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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山寺라는 말이 대변하듯 옛 사찰이라 하면 으레 숲이 울울창창한 산속에 있으려니 짐작한다. 하지만 사찰이 처음부터 마을과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찰이 들어서야 하는 곳에 대해 '마을과 멀거나 가깝지 않은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사분율」) 실제로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수행처인 기원정사(19~25년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는 당시 번화했던 도시 중 하나인 사위성에 자리 잡은 7층 목조건물이었다. 물론 부처님 당시 수행처가 모두 이런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숲속이나 나무 밑에 의지처 삼아 수행하는 수행자도 매우 많았다. 하지만 부처님이 머물렀던 여러 사원의 위치를 봤을 때 애초 사찰이 위치하고자 했던 곳이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입지 선택은 당시 수행자들의  탁발 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도 운문사

 

탁발 때문에 결정된 사찰의 위치

  부처님 당시 사찰은 요즘과 달리 '부엌'이 없었다. 당연히 사찰에서는 음식을 조리할 수 없었다. 당시 수행자들은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빌어 온 후 적당한곳에서 공양하는(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불교도 이런 전통을 따랐다. 이런 인도의 탁발 문화는 자연스레 사찰이 마을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도의 탁발 전통은 기후나 이에 따른 음식 문화와도 무관치 않다. 인도는 무덥고 강우량이 많기 때문에 농사에 맞춤인 땅이다. 그런데 이 농사라는 게 특성상 한철에 집중적인 과過 생산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상추나 깻잎을 심게 되면 어느 순간 도저히 혼자 혹은 한 집이 다 먹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시골의 '넉넉한 인심'은 이런 농업의 특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도는 먹거리가 넘쳐 나는 지역이다. 여기에 인도의 기후 특성이 또 탁발 문화에 한몴을 한다. 더운 날씨 탓에 음식이 금방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을 음식'을 미리 나눠 주는 풍습은 이런 이유에도 기인한다. 재가인은 수행자에게 음식을 보시하면서 남을 음식을 줄이고 공덕을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고마움은 통상 탁발받는 수행자가 아니라 보시하는 재가자가 표현하게 된다. 이렇게 탁발 문화가 일반화된 곳에서 사찰의 위치는 당연히 마을과 인접한 곳이어야 했다.

 

우리나라도 초기에는 도심에 자리 잡아

  황룡사는 신라의 정복군주이자 전륜성왕轉輪聖王 에 비견되는 진흥왕이 황궁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서상瑞祥을 입어 사찰로 바뀌었다는 신라 최대의 가람이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사찰의 건립 입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왕이 사는 궁궐은 당연히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즉 황룡사는 인도의 기원정사처럼 도시의 안쪽에 있었던 사찰인 것이다. 황룡사가 가까운 북쪽에는 원효 스님이 주석한 것으로 유명한 분황사가 있고 바로 남쪽에는 미탄사가 인접해 있다. 모두 시내라고 할 만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도와 달리 탁발 문화가 없었고 사원 안에서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도 있었는데 왜 산이 아닌 도시에 위치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왕이나 귀족들이 수시로 참배 다니던 사찰은 당연히 이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찰은 누구나 가까이서 즐겨 찾는 곳이었기 때문에 마을과 먼 산에 위치할 수 는 없었던 것이다.

 

선종의 흥기와 산사의 탄생

  불교가 번성한 중국 당나라 때에 이르면 도심 사찰은 현대의 교회처럼 포화 상태에  이른다. 이때 선종이 내면적인 명상을 주장하며 후발주자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사찰 일부가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시에는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었고, 또 참선 수행에 있어서도 도시 보다는 산속이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은 신도들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선농일치禪農一致 와 같은 자급자족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백장스님(749~814)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당시의 척박한 산사 문화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 선종의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그 결과 신라 말부터 유행하는 선종의 아홉 학파는 한결같이 산속에 자리하게 된다. 이를 9산선문, 즉 '아홉 산에 자리 잡은 선종의 학파'라고 한다. 최치원 남기 4비문[四山碑銘] 중 하나인 <지증대사비>에는 9산선문보다 5개가 많은 14산선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14산선문 역시 모두 산을 끼고 있었다.

 

신성사상과 군사적 목적도 한몫

  우리나라는 산이 매우 많다. 덕분에 '선仙'과 같은 산악숭배 문화가 발달한다. '仙'이란 글자를 풀어 보면 사람이 산에 기대어 있는 모습(人+ 山)이다. 발해만 쪽에서 흥기했던 신선사상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이런 산악숭배 전통은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직도 큰 절에 가면 삼성각에 산신이나 독성을 모셔 놓곤 한다. 이는 신선사상과 불교의 습합을 잘 보여 주는 예다.

 

  자연스레 군사적 역할을 일부 담당했던 사찰도 있다. 자장 율사가 창건한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는 삼국 시대 신라의 최전방에 건립된 사찰이다. 이 절은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 동북방의 지역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군사적 목적의 전환이 가능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월정사는 한국전쟁 당시 후퇴하는 아군에 의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또 전쟁이나 민란이 잦은 경우 사찰에는 자체 방어 인력이 있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승군이다. 이들을 수원승도隨院僧徒의 군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 말하면 해당 사찰을 방어하는 경비부대인 것이다. 이들 중 군대의 성격이 보다 강한 것으로 항마군, 즉 마귀를 항복받는 군대라는 것도 있다. 이때의 승군은 수행승과는 질적으로 다른 승려들로, 그 자체가 하나의 신분을 형성하는 직업군이었다. 산사에 존재했던 이런 자체 방어군의 정신은 후일 임진왜란 때의 승군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라지는 도시 사찰, 살아남은 산사

  조선이라는 숭유억불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사찰은 철거되거나 양반집 등으로 용도가 변경된다. 한옥은 나무를 짜 맞춰서 건축하기 때문에, 이를 풀어서 옮기거나 새로운 건물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찰은 당시 권세가들이 신속하게 집을 짓는 과정에서 헐리기 일쑤였다. 또 호젓하고 운치 있는 곳에 위치하던 사찰은 서원과 같은 유교 교육시설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다. 이 서원은 본래 쇠락한 숙수사宿水寺 자리에 들어선 것으로 아직까지 당간지주나 불상 등의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도심의 사찰들이 양반들의 주된 표적이 된 것과 달리, 산사의 의도적으로 방치된 측면이 있다. 물론 산사까지 찾아가서 파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원활하게 물자를 유통시키거나 산짐승을 피해 줄이기 위해서는 산사가 그 나름의 충분한 효용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산사에는 '여관'이나 '역참'의 기능도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풍수지리설과 연관되어 흔히 말해지는 비보사찰裨補寺刹도,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통 · 통신에 있어서 국가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산속에 국가시설을 건립한다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사찰은 조선의 경제 발달과 유지에 막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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