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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을 가리키는 말은 아주 다양하다. 같은 곳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규모에 따라 각기 구별해 부르곤 한다. 게다가 개별 사찰의 이름을 지을 때는 일정한 규칙이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흔한 관음사나 약사사, 지장사 등은 주불로 모시는 부처님 명호를 따라 지은 경우이지만 봉奉, 국國, 흥興 자가 들어간 사찰처럼 국가와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고, 지형이나 풍수를 고려해 지은 이름들도 있다.

불국사 회랑 ; '사원'이라는 말은 '절(寺)'이라는 말과 '담장'을 둘러쳤다(院)'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가람伽蓝과 사寺

  불교에는 사찰을 나타내는 많은 명칭이 있다. 이 중 가장 상위개념이 바로 가람 伽蓝과 사寺이다. '가람'은 인도불교에서 절을 가리키던 상가라마가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그 음이 차용돼 승가람마가 되고, 이것이 축약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가람을 절의 총칭으로 보야도 문제가 없다.

 

  인도 승려였던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후한의 명제 때인 영평 10년, 즉 기원후 67년에 수도인 낙양에 오자 후한 정부에서는 이들을 사신의 예로 대했다. 그래서 당시 홍로시라는 일종의 영빈관에 모시게 된다. 그런데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이 홍로사에 도착해 눌러앉고는 다음 해인 68년에 이를 절로 바꾸게 된다. 홍로사의 '寺' 자는 관청 시와 절 사의 두 가지 음을 가진다. 마치 '金' 자가 쇠 금과 성 김으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스님들이 관청에 살 수 없으니 시라는 발음을 사로 바꾸고, 명칭도 홍로에서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데리고 온 백마를 기념해서 백마로 변경하게 된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인 낙양의 백마사이다. 즉 '사'란 중국에서 가람에 상응하는 절의 총칭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총칭에 해당하는 우리 식 표현이 바로 '절'이다. 사를 왜 절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학설이 없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절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은 향과 함께 인도 문화가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인데, 통아시아 사람들에게 특이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배 형태의 명칭과 예배 장소의 명칭이 일치된 경우이다. '머리에서 머리(카락)가 자란다.'는 것도 같은 경우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사찰寺刹과 사원寺院

  사찰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예전에는 '신성 공간' 앞에 찰간이라는 국기 게양대와 같은 시설문을 세웠다. 요즘처럼 관청이나 학교에 국기게양대를 만드는 것도 유사하다. 사찰은 '절[寺]'에 이 신성한 공간 표식인 '찰간'이라는 단어가 결합돼 만들어진 단어다.

 

  또 절이 산이 아닌 도심에 있을 경우는 담을 둘러서 삿된 범접을 금하고 권위를 수립했다. 경복궁과 같은 왕궁의 담장 정도를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담을 둘러쳤다는 의미에서 '원院'이라고 한다. 원의 기원은 인도에서 우기 때 비를 맞지 않고 다니기 위해 절의 통로에 지붕을 씌운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바깥쪽으로 점차 담이 만들어지면서 사원의 형태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사'나 '사원'의 경우 불교와 관련된 것이지만, 불교가 동아시아 전통에 깊이 침투하면서 이런 표현은 이후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용어들은 다른 종교의 종교시설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의 모스크를 이슬람사원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이슬람사원을 일컬어 청진사라고 하는 경우 등이다.

 

암자庵子와 토굴土窟

  불국사와 같이 '사' 자가 들어가는 절은 과거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절이었다. 즉 '사'란 국가가 인정한 일정 규모 이상의 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절들은 때에 따라서는 작은 부속 사찰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부속 사찰을 '암庵'이라고 한다. 암은 암자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정상적으로 잘 지은 절이 아니라 수행을 위해서 풀로 지은 임시 초막과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점차 규격을 갖추면서 명칭만 암으로 남게 된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현대에 널리 쓰이고 있는 '토굴'이라는 것이 있다. 토굴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은 진짜 흙집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번듯한 경우가 많다. 이도 본래 의미가 전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산사와 같은 경우 부속된 암자를 산내 암자라고 한다. 이는 산 안에 있는 부속 암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사찰의 책임자를 주지라고하는 것과 달리 암자의 책임자는 암주라고 해서 차등을 둔다. 또한 암자는 사가 '직영'하기 때문에 주지와 암주의 관계는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처럼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제는 사라진 이름 난야蘭若

  암자와 같이 부속되지 않은 절이면서 또 사와 같이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 개인이 지은 절을 과거에는 '난야 蘭若'라고 해서 구분했다. 난야란 아란야를 음차해서 축약한 것으로 본래는 숲 속의 고요한 수행처를 의미했다. 이것이 차용되어 절의 의미로 수용된 것이다. 인도의 아란야가 동아시아로 와서 중국의 관청을 의미하는 '사'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참 멀리 와서 고생이 많은 경우라고 하겠다.

 

  절을 가리키는 용어 중 난야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가 과거처럼 정부의 인정을 받는 절만을 의미하지 않게 되면서 명칭이 위계가 높은 사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난야보다는 사가 더 있어 보이므로 '사'로 통합이 일반화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우리나라 절 이름에 들어간 한자의 비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사찰 이름은 관음사다. 관음신앙이 우리민중에서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약사사나 미타사라는 이름도 자주 보인다. 이 역시 '신앙'과 관련된 이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크게 분류해 이야기하지 않고 사찰 하나하나 이름의 의미를 찾아가면 끝이 없다. 그중에 가장 일반화된 것이 '봉奉' 자와 '원院' 자가 들어간 사찰 이름이다. 봉 자가 들어간 사찰의 경우 능침사찰의 기능을 한 곳이 많았고, 원 자가 들어간 사찰은 역참 기능을 했다. 이밖에 '흥興' 자와 '국國'자가 들어간 사찰 역시 '국가'와 관련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인조 때 창건된 남한산성의 국청사는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와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사찰이다. 국청사라는 같은 이름의 사찰이 부산 금정산에도 있는데 금정산 국청사 현판에는 "숙종 29년(1703년) 금정산성 중성을 쌓은 후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보호하니 그 이름을 국청사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興 자가 들어간 사찰 역시 꽤 많다. 서울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죽자 그 능을 정릉으로 정하고 세운 사찰이다. 조선 시대에만 이런 이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려 시대 문종의 원찰이었던 흥왕사는 절의 규모만 2,800칸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에서 세운 절이다. 이밖에 부석사나 호압사처럼 창건 설화나 풍수를 고려해서 이름을 붙인 사찰들도 있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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