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활짝 핀 연꽃이 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징성은 충북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에서처럼 사자가 왜 석등을 받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게 된다.

 

  인도에서 사자로 장식된 좌대를 쓰는 것은 군왕과 성자뿐이다. 이것이 불교문화로 수용되어 부처님의 좌대에 사자를 장식했고 이를 사자좌라고 한다. 그런데 석등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살펴지는 것이다. 사자를 좌대로 사용하는 또 다른 예로는 국보 제35호 전남 구례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이나 충북 제천 사자빈신사지 4사자 구층석탑, 전남 순천 선암사의 화산 대사 부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도 역시 탑· 부도· 석등의 일치점이 확인된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흔히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라고 말한다. 이 중 실천적인 측면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낸 것이 사성제와 팔정도다. 화사석의 8각형 구조와 4화창은  4성제가 중심이 되어 8정도를 실천하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의 석등이야말로 불교적인 이상을 그대로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신품神品이라 이를 만하다. 그 어떤 민족이든 문화든 등燈에 이와 같은 상징과 미감을 온축 한 경우는 없다. 이것이 바로 신라인의 위대성이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고려의 석등

  고려의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에 비해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화사석을 4각으로 만들어 네 방향을 모두 뚫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등 구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등이 내부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통일신라의 석등 안에는 등잔만 들어가고 한쪽을 여닫으며 스님이 등장에 불을 붙이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고려의 석등등 등잔에 외곽을 씌운 사각형 등 자체를 들이고 내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화사석의 크기가 커지고 화사석 주위에 창문이 필요 없어진다.

 

  화사석의 크기가 커지면 석등은 가분수처럼 머리가 무거워 보인다. 전체 비례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고려인들은 가분수와 같은 석등의 모양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권위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지나친 과장이 확인되는 부분인데 이와 같은 양상은 보물 제232호인 충남 논란 관촉사 석등이나 개성 현화사 석등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체를 크게 할 경우에는 당연히 하체가 빈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 고려인들은 하대의 기둥을 더 크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머리가 큰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어쩔 수 없다. 고려 시대 사람의 미감으로서는 이것이 훌륭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는 권위를 나타낸다기보다 그저 불균형으로 비칠 뿐이다.

 

  이렇게 고려의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과 같은 날렵하면서 정제된 모습은 사라지고 다소 해학적이며 둔중한 모습만 남게 된다. 이는 석등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화사석을 할짝 연꽃으로 떠받치던 모습도 사라지면서 더욱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통일신라기 주류를 이루었던 8각 원당형 부도 양식이 변화하여 석종형 부도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는 전체적으로 8각형의 전각에 사리를 모시고 예배하던 풍조가 사라지면서 이에 수반되는 문화구조 자체가 한국 문화재 전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로 오면 고려의 머리가 무거운 과장된 장엄의 상징성마저도 사라지고 완전히 불을 밝혀서 주변을 환하게 한다는 실용성만 남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석등의 문화는 단절되고 석등의 자리는 정료대가 대체하게 된다. 정료대는 돌로 된 대 위에 직접 모닥불을 지피는 방식이다. 밝기 면에서 석등은 정료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료대의 실용성은 종교에서 강조하는 미학적 이상을 모두 잃어버린 퇴색한 조선불교를 나타내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