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시 巳時(am 09:00 ~11:00) 무렵이면 마지 올리는 학인스님들의 발길로 통도사 후원은 바삐 움직인다. 본전의 부처님을 시작으로 각 법당에 공양을 올리기 위해 공양간에서는 매일 정성껏 밥을 지어 굽다리그릇에 담는다. 불기 佛器에 소복이 담긴 고봉의 마지는 사찰 후원에서 피워내는 신성한 꽃과 같다. 흰색이 지닌 성스러움과 봉긋하게 풍요로운 모습은 '밥'이 지닌 보편의 가치와 함께 부처님께 올리는 최상의 공양물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

  마지는 '공들여 만든 맛있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새겨 한자로는 '摩旨'라 쓰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다. 윤창화 선생은 마지가 범어 梵語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범어로 'maghi' 가  '영약靈藥의 약초'를 뜻하고, 당나라의 불교용어사전에도 한자는 다르나 음이 같은 '마지'가 있어 이를 신단神丹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어를 한국불교에서 한자로 음차音借했을 법하다.

  아울러 마지는 어른의 밥을 뜻하는 우리말 '진지'와 같은 어미語尾를 지녀, 두 용어의 관련성을 짐작하게 한다. 선후관계를 단언할 수 없지만 마지가 'maghi'에서 왔다면, 부처님의 밥을 공경의 뜻으로 '마지'라 부르게 된 데서 '진지'가 파생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지 또한 맛있는 음식을 뜻하는 '지旨'를 어미로 두기에 적합한 '珍旨'라 쓰기도 한다. 초기에는 한자가 없었더라도 그에 적합한 뜻으로 표기한 셈이다.

  사시에 올리는 불공은 부처님 재세 시 오후불식을 한 승단僧團의 공양 법식에서 유래하였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정오가 되기 전 하루 한 끼 공양하던 시간에 맞추어 정성껏 지은 밥을 올리며 행하는 예경 의식이기에, 이때 올리는 예불을 사시불공·사시예불이라 부른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암자에서도 출가 · 재가의 제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본사本師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각 전각에 마지를 나르기 시작하면서 공양간 가마솥에는 대중스님들의 오공午供을 위한 밥을 준비한다. 부처님의 사시 공양이 끝나고 그 뒤를 이어 제자들이 오시午時 공양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쌀에 돌과 싸라기가 많아 마지 올릴 쌀은 택미가 필수였다. 큰 상에 한지를 펴고 쌀을 부은 다음, 깨진 쌀은 물론 금이 간 쌀과 이물질을 일일이 골라내고 체로 걸러 작은티까지 모두 없앤다. 택미는 스님들이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 하여 재가자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행하는가 하면, 마지 쌀에 쓰는 조리나 바가지를 따로 구분하기도 했다.

  또한 밥을 짓는 공양간과 반찬을 만드는 채공간을 따로 두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마지에 반찬 냄새가 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찰 부엌이 현대식으로 바뀌고 효율성을 우선하면서 이러한 풍습도 조금씩 바뀌었지만, 마지 쌀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정성 들여 마지를 짓는 데는 변함이 없다.

  마지 올릴 전각이 많은 큰 절에서는 솥을 따로 두었다. 지금도 장작불을 때어 밥을 짓는 통도사에는 전통 공양간에 네 개의 커다란 가마솥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맨 왼쪽의 것이 마지솥이다. 공양간 외벽에 전각 명칭을 스무 개 남짓 써놓은 탁자를 두고, 밥이 다 되면 이곳에서 각 전각의 불기에 마지를 뜨게 된다. 빈틈없이 계량해서 짓고 뜨니 마지 솥의 밥은 한 톨도 남지 않는다.

통도사 마지올리는 학인스님

  마지 올리는 소임은 학인스님들의 몫이다. 맨 먼저 대웅전에 올릴 마지가 나가면, 차례로 각 전각의 마지 올리기가 시작된다. 마지를 나를 때는 불기 밑부분을 오른손으로 받쳐 어깨 위로 올리고, 왼손은 오른쪽 팔꿈치를 받친 수 조심스레 걷는다. 도중에 큰스님을 만나더라도 절을 올리지 않는데, 이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무렵은 사시불공에 동참할 신도들이 절을 찾으면서 활기찬 움직임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학인스님은 대웅전 불단에 마지를 올리고 나서, 노전爐殿스님이 헌좌진언을 할 무렵 법당의 소종을 다섯 망치 울리고 마지 뚜껑을 연다. 부처님께 마지를 올린다는 신호로 이를 '마지쇠 · 마지종'이라 부른다.

  대웅전 마지를 올리고 나오면서 법당 바깥에 있는 소종을 다시 울리게 된다. 법당 안의 마지쇠가 부처님과 동참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라면, 법당 밖의 마지쇠는 각 전각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렇게 바깥 종성鐘聲으로 대웅전 마지 신호를 보내면, 각 전각에서 마지를 올리는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상의 마지는 백미로 지은 쌀밥이지만, 명절이면 불단에도 다채로운 절식이 마지로 오른다. 설날의 '떡국 마지'에서부터 대보름의 '오곡밥 마지', 동지의 '팥죽 마지'가 있고, 추석에는 쌀밥과 송편이 오르게 마련이다. 특별한 음식을 만들면 집안 어른께 먼저 드리듯이, 세시歲時에 맞는 음식을 부처님께 올리면서 제자들이 함께 공양하는 의미가 자연스레 실천되는 것이다.

  불단佛壇만이 아니라 각단各壇에도 마지가 오른다. 일상의 마지를 올리는 대상이 불보살에 국한되지 않고 산신 ·칠성신 ·조왕신 등에 이르기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 근래에도 부처님 마지를 지었을 때 다 함께 올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존격에 따라 마지 올리는 시간을 구분하였다.

  여러 의식집에 "사성四聖은 오전에 모시고, 육범六凡은 해질녘에 부른다."라고 했듯이, 본래 하단의 신격은 오후에 청하였기 때문이다. 사성은 불 ·보살 ·성문 ·연각이고, 육범은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윤회하는 중생이니, 존격에 따라 일상의 마지 시간을 구분한 것이다. 따라서 산신 ·칠성신 ·조왕신 등의 경우 사시에 함께 올리지 않고 늦은 오후에 따로 올렸다.

  예불을 마치면 마지를 중단으로 퇴공하여 중단예불을 올리고, 모든 전각의 마지를 퇴공 솥에 모아 대중공양으로 삼게 된다. 예로부터 신도들은 불단에 올랐던 마지를 귀하게 여겼다. 그 밥에 부처님의 가피가 깃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 밥을 먹는 존재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시불공을 마치면 헌식獻食 소임의 스님이 밥 한 술을 덜어 헌식대에 올려두는데, 이는 굶주린 이류중생異類衆生을 위한 보시이다. "헌식 공덕은 더없이 크다."고 하여, 예전에는 법랍 높은 스님이 헌식 소임을 맡을 수 있었다.

  이처럼 마지는 초월적 존재에게 올리는 공양물이지만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듯이 내려서 먹는 것이기에, 마지를 둘러싼 후원문화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부처님께 올린 마지가 신중과 사부대중에게 이어지고 굶주린 생명에게까지 베풀어지니, 널리 퍼져가는 마지 공덕이 무량하기만 하다.

 

 

 

 

월간통도. 2023.05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