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불교를 '석가모니 부처님을 숭배하고 따르는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은 맞지 않는 설명이다. 힘들 때 의지할 곳을 찾는다는 사람까지 굳이 말릴 필요야 없겠지만, 불교는 '진리를 통해서 스스로 깨쳐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다. 그렇다면 깨친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뿐일까?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다양한 부처님 들이 존재한다.

 

  하나 더! 보통 불교라고 하면, 하나의 통합된 견해나 의견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것이 인도불교에서는 학파가 되고 중국불교에서는 종파로 발전한다. 서로 다른 학파와 종파는 근거로 삼는 중심 경전이 달랐고,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다. 또 '부처님'을 보는 방식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마치 예수를 신성으로 이해하느냐 인간으로 이해하느냐,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할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불국사 안양문(사진 앞)과 자하문(사진 뒤쪽) / 자하문을 통과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로, 안양문을 통과하면 아미타 부처님께로 가게 된다.

중심 전각과 부처님

  중국에 종파 불교가 성립된 시기는 대략 5~7세기경이다. 이후 이런 경향은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꽤 오랜 시간 영향을 주게 된다. 종파 사이에는 소의경전(所依經典, 고리와 신행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이나 수행 방법에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중심 전각에 모시는 부처님 역시 다르곤 했다.

 

  대부분의 종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셨다. 이런 경우 본존불은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고, 중심 전각은 대웅전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도, 아미타불이나 비로자나불 또는 미륵불과 같은 다양한 부처님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 중심 전각에 모시는 본존불이 다르고, 이와 함께 중심 전각의 명칭도 변하게 된다.

 

  여컨대 경북 안동 부석사의 주불전은 무량수전이며 본존불은 아미타불이다. 또 경남 합천 해인사처럼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의 주불전은 대적광전이며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이외에도 충북 보은 법주사나 전북 김제 금산사처럼 과거에 유가법상종에 속했던 사찰에서는, 주불전이 미륵전이며 본존으로는 미륵불이 모셔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특색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급격히 변한다. 정권에 의해 불교 종파들이 강제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면서 종파의 색깔을 잃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임진과 병자의 양란 이후가 되면, 오늘날과 같은 대웅전 중심의 사찰 구조가 보편화된다.

 

부속 전각에 모셔지는 불보살

  중국 건축의 기준과 방법을 집대성한 북송 시대 이계李誡의 저작 《영조법식》에는, "중요한 건물은 남북의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부수적인 건물들은 동서로 배치한다."는 건축 원칙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법식》은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당시 중국 건축의 일반론을  '집대성'한 성격이 크다. 그러므로 북송 이전부터 사찰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들이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수적인 건물'은 불교에서는 부속 전각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의 앞쪽 마당은 전면의 해탈문과 함께 口자 형 구조를 이루게 된다. 이때 좌우에 들어서는 건축물이 부속 전각이 된다. 부속 전각은 '부속'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어감만큼이나 상황에 따라서 편차가 크다.

 

  우선 강당(강원)선원의 배치에 대해 알아보자.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심검당尋劍堂, 우측에 설선당說禪堂이 들어서게 된다. 심검당이란 마음속의 검을 찾는다는 의미로 선원의 별칭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는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선불장이란 부처님을 뽑는 과거장이라는 의미다. 설선당이란 선을 설한다는 것으로, 경전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요즘 사람들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아 이런 편액을 보아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하지만, 조금만 알고 보면 옛사람들의 표현이 무척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으로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지장전이 모셔지고 우측에 강당이나 노전爐殿이 들어서는 경우이다. 지장전은 망자를 위한 49재나 천도재와 같은 제례가 모셔지는 전각이다. 강당은 강학 공간이며, 노전은 향로를 관리한다는 의미로 주불전을 전속으로 담당하는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다른 불전들과 달리 주불전은 위계가 높기 때문에 이곳을 담당하는 승려의 위계 또한 높다. 그래서 거주처를 노전이라고 높여서 불러 주는 것이다. 노전은 승려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그리 넓은 면적은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당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좌측의 지장전은 동일한데 우측에 천불전이나 나한전 또는 영산전과 같은 전각이 들어서는 경우다. 천불전은 1,000분의 부처님을 보신 전각이고,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 중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들을 모신 전각이다. 또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하시던 영산, 즉 영축산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이런 전각들은 모두 석가모니불과 관련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다른 부처님을 모신 적각을 대웅전의 부속 건물로 둘 수는 없기 때문에, 같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존이 되는 전각이 들어서는 것이다.

 

  참고로 한 사찰 안에 아미타불이나 비로자나불을 같이 모실 경우는 아예 별도의 영역을 구축해서 모시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 간에는 차이는 있지만 높낮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국사나 통도사가 그 예가 된다. 불국사는 진입 계단이 둘이어서 자하문을 통과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로 가게 되고 안양문을 통과하면 아미타 부처님께로 가게 된다. 한지붕 두 가족인 것이다. 통도사는 비로자나불 영역을 완전히 구분해서 설치하고 있다. 이 경우는 들어가는 방향은 같지만 더 들어가느냐 덜 들어가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치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가서 내리느냐 두 정거장을 가서 내리느냐의 차이라고 할까? 과거에 이런  세심한 배치를 고려했다는 게 흥미롭기만 하다.

 

기타 전각에 보셔지는 존상들

  중심 전각과 부속 전각 간에는 명확한 위계가 있다. 다만 그 위계를 설정하기 힘들 때는 별도의 영역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에는 워낙 많은 불보살들이 계시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이도저도 아닌 다소 애매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중심 전각과 부속 전각 외에 별도의 전각을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나 장경각 또는 삼성각과 같은 전각이다.

 

  보통 2~3개 전각밖에 없는 사찰도 대부분 관음전은 있다. 관음전은 그만큼 우리 민중에게 인기 있는 전각이다. 그러나 대웅전의 부속 전각에 포함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별도의 영역을 설치해 주기도 애매하다. 이런 문제로 인해 관음전은 배치에 있어서 자율성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장경각도 유사하다. 장경각은 경전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장경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또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특수 건물이다. 그렇다 보니 한구석으로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타 전각에 속하게 된다. 삼성각은 우리의 토속신앙과 결합된 것인데 이 경우는 인기가 많다. 그래서 멀리에 두지 않고 부속 전각 가까이 배치한다. 이런 점들을 보면, 사찰의 가람 배치는 위계 및 인기와 서열 등에 따른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중에서...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