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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통을 관찰하고, 나고 멸하는 법(생멸법)의 사유하는 모습/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의 사유하는 모습 / <금동반가사유상>(국보)의 얼굴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린 태자가 목격한 '세상의 실체'.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을 나와 동산으로 행차할 때 · · · 길가에서 밭 가는 농부를 보매/ 흙을 뒤칠 때 온갖 벌레들이 버둥질치며 죽네 · · · 농부는 일에 시달려 몸은 여위고 흐트러진 머리에 땀을 흘리며 온몸은 흙먼지로 뒤집어썼네/ 밭 가는 소도 지쳐서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네(「불소행찬」 <출성품> 중에서)."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실체는 '모두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생명 또는 존재의 이러한 집착은 '고통'이라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 온갖 고통을 관찰하시고/ 나고 멸하는 법 [생멸법 生滅法]을 사유하실 때/ 참으로 슬프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어 미처 깨닫지 못하는구나."

  무엇을 깨닫지 못하는가? 바로 앞 문장에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생멸법'이다. 모든 생명 또는 존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이라는 변화의 철칙에 지배받고 있다. '늙음 ·병 ·죽음으로 무너지는 것/ 이 세상은 참으로 수고롭고 괴롭구나!" 태어날 때는 태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태어나서는 생존하느라 발버둥 치고, 늙어갈 때는 아프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죽어갈 때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니 붓다의 말씀대로 "참으로 수고롭고 또 수고롭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면 이러한 수고로움이 죽으면 끝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죽어서 몸이 없는 상태 [중음 기간]에서도 역시 '다시 몸 받으려는 발버둥'은 계속되어, 결국 우리는 재생再生하게 된다. 이러한 생멸의 무지 않고, 마침내 사라짐으로 돌아간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 미술품 <반가사유상>은 바로 이 대목을 조형화한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통찰하는 어린 태자의 모습이다. 그는 무엇을 사유하는가? '나고 멸하는 법[生滅法]'이다. '사유'란 무엇인가? 여기서 사유란 '통찰하여 그 원인을 보는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 아니 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이것을 붓다는 사성제四聖諦의 가장 첫 번째인 고성제 苦聖諦로 천명하셨다. 성제聖諦란 '진리'란 뜻인데,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보편적인 법칙이자 사실을 말한다.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멸, 즉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한 것에 어리석게 집착하는 것은 고통을 야기한다. 한 번 만들어진 것은 맹목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질 친다. 몸도 한 번 만들어지면 그것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애쓴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 만들어진 마음은 끊임없이 계속 올라온다. 이것은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성품을 말한다.

 

  물론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므로 컨트롤 불가능하다. '물질과 느낌, 기억과 반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식'은 저절로 일어나 파도친다. '물질과 느낌, 기억과 반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식'을 '색色과 수受, 상想과 행行, 그리고 식識'의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붓다 설법의 결정판에 해당하는 「대념처경」의 <고성제>에는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것을 '오취온五取蘊'으로 규정한다. "요컨대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 또는 덩어리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다. "  '오온'이라고 부르는 것은 '취착 하는 성품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기에 '오취온'이라 하는데, 이것이 '나'의 실체이다.

 

  「고성제」의 마지막 단락에는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라며 설명이 나온다. "그것은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 색취온色取蘊,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 수취온受取蘊, 취착하는 기억의 무더기 상취온想取蘊, 취착하는 상카라의 무더기 행취온行取蘊,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 식취온識取蘊이다. "색 ·수 ·상 ·행 ·식의 덩어리가 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품의 취착이기에 취착의 무더기로서의 '나' 자체는 고苦라는 것이다. '삶이 고苦'일 수밖에 없는 이유. 답은 이미 제시되었다. '취착'하기 때문이다. 즉 '갈애'이다. 고통의 원인으로서의 갈애를 '집성제'라고 한다.

 

  고통은 컨트롤 불가능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 붓다께서 밝혀놓으신 길을 따라가보자. 우선 붓다의 어린 시절 태자가 '세상은 온통 고통이다'라는 사실을 목격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고자 정사유正思惟를 하는 장면에는 "모든 나고 죽음[生死]과 일어나고 멸함이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을 관찰할 때/ 마음은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네/ 오욕은 구름인 듯 사라져 버렸네."라고 기술되어 있다. 생사와 기멸의 변화,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대상으로 관찰하였을 때, 비로소 그것의 무상함을 보고 그것의 본질이 공空임을 알게 된다.

 

  고통에 마냥 시달리지 않고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직시하는 순간 그것의 정체는 드러났다. '고통'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고통이라는 것이 '대상화'되고 그것과의 '분리'가 일어났다. 나 자체가 고통이었다가, 이제는 고통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것을 관찰하였을 때"라는 대목이 핵심이다. 이렇게 통찰지가 발휘된 순간, 그것의 실체는 드러났고 그것은 사라졌다. "그리고 취착을 떠난 희락이 생겨 첫 번째 사마디를 받았다." 즉 초선정初禪定에 들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의심하거나 어지럽지도 않고 / 혼침 하거나 취착 하지도 않고 / 무너지거나 그것을 싫어하지도 않고 / 맑고 고요하여 모든 무명을 떠나 / 지혜의 광명이 돌아가고 더욱 밝아졌다."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苦가 법法'이라는 붓다의 첫 번째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고통이 오면 '고통이 일어났구나'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리면 사라진다. 부단히 생겨나는 고통을, 우리는 부단히 알아차려서 보내고 또 보내야 한다. 한 자락의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그 결과는 천 근의 무거움이 아니라 날아갈 것 같은 경안이며, 불타는 뜨거움과 깊은 어둠이 아니라 지극히 편안한 희락이며 맑고 청정한 자유이다.

 

 

 

 

 

월간통도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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